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만화사 : 1945~2009
박인하.김낙호 지음 / 두보북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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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국만화비평의 선구자들이란 도서에서  한국 문학비평가의 대가인 故 김현 선생님이 남긴 명언이 있다. 그것은 “만화는 대중문화가 아니라 대중들의 의한 문화이다”는 것이다. 과연 만화라는 것은 김현 선생님의 말씀대로 진실로 대중들과 가까이 있으며 그들과 같이 살아가는 하나의 살아있는 문화 현장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대중들과 함께 살아온 이 만화라는 것은 그렇게 우리에게 멀게 혹은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이다. 단지 그것을 제대로 재조명 받지 못한 채 우리의 인식 속에서 외롭게 살아가야 하는 입장에 처해진 것이다.

만화라는 것은 사실 그 누구도 접하기도 쉬우면서도 이해하기 쉽지만 한편으로 그런 접근의 용이성으로 대중들로부터 소외를 받기도 하였다. 그런 우리 대중문화자산 중의 하나인 만화가 어떻게 오늘날에 이르러 이런 대접을 받았는지 그동안 만화라는 것은 어떻게 숨쉬어 있었는지 소개하는 책이 있다.

그 책은 바로 <한국현대만화사 1945~2009>이다. 1945년이란 뜻은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우리 민족의 의미하는 바이고 2009는 2009년까지 한국만화계를 다시 재조명하는 기간 마지막 부분에 해당한다. 결국 이 책은 한국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일어난 만화의 역사를 다시 찾아가는 하나의 만화계보학적인 책이다.

우리가 혹은 부모님이 앞으로 태어날 후손들에게 이 만화라는 것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살아왔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진 흐름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과연 우리는 만화에 대해 어떻게 여기고 받아들이는가? 
 

한편의 역사연구도서처럼 시대와 그리고 상황에 따라 정리된 이 책을 본다면 우리도 차마 알지 못했던 만화에 관한 이야기와 그리고 그 만화 속에 담겨진 우리나라 민족의 역사, 수난, 아픔, 그리고 희망 등을 알아갈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전쟁으로 얼룩진 이 피난촌에서 많은 고아와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나이가 어린 고아들에게 그들의 마음에 위안될 만한 것들이 없었다. 그것이 바로 만화가 우리 대중들에게 사랑받았던 하나의 문화적 재산이었다. 추후 전쟁이 끝나고 나라가 다시 재건되어도 아이들에게 여전히 여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만화로 통해 꿈도 키우고 재미도 느낄 수 있었다. 만화란 당시 어린 아이들, 지금의 아버지 내지 할아버지들에게는 인생의 즐거움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만화는 무엇인가? 그저 공부를 방해하고 아이들에게 나쁜 것만 보여주는 불온서적으로 취급당하지 않은가? 게다가 한국 만화계는 이미 지칠 만큼 지치고, 그 자리에 일본 만화책이 대신한다. 이런 역사적인 흐름에 만화는 왜 이리 소외를 받아야 했는가?

그런 이야기들을 이 책에서는 아주 자세하게 소생히 다루고 있다. 만화탄압으로 대중들의 자유로운 문화향유를 방해한 군사독재정권, 그런 정권 속에 맞추어야 했던 이데올로기적인 가치관, 그런 암흑의 시대에 일부 독점권을 소유한 협회와 회사, 작가의 창의력 부족으로 일본 만화책 표절과 영입, 그리고 각종 국내 단체들의 억압 등등이 말이다.

그야말로 한국의 대중만화 역사는 어둠과 슬픔, 그리고 억압된 환경 아래 울부짖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현대사회에 와서는 이른바 문화콘텐츠라는 문화산업이 각광을 받고 있다. 문화의 기본에서 대중들이 쉽게 접근하여 즐길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이런 공간에서 만화라는 매체는 다양한 장르와 창의적인 이야기로 통해 대중들과 함께 즐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만화산업이나 문화는 여전히 열악하고, 그런 환경 속에서 다시 재건되기가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그런 만화문화의 저조함은 우리나라의 문화경쟁력에서 크나큰 손실이 아닌가? 최근 예전에 소년챔프에서 연재하였던 “프리스트”가 미국 영화로 다시 재각본되어 상영된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좋은 소재가 있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영화 및 애니메이션화되어 대중들에게 선보이지 못했다. 이 얼마나 아깝고 슬픈 일인가? 얼마 전에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방영한 임당열씨의 흑신(黑神)과 프리징 역시 한국에서 제작되지 못한 채 일본에서 제작되었다. 게다가 이 만화는 애초부터 배경과 인물을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으로 설정했다.

