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미러링 - 혐오의 시대와 메갈리아 신드롬 바로보기
박가분 지음 / 바다출판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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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라는 개념을 어디에 두고 말해야 좋은가에서 참으로 난감할 때가 많다정의라는 개념이 그 사회와 시대적 특성상황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정의라는 것은 도덕적 관념즉 사회적 통념이란 의미에 치중한다과거 조선시대 군왕과 사대부가 통치하던 때와 지금 민주주의 국가와의 가치관은 다를 수밖에 없다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다르고 변화해도 인간의 근본에서 계속 유지되고 인정되는 부분이 있다그것은 윤리적 가치관이다살인을 해서는 안 되고폭력을 휘두르면 아니 되며더욱이 사리분별이 있는 자라면 약자들을 괴롭히면 안 된다그러나 약자를 괴롭혀도 용납되는 것은 윤리적 가치관보단 그 사회적 권력 혹은 프레임에 의해 조성된 하나의 이데올로기또는 이데올로기를 정당화 하는 헤게모니로 볼 수 있다.

 

정의라는 개념에서 무서운 실행방법에서 응징이란 수단이 있다응징은 하나의 서사이고 하나의 신화에 가깝다기존 사회에 적이 혼란시킬 경우적의 위기에 모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적 자체는 섬멸하는 서사로 흐른다역사적인 기록에서 전쟁이나 각종 사변들을 보면 이런 서사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우리는 너희들에게 피해를 보았으니 우리는 이에 대한 보복을 실행하여 보상 내지 처벌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정의라는 이름 아래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폭력과 광기에 의해 합리화되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 읽은 박가분 작가의 <혐오의 미러링>, 프로이트 “id”라는 집단적 폭력적 기질이 ego 내지 super-ego로 대체될 경우 상당한 무서운 작용을 보여준다그 폭력적 광기에 정의를 내려줄 하나의 이름만 내걸면 뭐든지 해도 정당화 될 수 있다가령 조선의 역사는 외세의 침략과 내정간섭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다왜국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키고이에 중국 명나라가 지원 왔다명나라가 오면서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많은 불편함을 주었다상국(上國)의 천병(天兵)이 오니이에 대한 대접과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보상심리가 단순히 위에서 누르는 입장과 여기에 반대되어 밑에 있는 자의 입장은 다르다하지만 어느 쪽이든 보상심리에 의해 폭력을 휘둘리는 순간그 누구라도 같은 존재가 된다이스라엘 민족이 나치에 의해 희생당했지만결국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무고하게 살해한다보상심리에 의해 작동된 광기는 그 모든 폭력과 비인간적 행위를 정의라는 이름으로 덮는다거기에 신이라는 관념적 존재와 이데올로기적 사상을 더하면 완벽한 은폐가 일어난다물론 피해자가 계속 피해당하는 일이 없도록 만드는 것이 올바른 사회고그들의 아픈 상처를 드러내서 그 부분을 치료할 수 있게 금 처방해주는 것이 바람직한 행동이다.

 

하지만 그 상처가 본인이 받은 것이 아니라 그동안 누적된 형태고상처를 말하는 자들이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라 단지 같은 부류로 볼 수 있다는 것으로 지나친 요구 내지 폭력적 행동을 틀려먹었다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면서 수많은 악행을 일삼았다현재 그 당시의 지도자의 후예들은 당시 시대를 영광스러운 과거로 생각한다우리가 이에 대해 일본 권력자 내지 정부에게 항의하고 경계하는 것은 옳을 수 있지만일본인 관광객에게 그런 적대감을 보이는 것은 잘 못된 일이다군위안부에서 강제로 성노예로 착취당한 여성들의 원한을 생각하여 이번에 우리가 피해의식으로 인해 일본 여성을 집단 성폭행한다면 말이 되겠는가?

