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 이데아총서 9
발터 벤야민 지음 / 민음사 / 199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文藝理論)을 처음 접할 때 나는 그의 존재에 대해 그렇게 알지 못한 상태에서 보았다. 사실 나는 발터 벤야민이란 이름을 본 것은 작년 진중권 씨의 “미학 오딧세이” 3번째 편과 그리고 같은 저자의 “숭고와 시뮬라크르”라는 도서였다. 전자의 책은 미학에 대해 전무한 상태에서 읽은 책이라 발터 벤야민이란 인물은 그다지 익숙하지 않았다. 그리고 후에 나온 서적은 상당히 읽기에 어려운 도서였기 때문에 그 책 초반에 나온 발터 벤야민이란 사람을 이해하는 것을 역부족였다.

나의 발터 벤야민이란 이름이 다가온 것은 작년이었다. 그런 직후 책을 이래저래 조금씩 읽기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도서를 통해 나의 사고력을 증가할 것이 필요하여 도서 추천을 기거저기 알아보았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을 추천받은 것이다. 예전에 들어온 발터 벤야민이란 사람이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다. 그런 직후 도서를 찾아보고 구매하였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눈이 조금 아파왔다. 책에 읽혀지는 글씨 크기가 너무 작았다. 특히 각주에 달린 글자의 크기는 모니터에 보이는 글자를 읽는 것보다 더욱 난해(難解)했다. 게다가 책도 제법 페이지 수가 있었으므로 보통 양장본 서적을 보급판으로 내어 책의 크기도 글자의 크기도 미니멈하게 낸 도서같이 느꼈다. 그런 발터 벤야민 하면 생각나는 것은 무엇일까? 흔히 사람들은 아우라(Aura)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것이 발터 벤야민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에서 내가 아직 그렇게 깊은 통찰력을 가지지 못함에 유감(遺憾)스럽게 느끼지만, 그래도 발터 벤야민의 엄청난 업적은 이른바 기술복제시대(技術復除時代)에 대한 내용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들은 엄청난 과학기술과 문명발달로 통해 많은 물질적 혜택(惠澤)을 받는다. 물론 그 혜택은 자본주의사회구조(資本主義社會構造)에서 재력(財力)에 의해 차이가 나는 것은 분명하나, 적어도 최소한으로 도로, 전기, 상수, 하수 등의 인프라 - 이것 역시 재력이 작용하는 경우가 허다하나 - 등으로 통해 그 편리함을 누린다.

그렇지만 당시 발터 벤야민의 사회상은 그렇지 못하다. 1920~30년대 주요 활동과 저술을 맡은 발터 벤야민의 시대에서는 이제 막 기술복제로 통해 특히 영상이미지가 복제되는 것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영상이란 것은 마치 신기한 도구와 같았다. 예전에 사람의 모습을 복원하는 것은 오로지 미술가들의 그림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상당히 많은 노력과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많은 시간을 고정된 자세로 유지해야만 했다.

또한 그림이라는 것은 화가의 관점에서 시작되므로 화가가 눈에 보이는 것이기 보다는 화가의 눈 이외의 내부의 관념적인 부분까지 더해지면 조금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가령 어느 인물화에서 그 인물에 대한 특징적인 부분을 강조하거나 의미를 둘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진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 기구의 등장은 기술복제시대에서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그것은 영상의 잔상이 그 때 그대로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에서 그런 사진의 역할은 그림에서 보이지 못한 부분까지 치밀하게 보았으며, 또한 사진은 이때까지 우리가 보이지 않은 표상까지 잡음으로 그것이 새롭게 보아야 한다는 사고까지 추가했다. 특히 나같이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는 발터 벤야민의 사고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애니메이션이라 하여 실사영상이 영화(映畵)와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오히려 애니메이션으로 깊이 파고들어 가면 결국 영화의 세계와 조우(遭遇)하게 된다.

그런 영화세계에서 기술복제로 통한 이미지 재현에서 같은 작품을 토대로 영화와 영화 이전의 서사(敍事)를 보여준 연극(演劇)과의 사이를 밝힘은 참으로 놀라웠다. 사실 영화와 연극을 2가지를 놓고 실제 진행 시간은 2시간이라고 치자. 그런데 연극은 그 연극이란 공간 속에서 2시간을 그대로 Running Time으로 통해 다 보여준다면 영화는 2시간이란 시간 속에서 그 공간적인 영화관에서 보여주는 것은 2시간만의 세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 2시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2시간의 백배 혹은 천배 이상의 들어갈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연극의 2시간은 무대감독, 연출, 소품담당자 등과 같은 스텝들이 2시간 동안 연속적인 행위로 이루어진다. 즉 일련의 시간과 공간이 인물에 의해 연속적인 모습이 연출되는 시퀀스는 무대 위의 연기자들이 연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물론 연기자들의 모습에서 막과 극과 같은 시간, 공간, 상황적 배경 및 사건 등이 서로 나누어져 보인다면 무대 위에는 분명히 시퀀스가 이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무대 위가 아닌 무대 밖의 세계는 시퀀스가 연속적이다. 영화는 이런 시퀀스를 모두 해체해 버렸다. 영화의 시퀀스에 매달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영화관 안에서 계속 화면을 바라보는 영화관객과 영화 상영을 위해 기계를 조작하는 영화관 직원 정도일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모든 것을 분리하여 하나의 조각을 모아 거대한 틀로 만들 수 있는 재구성력을 소유한 것이다. 또한 영화는 필름을 복제할 수도 혹은 하나의 필름을 가지고 계속 상영할 수 있다.