그것이 우리나라의 만화계의 슬픈 초상인 것이다. 작가들마저 국내 만화시장으로 생존할 수 없음에 따라 일본 만화애니메이션 시장을 겨냥할 수밖에 없던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우리 만화산업은 병이 들어 시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시름하는 역사적인 흐름을 이 책에서 보이고, 앞으로 우리가 새롭게 나가야 비전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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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의 운명 (반양장)
문재인 지음 / 가교(가교출판)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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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문재인 변호사, 그는 아마 비명(悲鳴)에 죽어간 故 노무현 대통령의 영원한 남자일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있으면 언제나 뒤에서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그 문재인 변호사였다. 故 노무현 대통령 서거 2주기를 맞아 그의 영원한 동행자였던 문재인 변호사가 자신의 자서전을 내었다.


자서전을 보면 대략 자신의 태어나 이때까지 살아온 흔적들을 적어가는 책이다. 그런 자서전의 형국을 본다면 故 노무현 대통령의 자서전들은 많았던 것 같았다. 아니 그가 직접 자서전을 저술하기 보다는 이제는 타인의 손에서 만들어진 자서전이 많은 것 같다. 문재인 변호사의 자서전은 어떻게 본다면 문재인 변호사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지만, 그 이면에는 故 노무현 대통령과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이 책을 보면서 느낀 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바뀌어야 할 점과 고쳐가야 할 점, 그리고 같이 생각해야 할 점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들을 문재의 자서전을 들어다 보면서 느꼈다. 고문으로 죽은 대학생,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간 그들, 그냥 약자라는 이유로 내몰린 그들 물론 이 중에서 분명히 어떤 문제가 되는 인자가 있어서 희생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 사회가 “냄비 안의 개구리”라고 말이다. 개구리를 잡아 냄비에 넣고 천천히 가열하면 아주 독특한 현상이 일어난다. 그것은 개구리는 양서류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인 포유류처럼 온혈동물이 아니다. 그래서 냄비에 물을 가득 붙고 천천히 열을 올리면 개구리는 그 따뜻하게 데워지는 물속에서 졸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은 수증기가 될 때까지 상승하게 되면 어느덧 개구리는 졸게 된 상태에서 열로 인해 죽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개구리도 단백질로 구성된 존재이니 단백질이 열에 의해 익히게 되어 그야말로 살아있는 채로 닭백숙처럼 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인 듯하다. “그래 내가 아니니깐, 그래 내가 아닌 남이니 내가 왜 관심을 가지나? 남이 당하면 그것으로 끝이지” 이런 냉소적인 반응이 올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사회는 조금 삭막해지고 왜곡된 현상들이 여기저기 쑤셔 나온다. 사회라는 것은 일종의 수평거울과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균형이 깨지게 된다면 어느 한쪽에서 추가 기울이게 되고, 그로 인해 사회적인 문제가 돌출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운명”에서는 그런 현상들에 대해 어떻게 문재인 변호사가 헤쳐 나왔는지, 그런 과정에서 故 노무현 대통령과 어떻게 조우했는지 그리고 故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에 어떻게 하고 있는지 나온다.


이 책을 보면서 다시금 느끼는 것인데, 정말 국가와 정치 그리고 그것을 이행하는 사람들의 도덕성과 자질이 중요하다 느꼈다. 혹은 권력과 관계된 이른바 돈의 문제는 그룹 NEXT의 어느 노래 가사 구절처럼 “사람위에 있고 종교보다 강하다”, “강한 자에겐 편하고, 약한 자는 밟는다”처럼 우리 사회는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대립이 너무 강하다.


물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노력과 능력에 대한 분배차이는 인정하나 그것이 하나의 착취와 부당한 형태로 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란 점이다. 문재인 변호사가 처음 변호사로 활동할 때의 이야기와 그가 인권(人權)변호사로 유명하다는 점에서 뭔가 아이러니한 글귀를 읽었다. 왜냐하면 모든 법조인들은 인권을 위해 활동해야 하는데, 인권변호사가 따로 분리되어 호칭이 생겼다는 점에서 과연 법이라는 것이 인권을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권력을 위해 존재하는가이다.


