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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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두고 남녀의 관계는 어떻게 보는 것이 옳은가? 예전에 내가 책에서 본 문구가 기억난다. 여자가 남자의 말을 믿어야 하는 순간은 남자와 같이 침대에 있을 때가 아니라 침대에 나오는 순간이라고 말이다(원래의 말은 다르지만, 표현적인 요건에서 수정).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조금 바꾸는 것이 좋다고 여긴다. 여자는 침대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침대에 가기 전에 더 조심해야 하는 점이다. 한국사회에서나 혹은 일본사회에서나 어떤 식으로 연애관계가 발전할지는 모르나, 남자인 내가 생각해도 남자는 기본적으로 리비도(Libido)라는 무의식적인 성적욕구가 원래 강하기 때문에 그것 자체를 억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지 자제하고 이성적으로 통제할 뿐이다. 보통 남자들에게 당신은 여자에 대해 성적욕구가 없다고 말하는 순간, 그것이 오히려 무서운 일이다.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심한 국가에서 그런 남자를 두고 뭐라고 여길까? 동성애자도 아니고 이성애자도 아닌 무성애자라면 더욱 어떤가? 여자에게 남자한테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남자에게 여자한테 관심이 없다고 하는 것은 약간 다르다. 한국사회에서 여자가 여러모로 불리한 점은 많지만, 그런다고 남자도 불리한 게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차이는 남녀의 성적인 차이를 떠나 그 사람이 현재 처해진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조건으로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지만 할 수 없는 현실이고, 내가 원하지 않은 일이라도 억지로 해야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전후사정을 보고 사회적 여건을 토대로 바라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번에 읽은 마스다 미리의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는 이전에 읽은 <이대로 괜찮은 걸까?>보다 조금 심화된 내용이다. 주인공 수짱이 예전보다 나이가 더 찼다는 점과 수짱의 친구인 마이코는 결혼 후 아이를 낳아, 이번에 새로 등장할 노처녀로 사와코 씨가 등장한다.

 

수짱의 사촌동생 아카네가 등장한 <아무래도 싫은 사람> 편에서 등장한 아카네 직장동료인 기무라의 나이는 40이고,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에서 등장한 사와코의 나이 역시 40이다. 그런데 같은 40이라도 여자나 남자나 혹은 모든 인간들은 나이만으로 판단해서 안 되는 것이다. 기무라는 아주 사소한 것에 자기 편의를 챙기는 사람이라면, 사와코의 경우 자신의 생활에 나름 충실하다. 그런 그녀는 40이 되도록 결혼하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 아직 미모도 좋은데, 몸매관리하려고 요가학원도 다니는데, 잘 풀리지 않는다.

 

요가학원에서 만난 수짱과 친해진 사와코는 집에 어머니와 할머니가 계신다. 내용을 봐서는 할머니가 친가 쪽이 아니라 외갓집의 할머니 같은 느낌이었다. 집에 남자가 없이 여자 3명이 3대를 걸쳐 살고 있다는 것은 왠지 쓸쓸하다.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그나마 어머니는 연세가 있어도 정정하시나, 할머니는 치매가 있는지 제대로 몸도 못가누고, 기억력조차 없어졌다. 할머니가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왠지 슬픈 일이다.

 

인간이 가장 슬플 때가 언제인가? 여러모로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내가 혼자가 될 때이다. 혼자가 되는 순간이 슬픈 이유는 내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같이 기뻐하고 위로해줄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군대생활을 사병이 아닌 간부로 복무할 때 심하게 감기가 걸린 적이 있었다. 아무도 없는 자취방에 혼자 돌아와 너무 아파 아무 것도 안 먹고, 방 안에 이불을 혼자 덮고 있을 때 참 서러움 기분을 느꼈다. 혼자라는 것이 왜 슬픈가에서 이미 확실히 체험한 추억이다. 사와코의 걱정은 자신이 결혼하면 어머니는 어떻게 될까 하지만, 막상 어머니까지 연세로 인해 돌아가시면 자신은 그때 정도 할머니가 된다.

 

아무도 보살펴주는 이도 없고, 아무도 찾아주는 이도 없다. 외로운 생활이 젊어서 편할 수 있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신의 생활을 지치게 만든다. 그래서 사와코의 마음은 여러모로 괴롭다. 그녀는 27살 이후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 13년 동안 혼자였고, 그동안 같이 남자와 침대에 올라가지 못했다. 이럴 때 가장 느끼는 자괴감은 다시 남자와 침대로 갈 수 있을까라는 점이다. 여성의 40대는 30대와 다르게 신체 구조적으로 노화의 영향이 확실히 온다. 피부에 윤기도 없고(직원이 선물로 피부기름을 제거하는 화장세트를 줘도 오히려 기름이 필요하다는 말을 한다), 뱃살도 늘고, 가슴의 탄력도 약해진다.

 

결혼은 둘째치더라도 사와코는 자신이 여자로서 매력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다. 그래서 소개팅을 하여 우연히 남자를 만나 17년 만에 같이 침대에 가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문제는 두 사람의 가족에게 인사하는 것부터다. 남자의 집 쪽에서 사와코에게 아이를 어서 낳아달라고 요구하는 것까지 이해갈 수 있다. 하지만 임신이 가능한지 안 한지를 확인하게 해주는 증명서를 발급해달란 소리에 갑자기 어이가 없었다. 40이 되면 거의 늦은 시기라 하더라도 그냥 되는대로 결혼해서 살자는 아니라는 점이다.