따라서 연극은 한 번의 쇼로 마무리 짓는 것이라면 영화는 한 번의 쇼로 보여줄 뿐이다. 여기에 연기자들의 반응도 달라진다. 가령 연극무대 위의 연기자들은 관객을 직접적으로 의식해야만 하고, 그들은 그들의 연기에서 일순간의 실수조차 수정할 수 없다. 그들의 연기 자체가 완벽은 때와 시간에 따라 다르게 나온다. 하지만 영화는 반복되는 행동이나 실수를 편집하여 하나의 완벽한 이미지로 구성한다. 따라서 연기자는 연극무대의 긴장감을 놓치기가 쉬울 것이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관객이 아닌 단지 카메라맨이 들고 있는 카메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카메라를 통해 비추어지는 모습을 관객이 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가 연기하는 그 짧은 순간에는 관객들은 그를 보지 않는다. 단지 그 카메라의 영상이 복제되어 하나의 영화라는 예술 혹은 상업적 매체로 탄생할 때만 가능해진다. 지금의 이런 글들은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과 현대 사회에 살아가는 나의 지식으로 적은 글이다.

물론 내가 적은 지식은 일반 대중들이 지닌 상식보다 더 깊이 있게 논의한 내용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것이 특별히 누군가에게 통제된 지식이 아니다. 단지 통제되지 않은 것을 대중들이 스스로 통제하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내용을 당시 발터 벤야민은 적으려고 했다. 이제 그 시대의 영상문화는 막 태동했다. 그러나 영상문화는 하나의 대중예술로서 자유로운 담론주체가 아니라 하나의 이용당하는 객체적인 존재였다. 정치도구로서의 영화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상 안의 텍스트는 일반 서적 안의 텍스트와 비교하여 우리가 책을 읽을 것들을 더 이해하기 쉽고도 혹은 더 작은 시간으로 통해 어떤 사람 내지 단체가 의도하는 바를 강력하게 전달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파시즘에 대한 비판에서 영화 즉 영상이 강력한 무기가 된다는 것을 나는 볼 수 있었다. 기술복제시대에는 정보의 전달력을 알리기에 좋은 도구들이 많았다. 혹은 “태초에 말이 있었다”처럼 우리 인간들은 정보의 수용능력을 오랫동안 가지지 못했다.

그것은 정보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거기에 대한 접근성과 언문능력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언어라는 것은 서구사회에서 근대화 이전에는 거의 제한된 존재인 듯하다.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말을 구사하는 사고력이 있어야 하고, 사고력을 뒤받쳐주기 위해서는 언어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대하 교육이 필요하다. 교육의 조건이 될 수 있는 존재들은 일반 프롤레타리아에게 열려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기술복제시대에는 다양한 매체에 따라 정보가 복제되었다. 이전의 정보는 한정적이라면 근대시대에는 그 정보가 인쇄술의 발달, 녹음기술 발달, 영상기술 발달로 통해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문제는 이 정보력을 누군가가 통제하여 일반적으로 보여준다는 사실은 대중들에게 정보를 가져다 준 만큼 오히려 대중들을 어리석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라는 점이다. 그런 점을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처럼 발터 벤야민은 이미 스펙타클이란 단어를 여기서 사용했다.

조금 문예이론에서 면에서 이런 사회구조와 역사적 흐름을 잡는 것이 아닐까 하나 사실 문학과 예술 역시 사회적 현상과 역사적 흐름을 무시할 수 없다. 예술에서 역사적인 가치에서 그것이 진정으로 높은 가치를 부여받음은 지울 수 없는 사실이다. 가령 우리는 문화제 중에서 1,000년 전에 귀족이 사용하는 칼이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문학과 예술은 어떻게 본다면 그 때 당시의 인간이 가진 가치관과 상황을 전달하는 매체일 수 있다.

그런 매체를 후대의 인간들이 보는 것은 지금의 상황으로 본다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지금은 내가 뭐라고 할 그런 입장은 아니나 발터 벤야민의 경우 그는 유대교적인 종교적 관념과 마르크스주의적인 유물론을 동시에 무장되어 있다고 이 책 어느 부분에 적혀 있다. 물론 그런 문예의 대한 부분에서 이 책 후반부에 가면 발터 벤야민의 언어철학과 역사철학에 대한 담론이 적혀 있다.

