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현, 두 도시 이야기>는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에서 따온 제목이다. 영국인 찰스 디킨스의 소설은 직접 읽지를 않았으나, 읽은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프랑스대혁명 시기의 열기가 긍정적인 에너지보단 광기로 가득한 폭력적인 상태로 보였다. 폭력이란 행위를 정의란 이름으로 내세울 때 그것이 가지고 있는 정당성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찰스 디킨스를 비롯한 영국의 지성인들은 프랑스대혁명을 바르게 보지를 않았다. 심지어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 직접민주주의 이론의 시초, 혁명가들의 영원한 복음서를 만든 장 자크 루소조차 그러하다.


루소는 프랑스 당대의 문제를 알았고, 빈곤으로 고통 받는 프랑스 사람들의 슬픔을 알았다. 찰스 디킨스 이전에 영국 보수주의 에드먼드 버크 역시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혁명을 주도한 사람들을 보면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산악파 자코뱅당의 주도세력이라 보겠지만, 그 에너지를 본다면 화가 난 프랑스의 신민(臣民)들이었다.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은 어떤 사물과 현상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척도를 제공해준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에는 결정적인 치명타가 있다. 그것은 그게 나하고 관계없는 일이라면 상당히 냉정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말을 한다.

 

막상 어떤 사건에 대해 뛰어든 인간들은 어떤 심정적 변화를 느꼈으며, 거기에 동조하거나 혹은 부정하여 몸을 던진다. 총알이 자신을 향하여 격발되어도, 창날이 자신의 심장을 노려도 달려드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이 세상에서 사상을 만들었으나, 그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사상인 것이다. 멀리서 본 인간들은 그 사건 당사자가 아니기에 철저히 객관적인 자세로 임하나, 그 자세의 한계점은 당하는 사람이 누구에게 가는 것인가? 물론 자코뱅당의 광기는 심했고, 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의 단두대 향연은 테르미도르반동으로 이어지는 원동력이다. 그러나 그런 사건이 없었다면 프랑스란 공화국은 존재하지 않았고, 프랑스의 공화국역사가 17897월이 될 수 없었다.

 

7월은 더운 열기가 혁명적 에너지가 되어 왕정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란 이름을 세상에 알린 것을 본다면,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옆에서 들어본다면 뭔가 앞을 향해 가는 게 앞이 아니라 오히려 어둠으로 가려진 절망이 아닌가 싶다. 그래도 인간은 자신에게 선택되어야 할 순간에서 멈추면 안 된다. 그것이 자신에게 불리하여도 선택해야 한다. 선택의 순간을 피하고 양비론적인 가치관을 가진 인간들의 세계에선 아무런 변화가 없다. 양비론 주의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선택에 대한 책임감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무현, 두 도시 이야기>를 보는 순간, 내가 들어본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하고 뭔가 미묘한 차이가 있을 것이란 여겼다. 무현이 도시 2개소라고 한다면, 무현은 단순히 하나가 아니라 둘이어야 한다. 그래서 무현이란 이름은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힘없이 사라져간 노무현이란 변호인이었고, 다른 무현은 여수에서 마지막으로 투혼을 불사른 백무현이란 시사만화작가이다. 이들이 등장한 배경에서 한 쪽은 부산, 다른 쪽은 여수이고, 한 쪽은 2000, 다른 한쪽은 2016년이었다.

 

2사람 모두 이 세상에 없는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다. 영화주인공은 살아있는 인물이 아니라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인간이다. 이들에게 당시 부산과 여수는 어떤 공간이라 할까? 노무현이란 이름은 역사적으로 볼 때 승자보단 패자에 가까운 인물이다. 고등학교 출신 변호사, 지지세력 없이 독불장군처럼 싸우다 자살을 선택한 대통령, 가진 자가 아니라 항상 가지지 못한 자에 있던 사람, 생각하면 우리 대부분 한국인들은 가진 자의 입장보단 가지지 못한 입장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가난과 굶주림이 거친 힘든 지난 세월, 그러나 그것은 계속되고 후세들에게 대물림 된다. 정직하고 바람직하게 살아가기보다 권력에 아부하여 작은 콩고물에 충성을 바치는 세상, 201610월과 11월을 지나가면서 그 느낌을 더 심하게 다가온다. 비선실세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니, 작은 허물이 있는 사람은 크게 두각 되어도, 허물밖에 없는 인간들은 은근히 묻어 가려한다. 노무현이란 인간이 대통령에서 은퇴한지 8년이 지나고, 한국은 노무현이란 이름을 동네북처럼 치다가 이제는 노무현이란 이름에 작금의 현실을 돌아본다.