 

인간에게 어느 정도 폭력이란 수단이 허용되는 범주가 있고그 이상해서는 안 되는 일도 있다더구나 그 행동에 대한 하나의 가치관 내지 이데올로기의 신성화는 단순히 정의라는 이데올로기 가치관을 넘어 윤리적 가치관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어느 사회이든 불평등은 존재하고모순과 부조리로 넘쳤다그런 부당한 일이 존재해서 당연한 것은 아니나 늘 있었다는 점은 당연한 사실이었다그런 당연해서 안 될 일들을 당연한 일로 만드는 게 바람직한 사회의식이다.

 

모든 사람들이 완벽하고모든 사회가 정상적이지 않다모든 게 완벽한 세상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지만거기에 도달하는 것이 인간의 이상이다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지향한 철학이란 신의 사랑을 찾아가는 것이고민주주의 가치관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인권을 찾아가는 것이라면 지금 현실이 온전하지 않은 것이다하다못해 마르크스가 말한 공산주의 운동이란 현실에 없는 것이고오히려 그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원래의 사상적 시초는 철학적 사유와 고찰에서 시작되나사상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그 범주의 근원에 가는 것보다 단순한 답과 쉬운 길을 찾는 것을 원한다.

 

쉬운 길과 단순한 답을 찾으면 눈앞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은 매우 쉽다그냥 자기가 그러고 싶은 것만 믿고 계속 행동만 하면 된다하지만 신념과 광기는 다르다신념에는 왜 그래야 하는가에 대한 명제와 더불어 이에 대한 대안과 해결책을 요구한다광기는 대안과 해결책은 없이 자신들의 행동을 두고 정의집행이란 이름만 거론한다정의집행이 광기와 조우하면 폭력은 그저 자위행위에 불과하고문제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갈등만 조장한다갈등을 빚으면 갈등의 당사자가 가해자 내지 피해자로 될 수 있다피해자가 아니더라도 자신들을 잠재적 피해자로 생각하는 순간 이들은 자신이 언제 피해볼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공포로 광기를 표출한다.

 

박가분 씨의 <혐오의 미러링>은 이런 현상이 한국사회에서 메갈리아 혹은 워마드란 여성우월주의 집단 태생 및 근원을 밝히고 있다솔직하게 말하면 작가 분은 조금 더 연구해볼 필요한 분야가 있었다그것은 중세시대부터 지금도 이어져 오는 마녀사냥이다책을 읽으면 마녀사냥에 대한 기본적인 맥락을 알고 있다군사정권시절 용공조작 사건을 거론한 점에서 분명하다또한 마녀사냥은 피지배계층현대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계층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부유한 계층이나 혹은 지배계층이 마녀사냥을 당할 이유는 특별히 없다.

 

마녀사냥이 일어나는 것은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해소해야 하나그것이 해소되지 않은 채 그 피해를 고스란히 일반 사람들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원인을 사회구조적인 요소에서 바라보고 서로 해결하는 수단보단 더 간단한 길을 선택한다그리고 그것이 먹히면 하나의 이슈가 된다세월호 사건을 보면 참으로 마음을 아프게 혹은 분노하게 만든 일이 있다유가족들이 진실규명을 위해 호소하고어느 분들은 단식투쟁을 하는데극우사이트 회원들이 찾아와서 그 앞에서 피자와 통닭을 먹고 있던 것이다세월호 침몰된 어린 학생들을 두고 어묵이라며 비하하는 인간도 있었다.

 

윤리적 가치관으로 도저히 용납하지 못할 수준이었다게다가 그들은 방송에서 나온 것처럼 국가정보원 및 국가기관의 치밀한 공작에 의해 교묘히 넘어가서 넘지 말아야 행동을 했다세월호부터 시작하여 518광주시민의 죽음을 두고 조롱하던 일베그리고 박가분 씨가 이번에 적은 책은 일베의 미러링이라고 하는 메갈리아/워마드에 대한 책을 내었다나는 솔직히 일베도 문제지만메갈리아는 더 심각하게 여긴다일베는 사회적으로 공공의 적이 되었고어디 가서 일베라고 들키는 순간사회적 단절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러나 메갈리아는 다르다이들은 일베(국가기관의 첩보에 의해 돌아가나 국가기관은 은밀히 은폐했지만)처럼 자신들을 스스로 병신이라 하지 않고오히려 피해자란 입장에서 정의를 외친다박가분 씨가 잘 지적한 백색테러와 적색테러난 피해자이니 모든 행동이 정당하다는 식이다결국 일베와 다르게 메갈리아는 피해자란 입장에서 일베를 미러링하고잠재적 피해자라는 피해의식이 보상심리와 폭력의 정당화로 이어진 것이다결국 여자라는 이름으로 페미니즘을 동원하고내가 그동안 읽은 페미니즘 개념과 전혀 다른 양상이 페미니즘이란 이름으로 나온 것이다.

