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혐오의 미러링 - 혐오의 시대와 메갈리아 신드롬 바로보기
박가분 지음 / 바다출판사 / 2016년 9월
평점 :
정의라는 개념을 어디에 두고 말해야 좋은가에서 참으로 난감할 때가 많다. 정의라는 개념이 그 사회와 시대적 특성, 상황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의라는 것은 도덕적 관념, 즉 사회적 통념이란 의미에 치중한다. 과거 조선시대 군왕과 사대부가 통치하던 때와 지금 민주주의 국가와의 가치관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다르고 변화해도 인간의 근본에서 계속 유지되고 인정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윤리적 가치관이다. 살인을 해서는 안 되고, 폭력을 휘두르면 아니 되며, 더욱이 사리분별이 있는 자라면 약자들을 괴롭히면 안 된다. 그러나 약자를 괴롭혀도 용납되는 것은 윤리적 가치관보단 그 사회적 권력 혹은 프레임에 의해 조성된 하나의 이데올로기, 또는 이데올로기를 정당화 하는 헤게모니로 볼 수 있다.
정의라는 개념에서 무서운 실행방법에서 응징이란 수단이 있다. 응징은 하나의 서사이고 하나의 신화에 가깝다. 기존 사회에 적이 혼란시킬 경우, 적의 위기에 모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적 자체는 섬멸하는 서사로 흐른다. 역사적인 기록에서 전쟁이나 각종 사변들을 보면 이런 서사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너희들에게 피해를 보았으니 우리는 이에 대한 보복을 실행하여 보상 내지 처벌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정의라는 이름 아래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폭력과 광기에 의해 합리화되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 읽은 박가분 작가의 <혐오의 미러링>, 프로이트 “id”라는 집단적 폭력적 기질이 ego 내지 super-ego로 대체될 경우 상당한 무서운 작용을 보여준다. 그 폭력적 광기에 정의를 내려줄 하나의 이름만 내걸면 뭐든지 해도 정당화 될 수 있다. 가령 조선의 역사는 외세의 침략과 내정간섭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다. 왜국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이에 중국 명나라가 지원 왔다. 명나라가 오면서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많은 불편함을 주었다. 상국(上國)의 천병(天兵)이 오니, 이에 대한 대접과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보상심리가 단순히 위에서 누르는 입장과 여기에 반대되어 밑에 있는 자의 입장은 다르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보상심리에 의해 폭력을 휘둘리는 순간, 그 누구라도 같은 존재가 된다. 이스라엘 민족이 나치에 의해 희생당했지만, 결국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무고하게 살해한다. 보상심리에 의해 작동된 광기는 그 모든 폭력과 비인간적 행위를 정의라는 이름으로 덮는다. 거기에 신이라는 관념적 존재와 이데올로기적 사상을 더하면 완벽한 은폐가 일어난다. 물론 피해자가 계속 피해당하는 일이 없도록 만드는 것이 올바른 사회고, 그들의 아픈 상처를 드러내서 그 부분을 치료할 수 있게 금 처방해주는 것이 바람직한 행동이다.
하지만 그 상처가 본인이 받은 것이 아니라 그동안 누적된 형태고, 상처를 말하는 자들이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라 단지 같은 부류로 볼 수 있다는 것으로 지나친 요구 내지 폭력적 행동을 틀려먹었다.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면서 수많은 악행을 일삼았다. 현재 그 당시의 지도자의 후예들은 당시 시대를 영광스러운 과거로 생각한다. 우리가 이에 대해 일본 권력자 내지 정부에게 항의하고 경계하는 것은 옳을 수 있지만, 일본인 관광객에게 그런 적대감을 보이는 것은 잘 못된 일이다. 군위안부에서 강제로 성노예로 착취당한 여성들의 원한을 생각하여 이번에 우리가 피해의식으로 인해 일본 여성을 집단 성폭행한다면 말이 되겠는가?