어째든 이 책을 보면서 느낀 것이나 발터 벤야민이 가진 철학적, 문학적, 역사적, 종교적인 학문적 그릇은 가늠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또한 발터 벤야민이 살아가던 시절은 파시즘과 1차 세계대전, 그리고 많은 정치적인 변화가 있었다. 그런 시기에 발터 벤야민은 유럽인으로서 최후를 맞이한다. 발터 벤야민에 대한 소개에서 발터 벤야민은 파리가 베를린처럼 베를린이 파리처럼 여겼다고 한다. 파리는 자유와 혁명이 숨쉬고, 코뮈나르의 영혼이 불탄 채 잠을 자는 영토였다.

그런 영혼을 가진 땅을 사랑한 발터 벤야민이듯이 이 서적 초반의 자전적 프로필에서는 발터 벤야민의 어리고 젊은 시절의 글은 상당히 시적이면서도 아름다우면서도 섬세한 느낌이 들었다. 또한 문학적인 정보와 접근성이 없는 본인에게 많은 작가를 소개해주었다. 카프카, 프루스트, 보들레르, 그 외의 작가들, 또한 다양한 이야기 소재로 통한 비평적인 글들을 말이다. 서사라는 것은 단순히 외적으로 보이는 이야기이나, 그 이야기 내부에는 분명히 의미가 있다. 이야기를 보고 그것을 외적으로 읊어주는 해설가인가? 아니면 그 이야기를 통해 안에 들어가 무엇이 있는지 끄집어내려는 비평가인가? 아직 많은 학문적 도전이 필요한 본인이나, 발터 벤야민이 비평에 대한 비평적인 문구는 매우 인상이 깊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맑스 엥겔스 평전
하인리히 겜코브 지음, 김대웅 옮김 / 시아출판사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맑스·엥겔스 평전을 읽으면서 나는 생각나던 사람들이 여러 있었다. 그것은 나보다는 나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솔직히 젊은 대학시절 그렇게 철이 없었다. 생각이 얇고, 기분 내키는 성격이고, 침묵과 변덕으로 가득했다. 정말 어리고 어린 철부지였다. 지금도 철부지 어른이지만, 가끔 내 주변에 겪은 가족, 군대, 사회생활하면서 사회적으로 보는 내 눈으로 조금씩 변했다.

가족을 먼저 생각하니 우선 나는 내 아버지가 생각난다. 나의 아버지는 노동자다. 그리고 배를 타고 멀리 외국으로 가는 외항선원이다. 현재 당시 다니던 회사에 정년 후에 이제는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비정규직으로 되어 국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이제는 나는 피부로서 경험한다. 물론 나는 취업해서 일을 하고 있으나 아버지는 계속 일을 하신다.

개인적으로 시간을 달래기도 하겠지만, 가정 내의 살림을 보태기도 위해서다. 맑스·엥겔스 평전을 보면 노동자들이 제일 먼저 일을 하는 이유는 바로 생계의 문제이다. 그건 모든 노동자 내지 비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노동자들이 제대로 우리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입장인가이다. 지금도 여전히 부족하나, 우리 아버지가 처음 노동을 할 때는 지금보다 열악하고, 맑스와 엥겔스가 활동하던 당대 유럽은 훨씬 열악했다.

예전에 맑스의 자본(강신준 교수 번역본)을 읽어 본 적이 있다. 과도한 노동으로 병을 앓는 사람들이나,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인해 신체적인 기능이 월등하게 하락하는 사람들이나, 또는 임금이 턱없이 못 미치는 사람들 이 모든 것이 과연 인간의 생활 영위에서 가능하게 하는가이다. 참고로 내 아버지는 산업재해도 당하고, 근로환경 문제로 화상도 입으시고, 게다가 심장에 문제가 생겨 수술도 했다.

물론 환경적인 부분도 술을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가끔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어떤 특이한 의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생활 그리고 일상에 귀를 기울이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안다. 본래 노동시간은 1일 8시간(식사시간 제외)이나 가끔 그 이상으로 해야 하고, 때로는 밤을 새서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또한 주말과 휴일에도 노동을 하는 경우도 많다. 물론 선박 위에서라는 부분이 있지만, 거기는 육상과 달리 노동자의 권리가 크게 보장 받을 수 없다.

게다가 은연히 나오는 아버지의 입에서는 가난하다고 배운 것이 없다고 멸시받거나 또는 무시당한 적이 있다는 부분이 나온다. 가난은 죄가 아니나 죄가 되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성실하게 일해도 근로조건으로 인해 재해나 질병이 걸리게 될 경우 직장에서 심각한 패널티를 받게 된다. 이런 이야기가 아직도 현대에도 전해온다. 솔직히 말하여 국가가 운영하고 사회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어떤 힘든 일을 해야 하고, 누군가는 어떤 열악한 환경에 노출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렇지만 그런 힘들고 열악한 환경에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그 자체로 몰아넣어 더 이상의 발전이 없다면 문제다. 전에 어떤 문화평론가가 이런 말을 했다. 세상의 80%는 프롤레타리아이라고 말이다. 그 80%들 사이 중에서 위로 가려고 누군가는 그런 일을 맡게 된다. 그렇다면 그 일을 맡는 사람들을 단순히 낙오자 내지 종으로 보면서 대해야 하는가? 겉으로는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지만 그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날리며 자기 과시나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것이 옳은 일인가?