국가는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 “국민을 위해서” 또는 대다수의 약자를 두고 “서민을 위해서”라고 사실 사회적으로 보자면 국민 대부분이 그렇게 가진 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가진 자들에게 부당하게 그들이 가진 것을 가져오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가지지 못한 자들에 대하여 최소한 그들도 인간이라는 것을 포용해주자는 것이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하면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길거리나 혹은 각종 경험에서 나보다 못하거나(그들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닌 삶의 무게가 만들었다) 약한 자들을 보면 은근히 우쭐되고 싶은 기분이 말이다. 물론 아무런 노력과 대가 그리고 생각도 없이 자기가 옳다거나 맞다고 하는 사람은 인정하지 않는다. 거기다가 남을 배려할 줄도 모르고 오만하고 거만하고 위선적인 인간이라면 더욱 그렇다.


내가 나보다 약자들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할망정 그들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거나 비웃는 것이 정말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말이다. 당장 내가 어떻게 도와주거나 처우를 개선시킬 수 없다. 하지만 그들에 대해 인간적으로 대하야 한다는 인식만은 고수하는 사항이다. 그런 인식이 조금 조금씩 나만 아닌 다른 사람들도 쌓이면 사회적인 인식으로 확산될지도 모르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문재인 변호사는 상당한 활동가였다. 직접 여기저기 찾아다니면서 그런 일들을 해온 것이다. 본인의 직업이 변호사인 만큼 충분히 변호사로서 경제적, 사회적인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무도 몰라주는 가난한 노동자 편에서 그들의 애환을 보았다. 사실 세상을 살다보면 이런 말을 종종 듣는다.


“세상은 강자의 논리로 돌아가”라고 물론 그것을 부정하지 않겠다. 힘의 논리가 없다면 세상에 왜 분쟁이 멈추지 않고 터지겠는가? 하지만 그 힘의 논리에 자기 자신도 눌린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비극은 세상 모든 비극으로 볼 것이다. 하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강 건너 불구경일 것이다.


문재인 변호사가 강연할 때에 뒤에 적힌 故 노무현 대통령의 사진 그 옆에 새겨진 글귀가 매우 인상 깊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입니다” 과연 민주주의는 국민 내지 시민이 주인이다. 그들이 주인이 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민주주의 척도이다.


지금과는 다르나 과거 그리스 시민정치에서는 그리스 시민 자신들이 국가의 중심으로 되어 민주주의 시초가 되었다. 대신 여성, 어린이, 노예, 이방인들과 같은 약자를 배제했으나, 적어도 플라톤이 저술한 국가정체(正體)에서는 그 주체자의 도덕성, 강인함 의지, 골고루 배양된 육체 등으로 통해 진정한 정치세계를 구현하고자 했다. 단지 시대적인 차이가 있으나 진정한 국가와 정치는 결국 국민과 시민을 위한 것이고, 그 국가와 정치를 담당하는 사람 역시 국민과 시민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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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진실의 용기
프레데리크 그로 외 지음, 심세광 외 옮김 / 길(도서출판)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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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미셀 푸코하면 내가 떠오르는 것은 프랑스 구조주의 4인방(레비 스트로스, 자크 라캉, 롤랑 바르트)으로 기억된다. 또한 그는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도서에서 후기구조주의 학자로도 나온다. 그런 미셀 푸코가 추구하던 학문적 철학적 부분은 상당히 독특한 것 같았다.

아직까지 나는 미셀 푸코의 원전을 읽기보다는 주변 참고도서로 통해서만 읽어보았다. 그래서인지 정확하게 미셀 푸코의 생각을 글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미셀 푸코를 주변에서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글만 본 것이다. 한 마디로 그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보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수박 겉 핧기 식으로 보고 있는 수준인 것이다.

그러나 단지 내가 아는 미셀 푸코는 우리 인간들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동안 인간 스스로가 미쳐 생각하거나 눈치챌 수 없었던 부분을 주목하여 거기에 대해 비판하고 진단하는 것은 상당히 놀랍다는 생각이다.

미셀 푸코는 자신을 스스로 “나는 현재를 진단하는 의사이다”라고 했다. 철학자가 미래에 대한 예견이나 이상을 내세우기 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 대한 문제점을 찾아 무엇이 틀리고 무엇이 어떻게 틀렸는지 알아가는 것이 중요한 척도인가 싶다.