인간에게 어느 정도 폭력이란 수단이 허용되는 범주가 있고, 그 이상해서는 안 되는 일도 있다. 더구나 그 행동에 대한 하나의 가치관 내지 이데올로기의 신성화는 단순히 정의라는 이데올로기 가치관을 넘어 윤리적 가치관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 사회이든 불평등은 존재하고, 모순과 부조리로 넘쳤다. 그런 부당한 일이 존재해서 당연한 것은 아니나 늘 있었다는 점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런 당연해서 안 될 일들을 당연한 일로 만드는 게 바람직한 사회의식이다.
모든 사람들이 완벽하고, 모든 사회가 정상적이지 않다. 모든 게 완벽한 세상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지만, 거기에 도달하는 것이 인간의 이상이다.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지향한 철학이란 신의 사랑을 찾아가는 것이고, 민주주의 가치관이 인간의 자유와 평등, 인권을 찾아가는 것이라면 지금 현실이 온전하지 않은 것이다. 하다못해 마르크스가 말한 공산주의 운동이란 현실에 없는 것이고, 오히려 그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원래의 사상적 시초는 철학적 사유와 고찰에서 시작되나, 사상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그 범주의 근원에 가는 것보다 단순한 답과 쉬운 길을 찾는 것을 원한다.
쉬운 길과 단순한 답을 찾으면 눈앞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은 매우 쉽다. 그냥 자기가 그러고 싶은 것만 믿고 계속 행동만 하면 된다. 하지만 신념과 광기는 다르다. 신념에는 왜 그래야 하는가에 대한 명제와 더불어 이에 대한 대안과 해결책을 요구한다. 광기는 대안과 해결책은 없이 자신들의 행동을 두고 정의집행이란 이름만 거론한다. 정의집행이 광기와 조우하면 폭력은 그저 자위행위에 불과하고, 문제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갈등만 조장한다. 갈등을 빚으면 갈등의 당사자가 가해자 내지 피해자로 될 수 있다. 피해자가 아니더라도 자신들을 잠재적 피해자로 생각하는 순간 이들은 자신이 언제 피해볼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공포로 광기를 표출한다.
박가분 씨의 <혐오의 미러링>은 이런 현상이 한국사회에서 메갈리아 혹은 워마드란 여성우월주의 집단 태생 및 근원을 밝히고 있다. 솔직하게 말하면 작가 분은 조금 더 연구해볼 필요한 분야가 있었다. 그것은 중세시대부터 지금도 이어져 오는 마녀사냥이다. 책을 읽으면 마녀사냥에 대한 기본적인 맥락을 알고 있다. 군사정권시절 용공조작 사건을 거론한 점에서 분명하다. 또한 마녀사냥은 피지배계층, 현대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계층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부유한 계층이나 혹은 지배계층이 마녀사냥을 당할 이유는 특별히 없다.
마녀사냥이 일어나는 것은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해소해야 하나, 그것이 해소되지 않은 채 그 피해를 고스란히 일반 사람들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원인을 사회구조적인 요소에서 바라보고 서로 해결하는 수단보단 더 간단한 길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것이 먹히면 하나의 이슈가 된다. 세월호 사건을 보면 참으로 마음을 아프게 혹은 분노하게 만든 일이 있다. 유가족들이 진실규명을 위해 호소하고, 어느 분들은 단식투쟁을 하는데, 극우사이트 회원들이 찾아와서 그 앞에서 피자와 통닭을 먹고 있던 것이다. 세월호 침몰된 어린 학생들을 두고 어묵이라며 비하하는 인간도 있었다.