 

덕분에 사와코는 자신이 소개받은 남자와 인연이 아니라는 점을 알았다. 사실 생각해보면 난감한 것이 남녀사이에 가장 더 중요한 부분이 남녀로서 대하는 것 이상의 인간으로서 대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점에서 나 역시 독특한 성향과 취향으로 수짱이나 사와코처럼 되어갈지 모른다. 그래도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결혼 후 처음 인지하지 못한 상대방의 모습이 드러나면 엄청난 곤경에 빠진다는 점이다. 사람이 오래 알게 되면 사소한 것들에 통해 그 사람을 알 수 있으나, 처음에 몇 차례 만난 사람에겐 속내를 보이는 것보다 자기포장으로 통해 보여준다.

 

인간 사회에서 자기포장은 어쩔 수 없는 것은 알지만, 같이 살아야 하는 가족의 경우 조금 말은 다르다. 사람의 성향이 처음에 맞게 느끼는 것은 상대방을 보고 맞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익숙해지면 금방 상처 주는 말을 하는 게 쉽다. 물론 어느 정도 친분이 있으면 적당히 넘어갈지 모르나, 상대방의 입장에 따라 매우 예민할 수 있는 상황이 있다. 마스다 미리의 만화는 그런 예민한 부분을 어떻게 잘 보여주고 잘 넘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란 제목처럼 결혼하지 않으면 곤란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결혼해서도 곤란하다. 마이코가 결혼 후 아이를 돌보는 것으로 서로 간의 대화주제가 다르고, 공감되는 부분도 다르다. 불편하지 않은 친구가 불편해지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정체된 듯 유동하는 존재이므로 자신의 정체성, 즉 그 사람의 현재의 모습과 살아온 날들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런저런 고민은 늘 새로운 하루를 맞이할 때마다 다가온다. 심리적으로 뭔가 잘 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은 인간의 현재진행형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다고 급작스럽게 변화하는 것이다. 인간의 인생의 역설적인 순간들이 너무나도 많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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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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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다 미리의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는 이른바 수짱 시리즈의 시작이기도 하다. 여성작가가 그것도 여성의 입장에서 여성의 일상생활을 보여준다는 것은 남성인 나에겐 약간 턱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읽어보는 순간, 그렇게 낯설게 느낀 게 아니었고, 오히려 내 나이와 비슷한 상황의 미혼 여성의 마음을 보는 기분이었다. 물론 전반적인 여성이 그런 것은 아니나, 적어도 보편적인 성향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수짱의 심정과 상황이 옆에서 관찰하면 왠지 공감이 가기도 하고, 한편으로 얄미운 부분이 있구나 여겼다.

 

인간의 모습이란 한 가지로 표현할 수 없다. 다양한 모습이 존재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과 여건에 따라 계속 변해간다. 누군가에게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나, 나에게는 짜증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사람의 유동적으로 변해가는 일상은 한편으로 두렵기도 하지만, 그 유동적 일상생활도 하나의 정해진 패턴에 묻힌 것처럼 보인다. 수짱의 이야기는 카페로부터 시작한다. 자신이 일하면서 옆에 근무하는 이와이는 수짱보고 어리고 외모가 예쁜 편이다.

 

카페에 들리는 본사직원인 나카다 매니저를 두고 수짱은 은근히 흠모한다. 그러나 나카다 매니저는 수짱보다 나이가 어리고, 자주 오는 사람이 아니므로 겉으로 드러날 수 없는 입장이다. 가끔 그런 일이 있다. 주변에서 당신은 왜 연애를 하지 않고 결혼을 하지 않느냐고? 개인적인 성격이나 취향의 문제도 있겠지만, 주변 여건이 그렇게 만들어지고, 일상생활이 그리 만들어지는 것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수짱의 경우 카페에서 일하므로 주변에 일하는 직원이나 아르바이트생들이 모두 여성이다.

 

여성들만 모인 공간에 남성이 없으며, 여성들 자체가 많은 집단에 남성이 들어가서 일하는 것조차 벅차다. 남성들의 공간에서 여성 소수가 지내기는 하지만, 은근슬쩍 남성들의 권위의식에 압박을 받는다. 그런 점에서 남녀인원이 골고루 퍼진 곳이 아니라면 제대로 된 연애기회를 가지기란 어려울 것이다. 수짱의 가게에 오는 다나카 씨의 본사 사정은 알 수 없으나, 그는 이와이 씨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한다.

 

솔직히 누군가 사귀거나 만나지 않았지만, 주변에 괜찮은 사람이 있어서 내가 아는 주변인이 그 사람과 사귀거나 계속 만나고 있다면 한편으로 심술이 날 것이다. 수짱의 인간적인 모습은 바로 여기서 등장한다. 이와이 씨와 다나카 매니저가 사귀는 것을 알고, 어느 날 결혼한다는 사실까지 알 때 수짱은 집에서 우울한 눈물을 흘린다. 물론 자신에게 다나카 매니저가 연인이 된다는 보장은 없더라도 그렇게 되면 좋겠다는 희망사항까지 버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수짱은 결혼과 연애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수짱 시리즈를 보면 항상 옆에 친구나 혹은 다른 여성인물이 조연 이상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에서 등장한 조연급 주인공은 수찡의 친구 마이코다. 그녀는 회사에서 일하는 오피스레이디로 노처녀 자리에서 갈등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남자친구로 평범한 남성이 아니라 가정이 있는 유부남을 두고 있다. 가끔 그녀의 집에 그를 초대하여 외로움을 달래는 모습에서 그 남자를 두고 마치 어리광을 부리는 다 큰 남자 아이처럼 생각한다.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은 누구나 외로움을 느끼고, 마음의 위안을 받고 싶어 한다. 위안을 받는 행위는 먹는 것도 되고, 음악을 듣거나 혹은 영화 같은 것도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몸으로 직접 닿는 촉감 역시 피하지 못하는 유혹이다. 마이코는 그렇게 회사에서 사소한 일이 치여 살며, 주말에 억지로 직장상사의 이사한 집에 가서 집들이를 해야 한다. 가까운 친구나 친척이라면 마음이 편할지도 모르나, 직장의 상사라면 그렇지 못하다.

