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책세상 니체전집 2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진우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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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글들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그는 예전에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의 글은 1세기가 지나야 안다”라고 말이다. 그의 말대로 그는 정작 그의 사상들은 1세기가 지나 엄청난 현대철학의 기반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프랑스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 등등 니체의 사상은 얼마나 많은 현대철학자들에게 큰 강줄기로 되었을까? 가끔 니체의 이런 부분들을 생각하면 정말 놀랠 수밖에 없다.

그런 그의 사상서적을 읽어보는 것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던 현대철학자들의 사고들을 사전에 한번 점검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 전에 같은 책에 담겨진 “비극의 탄생”에서는 고대 그리스 비극의 디오니소스적인 면을 강조했다면 또한 거기에 담겨진 리하트르 바그너에 대한 업적을 기렸다면 반사회적 고찰에서는 이런 모습과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우선 “비극의 탄생”에서는 열렬하고 강인한 비극에 대한 니체의 환호성을 볼 수 있다면 “반사회적 고찰”에서는 니체의 당시 독일사회에 대한 아주 냉철하고 통렬한 비판이었다. 그 비판의식은 이 책이 나온 지가 140년 정도 되어도 나에게 큰 영감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반시대적 고찰에서 니체는 우리 현대사회에서 통하는 사회적 문화적 인식적인 문제를 여지없이 적어내려 갔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는 영국의 위대한 사상가인 존 스튜어트 밀은 이른바 공리주의 및 자유민주주의를 열렬하게 연구한 학자로서 그의 사상은 국가 시민사회에 대해 기술했다면, 니체는 국가 시민사회가 아닌 대중사회를 적어 내려갔다. 오늘날의 대부분 민주주의 국가라는 체계에서 국민이 주권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그들의 주권적인 주인의식보다는 이른바 군중심리로서 보여 큰 오류를 낳고 있다.

이런 점을 나도 솔직히 크게 유감을 표명하고 있다. 그런 거대한 군중심리가 남의 희생과 남의 타격을 아파하기 보다는 그들에게 오히려 하나의 권위나 상징 혹은 이득이 된다는 잔인무도한 인간심리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니체는 인간들이 가지고 있다는 이른바 교양에 대해 날카롭게 비난했다. 오늘날의 교양은 무엇인가? 흔히들 사람들은 무식하거나 예절이 없거나 혹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교양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래 말하는 인간들이 정작 하는 태도는 값비싼 옷과 치장, 그리고 가끔 열리는 문화공간들에 대한 이용은 그들이 마치 교양인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니체는 그런 인간들을 교양인이 아니라 교양인 것처럼 행동하는 속물로 여겼다. 속물은 무엇인가? 이른바 마치 자기는 그런 현대적인 감각과 최신에 나온 모든 것을 알고 남들 혹은 대부분에게 인정받음으로 교양인이라고 하는 이른바 위선적인 자세이다. 이들은 정말 뛰어난 존재나 혹은 그 이상의 존재들이 나오면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이상하게 여긴다.

이들은 자신들의 사고와 일치하지 않은 교양이지 않은 것으로 취급해 버린다. 특히 니체가 살던 시절은 독일이 프랑스와 전쟁하여 승리한 때이며, 이때 아주 유명한 왈츠음악가 슈트라우스가 활약하던 시절인 모양이었다. 니체는 슈트라우스와 같은 시대에 살아 그가 마치 대단한 영웅으로 활동하는 것을 무척이나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마치 독일이 승리하여 모든 것에 우월함을 가져 어리석은 인간들이 거기에 흠뻑 취해 아무런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없는 점에서 말이다. 독일 군중들은 아마 슈트라우스의 활약으로 많은 시대적 반응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니체는 그런 슈트라우스와 독일 군중들에 대해 어리석고 획일적이며 인간의식에 대해 비판했다.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 2번째 편을 보면 그런 면이 잘 나온다. <그래서 세상은 “지리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의라는 미덕은 너무나 드물게 존재하고, 더 드물게 인식되며, 거의 죽도록 미움을 받는다. 그에 반해 거짓 미덕의 무리들은 어느 시대에나 존경을 받았고 화려하게 행진했다. 실제로는 단지 소수만이 진리에 봉사한다. 왜냐하면 단지 소수만이 정의로워지려는 순수한 의지를 가졌고, 그중 또 극소수만이 정의로울 수 있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정의롭겠다는 의지만 가졌다고 충분한 것은 아니다.>