윤리적 가치관으로 도저히 용납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방송에서 나온 것처럼 국가정보원 및 국가기관의 치밀한 공작에 의해 교묘히 넘어가서 넘지 말아야 행동을 했다. 세월호부터 시작하여 518광주시민의 죽음을 두고 조롱하던 일베, 그리고 박가분 씨가 이번에 적은 책은 일베의 미러링이라고 하는 메갈리아/워마드에 대한 책을 내었다. 나는 솔직히 일베도 문제지만, 메갈리아는 더 심각하게 여긴다. 일베는 사회적으로 공공의 적이 되었고, 어디 가서 일베라고 들키는 순간, 사회적 단절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러나 메갈리아는 다르다. 이들은 일베(국가기관의 첩보에 의해 돌아가나 국가기관은 은밀히 은폐했지만)처럼 자신들을 스스로 병신이라 하지 않고, 오히려 피해자란 입장에서 정의를 외친다. 박가분 씨가 잘 지적한 백색테러와 적색테러, 난 피해자이니 모든 행동이 정당하다는 식이다. 결국 일베와 다르게 메갈리아는 피해자란 입장에서 일베를 미러링하고, 잠재적 피해자라는 피해의식이 보상심리와 폭력의 정당화로 이어진 것이다. 결국 여자라는 이름으로 페미니즘을 동원하고, 내가 그동안 읽은 페미니즘 개념과 전혀 다른 양상이 페미니즘이란 이름으로 나온 것이다.
사실 나는 메갈리아 그 자체에 대해 문제를 삼기보단 메갈리아라는 존재에 대해 무조건적인 지지를 내보내고 있는 여성학자들이다. 오히려 현장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여성운동가라면 이들에게서 이질감을 보일 것이다. 현장의 여성인권운동가들은 여성의 인권을 넘어 장애인, 노인, 어린이(고아) 같은 약자까지 모두 보호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메갈리아에게 그런 것은 없다. 노인이란 한국남자로 살아왔으니 비난해야 하고, 어린 남자아이는 앞으로 한국남자로 살아야 하기에 비난해야 한다는 논리다. 이들에게 어떤 논리도 필요 없고 단지 자기 말만 내세운다.
그들의 입장, 그들의 정의에서 충분히 가능성이 높다. 작가의 글에서 아쉬운 감정이 드는 부분이 바로 지식인들 혹은 엘리트들이 보는 어설픈 짝사랑이다. 일베나 메갈을 알기 전에 먼저 디시인사이드 내지 인터넷문화를 알아야 하는데, 이들이 그런 문화에 깊이 들어갈 일도 없다. 디시인사이드가 원래부터 문제가 많은 일부 극소수 회원들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바가 있다. 그런 사이트에서 남자연애인갤러리에 활동하던 회원들이 기존 남성들이 사용하던 비속어 내지 욕설을 따라하면서 같이 오염되고, 메갈리아는 그런 공간에서 더 진화하여 새롭게 나온 것이다.
메갈리아 존재는 올해 처음 들어본 것 같고,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봐도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메갈리아 위험하다고 여긴 것은 단순히 한국남자만 욕하면 그렇다고 넘어가겠지만, 어린이 성추행, 넥슨사에서 펼친 민폐, 강남지하철 사건 뒤 행동, 산업재해로 죽은 청년에 대한 조롱, 세월호 희생학생에 대한 조롱, 독립운동가와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비하, 시위 중 물대포의 충격으로 사망한 백남기 농초에 대한 조롱 등이다. 이들이 이런 짓을 하는 점에서 인륜의 가치를 물어보는 것도 어려우나, 이런 이들을 이때까지 지지한다고 말하는 지식인들의 착각이 더 무서운 일이다.
만일 일베가 스스로 정화능력이 있었다면 지금과 같이 일반 사회에서 인간 네트워크 속으로 님비(Not in my Back-yard)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페미니즘이란 탈을 쓰게 되면 인간 네트워크 속에서 오히려 큰 소리를 낼 것이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고, 자신이 느낀 피해의식 내지 공감대가 조금이라도 닿게 되면 그 대열에 참여하기 쉽다. 문제는 그런 불편함을 내비치는 게 아니라, 위에서 말한 것처럼 대안과 해결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강남역에서 살해당한 여성은 참으로 안타깝다. 아직 젊고 가족들의 사랑을 받고 사는 구성원이었다.