 

옷도 제대로 차려 입어야 하고, 들어가서 편하게 앉아 있지 못한다. 주말 하루 편하게 쉬고 싶은 일정이 모조리 사라진다. 마이코에게 일상의 변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인간은 변하고 싶다고 마음을 먹어도 쉽게 변화할 수 없다. 뭔가 새로운 계기나 기회가 있어야 한다. 주변에서 사람들은 왜 너는 그렇게 살아가니 어떻게 할 수 없어? 라고 이야기하지, 그에 대한 대안이나 도움은 전혀 주지 않는다. 흔히 말해 답은 이미 정해졌으니 너는 대답만 하든지 혹은 너는 부족한 사람이야 라는 식으로 몰아간다.

 

그런다고 은근히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말도 틀렸다고 볼 수만은 없다. 마이코는 유부남 애인을 정리했지만, 그런 만남을 하면서 처음부터 그에게 진정한 사랑을 기대하는 게 어리석었고(진정 사랑한다면 그 남자에게 현재의 아내와 이혼하라고 요구하는 게 옳은 게 아닌가), 수짱도 진정 마음이 있었다면 이와이가 만나기 전에 한 번 말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런 말을 잘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말이야 쉽지!”

 

사람이 살면서 진정 자신이 원하는 뜻대로 선택한 적은 얼마나 될까?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에서도 비단 수짱의 마음만이 아니라 우리도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아니라면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조차도 선택의 권리라고 여기고 있는지를 말이다. 물론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한다면 그 안에서도 뭔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잡아야 할 것이다. 그런다고 이성으로 이해하도라도 마음은 따라주지 않는다. 인간의 심리는 머리로 생각하기보단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라고 고민하더라도 당장 답이 나오지 않으니 오늘도 내일도 같은 고민으로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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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시작 - 노무현에 관한 첫 구술기록집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생각의길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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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神話)라는 것은 다양한 이야기를 대변한다. 우리가 실제 있었던 이야기를 은폐 및 왜곡하는 경우도 있으나, 도저히 믿기지 않은 사실조차도 신화로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신화의 겉에 보이는 이야기와 속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다르다. 이번에 읽은 <노무현의 시작>은 한국 노동운동역사에서 노동자를 변호하는 변호인이 탄생한 것을 적고 있다. 물론 여기에 구술된 기록은 사실적인 관계에 의해 적시된 것이고, 구술관계자는 그 당시 역사에서 핍박받던 사람들이었다.

 

신화와 매치하면서 신화는 그 사회나 문화적 집단의 기원이나 혹은 정체성을 말해주는 메시지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에 대한 신화는 과연 보는 이에게 어떤 존재로 왔는가? 노무현의 변호인 시절을 다시 보는 것은 우리 사회를 다시 보는 것과 같다. 최근에 나는 역사학자가 저술한 <일본과 서구의 식민통치 비교>라는 책을 읽었다. 노무현 변호인이 활동을 하던 시기는 1980년대이고, 내가 읽은 도서는 1910~40년대 일제 식민지를 중심으로 연구한 도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소름이 끼친 이유는 일제가 펼친 노동억압정책이 1980년대의 우리나라와 너무 흡사한 점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우리나라는 독립운동을 한 것만 기억했지, 노동운동을 한 것은 잘 모른다. 노동운동을 한 이유는 우선 생계수단이 우선이고, 다음으로 가혹한 노동시간이다. 집에 공장에 일하는 가족들이 있다면 잘 알 수 있을지 모른다. 어떤 노동환경에서 얼마나 가혹하게 일하고 있는지를 옆에서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하지 않으면 그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제 치하에서도 그런 문제가 이미 시작된 점이다.

 

기업과 공권이 결탁하여 노동자의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때에 따라서는 감금, 납치, 구속, 심지어는 살해까지 하였다. 사실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은 조선 안에서만 아니다. 고바야시 다키지의 선집들을 읽어보면 일본 내에서도 일본인에 대한 노동운동 탄압은 매우 심각했다. 국가와 민족들은 다르고, 설사 남에게 빼앗긴 나라나 혹은 빼앗은 나라에도 늘 빈자는 빈자였다. 빈자들은 자신들의 현실을 제대로 목격하기보단 또 다른 차별에 의해 다른 누군가를 억압하려 했다. 타인에게 받은 억압을 다른 누군가에게 돌린 악순환이 연속된 것이다.

 

한국의 노동운동에서 1980년대는 가장 치열했던 순간이다. 물론 정부가 일본이건 한국이건 크게 변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었다.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안기부와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그 가족들은 갖은 협박과 감시 속에서 시달려야 했다. 이런 시기에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은 극단적인 수단으로 갈 수밖에 없다. 자신의 생명과 가족의 생계가 달린 문제니 그 과격함은 이루어 말할 수 없다. 노동운동을 한 반면 시위과정에서 다치거나 죽은 경관도 있다.