어째든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책의 굵기가 상당히 얇아 미셀 푸코를 연구하던 학자들이 그를 어떻게 여기는지 대해 서술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실제 읽고 보니 상당히 어려웠다. 그의 학문의 성향이 초기에 고고학에서 계보학으로 옮겨간 것과 미셀 푸코가 니체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점으로 사회과학을 연구한 그로서는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을 많이 인용했다는 점이다.

또한 (후기)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영역에서 기존 서양철학의 근간이 된 고대 그리스철학을 거부하기 보다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뿐만 아니라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의 견유학파까지 연구하고 거기에 대해 꼴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의했다는 것이 퍽 인상이 깊었다.

서적 마지막 부분에서 미셀 푸코가 강의한 내용에서 “파르헤지아"에 대해 조금 인상 깊었다. 이 책의 제목이 진실의 용기인만큼 파르헤지아는 <진실의 용기라는 테마는 푸코가 윤리의 장(자기와의 관계를 구조화는 것과 관련된 문제, 즉 자기 자신을 통치하는 방법)을 따로 때어내 규정하려고 시도한 후 정치적 장(타자의 행위의 구조화에 관련된 문제, 즉 타자를 통치하는 방법)을 다시 통과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이 테마가 푸코에게 촉발한 관심을 규정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솔직히 말하기, 진실 말하기, 진실의 용기의 테마와 함께 푸코가 자기 자신의 말의 위상과 공적인 지식인으로서의 역할, 그리고 임무의 관건들에데 물음을 던진다는 의미에서 자기 자신의 가장 가까운 지점에 위치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처럼 지식인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스스로 인격을 배양하여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를 윤리적으로 생각해야 할것이며, 특히 이 파르헤지아는 민주주에서 아무것이나 말하기, 모든 것과 그 반대의 것을 말하기로 거대한 권력과 벽에 대해 대항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서적 마지막 부분에는 이 부분이 인상 깊었다.

<강도 있는 선동의 용기, 만인이 알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진실들이나 만인이 반복하지만 그 누구도 체험시키려고 노력하지 않는 진실들을 자신의 행위를 통해 백일하에 드러내는 용기, 단절, 거부, 고발의 용기이다.> 또한 이것으로 <선을 추구하고 악을 피해 가는 도덕을 기초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실을 따르고 거짓을 고발하는 윤리를 요청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철학자의 도덕이 아니라 참여 지식인의 윤리이다.>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타인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으로 다수가 모여들어 하나의 거대한 교조적인 진리를 내세운다. 하지만 그 타인에 대한 비판은 과연 그 비판대상이 옳고 그른가보다는 자신들이 거대한 틀로 변모하여 하나의 선악을 이원화시키는 방법이다. 그것은 진실로 용기 있는 정의가 아니라 비겁한 행동일지 모른다. 남에게 모든 책임을 운운하며 자신을 몰래 뒤로 빠지는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 앞에서 위대한 군왕처럼 행동하는 위선적인 지식인들은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있는 모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셀 푸코가 행동하는 양심에서 과연 나는 얼마나 그를 따라갈 수 있을까 의문이다. 그것은 내 자신이 아직 수양이 부족하다는 점과 미셀 푸코라는 위대한 철학자 앞에 작은 잡초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있어서 아닐까 하지만, 그래도 내가 지켜야할 가치와 윤리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는 것은 맞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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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책세상 니체전집 2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진우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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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글들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그는 예전에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의 글은 1세기가 지나야 안다”라고 말이다. 그의 말대로 그는 정작 그의 사상들은 1세기가 지나 엄청난 현대철학의 기반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프랑스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 등등 니체의 사상은 얼마나 많은 현대철학자들에게 큰 강줄기로 되었을까? 가끔 니체의 이런 부분들을 생각하면 정말 놀랠 수밖에 없다.