그런 가족들이 딸, 동생을 잃었다. 오빠가 억울함을 토로하자 동생시체 팔아 보상비를 노리냐는 말을 하거나, 심지어 뺨을 때리는 사람도 있다. 어느 이는 이들에게 찾아와 자신들만의 페미니스트 가치관을 강조한다. 메갈리아가 이때 여동생을 잃은 오빠를 두고 진심의 위로보단 한국남자이니 여성의 죽음을 슬퍼할 자격이 없다는 말을 했다. 메갈리아 전체가 그런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르나, 그런 식의 글이 호응이 높고, 이에 대한 비판이 없다는 점이다. 이런 문제를 두고 내가 블로그에 글을 올리면, 이상한 덧글들이 달린다.
메갈리아는 아니나, 메갈리아에 동조한다는 지식인들의 착각으로 가득 찬 믿음이 두려울 뿐이다. 그런다고 해서 한국사회가 문제없는 것도 아니고, 한국 사회 내 남성들이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한국사회에서 남성도 힘들게 살고, 무조건적으로 적은 아닌 점이다. 왜 이런 피해의식들에 의한 혐오범죄가 일어나고, 그 근원은 무엇인가? 작가 분이 조금 더 마녀사냥에 치중하면 좋겠다는 점이 바로 마녀사냥은 대다수의 일반 국민들이 경제적으로 힘들고 여유가 없을 경우 그 책임을 구조적으로 판단하기보단 눈에 보이는 만만한 존재로 전이되는 점이다.
메갈리아들이 한국남자들을 욕을 하지만, 특히 제일 심하게 조롱하는 것은 가난한 남자이다. 지하철역 스크린 도어 수리 중 사망한 청년은 비정규직에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사람이다. 그의 죽음을 왜 욕되게 하는 것인가? 이에 반해 부유하고 권력이 있는 자에게 그런 욕을 날리지 않는다. 과거 집권여당 시초들은 군사정권 시절, 권력가와 결탁하고, 이중에는 과거 검사나 경찰, 국군장성도 많았다. 이들이 국민을 감금하고 고문할 때 남자들은 과도한 폭행, 여자는 성폭행을 자행했다. 남자가 결혼하면, 그의 장모와 아내를 눈앞에서 성폭행하겠다고 협박하여 간첩으로 조작했다.
이런 자들은 왜 페미니스트들은 비판하지 않은 것인가? 현재 재벌들은 한국 산업화시절 어린 여공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성장했다. 여공들에게 좁은 공간에서 환기도 되지 않아 폐병 내지 위염으로 고생해도 계속 일을 시켰고, 잔업과 야근, 임금체불 등 잔혹한 행위를 가했다. <전태일 평전>에서 병을 앓아 혼자 외롭게 자취방에서 죽어가는 어린 소녀를 바라본 전태일의 마음을 보자, 참으로 한숨만 나왔다. 왜 그런 여성들에 대한 추모의식은 없을까? 하다못해 위안부에서 슬프고 아픈 기억만 가진 할머니들에 대해 진심으로 관심을 가졌을까?
내가 지식인들이나 혹은 주변에 본 지식인 내지 예술계에 몸담은 분들이 이런 문제를 제대로 고찰하지 않은 점이다. 예술인들이 노동인권을 위해 작품을 만드는데, 메갈리아가 산업재해로 죽은 노동자를 조롱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거기에 대하여 메갈리아 비판하니, 지식인이나 예술인들이 왜 여성인권을 왜 무시 하냐는 식으로 나온다. 그들의 주제와 대상이 어긋나게 되는 현상으로 일어난다. 전에 읽은 책으로 <섹스와 돈>이란 책이 있다. 백인중심의 미국에서 자본주의는 여성의 예속화를 미디어로 통해 자본으로 합리화 시킨다.