 

둘 사이에는 언제나 갈등과 분노의 화살만 존재했다. 그러나 정작 그 문제에 대한 중재나 해결방안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살기 위해 투쟁하는 인간과 명령에 의해 움직일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할까? 민주주의 제도는 포용성과 국민에 대한 최선의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그 정부가 제대로 되지 않은 정부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후대에 의해서 희비가 엇갈린다. 민주주의의 반대는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어른들은 70~80년대의 향수로 판단한다.

 

안타까우나 그것은 한국의 자유주의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를 파괴하는 원동력인 파시스트다. 한국에서 아직도 파시스트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헌법적 가치에서 그 역사적 철학적 가치관을 두고 깊이 고민하는 자는 없다. 사실 노무현이란 인물이 누군가에게 좌파대통령이라 하고, 누군가에게 우파대통령이라고 한다. 좌우 이념적인 부분에서 기본적 맥락조차 이해하지 못한다면 토론을 100분을 하든 200분을 하든 변한 것은 없다. 정치란 결국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감성과 무의식의 발판이 되어 사람들을 자극한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만 정치가 흘러가면 나라 상태가 말이 아니게 꼬이게 된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연대하는 자들이 먼저 하는 것이 무엇인가?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권을 늘리기 위해 새로운 사업을 확장한다. 그리고 확장된 사업에서 발생하는 이익은 새롭게 이권으로 등록되나, 등록되는 순간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기존의 이권으로 자리 매김한다. 이런 악순환 고리가 반복되며, 그 과정에서 생긴 모순과 부조리는 누군가 떠맡게 되고, 결국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바로 80년대 노동운동의 역사였다. 내가 대학에서 전공하던 과목은 환경공학이다. 환경공학에서 배운 무서운 공해역사에서 런던 스모그현상, LA 광화학스모그, 일본의 미나마타병과 이타이이타이병이다. 일본에서 이타이이타이병은 카드뮴이 인체에 누적되어 인간의 근골계에 심한 질환을 준다. 이때 병으로 인한 통증이 얼마나 심각한지 이타이이타이라고 말한다. 일어로 이타이이타이는 너무 아프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이병인 온산병이라고 한다. 울산의 온산공단에서 일하던 노동자에게 이 병이 걸린 것이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강제로 직장에서 내쫓김은 당하고 보상조차도 받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내 옆에 누군가 그러면 언젠가 그 옆에 있었던 그 누군가도 똑같은 병에 걸려 서글픈 인생에 괴로워하며 증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이다. 분노는 필요할지는 모르나 증오는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아무런 희망도 빛도 없이 그저 억압을 받고 일방적으로 당해야 하는 심정이란 그야말로 저주가 걸린 세계일 것이다.

 

신화적인 요소에서 어두운 세상을 찾아오는 한 줄기 빛을 기다리는 민중의 바램처럼 노무현의 시작 역시 그런 것이다. 다소 그에 대한 표현이 지나칠 수 있겠으나, 책을 읽든 안 읽든 만약 어떤 최악의 상황에 놓여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는 비참한 사람에게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손을 내밀어준다면 어떻게 볼 것인가. 인간은 자신이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 여기고 살아가고, 누가 불행한 일을 당하면 자신에게 그런 일이 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기만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그 기만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분이라면 도통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그런 일이 주변에 일어나도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은 그 이유만으로 별개의 이야기다. 그런데 그 기만이 가득한 세상에 누군가를 향하여 아무런 사심 없이 도움의 손길을 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그 일을 하는 것은 각종 박해와 억압, 심지어 자신이 쌓아온 부와 명성까지 모조리 버리는 것이다. 그런 희생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변호인 노무현은 좋아해도 대통령 노무현은 조금 꺼리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들의 이야기와 입장을 들어보면 이해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런다고 해서 노무현이란 인간 자체가 변했다고 여기지 않는다. <노무현의 시작>에서 한국노동운동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이소선 여사가 청와대에 방문하여 노무현 대통령과 이야기하던 모습이 나온다. 정말 그가 노동자들을 외면했다면 이소선 여사나, 노동운동인사와 노동관련 정당의 인사가 찾아올 리가 없다. 단지 오면 불평이나 정치적 사회적 한계성에 대해 토로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이 좋아졌다고 하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노무현의 시작점은 부림사건이란 희대의 용공조작사건이고, 우리나라에서 근현대사에서 놓칠 수 없는 마녀사냥이다. 납치 구금되어 온갖 폭력과 고문으로 몸과 마음이 쇠약해진 사람들, 지금도 그들과 그들의 가족은 당시의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뒤에 일어난 노동운동은 예나 지금이나 한국에서 해결해야할 급과제이다. 최근 군대 병력 감축으로 인해 예비군의 훈련기간이 23일에서 조만간 45일로 늘어난다고 들었다. 군대에 입영해야할 남성들이 수가 줄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남성이 아니라 한국의 출산율이 저하되어 앞으로 100년 이후 이대로 가면 한국이란 나라가 존재할지 의문스러울 정도다. 결국 한국사회를 유지하려면 인구가 재생산되어 유지 되어야 하나, 오히려 그것을 역으로 가고 있다. 그 원인은 결혼을 하는 것이 어렵고, 결혼 후에 출산과 육아가 더더욱 어렵다. 인구의 재생산이 되지 않으면 경제력이 축소되고, 군대에서 병력이 부족하여 이미 국방과 경제의 약화로 국가의 위기가 초래되는 것이다. 이 위기를 극복할 방법은 월급쟁이들의 생활수준을 높여 인구를 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가계가 안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최근 임금피크제도를 말하는 점에서 안타까운 기분이 든다. 20대 청년이 50대 어른에게 자신들의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그만 일을 하던지 혹은 월급을 덜 받으라고 요구한다. 다르게 생각하면 이들이 취업노선에 달려든 후 20~30년이 지나면 한 가족의 가장이 되고, 그 가장은 가족들의 생계수단과 자녀의 육아를 위해 일을 할 수밖에 없다. 그때 되면 지금의 20대도 50대로 되어 추후에 나올 20대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이다. 미래를 보지 않고 현실에서 당장 어떻게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적 모순을 다른 부조리로 대체될 뿐이다.