그런 그의 사상서적을 읽어보는 것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던 현대철학자들의 사고들을 사전에 한번 점검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 전에 같은 책에 담겨진 “비극의 탄생”에서는 고대 그리스 비극의 디오니소스적인 면을 강조했다면 또한 거기에 담겨진 리하트르 바그너에 대한 업적을 기렸다면 반사회적 고찰에서는 이런 모습과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우선 “비극의 탄생”에서는 열렬하고 강인한 비극에 대한 니체의 환호성을 볼 수 있다면 “반사회적 고찰”에서는 니체의 당시 독일사회에 대한 아주 냉철하고 통렬한 비판이었다. 그 비판의식은 이 책이 나온 지가 140년 정도 되어도 나에게 큰 영감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반시대적 고찰에서 니체는 우리 현대사회에서 통하는 사회적 문화적 인식적인 문제를 여지없이 적어내려 갔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는 영국의 위대한 사상가인 존 스튜어트 밀은 이른바 공리주의 및 자유민주주의를 열렬하게 연구한 학자로서 그의 사상은 국가 시민사회에 대해 기술했다면, 니체는 국가 시민사회가 아닌 대중사회를 적어 내려갔다. 오늘날의 대부분 민주주의 국가라는 체계에서 국민이 주권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그들의 주권적인 주인의식보다는 이른바 군중심리로서 보여 큰 오류를 낳고 있다.

이런 점을 나도 솔직히 크게 유감을 표명하고 있다. 그런 거대한 군중심리가 남의 희생과 남의 타격을 아파하기 보다는 그들에게 오히려 하나의 권위나 상징 혹은 이득이 된다는 잔인무도한 인간심리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니체는 인간들이 가지고 있다는 이른바 교양에 대해 날카롭게 비난했다. 오늘날의 교양은 무엇인가? 흔히들 사람들은 무식하거나 예절이 없거나 혹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교양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래 말하는 인간들이 정작 하는 태도는 값비싼 옷과 치장, 그리고 가끔 열리는 문화공간들에 대한 이용은 그들이 마치 교양인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니체는 그런 인간들을 교양인이 아니라 교양인 것처럼 행동하는 속물로 여겼다. 속물은 무엇인가? 이른바 마치 자기는 그런 현대적인 감각과 최신에 나온 모든 것을 알고 남들 혹은 대부분에게 인정받음으로 교양인이라고 하는 이른바 위선적인 자세이다. 이들은 정말 뛰어난 존재나 혹은 그 이상의 존재들이 나오면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이상하게 여긴다.

이들은 자신들의 사고와 일치하지 않은 교양이지 않은 것으로 취급해 버린다. 특히 니체가 살던 시절은 독일이 프랑스와 전쟁하여 승리한 때이며, 이때 아주 유명한 왈츠음악가 슈트라우스가 활약하던 시절인 모양이었다. 니체는 슈트라우스와 같은 시대에 살아 그가 마치 대단한 영웅으로 활동하는 것을 무척이나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마치 독일이 승리하여 모든 것에 우월함을 가져 어리석은 인간들이 거기에 흠뻑 취해 아무런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없는 점에서 말이다. 독일 군중들은 아마 슈트라우스의 활약으로 많은 시대적 반응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니체는 그런 슈트라우스와 독일 군중들에 대해 어리석고 획일적이며 인간의식에 대해 비판했다.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 2번째 편을 보면 그런 면이 잘 나온다. <그래서 세상은 “지리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의라는 미덕은 너무나 드물게 존재하고, 더 드물게 인식되며, 거의 죽도록 미움을 받는다. 그에 반해 거짓 미덕의 무리들은 어느 시대에나 존경을 받았고 화려하게 행진했다. 실제로는 단지 소수만이 진리에 봉사한다. 왜냐하면 단지 소수만이 정의로워지려는 순수한 의지를 가졌고, 그중 또 극소수만이 정의로울 수 있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정의롭겠다는 의지만 가졌다고 충분한 것은 아니다.>

아마 니체는 이런 진리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보았다. 모두 일방적인 생각 단순한 생각 게다가 본서에서는 국가는 철학을 두려워한다고 했다. 국가에서는 오로지 진정한 철학자만이 아니라 나라에 봉사할 철학자를 원했고, 그런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마치 위대한 인간인양 위선을 떨고 국가와 협력하여 사람들을 속인다고 했다.

사실 새로운 생각과 사상은 기존 국가체계에서는 위협적인 존재라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국가체계는 이미 완성된 하나의 조직이나 새로운 반항적인 존재로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기존 부패한 국가체계는 언제나 선량하고 위대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들을 두려워했다.