이런 문제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려온 문제다. 맑스와 엥겔스는 그런 사회에서 너무 정당화되어 있고 하나의 이데올로기처럼 된 이 어긋난 사회를 변화하고 싶었다. 그것은 공상세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아무 의미나 계획이 없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과학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로 통해서이다. 나는 자본과 맑스·엥겔스 평전을 읽으면서 이 생각을 했다. 자본은 1~3권까지 나오나, 자본 4권부터는 계속 나올 것이라고 말이다.

사실 맑스가 자본의 집필 지연사유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가정문제, 개인 건강문제, 국제노동자연합 관련과 많은 사건들, 그러나 자본은 사회적인 문제와 기존 역사적인 부분에서 서술하자니 맑스가 집필할 시기부터 계속 변화가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조금씩 수정하고 고치고 변경하니 기간이 지연되었다. 그리고 당시 맑스가 제기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역시 지금으로 보면 상당히 시대에 떨어질 수 있다.

당연히 맑스가 제기한 문제인 당시 사회는 봉건사회에서 시민혁명 이후 소외된 프롤레타리아를 배제한 사회이었고, 자본주의 국가체계도 시작에서 얼마 멀지 않았던 시기다. 그러다 보니 맑스와 엥겔스의 주장은 당시로는 합리적이나 지금은 비합리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 부정은 아니다. 가령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살던 시절에 인간이 지구를 날거나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생각했겠는가?

시대적인 흐름과 변화에는 어느 정도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맑스와 엥겔스의 사상이 지금까지 변화 없이 오는 것은 이 책의 케이스 안쪽에 적혀 있는 장 폴 사르트르의 변증법적 이성비판 문구가 인상적으로 알려준다. “맑스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상황들이 아직 극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렇다. 사실 내가 있는 시간과 공간적 요소에서 서민계층이나 소외계층을 가끔 보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공사현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도 옆에서 보는 기회도 많다.

그러나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들은 아직 많은 보장을 받지 못하는 듯하다. 또한 그런 보장을 받지 못함으로 다소 천박한 말과 행동들 역시 계속 나온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그런 말과 행동을 해도 이제는 짜증내거나 눈살만 찌푸릴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입장에 놓인 것이다. 현장마다 다르겠지만 고단한 노동, 덥고 추운 날씨, 위험한 안전 그 많고 많은 환경들이 이들에게 마음의 여유를 그렇게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단지 안타까운 사실은 맑스와 엥겔스는 이런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노력하였고 당시 그들을 지지하던 사람들 즉 노동자들도 스스로 인권을 찾기를 바랐다. 지금 잘못된 생각으로 보면 이해가지 않으나 당시 노동자에게 투표권이 없었고, 여자들에게 투표권이나 정치참여권이 없었으며, 10대 아이들도 공장과 광산에 끌려가 12시간 넘는 가혹한 노동을 했다. 게다가 사고를 당해도 제대로 보상 내지 보장을 받지 못했으니 그들의 분노를 이미 충만했다. 하지만 그런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풀어내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 분노가 과연 대단했는지 1871년 코뮈나르의 사건은 충격이었다. 독일 전 정부인 프로이쎈군대가 프랑스 국민들을 향해 공격하고, 게다가 그 원인은 부정한 정부였는데, 그 부정한 정부는 자국민들을 총으로 쏘았다. 그때 투쟁하던 국민들 중에서 어린 소년과 여자들도 있었다. 이 어린 영혼들이 왜 총을 맞아가면서 그렇게도 미친 듯이 군대에 저항하였을까? 참으로 비극이었다. 유럽사회가 지금은 엄청난 정치적으로 예술적으로 철학적으로 발달되어 있지만, 그 후면의 역사에선 엄청난 피와 눈물을 흘린 기억이었다.

그 당시 엄청난 피를 흘린 유럽에서 근대를 지나오며 전쟁의 휘몰이에 또 다시 피를 흘렸지만, 지금 유럽을 본다면 그 당시의 피와 눈물이 헛되지 않은 듯하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계속 억압당하고 핍박당하고 있다. 지금으로 본다면 맑스와 엥겔스의 정신은 낡은 과거의 유령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유령들은 정말 다시 찾아온다. 찾아 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정말 옳았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그들의 유령을 다시 부를 수밖에 없다는 비극이다.

맑스와 엥겔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단순히 맑스와 엥겔스만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당시 고통 받고 착취당하고 배고픔과 추위에 분노의 눈물과 저주의 피를 쏟았던 이름 없이 사라져간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이 책으로 전하므로 그 진한 여운과 강렬한 인상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르크스의 유령들
자크 데리다 지음, 진태원 옮김 / 이제이북스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마르크스의 유령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마 그렇게 생각한다. 그 이유는 마르크스라는 인물이 만든 거대한 업적과 그리고 그의 업적에 따라 생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마르크스가 태어나고 죽고 하여도 여전히 마르크스의 이름은 아직도 공방 중에 있다.