 

현대사회에서 인력이 감축되는 것은 기계의 보급과 전자동 디지털시스템에 의해서다. 사람이 하는 일이 기계로 대체되고, 기계의 능률이 상승하여 많은 인력을 둘 필요가 없다. 따라서 새로운 노동시장과 경제발전을 위해서라면 다른 직종을 살리고, 인력중심의 노동시장을 운용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러나 인건비 축소로 이윤을 지키려 하고, 기업의 유보금은 늘어간다. 현실적 문제는 알지만, 자신의 이권을 지키기 위한 자들이 계속 현실적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부조리로서 모순을 대체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이미 절벽 앞에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도래하면서 거리에서 시위대를 이끌며 정면으로 부딪히는 변호인들은 지금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 변호인의 시작은 노무현이다. 노무현의 시작이 결국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을 시작이 된 것이다. 법으로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이 법 이외의 것으로 억압받던 시절에 유일한 대안 점은 법의 원칙에 따르는 것이다. 무지와 가난은 독재정부의 연속하게 해주는 힘이 된다. 가진 것도 없이 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신화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항상 양면의 칼날처럼 대우받았다. 노무현을 두고 기존 권력자들의 시선에서 매우 귀찮고 짜증나는 인물일 것이다. 이에 반해 계속 당하기만 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아주 속이 시원하고 통쾌한 인물일 것이다. 그래서 노무현은 신화로 될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의 신화는 성공의 신화가 아니라 패배의 신화다. 승리의 이야기는 회자되지 않으나 패배의 이야기는 회자되어 우리의 기억을 자극한다. 그가 옳고 그른 인물인지 판단하는 것은 그를 바라보는 사람의 입장차이일 것이다. 만약 적어도 현실에서 부당한 일을 당하고 억울하게 그 일로 계속 피해를 본 사람이라면 노무현이란 이름은 영원히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노무현 신화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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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싫은 사람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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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마스다 미리는 일본의 유명한 만화가이다. 그녀의 만화는 20~30대 여성에게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그 흐름을 타고 최근에 영화가 개봉되기도 했다. 우연히 개인이 운영하는 도서관에서 마스다 미리의 만화에 대해 읽어보고 서로 이야기해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예전에 마스다 미리라는 작가의 이름은 들은 적이 있으나, 실제로 읽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마스다 미리의 만화는 20~30대 여성에게 잘 와 닿으며, 특히 30대 미혼의 여성에게 많은 공감을 사고 있다고 한다.

 

아마 마스다 미리의 만화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수짱때문인가 싶다. 이번에 내가 읽어본 <아무래도 싫은 사람>에서 수짱은 36세 노처녀로 등장한다. 일본의 36세와 한국의 36세는 다르다. 일본의 1살은 실제 태어난 지 1년이 지나야지 나이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1살로 본다. 일본과 한국의 나이세는 차이에서 한국은 일본나이를 고려할 때 만1세라고 이야기한다. 36세의 수짱은 한국나이로 37살의 여성이다. 최근 결혼연령이 늦어진다고 하나, 남성에 비하면 상당히 많이 늦은 나이인 점은 분명하다.

 

그런다고 수짱이 어디 외모가 특이하거나 이상한 것도 아니다(만화에서 그려지는 캐릭터를 보고 미적인 판단여부를 알 수 없다). 결혼하지 못하는 것인지 결혼하지 않은 것인지가 매우 불명확하다. 수짱의 주변에 인연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환경적 여건이 많이 큰 것 같으며,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그동안 마음에서 누적된 자기불안심리가 더 공고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싫은 사람>은 연애를 중심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보이는 사소한 경계점이 중심이다.

 

여성작가라고 하지만, 막상 읽어보니 공감대는 형성되었다. 일단 수짱이 일하는 카페에 아르바이트생과 정직원이 있다. 그런데 정직원 한 사람이 사장의 친척이고, 그녀는 수짱이 가게 점장 인데도, 그녀와 상의하지 않고 자신의 기분대로 해결하려고 한다. 사소한 일에서부터 중요한 일까지 말이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사람의 관습이 참 피곤할 때가 많다. 수짱이 느끼는 불편함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뒤에서 남의 험담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다음에 계속 얼굴을 바꾸고, 그 험담한 사람과 잘 지내는 모습에서 인간의 이중적 모습이 지겨울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기분이 좋지 않아도 아무 말도 못한 채 가만히 있는 수짱 역시 자신에 대한 짜증과 기만함에 화가 나기도 한다. 수짱의 사촌동생이 겪은 이야기도 참 공감이 갔다. 식당이나 어디 가게를 가면 직원이나 아르바이트생이 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령 내가 식당에 가서 주문을 하려고 한다면, 접대하는 사람이 나보다 나이가 많을 수도 혹은 적을 수도 있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이 아르바이트생으로 와서 서빙 하는 경우가 참 많다.