 

사실 나는 메갈리아 그 자체에 대해 문제를 삼기보단 메갈리아라는 존재에 대해 무조건적인 지지를 내보내고 있는 여성학자들이다오히려 현장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여성운동가라면 이들에게서 이질감을 보일 것이다현장의 여성인권운동가들은 여성의 인권을 넘어 장애인노인어린이(고아같은 약자까지 모두 보호해야 할 대상이다그러나 메갈리아에게 그런 것은 없다노인이란 한국남자로 살아왔으니 비난해야 하고어린 남자아이는 앞으로 한국남자로 살아야 하기에 비난해야 한다는 논리다이들에게 어떤 논리도 필요 없고 단지 자기 말만 내세운다.

 

그들의 입장그들의 정의에서 충분히 가능성이 높다작가의 글에서 아쉬운 감정이 드는 부분이 바로 지식인들 혹은 엘리트들이 보는 어설픈 짝사랑이다일베나 메갈을 알기 전에 먼저 디시인사이드 내지 인터넷문화를 알아야 하는데이들이 그런 문화에 깊이 들어갈 일도 없다디시인사이드가 원래부터 문제가 많은 일부 극소수 회원들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바가 있다그런 사이트에서 남자연애인갤러리에 활동하던 회원들이 기존 남성들이 사용하던 비속어 내지 욕설을 따라하면서 같이 오염되고메갈리아는 그런 공간에서 더 진화하여 새롭게 나온 것이다.

 

메갈리아 존재는 올해 처음 들어본 것 같고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봐도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았다내가 메갈리아 위험하다고 여긴 것은 단순히 한국남자만 욕하면 그렇다고 넘어가겠지만어린이 성추행넥슨사에서 펼친 민폐강남지하철 사건 뒤 행동산업재해로 죽은 청년에 대한 조롱세월호 희생학생에 대한 조롱독립운동가와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비하시위 중 물대포의 충격으로 사망한 백남기 농초에 대한 조롱 등이다이들이 이런 짓을 하는 점에서 인륜의 가치를 물어보는 것도 어려우나이런 이들을 이때까지 지지한다고 말하는 지식인들의 착각이 더 무서운 일이다.

 

만일 일베가 스스로 정화능력이 있었다면 지금과 같이 일반 사회에서 인간 네트워크 속으로 님비(Not in my Back-yard)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페미니즘이란 탈을 쓰게 되면 인간 네트워크 속에서 오히려 큰 소리를 낼 것이다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고자신이 느낀 피해의식 내지 공감대가 조금이라도 닿게 되면 그 대열에 참여하기 쉽다문제는 그런 불편함을 내비치는 게 아니라위에서 말한 것처럼 대안과 해결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강남역에서 살해당한 여성은 참으로 안타깝다아직 젊고 가족들의 사랑을 받고 사는 구성원이었다.

 

그런 가족들이 딸동생을 잃었다오빠가 억울함을 토로하자 동생시체 팔아 보상비를 노리냐는 말을 하거나심지어 뺨을 때리는 사람도 있다어느 이는 이들에게 찾아와 자신들만의 페미니스트 가치관을 강조한다메갈리아가 이때 여동생을 잃은 오빠를 두고 진심의 위로보단 한국남자이니 여성의 죽음을 슬퍼할 자격이 없다는 말을 했다메갈리아 전체가 그런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르나그런 식의 글이 호응이 높고이에 대한 비판이 없다는 점이다이런 문제를 두고 내가 블로그에 글을 올리면이상한 덧글들이 달린다.