차라리 이 서적에서 마르크스가 유령으로 되기 전에 헤겔, 칸트,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인물들은 그렇게까지 구설수로 떠오르지 않는다. 분명 현대 우리 인간사회에서도 철학하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영역은 여전히 미친다. 모든 서양철학사의 근거는 바로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과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철학과 서양에서의 기독교 사상은 다시 새로운 철학을 만들어 중세와 근대로 이어진다. 그런 와중에 칸트와 헤겔이 근대철학 이전 즉 마르크스 이전에 강력한 철학적인 사상가로 떠오르면서 당시 독일과 지금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우리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전수한다.

그래도 이것이 유령이란 이름보다 하나의 이념, 사상, 진리, 영혼 등으로 넓게 풀어 본다면 분명 마르크스의 유령이란 이름을 뛰어넘을 수 없을 것이라 본다. 일단 나는 이 책을 보면서 그렇게 이해되지 않는다. 자크 데리다라는 프랑스 철학자에 대해 이름은 이미 예전부터 알았다. 그리고 그가 해체주의로 통해 기존의 플라톤주의적인 서양철학에서 플라톤에게 속된 말로 맞짱을 뜨려던 학자라고 이야기 들었다.

그렇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그가 저술한 서적을 읽어본 것은 없었다. 단지 이래저래 모아 놓은 철학교양서 내지 현대철학안내지도 관련 도서에서 그의 이름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런 나에게 이번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보인 데리다의 느낌은 약간 감지했으나 이 서적의 맨 뒤의 진태원 선생님의 역자후기에서 나온 것을 보고 내 생각은 “지금 세계에서 마르크스의 사상들이 실패한 것처럼 보여도 그의 사상은 결코 무너지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계속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사실 1990년대 대한민국 남북군사경계선 위에 있던 북한과 그 위에 있는 소비에트 연방이 예전의 스탈린주의가 해체되고 소비에트는 과거 소비에트 이전의 러시아라는 국가로 돌아갔다. 단 러시아로 돌아갔다고 하나 러시아 왕국(王國)이 아닌 단지 러시아 공화국(共和國)우로서 말이다.

러시아가 소비에트 연방으로 활동할 때 소비에트 연방은 공산주의라 했으나, 실상은 국가자본주의였다. 단지 미국과 서방국가는 개인적 자본주의라면 소비에트 연방은 국가적인 자본주의였다. 사실 국가 이데올로기가 어찌 되었던가 싶어도 자본 즉 국가를 움직이든 기업은 움직이든 혹은 개인이 움직이든지 자본력은 필요했다.

하지만 소비에트 연방은 무너지고, 소비에트 연방은 올린 스탈린주의 붕괴되고, 스탈린 이전 볼셰비키 혁명의 주동자인 레닌주의가 몰락해버리고, 레닌이 어느 사람이 죽었을 때 지구의 두뇌가 한머리 만큼 줄었든 엥겔스, 그 엥겔스의 영원한 파트너인 마르크스까지 올라가서 무너진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목표로 하던 세상은 “노예 없는 주인”인 세상 즉 모든 사람에게 인권을 주어지는 세상이다. 이상하게도 마르크스가 원한 이념은 그런 것인데, 오히려 평범한 인민들을 억압한 것이다.

그것이 마르크스의 유령들 중에서 선의를 지닌 성령(聖靈)이 아니라 악령(惡靈)이 되어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웃기지만 그것은 마르크스가 직접 만들어낸 유령이 아니라 마르크스의 이름을 그러니깐 그를 하나의 유령으로 만들어버렸던 사람들이 만든 악령이었다. 그런 악령으로 인해 마르크스주의는 20세기에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녕 마르크스주의자들은 21세기에도 계속 존재하고, 여전히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읽히고 있다. 우리가 여기던 마르크스의 유령들 중에서 악령이라 여긴 부분은 사실 마르크스가 연출하고픈 것들이 아니었다. 마르크스의 이름 다른 사람에 의해 계속 다르게 변모되어 오나 그의 이름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위에도 밝힌 듯이 20세기 후반에 와서 지구세계에서 자본주의를 필두로 한 신자유주의가 승리한 세상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승리한 세상이라도 그것은 인간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질병, 인종차별, 빈곤, 테러, 조작 등의 일들이 신자유주의 국가의 상대국가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 내부에서 일어나는 점이다.

그런 상황들은 본다면 마르크스가 문제를 제기하고 고치려고 했던 그 흔적들 das kapital 즉 자본론(資本論)이 계속 21세기에 나타나 계속 세계 여러 국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1848년 2월에 엥겔스와 같이 선포한 <공산당 선언> 역시 계속 읽혀진다. 물론 이런 <공산당 선언>은 당시 유럽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현상 등을 어느 정도 이해하지 못하면 그저 마르크스가 악령으로 보일 뿐이다.

