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식물의 인문학 - 숲이 인간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박중환 지음 / 한길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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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인문학>을 읽는 순간 나는 내 자신이 환경공학 전공자인 점에서 많은 동질감을 느낄 것이라 여겼다. 왜냐하면 식물을 다루는 것은 생태환경을 다루는 것이고, 생태환경이라는 것은 환경학에서 반드시 깊이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영역이다. 사람들은 환경에 대해 여기는 것을 아주 간사한 모습으로 보여준다. 환경이 왜 깊이 봐야 하는 것일까? 환경이란 영역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하면 아주 거시적인 부분을 생각한다. 자원고갈, 식수오염, 지구온난화 등등을 말이다. 그렇지만 정작 그래 말하면서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한 고민이나 대안의식은 없다.

 

대부분 사람들은 거시적인 영역보단 미시적인 영역에 치중한다. 환경은 단순히 환경 속에서 움직이는 분야가 아니라 인문, 경제, 사회, 정치 등 다양한 영역에서 관여한다. 특히 님비현상과 같은 경우 내 주변에 대규모 공사가 일어날 경우 사람들의 반응은 천차만별이다. 집 근처에 대단지 아파트가 설립되면 2가지로 나누어진다. 1가지는 공사로 시끄럽고 먼지 날려 생활이 어렵다는 점과 다른 1가지는 집값이 올라 부동산시세의 혜택을 본다는 점이다. 환경은 이런 저런 논리에서 치고받는 논쟁거리로 올라선 것이다.

 

환경이 소중한 이유는 처음에는 모른다. 모를 수밖에 없다.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물과 공기를 마시는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단지 숨을 쉬는 이유는 이성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자율신경에서 조절하는 부분이고, 물을 마시는 것은 물의 맛을 음미하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단지 목이 마르기 때문이다. 선택적인 부분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적 요인에 의해 물과 공기는 인간에게 전달된다. 그런데 이 물과 공기가 공급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상당히 괴로울 것이다. 집 옆에 공사장에서 먼지가 날려 창문을 못 열고, 퇴근 길 버스를 기다리는 도중 배기장치가 불량한 자동차에서 뿜어내는 매연은 매우 괴로운 고문이다. 이때 비로소 공기의 중요함을 알지만, 공기를 마시는 시간 중 그 순간은 짧은 찰나와 같기 때문에 금방 잊어진다. 물도 마찬가지다. 4대강 사업 이후 하천에 녹조현상이 일어나고, 물고기가 떼죽음이 일어나도 눈도 꼼짝하지 않은 사람도 많다. 그 문제를 말하면 오히려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만약 당사자 그 하천유역에 사는 사람이라 가정하자, 물이 하도 오염되어 수돗물에서 악취가 발생하고 트리할로메탄이란 암을 유발하는 물질이 대거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반응이 순간적으로 바뀐다. 수돗물을 마시지 않고 슈퍼에서 구매한 생수로 식수로 활용할 것이다. 인간의 간사함에서 나는 가끔 어이없는 형태를 본다. 자연의 소중한 것을 망각하면서 막상 자기 집이 아닌 곳에 환경 분쟁이 일어나면 비난의 화살을 날린다. 내만 안 당하면 되지! 란 심보가 우리 사회에 인간성을 마비시킨 것도 모자라 자연까지 파괴한다.

 

자연이 왜 소중한가에서 자연이 없다면 생물이 살 수 없고, 생물이 살수 없는 곳에 인간이 살 수 있을 리가 없다. 새가 살지 않는 곳은 토지가 척박하고, 대지가 병이 들어 생명의 기운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은 곳이다. 그런 곳에 인간이 살 수 있겠는가? 인간의 행위는 이때까지 그런 것을 막기보단 오히려 가속화시켰다. 산업혁명 이후 영국에서는 가난한 노동자들은 주거환경의 악화로 건강이 심하게 나빠졌다. 그런 사람에게 유일한 치료방안은 주거환경의 개선이겠지만, 사유재산인 부분이므로 수많은 노동자를 구제할 방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대규모 자연을 보호하고, 공유지로 삼아 자연의 맑은 공기와 물을 노동자들에게 공급하도록 했다. 물론 그 곳에서 어떤 개발과 오염은 불허한다.