 

시내에 나가면 보통 대학생이나 휴학생들이 아직 어린 표정으로 손님을 대하는데, 가끔 가다보면 손님 중에 무례한 사람들이 많다. 반말을 하는 것은 기본이고, 큰 소리에 짜증까지 부린다. 물론 그 아르바이트생이 친절하지 못하거나 실수를 하고도 제대로 사과하지 않으면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정신이 나가지 않은 이상 그럴 일은 거의 없다. 한국사회도 그러하거니와 일본에도 그런 요소를 지닌 점을 본다면 한일 양국 간의 문화적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의 심리적 요소는 비슷하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 일상에서 사람들이 화를 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사람들은 어떤 큰일에 대해 화를 내지 않는다. 너무 일이 커지면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 침착하게 해결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사소한 일들이 쌓이고 쌓이면 인간은 어느 순간 냉정을 잃게 된다. 그동안 계속 자기 마음에 응어리를 쌓아 올렸기 때문이다. 회사 내에서 그런 점을 가끔 본다. 누구는 프린터에 용지가 없으면 다시 가지고 오고, 프린터에 종이가 걸리면 일일이 빼주는데, 막상 프린터에 출력을 보낸 사람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 백 장의 인쇄물을 출력버튼을 컴퓨터 워드프로그램에서 지정하고, 그동안 자기 일만 한다. 다른 사람들도 출력물을 뽑아 사용해야 한다. 어느 누구만 일이 급하고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면 짜증이 올라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사소한 일에서 짜증나는 것은 어찌 보면 그 사소함이 인간의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래도 싫은 사람>에서 수짱 사촌동생이 식당에 가면서 남자친구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본다. 점원에게 물을 주세요.”가 아니라 여기! 이라 말한다.

 

평소 사람을 대하는 인격이 거기서 그대로 묻어나오는 것이다. 문제는 거기서 수짱의 사촌동생은 불쾌감만 느끼는 게 아니라 집에 가서도 가족과의 스파크가 튄다. 신발을 벗을 때 가지런히 정리하는 게 아니라 그저 되는대로 벗어버리고, 말투나 분위기도 조금 감정적으로 나가기도 한다. 밖에서 왠지 모르게 불만을 받으면 거기서 해소되지 못한 채 어딘가 폭발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다. TV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다니는 회사에서 위에 계시는 사람이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아랫사람에게 종종 이유 없이 짜증내거나 업무로 꼬투리를 잡는 경우가 많다.

 

마스다 미리의 작품에서 보이는 그런 돋보임이란, 바로 이런 사소한 것에 대한 표현력이다. 그림체는 왠지 모르게 단순하게 보일지 모르나, 그림에서 보이는 상황과 대사내용은 엄청난 공감대가 있다. 사람이 살다보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맞지 않은 사람이 있다. 왜 그런가 싶으면 그 사람의 전반적인 것보다 사소한 모습이 자신의 시야에 누적되었기 때문이다. 사소한 것에 대해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여기나, 거대한 성곽 역시 사소한 돌멩이로 이루어진 것이라 본다면 <아무래도 싫은 사람>을 보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보이는 인간관계도 잘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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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9-07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애비 님, 한국 만화 역사의 큰 획을 그은 김혜린 작가 리뷰도 부탁드립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9-07 17:28   좋아요 0 | URL
테르미도르라는 만화가 인상깊어 보이는데
한 번 어디서 구하여 읽어보겠습니다!!!
 
[전자책] 식물의 인문학 - 숲이 인간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박중환 지음 / 한길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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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인문학>을 읽는 순간 나는 내 자신이 환경공학 전공자인 점에서 많은 동질감을 느낄 것이라 여겼다. 왜냐하면 식물을 다루는 것은 생태환경을 다루는 것이고, 생태환경이라는 것은 환경학에서 반드시 깊이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영역이다. 사람들은 환경에 대해 여기는 것을 아주 간사한 모습으로 보여준다. 환경이 왜 깊이 봐야 하는 것일까? 환경이란 영역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하면 아주 거시적인 부분을 생각한다. 자원고갈, 식수오염, 지구온난화 등등을 말이다. 그렇지만 정작 그래 말하면서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한 고민이나 대안의식은 없다.

 

대부분 사람들은 거시적인 영역보단 미시적인 영역에 치중한다. 환경은 단순히 환경 속에서 움직이는 분야가 아니라 인문, 경제, 사회, 정치 등 다양한 영역에서 관여한다. 특히 님비현상과 같은 경우 내 주변에 대규모 공사가 일어날 경우 사람들의 반응은 천차만별이다. 집 근처에 대단지 아파트가 설립되면 2가지로 나누어진다. 1가지는 공사로 시끄럽고 먼지 날려 생활이 어렵다는 점과 다른 1가지는 집값이 올라 부동산시세의 혜택을 본다는 점이다. 환경은 이런 저런 논리에서 치고받는 논쟁거리로 올라선 것이다.

 

환경이 소중한 이유는 처음에는 모른다. 모를 수밖에 없다.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물과 공기를 마시는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단지 숨을 쉬는 이유는 이성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자율신경에서 조절하는 부분이고, 물을 마시는 것은 물의 맛을 음미하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단지 목이 마르기 때문이다. 선택적인 부분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적 요인에 의해 물과 공기는 인간에게 전달된다. 그런데 이 물과 공기가 공급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상당히 괴로울 것이다. 집 옆에 공사장에서 먼지가 날려 창문을 못 열고, 퇴근 길 버스를 기다리는 도중 배기장치가 불량한 자동차에서 뿜어내는 매연은 매우 괴로운 고문이다. 이때 비로소 공기의 중요함을 알지만, 공기를 마시는 시간 중 그 순간은 짧은 찰나와 같기 때문에 금방 잊어진다. 물도 마찬가지다. 4대강 사업 이후 하천에 녹조현상이 일어나고, 물고기가 떼죽음이 일어나도 눈도 꼼짝하지 않은 사람도 많다. 그 문제를 말하면 오히려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만약 당사자 그 하천유역에 사는 사람이라 가정하자, 물이 하도 오염되어 수돗물에서 악취가 발생하고 트리할로메탄이란 암을 유발하는 물질이 대거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반응이 순간적으로 바뀐다. 수돗물을 마시지 않고 슈퍼에서 구매한 생수로 식수로 활용할 것이다. 인간의 간사함에서 나는 가끔 어이없는 형태를 본다. 자연의 소중한 것을 망각하면서 막상 자기 집이 아닌 곳에 환경 분쟁이 일어나면 비난의 화살을 날린다. 내만 안 당하면 되지! 란 심보가 우리 사회에 인간성을 마비시킨 것도 모자라 자연까지 파괴한다.