그런데 당시 유럽사회 즉 독일, 프랑스, 영국 등을 살펴보면 마르크스를 모르는 우리 어느 사람에겐 악령으로 보이겠으나, 사실 마르크스가 당시 서적을 저술할 때에는 그 사회 자체가 유령들의 사회였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에게 천부적인 인권이 있다고 하나 그런 인권은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으며, 국가경제규모가 발달하면 할수록 국민 대부분이 인간다운 삶보다는 인간보다 못한 삶으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살이에 대해 비관적으로 여길 수 있으며, 거기에 대한 반사적인 욕구로 공상적인 세계를 꿈꿀지도 모른다. 사실 지금이야 당시 마르크스가 원한 세계관은 다소 공상적일지도 모르나, 당시 마르크스가 본 세계에서 과학적이고 행동적인 가치관으로 통해 세상을 바꾸자 하였다.

그렇다면 정녕 마르크스는 유령에서 어떤 유령이 되어야 하는가? 분명 데리다가 적은 시점에서는 마르크스의 이념을 따라 세웠다는 국가들은 몰락해가고 있었다. 단지 그들은 정말 마르크스의 이념이 아니라 단지 마르크스의 이름을 빌려 하나의 유령으로 사용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아직까지 마르크스는 사라져가는 유령일까?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공산당 선언>의 서문에 올라가 있는 이 역사적인 2인물 “메테르니히”와 “기조”같은 인물이 현실에서 약자들을 더욱 가혹하게 착취하고 억압하고 있는 이상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코쿠리코 언덕에서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이미 나이가 지긋하게 들어 그 감독의 자리를 본인이 하기 보다는 본인의 아들에게 그 위치를 인수하여 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스튜디오 지브리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위치는 상당히 강하다. 비록 그의 아들인 오료가 감독을 맡았는데 말이다. 미야자키 가문의 2대 연속 애니메이션 감독 출신은 매우 소중하고 귀한 일이다. 정녕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에서 데즈카 오사무 이후로 명맥을 이어온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제는 자신의 은퇴 후를 넘어 보아 미야자키 코드를 이어갈 다리를 만든 것이다.

이번에 2011년 스튜디오 극장용 애니메이션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이제 미야자키 하야오의 특유한 작품과 설정 그리고 맛을 볼 수 있었다. 물론 미야자키 고료라는 감독은 2006년 게드전기를 발표하였으나, 당시 미야자키 하야오가 2004년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2008년 “벼랑 위의 포뇨”에 대해 감독과 각본을 맡았다. 2010년 “마루 밑의 아리에티”에서 각본을 맡고 이번에 나온 “코쿠리코 언덕에서” 역시 각본을 맡았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제 정면적으로 애니메이션을 전두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후방에서 물량을 받쳐주는 지원군으로 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의 아들이 이번 작품의 감독을 맡은 것은 1941년도 태어난 70대 어르신으로 본다면 그는 역시 스튜디오 지브리를 이끌어 나갈 신인 애니메이터 지휘관을 받쳐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스튜디오 지브리라는 이름을 보면 미야자키 하야오와 타카하타 이사오라는 명감독이 이름을 떨치므로 그들의 그늘에서 쉽게 벗어나는 것은 어렵다. 왜냐하면 그들이 세운 업적이라는 것은 차마 따질 수 없을 만큼 상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일까? 이 작품을 그러니깐 이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애니메이션의 서사를 읽어보면 참으로 재미있는 부분이 나온다. 그것은 단순히 스토리 외적으로 흘러가는 부분이 아니다.

흔히 서사구조 즉 내러티브(narrative)에서는 중요한 구조를 가진다. 그것은 <발단 ☞ 전개 ☞ 위기 ☞ 절정 ☞ 결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갈등이나 혹은 위기를 발현하는 극적플롯이 존재하여 그것이 극대화되면 작품 내의 주인공들의 갈등과 위기상황을 연출하고 어떤 우연한 계기와 조력자로 통하여 그것을 해소하여 스토리의 결말을 이끌어 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詩學)으로 통해 철학적인 이야기를 펼쳐가며 해석하듯이 이 작품 역시 서사 속에 숨겨진 담론이 나의 눈에 들어온다.

작품 시기는 1963년 어느 바다마을로 중심이 되어 1964년에 일본 도쿄에서 올림픽이 열린다. 이때의 일본은 1945년 태평양전쟁 패전과 1950년 한국전쟁이라는 국내외 전쟁에서 큰 소용돌이가 몰아친다. 이때 일본은 한국전쟁으로 통해 미군 및 연합군의 군수물자 기지로서 큰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다. 그 경제적인 발달이 1960년대 일본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배경에서 이 작품을 새롭게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이야기에서 여자주인공 미츠자키 우미로 통해 단순히 남자주인공 카자마 슌과의 첫사랑 이야기의 비극과 비극의 해결이 주된 요소가 아니다. 이 작품의 제일 중요한 부분은 바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왜 아버지이라는 것이 등장할까? 여자주인공 우미는 자신의 아버지가 선원이었고, 그 아버지는 배를 타고 나와 영영 돌아오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그는 한국전쟁에서 군수물자 이동 시에 적의 공격으로 인해 배가 침몰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코하마 작은 어촌에서 우미는 아버지가 오기를 바라며 국기계양대에 깃발 2개를 항상 올린다.