 

자연의 기운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인간의 생존하고 연결되어 있다. 산소가 일정치 않으면 인간의 뇌만 아니라 신체조직도 망가지기 시작한다. 장시간 열악한 노동환경만이 문제가 아니다. 공기가 환기되지 않고, 밀폐공간에서 계속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해야 했다. 산소농도가 저하되어 면역력의 감소와 인구감소까지 일어난다. 인간에게 자연이 필요한 이유는 단순히 미적으로 쾌락함을 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야 하는 최소한의 생명줄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연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건강한 대지를 지탱하는 토양, 그 토양 아래 머물고 있는 물과 식생이다. 토양에 언제나 지하수가 있고, 지하수가 없이는 토양도 존재하지 못한다. 물의 기능은 응력이란 것이 있어서 일정 수분은 지반의 붕괴를 막으며, 지반에 가해지는 충격도 완화한다. 그리고 그 물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토지도 필요하나 그것과 동시에 갖추어야 할 존재가 바로 식물이다. 식물이 왜 중요한 것인가?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할 생태조건에서 식물은 기본 중에 기본이다.

 

푸른색의 식생이 존재하지 않으면 인간의 삶은 유지될 수 없다. 이미 그것 오래전 우리 인류에 의해 증빙된 것이다. 인간은 하루에 1끼이든 2끼이든 식사를 하지 않으면 삶을 영위할 수 없다. 대부분 우리 식단에 올라오는 것은 육류나 생선보다는 식물로 만들어진 것이다. 설사 육류가 올라와도 그 육류를 키우기 위해 식물이 필요하다.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키우는데 곡물과 여물이 필요하다. 결국 식물이 기반이 되어 고기가 우리 입으로 전달된다. 식물의 종말은 인류와 세계의 종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식생의 중요성을 잊는다. 너무 물질만능주의로 인한 착오일까? 과거 인간들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식물에서 곡식을 찾았고, 아픔 몸을 치료하기 위해 식물에서 약초를 찾았다. 우리나라에서 성웅으로 받드는 이순신 장군이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부상당했을 때 조치한 방법이 버드나무를 이용하여 발을 고정시킨 것이다. 버드나무에는 진통제의 효과가 있다. 약을 만들 때 쓰는 식물을 보면 약초도 있지만, 일상에서 사용하는 채소가 있다. 도라지나 감 같은 식물은 약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반찬에 이용된다.

 

인간의 병을 치유하는 점에서 자연에 모든 약이 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물론 외과적인 시술도 필요하나, 내과적으로나 혹은 간단한 외상 약에서 식생의 도움은 화학약품보다 뛰어나다. 화학약품은 부작용이 매우 심하나, 예로부터 사용된 한방은 부작용이 거의 최소화한다. 인간을 하나의 우주로서 보고 그 조화를 맞추었기에 자연적 흐름에 인간을 다시 되돌리는 것이다. 억지로 무리하게 떼거나 붙이면 결국 탈이 나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우리 인간이 자연에서 식생을 이용한 것이라 보나, 결국 우리 인간은 자연과 자연의 소생인 식물에게 도리어 지배를 받고 있는 셈이다. 자연은 변화와 흐름에 충실하게 받아들여 그것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몰고 간다. 돌연변이가 인간에게 흔하지 않아도 식물에게 흔하다. 인간의 돌연변이는 오히려 도태되거나 생존에서 불리한 조건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식물의 변이는 다른 환경에 적응하면서 자신의 종족을 보존한다. 식물은 토지 위에서 자란다. 그래서 토지가 한정된 영역이기에 서로들 싸우기도 하고, 공존하기도 한다. 그 대상은 같은 식물이기도 하고, 곤충 혹은 동물에 미생물까지 포함된다.

 

경쟁을 하면서 공존하는 이들은, 우리가 흔히 자연의 야생이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고 하나, 그 투쟁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그 생태계는 붕괴되는 점이다. 토끼를 잡아먹던 늑대를 죽이자, 토끼가 처음에 많이 번성하다 어느 순간 멸종했다. 그 이유는 토끼들이 그 지역의 풀을 모조리 갉아먹는 바람에 풀이 자라는 시간이 이들의 식량공급과 일치할 수 없어서, 대부분의 토끼가 굶어 죽은 것이다. 억지로 자연에서 한 가지를 건들면 어느 순간 도미노현상이 일어난다.

 

인간은 이런 자연의 생태계를 이해하지 않아 과오를 범한다. 식물이 자라는 저 생태계가 왜 저렇게 되어 있을까 에서 저기는 오랜 시간을 거쳐 형성된 균형이 있다는 점이다. 이미 균형이 파괴된 대도시에서 자연의 녹취를 잃어버린 지가 옛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이 있는 곳으로 여행하고, 거기에 자신의 심신을 회복하려는 순간, 물질만능주의의 편리성을 추구하는 이기심이 발동된다. 그리고 자신의 편리성을 위해 자연의 공간을 개발하고, 또 다른 개발자가 와서 또 개발하는 방식이 반복되어 천연자연의 명소는 어느 순간 그 자연의 색을 잃어버린다.