 

메갈리아는 아니나메갈리아에 동조한다는 지식인들의 착각으로 가득 찬 믿음이 두려울 뿐이다그런다고 해서 한국사회가 문제없는 것도 아니고한국 사회 내 남성들이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단지 한국사회에서 남성도 힘들게 살고무조건적으로 적은 아닌 점이다왜 이런 피해의식들에 의한 혐오범죄가 일어나고그 근원은 무엇인가작가 분이 조금 더 마녀사냥에 치중하면 좋겠다는 점이 바로 마녀사냥은 대다수의 일반 국민들이 경제적으로 힘들고 여유가 없을 경우 그 책임을 구조적으로 판단하기보단 눈에 보이는 만만한 존재로 전이되는 점이다.

 

메갈리아들이 한국남자들을 욕을 하지만특히 제일 심하게 조롱하는 것은 가난한 남자이다지하철역 스크린 도어 수리 중 사망한 청년은 비정규직에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사람이다그의 죽음을 왜 욕되게 하는 것인가이에 반해 부유하고 권력이 있는 자에게 그런 욕을 날리지 않는다과거 집권여당 시초들은 군사정권 시절권력가와 결탁하고이중에는 과거 검사나 경찰국군장성도 많았다이들이 국민을 감금하고 고문할 때 남자들은 과도한 폭행여자는 성폭행을 자행했다남자가 결혼하면그의 장모와 아내를 눈앞에서 성폭행하겠다고 협박하여 간첩으로 조작했다.

 

이런 자들은 왜 페미니스트들은 비판하지 않은 것인가현재 재벌들은 한국 산업화시절 어린 여공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성장했다여공들에게 좁은 공간에서 환기도 되지 않아 폐병 내지 위염으로 고생해도 계속 일을 시켰고잔업과 야근임금체불 등 잔혹한 행위를 가했다. <전태일 평전>에서 병을 앓아 혼자 외롭게 자취방에서 죽어가는 어린 소녀를 바라본 전태일의 마음을 보자참으로 한숨만 나왔다왜 그런 여성들에 대한 추모의식은 없을까하다못해 위안부에서 슬프고 아픈 기억만 가진 할머니들에 대해 진심으로 관심을 가졌을까?

 

내가 지식인들이나 혹은 주변에 본 지식인 내지 예술계에 몸담은 분들이 이런 문제를 제대로 고찰하지 않은 점이다예술인들이 노동인권을 위해 작품을 만드는데메갈리아가 산업재해로 죽은 노동자를 조롱한다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거기에 대하여 메갈리아 비판하니지식인이나 예술인들이 왜 여성인권을 왜 무시 하냐는 식으로 나온다그들의 주제와 대상이 어긋나게 되는 현상으로 일어난다전에 읽은 책으로 <섹스와 돈>이란 책이 있다백인중심의 미국에서 자본주의는 여성의 예속화를 미디어로 통해 자본으로 합리화 시킨다.

 

남성에게 주어진 경제적정치적 특권이 여성을 예속화했다면여성이 정치적경제적 자율성을 가지게 된다면 남성과의 관계가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가야 한다하지만 수평의 관계성에선 책임성이 따른다메갈리아 분석글에 혐오로 가득하나그 속에서 돈 없는 남자에 대한 혐오는 더 심각하다돈 많은 남자에게 얻어먹으면 행운이고돈 없는 남자를 만나면 운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나여기에 대한 비판이나 고찰은 없다가 사안에 대한 일부 문제를 전체적으로 일반화는 위험한 발상이나그 일부의 문제 중에서 어느 사안에 대해 전혀 비판의식이 없다는 것은 심각하다.