우선 그리스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는 그의 올바른 가치관과 정당한 사고로 통해 세상의 어리석음을 탐방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척이나 무지하다고 생각되어 각계의 명사를 찾아 그에게 진리를 얻고자 했으나 모두 소크라테스에게 진리를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오만이라는 옷을 벗겨 버렸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에게 미움을 받아 독배를 받고 죽음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는 죽음이란 그 고통스러운 앞에서도 오히려 죽음은 철학자가 가장 가까이 해야 할 이상적인 세계라는 것을 옆 사람들에게 당당히 밝혀 두고 그는 독배를 들이킨다. 그 후에 그의 제자인 플라톤 역시 그의 진정한 학문적인 면 때문에 수모를 당한다. 물론 니체는 소크라테스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공격을 날리지만 둘 다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자라는 점을 보자면 얼마나 철학자가 국가에서는 아주 위험한 인물인가?

사실 니체의 글을 읽어보면 니체는 분명 반국가적이면서 반사회적인 면이 강하다. 그는 국가를 아주 나쁜 것으로 보았다. “차라투스트라 이렇게 말했다”에서는 국가는 인간을 억압하는 하나의 나쁜 도구로 본 것이다. 게다가 그 국가와 결탁한 교조적인 교회와 대중들을 선동하는 저널니스트 등은 니체가 살아가야 할 세상에서 반드시 없어져야 할 존재로 보았다.

하지만 재밌는 사실은 니체가 사상적인 스승으로 여긴 쇼펜하우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할 심각한 염세주의자라고 비판했다. 그런 점에서 반사회적 고찰 3번째 부분에서 보인 니체의 태도를 보자면 상당히 괴리감을 느낄 정도로 난해한 반응을 느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교육자로서 보았으며, 그의 학문으로 통해 당대 독일사회를 강렬하게 비판했고, 그런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적인 태도를 매우 화려한 문체로서 적어 내려간다. 니체가 살던 교양인들에 대한 비판, 영리주의자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인간 오류에 대한 비판 등등 말이다.

철학자와 예술가의 관계도 재미있다, “학문은 예술가의 광학으로 바라보지만, 예술은 삶의 광학으로 바라본다.” 아마 학문과 예술이 삶이라는 진실한 부분보다는 가식과 허위와 속물로 이루어져 거기에 대한 니체는 많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아마 이런 것에 대한 비판의식이 염세주의자인 쇼펜하우어로 통해 나타남에 따라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자신의 스승으로 보았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런 염세주의적인 태도는 현실에 대한 회피와 어둠만 강조하지 빛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보았다. 그래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로 통해 자신이 직접 어리석은 군중에게 가서 뜻을 전파하고 그 뜻이 끝나면 자신은 떠남을 강조했다. 어느 서적에서는 니체주의자들은 니체주의가 되면 안된다고 했다. 처음에 이해하지 못했으나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로 통해 그것을 이야기한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진리를 전파한 후에 그 사람 1명 1명에게 하나의 진리가 생겨 각자의 양심과 의지로서 살아가길 바란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들은 다양한 정보매체로 통해 자신의 솔직한 눈으로 세상을 보기보단 여전히 달콤하고 자극적인 것을 원한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초월하고 자연 그 자체 즉 인간 그 자체의 순수함으로 가는 초인 영원회귀사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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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식인 지도
김상환 외 엮음 / 산처럼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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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있으면서 조금 재미나는 일인지 아니면 다소 걱정되는 일인지 조금 상황을 결정내리기 어려운 사건이 터졌다. 그것은 전 세계의 이목을 끄는 테러리스트 우두머리인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군의 방아쇠 아래 그 이름을 현재인이 아니라 과거인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사마 빈 라덴하면 생각하는 일이 바로 911 테러인데, 막상 그 테러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너무 이래저래 다른 내용이 나오므로 단순히 한가지 판단기준이나 혹은 근거에 모든 것을 맡기기에는 조금 섣부른 점들이 많다. 그런데 이 오사마 빈 라덴이 사망 직후 어느 유명한 학자가 도발적인 말을 날렸다.

 

그 인물은 바로 미국 최고의 양심적인 지식인이오, 세계 언어학자의 권위와 학식을 날리는 MIT대학교의 노암 촘스키 교수였다. 사실 테러리즘은 별로 나도 좋다고 생각하지 않으나, 이 노암 촘스키의 서적을 보면 재미나는 일들을 약간 계보학 적으로 파고 들어간다. 우리가 아는 현실과 그 현실을 만들어낸 과정이 그렇게 제대로 되었는가 이다.