그 깃발은 언제가 자신에게 돌아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자기에 대한 위로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 깃발에 모든 마음을 담은 우미에게 새로운 사람이 온다. 바로 학생회장 친구이면서 학교신문을 발간하는 카자마군을 만난 것이다. 그는 우미가 올린 깃발의 의미를 알고 그의 아버지 배를 탈 때마다 그 깃발이 항상 달린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학교 신문에 우미의 깃발 이야기를 시로서 풀어낸다.

카자마군은 그의 아버지가 선원이므로 뱃사람에 대해 잘 알고 깃발에 대해 알았으며, 모스 신호 역시 알았다. 하지만 우미의 깃발은 단순한 깃발이 아니라 아버지에 향한 딸의 사랑이었다. 이쯤되어 나는 이것을 생각했다. 마치 자신의 어머니인 클리템네스트라와 어머니의 간부인 아이기스토스가 생각났다. 물론 우미는 엘렉트라 신화에서 동생인 오레스테스를 이용하여 아버지 아가멤논 왕의 원수인 어머니와 어머니의 간부를 살인하지 않으나, 그런 심리적인 부분에서 신화에서 보이는 듯한 심리적인 상황을 반영했다.

물론 추후에 설명하겠으나, 이 작품에서 우미의 어머니가 등장한 것은 카자마군에 대한 체념 후에 등장한 것이다. 일단 왜 우미가 카자마군과 중요한 역할과 그것이 보이는 일본의 역사적 배경은 어떻게 이어질까? 카자마군은 자신의 학교에서 낡고 허름한 동아리건물을 철거에 반대하기 위해 시위를 한다. 그리고 동아리 건물 아래에 있는 작은 인공 수원지에 몸을 날린다. 그때 우연히 만난 카자마군과 우미는 운명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지만 이것은 두 사람으로 통해 이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단순하게 연애를 주제로 하는 작품으로 오인하게금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건물로 가면 알 수 있다. 낡은 건물안에 있는 카자마군을 만나기 위해 우미와 우미의 동생 하나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듣는다. 이 건물이 매우 오래되어 너무 지저분하다는 점과 이 건물이 낡아 이제 철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카자마군은 어느날 학생집회 토론에서 이 건물을 부수지 말고 존치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반대로 많은 학생들은 이 건물을 헐고 새로운 건물을 지어야 한다고 했다. 이 작품의 진정한 숨은 이야기는 바로 이 낡고 허름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다. 대사 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카르티에 라탱' 안의 “먼지도 문화”라고 말이다. 이 건물은 일본 경제성장과 더불어 지난 과거가 고스란히 담긴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건물을 모조리 없애려고 한다.

건물을 없애 버리는 것은 좀 더 생각하면 과거 일본의 이야기를 없애는 것과 같다. 과거 일본 태평양전쟁 이후 패전과 더불어 경제성장하여 과거의 자신의 잘못을 그대로 누적(카르티에 라탱 안의 먼지처럼)하다가 이제 없애는 것은 과거를 모조리 없애 버리는 것이다. 그런 점을 카자마군은 반대했다. 오히려 과거부터 이어온 잘못된 점은 모두가 고쳐나가고 이것을 계속 이어나가야 할 전통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을 학생들이 보고 서로 간의 대립이 이어지는 것이 한참 보인다. 그런데 이 토론의 갈등도 우연히 학교 교장과 교사의 등장으로 인해 멈춘다. 그들은 과거 일본의 상징이다. 늙고 낡은 과거의 치적을 모조리 없애고 새로운 일본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게다가 이 낡은 공간에서는 여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여기 이 폐쇄되고 낡은 공간에서 유일한 최초 방문자는 미츠자키 자매였고, 그런 카르티에 라탱을 지켜낸 핵심적 뿌리는 우미였다. 

 

우미는 여학생들을 이 낡고 늙은 공간을 다시 들어가서 청소하고 정리하고 새롭게 변모했다. 과거 일본 즉 태평양전쟁 시대에서 그 사회적 분위기는 군국주의적이면서도 남성이 모든 것을 좌우하던 시대였다. 하지만 이제 학교 내에서 자발적으로 여학생이 카르티에 라탱을 변모하면서 학교 학생들이 변하고 심지어 이 건물을 철거하는 계획까지 막아낸다. 과거 붉은 돼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소녀는 상당히 강했다. 그런데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인 오료 역시 소녀가 강했다.

단지 차이점이라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하늘을 공간으로 펼쳐갔다면 아들은 이번에 바다로 통해 풀어간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소녀와 하늘은 결코 빠질 수 없는 필수적인 아이템이다. 이번 작품 역시 요코하마의 작은 마을에서 어느 고등학교를 바꾼 것은 이 소녀이다. 물론 이 소녀는 처음에는 카자마군으로 시작했으나 어느 순간 그것이 바뀌기 시작한다. 이 모든 학교 안의 카르티에 라탱을 지키기 위해 우미, 카자마군, 학생회장 3명은 학교 이사장을 만나로 간다.