 

반남성주의자라면 남성을 만나지 않아도 되는데만나서 막상 그들의 주머니를 탐색하는 점에서 메갈리아는 단순히 남성혐오로 이루어진 집단만이 아니다그들의 집단성에는 부익부 빈익빈에서 등장하는 청년 혹은 젊은 세대들의 실업빈곤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만이 엉뚱한 사람들에게 불똥을 튄 것이다물론 한국남성 중 기성세대의 꼰대의식은 참 문제가 많다청년세대들이 겪는 고충을 이해하지 않는다이미 나온 서적 중에 <88만원 새대>, <사천원 인생>이나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거울은 상이 반사되어 비추어진다상을 비추는 거울이라 해도상이 원래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이란 물체가 스스로 움직이거나 또는 누군가 거기에 있어야 한다미러링이란 말만 하고미러링이란 상의 변화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광기만 넘치는 현상에서 답은 없어 보인다대안과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혐오만 내세울 경우 그 최후는 허무함이다메갈리아를 운동권에서 이용하려 했지만 오히려 실패했다그들을 두고 이란 지칭하며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기존 페미니즘 진영에서 메갈리아에 대해 세력권을 확장하려 했지만적어도 최소한의 가치관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지 말아야 했다.

 

현재 2016년 11월 말국가기관의 비리와 부패무능한 지도자와 정치 권력자들의 민낯이 드러나고국민들은 분노한다여기 주모자가 여성대통령과 여성이 있다고 해서 이들을 단순 옹호하고비판하는 사람에 대해 불만을 느끼는 자칭 페미니즘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현재 대통령은 정치적 역량으로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독재정권 시절 아버지의 이름으로 선택되었다저번 대선 때 사무실에서 다른 부서 상급자와 말다툼이 있었다대통령이 되는 이유에서 여자도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여자가 대통령을 하지 마란 법은 없다.

 

단지 그 자질과 역량을 제대로 간파하여 선택해야 한다그 상급자는 여성이라 대통령이 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아버지 딸이란 사실에서 선택한 것이다페미니즘은 원래 진보적인 가치관이고진보적이지 않은 사람이 여자가 대통령을 해야 되라는 말에서 상당한 논리부조리가 있다그런 말을 이제는 메갈리아 워마드 진영에서 나온다국가를 문란하게 만든 자들을 두고 대단한 여자라고 말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상식적인 일반여성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는가?

 

폭력적인 남성성을 토대로 이루어진 대통령이 무슨 여성을 위한 대통령인가 말이다이성적 논리와 판단 없이 그저 광기와 독설로만 되돌아 올 뿐이다그리고 내가 진짜 걱정하고 있는 것은 이 현상에 대해 제대로 관찰하지 않은 지식인들의 오류다자신이 진보적인 지식인이라면 맨 처음 생각해야 인권이다타인의 인권(그것도 어린이노인장애인지하철 스크린도어 사망사고나 강남역 살인사건 유가족 등)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세력에 대해 단지 페미니즘이란 이데올로기만 내세운 것에 동조했다면지식인이 가져야할 최소한의 마지노선을 버린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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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7 2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27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28 08: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28 0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블루레이] 변호인 : 일반판 - 아웃케이스 없음
양우석 감독, 송강호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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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변호인이 TV에서 방영된 사례를 보지 못했다. 알고보니 이 영화를 상영 후 CJ 부사장에게 엄청난 압력이 왔다는 기사를 보고 바로 짐작했다. 영화에서 가장 많이 아픈 장면은 경찰에 끌려간 끌려간 아들을 보고 온 순애가 송변을 만나 변호를 애원하는 장면이다.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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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엮다 오늘의 일본문학 11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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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애니메이션으로 나오는 이 작품!
소설보단 애니메이션으로 보는 오타쿠로써 느끼는 것은 정말 섬세하다는 것!
덕질을 하면서 소설 한권을 보는 기분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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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6-11-16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작품이 애니로도 나오나요! 일본애들은 신기한 게 소설이 괜찮다싶으면 만화 애니로 제작되네요. 일자리가 그만큼 더 넓어질 수 있다는 거겠죠!

만화애니비평 2016-11-16 20:21   좋아요 0 | URL
그렇죠. 오타쿠는 행복한겁니다!
 