남성에게 주어진 경제적, 정치적 특권이 여성을 예속화했다면, 여성이 정치적, 경제적 자율성을 가지게 된다면 남성과의 관계가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가야 한다. 하지만 수평의 관계성에선 책임성이 따른다. 메갈리아 분석글에 혐오로 가득하나, 그 속에서 돈 없는 남자에 대한 혐오는 더 심각하다. 돈 많은 남자에게 얻어먹으면 행운이고, 돈 없는 남자를 만나면 운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나, 여기에 대한 비판이나 고찰은 없다. 가 사안에 대한 일부 문제를 전체적으로 일반화는 위험한 발상이나, 그 일부의 문제 중에서 어느 사안에 대해 전혀 비판의식이 없다는 것은 심각하다.
반남성주의자라면 남성을 만나지 않아도 되는데, 만나서 막상 그들의 주머니를 탐색하는 점에서 메갈리아는 단순히 남성혐오로 이루어진 집단만이 아니다. 그들의 집단성에는 부익부 빈익빈에서 등장하는 청년 혹은 젊은 세대들의 실업, 빈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만이 엉뚱한 사람들에게 불똥을 튄 것이다. 물론 한국남성 중 기성세대의 꼰대의식은 참 문제가 많다. 청년세대들이 겪는 고충을 이해하지 않는다. 이미 나온 서적 중에 <88만원 새대>, <사천원 인생>이나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거울은 상이 반사되어 비추어진다. 상을 비추는 거울이라 해도, 상이 원래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이란 물체가 스스로 움직이거나 또는 누군가 거기에 있어야 한다. 미러링이란 말만 하고, 미러링이란 상의 변화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광기만 넘치는 현상에서 답은 없어 보인다. 대안과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혐오만 내세울 경우 그 최후는 허무함이다. 메갈리아를 운동권에서 이용하려 했지만 오히려 실패했다. 그들을 두고 “꿘”이란 지칭하며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기존 페미니즘 진영에서 메갈리아에 대해 세력권을 확장하려 했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가치관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지 말아야 했다.
현재 2016년 11월 말, 국가기관의 비리와 부패, 무능한 지도자와 정치 권력자들의 민낯이 드러나고, 국민들은 분노한다. 여기 주모자가 여성대통령과 여성이 있다고 해서 이들을 단순 옹호하고, 비판하는 사람에 대해 불만을 느끼는 자칭 페미니즘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현재 대통령은 정치적 역량으로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독재정권 시절 아버지의 이름으로 선택되었다. 저번 대선 때 사무실에서 다른 부서 상급자와 말다툼이 있었다. 대통령이 되는 이유에서 여자도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자가 대통령을 하지 마란 법은 없다.
단지 그 자질과 역량을 제대로 간파하여 선택해야 한다. 그 상급자는 여성이라 대통령이 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아버지 딸이란 사실에서 선택한 것이다. 페미니즘은 원래 진보적인 가치관이고, 진보적이지 않은 사람이 여자가 대통령을 해야 되라는 말에서 상당한 논리부조리가 있다. 그런 말을 이제는 메갈리아 워마드 진영에서 나온다. 국가를 문란하게 만든 자들을 두고 대단한 여자라고 말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상식적인 일반여성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는가?
폭력적인 남성성을 토대로 이루어진 대통령이 무슨 여성을 위한 대통령인가 말이다. 이성적 논리와 판단 없이 그저 광기와 독설로만 되돌아 올 뿐이다. 그리고 내가 진짜 걱정하고 있는 것은 이 현상에 대해 제대로 관찰하지 않은 지식인들의 오류다. 자신이 진보적인 지식인이라면 맨 처음 생각해야 인권이다. 타인의 인권(그것도 어린이, 노인, 장애인, 지하철 스크린도어 사망사고나 강남역 살인사건 유가족 등)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세력에 대해 단지 페미니즘이란 이데올로기만 내세운 것에 동조했다면, 지식인이 가져야할 최소한의 마지노선을 버린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