 

자연이 왜 소중한가에서 자연이 없다면 생물이 살 수 없고, 생물이 살수 없는 곳에 인간이 살 수 있을 리가 없다. 새가 살지 않는 곳은 토지가 척박하고, 대지가 병이 들어 생명의 기운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은 곳이다. 그런 곳에 인간이 살 수 있겠는가? 인간의 행위는 이때까지 그런 것을 막기보단 오히려 가속화시켰다. 산업혁명 이후 영국에서는 가난한 노동자들은 주거환경의 악화로 건강이 심하게 나빠졌다. 그런 사람에게 유일한 치료방안은 주거환경의 개선이겠지만, 사유재산인 부분이므로 수많은 노동자를 구제할 방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대규모 자연을 보호하고, 공유지로 삼아 자연의 맑은 공기와 물을 노동자들에게 공급하도록 했다. 물론 그 곳에서 어떤 개발과 오염은 불허한다.

 

자연의 기운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인간의 생존하고 연결되어 있다. 산소가 일정치 않으면 인간의 뇌만 아니라 신체조직도 망가지기 시작한다. 장시간 열악한 노동환경만이 문제가 아니다. 공기가 환기되지 않고, 밀폐공간에서 계속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해야 했다. 산소농도가 저하되어 면역력의 감소와 인구감소까지 일어난다. 인간에게 자연이 필요한 이유는 단순히 미적으로 쾌락함을 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야 하는 최소한의 생명줄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연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건강한 대지를 지탱하는 토양, 그 토양 아래 머물고 있는 물과 식생이다. 토양에 언제나 지하수가 있고, 지하수가 없이는 토양도 존재하지 못한다. 물의 기능은 응력이란 것이 있어서 일정 수분은 지반의 붕괴를 막으며, 지반에 가해지는 충격도 완화한다. 그리고 그 물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토지도 필요하나 그것과 동시에 갖추어야 할 존재가 바로 식물이다. 식물이 왜 중요한 것인가?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할 생태조건에서 식물은 기본 중에 기본이다.

 

푸른색의 식생이 존재하지 않으면 인간의 삶은 유지될 수 없다. 이미 그것 오래전 우리 인류에 의해 증빙된 것이다. 인간은 하루에 1끼이든 2끼이든 식사를 하지 않으면 삶을 영위할 수 없다. 대부분 우리 식단에 올라오는 것은 육류나 생선보다는 식물로 만들어진 것이다. 설사 육류가 올라와도 그 육류를 키우기 위해 식물이 필요하다.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키우는데 곡물과 여물이 필요하다. 결국 식물이 기반이 되어 고기가 우리 입으로 전달된다. 식물의 종말은 인류와 세계의 종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식생의 중요성을 잊는다. 너무 물질만능주의로 인한 착오일까? 과거 인간들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식물에서 곡식을 찾았고, 아픔 몸을 치료하기 위해 식물에서 약초를 찾았다. 우리나라에서 성웅으로 받드는 이순신 장군이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부상당했을 때 조치한 방법이 버드나무를 이용하여 발을 고정시킨 것이다. 버드나무에는 진통제의 효과가 있다. 약을 만들 때 쓰는 식물을 보면 약초도 있지만, 일상에서 사용하는 채소가 있다. 도라지나 감 같은 식물은 약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반찬에 이용된다.

 

인간의 병을 치유하는 점에서 자연에 모든 약이 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물론 외과적인 시술도 필요하나, 내과적으로나 혹은 간단한 외상 약에서 식생의 도움은 화학약품보다 뛰어나다. 화학약품은 부작용이 매우 심하나, 예로부터 사용된 한방은 부작용이 거의 최소화한다. 인간을 하나의 우주로서 보고 그 조화를 맞추었기에 자연적 흐름에 인간을 다시 되돌리는 것이다. 억지로 무리하게 떼거나 붙이면 결국 탈이 나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우리 인간이 자연에서 식생을 이용한 것이라 보나, 결국 우리 인간은 자연과 자연의 소생인 식물에게 도리어 지배를 받고 있는 셈이다. 자연은 변화와 흐름에 충실하게 받아들여 그것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몰고 간다. 돌연변이가 인간에게 흔하지 않아도 식물에게 흔하다. 인간의 돌연변이는 오히려 도태되거나 생존에서 불리한 조건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식물의 변이는 다른 환경에 적응하면서 자신의 종족을 보존한다. 식물은 토지 위에서 자란다. 그래서 토지가 한정된 영역이기에 서로들 싸우기도 하고, 공존하기도 한다. 그 대상은 같은 식물이기도 하고, 곤충 혹은 동물에 미생물까지 포함된다.