 

솔직히 노암 촘스키 서적 중에서 “불량 국가”란 서적을 보면 우리가 약간 흠칫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건 우리나라 과거 일본에 의해 강제로 통치 받을 시절, 우리 선조들은 자국 독립을 위해 일본군과 싸웠다는 점이다. 그때 아주 명성을 날리던 독립군과 광복군, 혹은 그들이 활약한 전공은 우리 국민들에게는 하나의 영웅적인 상징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그 영웅적인 인물들이 당시 일본은 그렇다 치더라도 세계 국가세계에서는 하나의 테러리스트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 정치외교에서 정의적인 면은 어느 국가 자체의 존립의 정당성이 아니라 그 국가들 속에서 얼마나 힘의 논리로서 이끌어 가는 것이 하나의 정의였다. 참고로 우리나라 국방부에서는 국군의 기원을 독립 활동했던 선열에게 그 근본을 두고 있는데, 당시로서 그 국군의 선봉들이 세계에서는 테러리스트일 뿐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도 하나의 주권을 가진 것도 군사, 외교, 경제적인 힘의 논리가 뒷받침한다. 사실 국가에서 군사력이 없다면 그것은 국가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을사조약에서 대한제국의 군부대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미 주권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어째든 너무 이런 내용으로 글을 적어 책의 본문과 크게 어긋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나, 사실 이 노암 촘스키이란 인물을 본 서적의 제1부 1편에 소개한 이상 화려하게 적을 수 없는 노릇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 세계 지식인 지도에서는 세계 최고의 언어학자인 노암 촘스키를 필두로 하여 다양한 지식인들을 소개한다. 책의 내용으로 보자면 21세기 이후에 생존하는 지식인이므로 20세기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20세기 세계 학문적인 부분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당연히 프랑스다. 프랑스 끌로드 레비 스트로스를 필두로 하여 자크 라캉, 롤랑 바르트, 루이 알튀세르, 미셀 푸코 등 다양한 구조주의 학자들이 활약했으며, 이후 프랑스에서는 자크 데리다, 장 보드리야르, 삐에르 부르디외 등 다양한 후기구조주의 학자들이 활동을 했다.

 

그런데 그 유명한 학자들도 천운을 다해 이미 과거로 가고 새로운 지식인이 등장하고, 그들 역시 세계의 변화에 따라 다시 새로운 면들을 발견하고 기존에 있던 가치를 재조명한다. 그 지식인 중에서는 나에게 글을 알려주는 문학도에 의하면 슬라보예 지젝이 가장 핵심적으로 조명되는 지식인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조금 재미있는 점은 슬라보예 지젝에 대해 그렇게 나는 공부하고 서적에 기울리지 않았으나, 그가 슬로베니아인으로 과거 사회주의 몰락을 경험하고 프랑스에 넘어가고 정신분석학을 연마하고 이른바 20세기 최고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을 이은 사회학자로 이름을 날린 것이다. 어느 서적에 의하면 그는 슬로베니아 라캉 학파로 통하며, 헤겔의 변증법적인 요소까지 마스터하여 무궁무진한 담론을 나오게 한다는 점이다.

 

아직까지 라캉도 그렇다 치더라도 헤겔의 변증법까지 들어가지 않은 나로서는 딱히 뭐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없다. 단지 최근 지식인 사이에서는 철학적인 요소에 정신분석학적인 요소를 첨가하여 사회적인 현상을 분석하고 인간의 유형을 알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흥미롭다. 물론 자크 라캉의 학파를 유지하면서 라캉의 사위로 정신분석학자로 활약하는 자크 알렌 밀레에 대한 소개도 있다. 집에 아직 덜 읽은 라캉의 11번째 세미나 서적을 엮은이다.

 

어째든 이렇게 다양한 담론과 학문 그리고 사상들을 연구하고 담론하는 인물에 대해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 그 분야는 다양하다. 정치, 윤리, 사상, 경제, 사이버, 예술, 건축, 정신분석, 환경, 에너지, 여성, 음악, 엔지니어, 의학, 사이보그, 나노과학, 미래 등등 이때까지 어지러운 20세기를 맞이하고 앞으로 21세기를 맞이한 인류가 쌓인 것들과 쌓아 가야할 이야기를 짤막하게 세계를 대표하는 지식인의 이야기와 그 세계 지식인을 바라보는 한국 지식인이 적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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