2016년 10월 29일, 제가 태어나서 광주를 2번째를 방문했다. 처음 방문한 적은 아마 2년 전 3월 정도, 친구장사와 관련하여 도와줄 일이 있어서 잠시 같이 광주로 갔다. 당시 내가 광주를 갔을 때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방문한 곳은 광주시 북구에 위치한 518민주묘지에 갔다. 518이란 사건이 일어난지 36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당시의 상처가 깊은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슬픔과 고통이 베여진 곳이 아니라 환희와 창의가 숨을 쉬는 광주 비엔날레에 다녀왔다. 다른 광역시와 달리 광주는 공기가 매우 깨끗했고, 대신 시내 진입하는 고속도로 진출입로가 좁고 불편했다. 예전에 올 때도 교통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그런 환경이었는데, 그 부분 만큼은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직접 차를 몰고 가니 편도가 대략 270km 정도 나온 것 같다. 그러나 그 전에 1913 송정시장에 가서 맛있는 식빵도 사먹고, 이래저래 광주 시내를 운전했으니 거리는 600km 정도 달린 것 같다. 


몸은 약간 힘들어도 볼 만한 행사였고, 갈만 한 도시였다. 전주의 한옥마을처럼 광주는 억지로 송정시장을 꾸미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조성된 1913송정시장을 계속 유지하면서 발전했으니 과거의 흔적이 잘 보전되었다. 한국은 집안에서 원래 장사나 가게를 하면 가업을 유지하지 않은 편이나, 여기선 오랫동안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유산을 이어받은 분들이 장사를 했다. 그런 점이 참으로 좋았다.



광주비엔날레 행사장이다. 부산에 살면서 시립박물관을 가봤지만, 거기는 센텀시티, 그리고 벡스코 옆인 점에서 교통요충지에 위치해 있다. 광안대교와 맞물리고, 지하철역도 옆에 있다. 그래서 사람은 많으나 건물을 보자면 조금 위화감이 있다. 대신 교통이 좋으니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는 편하다. 몇 번 시립미술관에서 관람을 했지만, 광주는 아파트 단지 옆에 있었다. 교통은 왠지 불편한 것 같으나, 차들이 많지 않고, 옆에 호수공원이 있어서 산책하기 좋고, 또한 박물관도 위치하여 문화적인 여행코스로 적당했다. 


행사장 안에 들어오니 전시1관 메인은 녹두서점 재현이었다. 518광주민주화 운동(나는 민주화 운동보단 광주민간인대량학살사건-제노사이드-이라고 부르고 싶다. 너무 잔인했기 때문이다) 당시 지식인들과 학생들이 자주 이용한 녹두서점을 재현했다. 기억에 의해 재현된 서점, 당시의 상황도 재현해주며, 벽에는 시대의 아픔을 적어놓은 글들이 보였다. 518묘지공원 내 전시관을 1~2시간 관람하면 알게 된다. 그날의 잔혹함을 말이다.


책은 당시 책만이 아니라 여기 행사에 참여한 도서출판사도 책을 전시하고 판매했다. 내가 보고 싶은 책은 현실문화에서 발간한 자크 랑시에르의 <이미지의 운명>, 그런데 가격이 비싸다보니 결국 일행 분이 나중에 사자는 권유에 다음을 기약했다. 랑시에르의 책 말고도 알랭 바디우의 책도 있었다. 그러나 정희진 교수의 책을 보니 조금 한숨이 나왔다(최근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게이트 사건에 정희진이 지지한 집단 워마드 및 메갈에서 이 사건을 두고 여성탄압이란 말을 했으니 말이다). 


광주는 2번째이지만, 언제 다시 한 번 가야 할 것이다. 전에 시골 삼촌에게 518에 대해 조금 물어보니 왠지 모를 한탄감을 느껴왔다. 나보고 자기 대신 한 번 묘지공원에 다녀와 달라는 말도 들었다. 언제 다그 약속을 지킬 것을 생각하며, 광주에 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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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0 15: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10 1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11-10 16: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2일 상경 안하십니까 ?

만화애니비평 2016-11-10 17:42   좋아요 0 | URL
형집에 가려해도 참 허허..
 