 

경쟁을 하면서 공존하는 이들은, 우리가 흔히 자연의 야생이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고 하나, 그 투쟁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그 생태계는 붕괴되는 점이다. 토끼를 잡아먹던 늑대를 죽이자, 토끼가 처음에 많이 번성하다 어느 순간 멸종했다. 그 이유는 토끼들이 그 지역의 풀을 모조리 갉아먹는 바람에 풀이 자라는 시간이 이들의 식량공급과 일치할 수 없어서, 대부분의 토끼가 굶어 죽은 것이다. 억지로 자연에서 한 가지를 건들면 어느 순간 도미노현상이 일어난다.

 

인간은 이런 자연의 생태계를 이해하지 않아 과오를 범한다. 식물이 자라는 저 생태계가 왜 저렇게 되어 있을까 에서 저기는 오랜 시간을 거쳐 형성된 균형이 있다는 점이다. 이미 균형이 파괴된 대도시에서 자연의 녹취를 잃어버린 지가 옛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이 있는 곳으로 여행하고, 거기에 자신의 심신을 회복하려는 순간, 물질만능주의의 편리성을 추구하는 이기심이 발동된다. 그리고 자신의 편리성을 위해 자연의 공간을 개발하고, 또 다른 개발자가 와서 또 개발하는 방식이 반복되어 천연자연의 명소는 어느 순간 그 자연의 색을 잃어버린다.

 

맨 처음 그곳에서 인간이 하는 행위는 부지정지작업이다. 바로 땅을 억지로 밀고, 땅위에 있던 나무와 풀을 강제로 철거하는 것이다. 자연의 파괴는 인간의 이기심과 무지에서 시작되어 우리의 목을 옭아맨다. 중세 이전의 인간이 식생을 두고 정원을 삼은 이유는 미적인 감각도 있지만, 식물에게서 식량과 약을 구하기 위해서다. 산업화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하자 인간은 자신이 모든 자연을 지배하는 군림하는 압제가가 된 것처럼 착각한 것이다.

 

인간이 도시화로 인해 지구이상기상현황이나 사막화 그리고 각종 질병은 자연의 식생을 스스로 잘라내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어디서부터 바라보는 것이 옳은가? 교육과 경제조차고 삶의 경쟁에 의해 모든 것을 배제시켜 승리독식을 향하여 서로 파괴시킨다. 자연에 향한 인간의 모습은 모든 것이 평등한 영역으로 흐른다. 교양서적으로 <식물의 인문학> 좋은 도서인 것 같다.

 

그러나 환경공학 전공자로서 메탄과 탄산가스에 대한 생각은 다르다. 실제로 화산폭발이나 지반에서 내뿜는 가스에서 탄소가스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자동차나 공장매연 같은 화석에너지 사용이 대기오염에 해당이 되는 것에 대한 부분은 조금 문제가 있다. 환경에서는 모든 것에 대해 일정 부분 자정능력을 갖춘 것으로 본다. 수질에서 BOD(생물화학적산소요구량), SS(부유물질량), T-P(총인) 등과 같은 오염물질이 들어오면 물속에 있는 DO(용존산소)와 미생물이 오염물질을 제거해준다. 물론 미생물은 생물화학적 방법에 의해서라고 하나 물의 이동에 의한 와류현상이나 물속의 산소 그 자체도 산화하기에 화학적 처리가 일어난다.

 

그럼 오염이 일어나는 이유는 자정능력 이상의 오염물질을 유입 돼서 부터다. 수질에서 비점오염원이 문제되는데, 비점오염원은 강우 시 지표면의 먼지나 토사 등이 하천에 유입되면 오염시키는 오염원이다. 그런데 도시가 아닌 농촌이나 다른 지역에서 비점오염원은 발생하고, 자연적으로 정화된 곳에서도 폭우가 내리면 산사태에 의한 토사의 대량유입이 일어난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토사유출이 된 하천은 다시 원상복귀를 하지만, 도시는 그렇지 않다. 이미 자정능력의 한계가 도달했기 때문이다.

 

대기 역시 그렇다. 대기 중의 공기의 이동에 따른 확산과 나무와의 생물화학적 반응은 공기에 유입된 대기오염물질을 저감시킨다. 이때까지 그것이 균형을 맞추어 배출과 자정능력의 균열이 없었지만, 도시화와 산업화에 따른 대기오염물질이 발생하여 이런 문제를 야기했다. 전 대기환경에서 다이옥신의 배출이 극지방의 동물에게 누적되어 있는 점에서 미량의 다이옥신도 그러한데 탄산가스의 경우 전혀 지구온난화와 극지방 빙하와 문제되지 않는다는 논리는 환경공학 전공자에서 의아한 부분이다.

 

그런 이론이 전에 나온 적이 있었다. 그 이론을 내놓은 연구소가 어느 대규모 자본력을 소유한 외국기업과 결탁한 것이 있으며, 특히 석유와 관련된 곳이 있다고 들었다. 자연파괴와 대기오염에서 석유를 팔아 이익 보는 쪽, 혹은 하이브리드차로 세금을 이익 보는 쪽에서 생각하면 조금 의아스럽다. 더 의아스러운 부분은 전 지구적인 영역이 아니더라도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 옆에 있으면 배기가스가 상당히 열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온실효과가 없다면 국소적인 열오염은 어떻게 설명되는가? 지구광역적이 아니더라도 국가 내부의 크고 작은 광역 범위를 생각하면 조금 논리가 성립되지 않은 문제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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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baal 2015-09-08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스럽게 써주신 서평 감사합니다. 저도 기회가 되면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9-08 20:55   좋아요 0 | URL
더더욱 정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