 

다큐멘터리 영화가 나온 시점과 현실상황을 보자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노무현이란 인간이 패배자로 역사 속에서 사라져도 지금에 다시 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노무현을 따라 여수에서 나온 백무현이란 인간이 다시 기억해줘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부산은 노무현이 속한 당이 불리한 곳이고, 백무현이 나온 여수는 상대편이 유리한 지역이다. 불리한 싸움, 이기는 생각조차도 어려운 곳에서 그들은 승부를 건다. 지역주의와 싸우고 자신의 한계와 싸운다.

 

백무현 국회의원 후보는 암으로 투병 중인데도 끝까지 승부를 임했고, 최후는 한 줌의 재로 되어 2사람의 무현은 다시 만나게 되었다. 사실 이 영화는 백무현보단 노무현이 더 집중되는 작품이다. 그가 해오던 일들이 많았고, 지역주의에 대해 승부를 던지는 것도 그렇다. 지역구 국회의원이 다른 지역 사람이다가 막상 선거철 전에 들어와 그 지역의 일꾼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자신의 포장지를 보여준다. 김해 출생, 부산 학교 졸업, 부산 거주, 부산에 사는 가족들까지 본다면 오히려 진짜 이웃은 옆에 있지만, 사람들은 당의 그림자에 의해 사람을 외면한다.

 

노무현은 사람을 봐달라고 했다. 후보가 남의 집 수돗물이 막혀도 터줄 이유도 없고, 법적 자문을 해줄 이유도 없다. 그것은 무료로 봉사해주는 것이고, 대가도 받지 않는다. 국회에 가면 국가의 일꾼으로 지역주민 생활을 돌보는 게 당연하나, 그게 아닌 이상 해줄 이유는 없다. 영상에 잡힌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소박하고 평범한 부산 사람들이다. 노무현이란 인간 역시 보면 부산 사투리에 농담 반, 진담 반 섞어가는 부산에 사는 옆집 아저씨 스타일이다. 백무현이란 시사만화작가 역시 그냥 길가다가 인상 좋은 옆집 아저씨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갈 사람이 중요하다. 하지만 인간 그 개인에게 부여되는 자질에서 누군가보단 잘날 수 있어도, 누군가보다 더 월등한 인간이어서는 안 된다. 월등한 인간이라 여기는 순간 타인들은 자신의 아래로 보게 되고, 그것 민주주의 이름을 이용하여 권력자와 그 주변의 권력 추종자들이 원하는 관료주의 체제로 만드는 결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런 체제를 만들기 위한 가장 좋은 제도는 선거에서 이기는 방법이고, 선거결과로 승자는 하나의 당위성을 갖는다.

 

대신 선거는 나와 타자와의 싸움을 등치시키고, 지역주의에 함몰되어 통합과 화합이란 이름을 무색하게 한다. 그런 지역주의에 몸을 던진 무현, 그리고 한 줌의 재로 돌아간 무현, 영화 OST로 전인권 씨의 걱정 말아요 그대가 나온다. 그들이 걱정하던 지역주의 한계, 지금도 지역주의는 팽배하고, 그들은 지역주의에 의해 패배했다. 그러나 역사란 그런 패배조차도 먼 미래에 도래될 승리에 대한 발판이 된다. 지금은 패배해도 최후의 승자는 미래의 역사에 의해 재조명된다. 하지만 그 당시 패자들은 목숨을 잃고, 망자의 명예조차 박탈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전인권 씨의 노래는 무현들에게 바치는 헌정 곡으로써 그들의 마음, 그들을 떠나보낸 우리의 마음을 달래주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물론 주변에 흐느끼는 어떤 남성관객들의 숨소리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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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11-05 1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립네요..

만화애니비평 2016-11-06 19:32   좋아요 0 | URL
오늘 우병우 기사를 보니 더 마음이 그렇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