<무현, 두 도시 이야기>는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에서 따온 제목이다. 영국인 찰스 디킨스의 소설은 직접 읽지를 않았으나, 읽은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프랑스대혁명 시기의 열기가 긍정적인 에너지보단 광기로 가득한 폭력적인 상태로 보였다. 폭력이란 행위를 정의란 이름으로 내세울 때 그것이 가지고 있는 정당성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찰스 디킨스를 비롯한 영국의 지성인들은 프랑스대혁명을 바르게 보지를 않았다. 심지어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 직접민주주의 이론의 시초, 혁명가들의 영원한 복음서를 만든 장 자크 루소조차 그러하다.


루소는 프랑스 당대의 문제를 알았고, 빈곤으로 고통 받는 프랑스 사람들의 슬픔을 알았다. 찰스 디킨스 이전에 영국 보수주의 에드먼드 버크 역시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혁명을 주도한 사람들을 보면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산악파 자코뱅당의 주도세력이라 보겠지만, 그 에너지를 본다면 화가 난 프랑스의 신민(臣民)들이었다.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은 어떤 사물과 현상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척도를 제공해준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에는 결정적인 치명타가 있다. 그것은 그게 나하고 관계없는 일이라면 상당히 냉정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말을 한다.

 

막상 어떤 사건에 대해 뛰어든 인간들은 어떤 심정적 변화를 느꼈으며, 거기에 동조하거나 혹은 부정하여 몸을 던진다. 총알이 자신을 향하여 격발되어도, 창날이 자신의 심장을 노려도 달려드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이 세상에서 사상을 만들었으나, 그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사상인 것이다. 멀리서 본 인간들은 그 사건 당사자가 아니기에 철저히 객관적인 자세로 임하나, 그 자세의 한계점은 당하는 사람이 누구에게 가는 것인가? 물론 자코뱅당의 광기는 심했고, 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의 단두대 향연은 테르미도르반동으로 이어지는 원동력이다. 그러나 그런 사건이 없었다면 프랑스란 공화국은 존재하지 않았고, 프랑스의 공화국역사가 17897월이 될 수 없었다.

 

7월은 더운 열기가 혁명적 에너지가 되어 왕정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란 이름을 세상에 알린 것을 본다면,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옆에서 들어본다면 뭔가 앞을 향해 가는 게 앞이 아니라 오히려 어둠으로 가려진 절망이 아닌가 싶다. 그래도 인간은 자신에게 선택되어야 할 순간에서 멈추면 안 된다. 그것이 자신에게 불리하여도 선택해야 한다. 선택의 순간을 피하고 양비론적인 가치관을 가진 인간들의 세계에선 아무런 변화가 없다. 양비론 주의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선택에 대한 책임감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무현, 두 도시 이야기>를 보는 순간, 내가 들어본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하고 뭔가 미묘한 차이가 있을 것이란 여겼다. 무현이 도시 2개소라고 한다면, 무현은 단순히 하나가 아니라 둘이어야 한다. 그래서 무현이란 이름은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힘없이 사라져간 노무현이란 변호인이었고, 다른 무현은 여수에서 마지막으로 투혼을 불사른 백무현이란 시사만화작가이다. 이들이 등장한 배경에서 한 쪽은 부산, 다른 쪽은 여수이고, 한 쪽은 2000, 다른 한쪽은 2016년이었다.

 

2사람 모두 이 세상에 없는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다. 영화주인공은 살아있는 인물이 아니라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인간이다. 이들에게 당시 부산과 여수는 어떤 공간이라 할까? 노무현이란 이름은 역사적으로 볼 때 승자보단 패자에 가까운 인물이다. 고등학교 출신 변호사, 지지세력 없이 독불장군처럼 싸우다 자살을 선택한 대통령, 가진 자가 아니라 항상 가지지 못한 자에 있던 사람, 생각하면 우리 대부분 한국인들은 가진 자의 입장보단 가지지 못한 입장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가난과 굶주림이 거친 힘든 지난 세월, 그러나 그것은 계속되고 후세들에게 대물림 된다. 정직하고 바람직하게 살아가기보다 권력에 아부하여 작은 콩고물에 충성을 바치는 세상, 201610월과 11월을 지나가면서 그 느낌을 더 심하게 다가온다. 비선실세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니, 작은 허물이 있는 사람은 크게 두각 되어도, 허물밖에 없는 인간들은 은근히 묻어 가려한다. 노무현이란 인간이 대통령에서 은퇴한지 8년이 지나고, 한국은 노무현이란 이름을 동네북처럼 치다가 이제는 노무현이란 이름에 작금의 현실을 돌아본다.