 

맨 처음 그곳에서 인간이 하는 행위는 부지정지작업이다. 바로 땅을 억지로 밀고, 땅위에 있던 나무와 풀을 강제로 철거하는 것이다. 자연의 파괴는 인간의 이기심과 무지에서 시작되어 우리의 목을 옭아맨다. 중세 이전의 인간이 식생을 두고 정원을 삼은 이유는 미적인 감각도 있지만, 식물에게서 식량과 약을 구하기 위해서다. 산업화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하자 인간은 자신이 모든 자연을 지배하는 군림하는 압제가가 된 것처럼 착각한 것이다.

 

인간이 도시화로 인해 지구이상기상현황이나 사막화 그리고 각종 질병은 자연의 식생을 스스로 잘라내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어디서부터 바라보는 것이 옳은가? 교육과 경제조차고 삶의 경쟁에 의해 모든 것을 배제시켜 승리독식을 향하여 서로 파괴시킨다. 자연에 향한 인간의 모습은 모든 것이 평등한 영역으로 흐른다. 교양서적으로 <식물의 인문학> 좋은 도서인 것 같다.

 

그러나 환경공학 전공자로서 메탄과 탄산가스에 대한 생각은 다르다. 실제로 화산폭발이나 지반에서 내뿜는 가스에서 탄소가스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자동차나 공장매연 같은 화석에너지 사용이 대기오염에 해당이 되는 것에 대한 부분은 조금 문제가 있다. 환경에서는 모든 것에 대해 일정 부분 자정능력을 갖춘 것으로 본다. 수질에서 BOD(생물화학적산소요구량), SS(부유물질량), T-P(총인) 등과 같은 오염물질이 들어오면 물속에 있는 DO(용존산소)와 미생물이 오염물질을 제거해준다. 물론 미생물은 생물화학적 방법에 의해서라고 하나 물의 이동에 의한 와류현상이나 물속의 산소 그 자체도 산화하기에 화학적 처리가 일어난다.

 

그럼 오염이 일어나는 이유는 자정능력 이상의 오염물질을 유입 돼서 부터다. 수질에서 비점오염원이 문제되는데, 비점오염원은 강우 시 지표면의 먼지나 토사 등이 하천에 유입되면 오염시키는 오염원이다. 그런데 도시가 아닌 농촌이나 다른 지역에서 비점오염원은 발생하고, 자연적으로 정화된 곳에서도 폭우가 내리면 산사태에 의한 토사의 대량유입이 일어난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토사유출이 된 하천은 다시 원상복귀를 하지만, 도시는 그렇지 않다. 이미 자정능력의 한계가 도달했기 때문이다.

 

대기 역시 그렇다. 대기 중의 공기의 이동에 따른 확산과 나무와의 생물화학적 반응은 공기에 유입된 대기오염물질을 저감시킨다. 이때까지 그것이 균형을 맞추어 배출과 자정능력의 균열이 없었지만, 도시화와 산업화에 따른 대기오염물질이 발생하여 이런 문제를 야기했다. 전 대기환경에서 다이옥신의 배출이 극지방의 동물에게 누적되어 있는 점에서 미량의 다이옥신도 그러한데 탄산가스의 경우 전혀 지구온난화와 극지방 빙하와 문제되지 않는다는 논리는 환경공학 전공자에서 의아한 부분이다.

 

그런 이론이 전에 나온 적이 있었다. 그 이론을 내놓은 연구소가 어느 대규모 자본력을 소유한 외국기업과 결탁한 것이 있으며, 특히 석유와 관련된 곳이 있다고 들었다. 자연파괴와 대기오염에서 석유를 팔아 이익 보는 쪽, 혹은 하이브리드차로 세금을 이익 보는 쪽에서 생각하면 조금 의아스럽다. 더 의아스러운 부분은 전 지구적인 영역이 아니더라도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 옆에 있으면 배기가스가 상당히 열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온실효과가 없다면 국소적인 열오염은 어떻게 설명되는가? 지구광역적이 아니더라도 국가 내부의 크고 작은 광역 범위를 생각하면 조금 논리가 성립되지 않은 문제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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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baal 2015-09-08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스럽게 써주신 서평 감사합니다. 저도 기회가 되면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9-08 20:55   좋아요 0 | URL
더더욱 정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