아마 니체는 이런 진리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보았다. 모두 일방적인 생각 단순한 생각 게다가 본서에서는 국가는 철학을 두려워한다고 했다. 국가에서는 오로지 진정한 철학자만이 아니라 나라에 봉사할 철학자를 원했고, 그런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마치 위대한 인간인양 위선을 떨고 국가와 협력하여 사람들을 속인다고 했다.

사실 새로운 생각과 사상은 기존 국가체계에서는 위협적인 존재라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국가체계는 이미 완성된 하나의 조직이나 새로운 반항적인 존재로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기존 부패한 국가체계는 언제나 선량하고 위대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들을 두려워했다.

우선 그리스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는 그의 올바른 가치관과 정당한 사고로 통해 세상의 어리석음을 탐방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척이나 무지하다고 생각되어 각계의 명사를 찾아 그에게 진리를 얻고자 했으나 모두 소크라테스에게 진리를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오만이라는 옷을 벗겨 버렸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에게 미움을 받아 독배를 받고 죽음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는 죽음이란 그 고통스러운 앞에서도 오히려 죽음은 철학자가 가장 가까이 해야 할 이상적인 세계라는 것을 옆 사람들에게 당당히 밝혀 두고 그는 독배를 들이킨다. 그 후에 그의 제자인 플라톤 역시 그의 진정한 학문적인 면 때문에 수모를 당한다. 물론 니체는 소크라테스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공격을 날리지만 둘 다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자라는 점을 보자면 얼마나 철학자가 국가에서는 아주 위험한 인물인가?

사실 니체의 글을 읽어보면 니체는 분명 반국가적이면서 반사회적인 면이 강하다. 그는 국가를 아주 나쁜 것으로 보았다. “차라투스트라 이렇게 말했다”에서는 국가는 인간을 억압하는 하나의 나쁜 도구로 본 것이다. 게다가 그 국가와 결탁한 교조적인 교회와 대중들을 선동하는 저널니스트 등은 니체가 살아가야 할 세상에서 반드시 없어져야 할 존재로 보았다.

하지만 재밌는 사실은 니체가 사상적인 스승으로 여긴 쇼펜하우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할 심각한 염세주의자라고 비판했다. 그런 점에서 반사회적 고찰 3번째 부분에서 보인 니체의 태도를 보자면 상당히 괴리감을 느낄 정도로 난해한 반응을 느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교육자로서 보았으며, 그의 학문으로 통해 당대 독일사회를 강렬하게 비판했고, 그런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적인 태도를 매우 화려한 문체로서 적어 내려간다. 니체가 살던 교양인들에 대한 비판, 영리주의자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인간 오류에 대한 비판 등등 말이다.

철학자와 예술가의 관계도 재미있다, “학문은 예술가의 광학으로 바라보지만, 예술은 삶의 광학으로 바라본다.” 아마 학문과 예술이 삶이라는 진실한 부분보다는 가식과 허위와 속물로 이루어져 거기에 대한 니체는 많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아마 이런 것에 대한 비판의식이 염세주의자인 쇼펜하우어로 통해 나타남에 따라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자신의 스승으로 보았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런 염세주의적인 태도는 현실에 대한 회피와 어둠만 강조하지 빛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보았다. 그래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로 통해 자신이 직접 어리석은 군중에게 가서 뜻을 전파하고 그 뜻이 끝나면 자신은 떠남을 강조했다. 어느 서적에서는 니체주의자들은 니체주의가 되면 안된다고 했다. 처음에 이해하지 못했으나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로 통해 그것을 이야기한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진리를 전파한 후에 그 사람 1명 1명에게 하나의 진리가 생겨 각자의 양심과 의지로서 살아가길 바란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들은 다양한 정보매체로 통해 자신의 솔직한 눈으로 세상을 보기보단 여전히 달콤하고 자극적인 것을 원한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초월하고 자연 그 자체 즉 인간 그 자체의 순수함으로 가는 초인 영원회귀사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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