 

다큐멘터리 영화가 나온 시점과 현실상황을 보자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노무현이란 인간이 패배자로 역사 속에서 사라져도 지금에 다시 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노무현을 따라 여수에서 나온 백무현이란 인간이 다시 기억해줘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부산은 노무현이 속한 당이 불리한 곳이고, 백무현이 나온 여수는 상대편이 유리한 지역이다. 불리한 싸움, 이기는 생각조차도 어려운 곳에서 그들은 승부를 건다. 지역주의와 싸우고 자신의 한계와 싸운다.

 

백무현 국회의원 후보는 암으로 투병 중인데도 끝까지 승부를 임했고, 최후는 한 줌의 재로 되어 2사람의 무현은 다시 만나게 되었다. 사실 이 영화는 백무현보단 노무현이 더 집중되는 작품이다. 그가 해오던 일들이 많았고, 지역주의에 대해 승부를 던지는 것도 그렇다. 지역구 국회의원이 다른 지역 사람이다가 막상 선거철 전에 들어와 그 지역의 일꾼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자신의 포장지를 보여준다. 김해 출생, 부산 학교 졸업, 부산 거주, 부산에 사는 가족들까지 본다면 오히려 진짜 이웃은 옆에 있지만, 사람들은 당의 그림자에 의해 사람을 외면한다.

 

노무현은 사람을 봐달라고 했다. 후보가 남의 집 수돗물이 막혀도 터줄 이유도 없고, 법적 자문을 해줄 이유도 없다. 그것은 무료로 봉사해주는 것이고, 대가도 받지 않는다. 국회에 가면 국가의 일꾼으로 지역주민 생활을 돌보는 게 당연하나, 그게 아닌 이상 해줄 이유는 없다. 영상에 잡힌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소박하고 평범한 부산 사람들이다. 노무현이란 인간 역시 보면 부산 사투리에 농담 반, 진담 반 섞어가는 부산에 사는 옆집 아저씨 스타일이다. 백무현이란 시사만화작가 역시 그냥 길가다가 인상 좋은 옆집 아저씨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갈 사람이 중요하다. 하지만 인간 그 개인에게 부여되는 자질에서 누군가보단 잘날 수 있어도, 누군가보다 더 월등한 인간이어서는 안 된다. 월등한 인간이라 여기는 순간 타인들은 자신의 아래로 보게 되고, 그것 민주주의 이름을 이용하여 권력자와 그 주변의 권력 추종자들이 원하는 관료주의 체제로 만드는 결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런 체제를 만들기 위한 가장 좋은 제도는 선거에서 이기는 방법이고, 선거결과로 승자는 하나의 당위성을 갖는다.

 

대신 선거는 나와 타자와의 싸움을 등치시키고, 지역주의에 함몰되어 통합과 화합이란 이름을 무색하게 한다. 그런 지역주의에 몸을 던진 무현, 그리고 한 줌의 재로 돌아간 무현, 영화 OST로 전인권 씨의 걱정 말아요 그대가 나온다. 그들이 걱정하던 지역주의 한계, 지금도 지역주의는 팽배하고, 그들은 지역주의에 의해 패배했다. 그러나 역사란 그런 패배조차도 먼 미래에 도래될 승리에 대한 발판이 된다. 지금은 패배해도 최후의 승자는 미래의 역사에 의해 재조명된다. 하지만 그 당시 패자들은 목숨을 잃고, 망자의 명예조차 박탈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전인권 씨의 노래는 무현들에게 바치는 헌정 곡으로써 그들의 마음, 그들을 떠나보낸 우리의 마음을 달래주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물론 주변에 흐느끼는 어떤 남성관객들의 숨소리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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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11-05 1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립네요..

만화애니비평 2016-11-06 19:32   좋아요 0 | URL
오늘 우병우 기사를 보니 더 마음이 그렇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