그런데 그 이사장이 우미에게 묻는다. 아버지가 누구냐고 말이다. 그 말에 우미가 아버지는 선원이고, 한국전쟁에 죽었다. 다시 이사장은 묻는다. 그 건물을 지키고 싶은 이유가 뭐냐고 말이다. 우미는 아무런 미련 없이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이 작품에서 우미는 자신의 잃어버린 아버지를 스토리 외적으로는 카자마군에게 겹쳤고, 스토리 내의 의미에서는 카르티에 라탱에게 겹쳤다.
 

 


왜냐하면 우미의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우미는 자신의 아버지를 매일 생각하고, 그런 아버지 모습을 카자마군에게 본 것이다. 하지만 우미는 아버지의 그늘을 카자마군에게 전이시키려 했으나,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의 아버지가 카자마군의 친아버지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실 카자마군이 자신의 마음에 들어올 때 우미가 올린 깃발은 다른 모습이었다. 호쿠토라는 깃발에서 기존 2개의 깃발이 5개로 늘어났다. 그녀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카자마군의 고백에서 그녀는 카자마가 친오빠인 것으로 오인했다. 그런 오인의 절망에서 다시 깃발은 2개로 바뀌게 된다. 하지만 이야기의 끝은 이게 아니었다. 언제나 아버지가 오기를 기다리며, 또한 기다리는 아버지 대신하여 카자마군을 사랑하던 우미가 절망에 빠질 무렵 유력한 조력자가 등장한다. 그것은 우미의 어머니였다. 우미의 어머니는 우습게도 우미가 자신의 아버지를 그리워 한 후에 그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는 카자마군을 만난 후 다시 그 카마자군과의 사랑을 포기하고 난 뒤에 나타났다.

사실 우미는 죽을 것으로 설정된 아버지가 돌아와서 그녀를 안으려고 할 때 분명 어머니는 등장하지 않을 설정이었다. 왜냐하면 정말 카자마군이 우미의 친오빠라면 카자마는 우미의 어머니와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인 요소가 발생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그렇지만 우미의 어머니가 등장하고 나서는 오히려 그 갈등은 이어지기 보다는 해소되었다. 우미의 아버지는 카자마군을 놓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 친구가 전시에 죽고, 그의 아이가 고아원에 보내기를 거부했다. 다시 우미의 아버지는 그 아이를 카자마군의 아버지에게 맡긴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자리이동에서 지난 일본의 슬픔을 알 수 있다.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카자마군의 친아버지는 죽었다. 그리고 우미의 아버지는 한국전쟁으로 죽었다. 2사람의 아버지는 결국 일본 근대화의 역사에서 지나간 아버지였고, 우미는 그런 아버지의 그늘 아래 살아가고 있었다. 작품 마지막에 우미는 다시 깃발 2개를 올리면서 미소를 띄운다. 그것은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음을 알아도 학교 동아리 건물인 카르티에 라탱을 지켜서 아버지에 대한 마음을 지킬 수 있었으며, 또한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는 카자마군과의 사랑 역시 지킬 수 있었다. 

 


이 작품의 이야기는 우미의 첫사랑인 카자마군과의 관계에서 이른바 친남매라는 오해의 갈등에서 시작했으나 알고 보니 두 사람은 친남매가 아니라는 점과 또한 이들이 학교 안의 소중한 공간인 카르티에 라탱을 지켰다는 것이다. 스토리로 본다면 요지는 간단한다. 하지만 그 간단한 요지 뒤에 보이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즉 과거의 자신의 이야기는 어떻게 풀어가는지 알 수 있다. 아버지의 이름은 2가지다. 그립기도 하나 한편으로 부끄럽거나 미운 대상이다.

그렇다면 그들(지나간 역사 내지 과거들)을 강제로 없애 버리거나(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덮어버리거나) 할 수 있지만, 그것조차도 현재 자신의 모습이었다. 싫든지 좋든지 과거가 어떻게 되어 왔어도 현재 살아가는 인간이 형성된 모습이었다. 과거를 부정하면 현재도 없고, 다시 미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과거의 모습에서 아버지들은 떠돌아다니는 혼령으로 되어 계속 괴롭힘을 후세에 주는 것일까? 아니면 모두의 정신을 병들게 하는 망령이 되어 악몽을 꾸게 하는 것일까?

이 작품의 결말은 그런 아버지와 과거의 모습을 버리기 보다는 새롭게 먼지를 털어(자신들의 오류를 스스로 인정하고 청산하여)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기를 바란 것이다. 이 작품을 보기 전후에 기회가 닿는다면 한번 미야자키 하야오의 붉은 돼지를 보기를 바란다. 붉은 돼지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전형적인 정신세계와 관념이 들어가 있다. 파시즘을 거부하는 돼지, 그는 전쟁과 착취를 떠나 모든 것을 초월하여 돼지가 되었다.

또한 미야자키 하야오는 독일 사회철학자 칼 마르크스를 좋아하던 마르크스주의자다. 그런 그가 일본 근대화의 역사에서 어두운 전쟁에 죽은 아버지를 추모하는 작품을 만들게 한 것은 어긋난 아버지의 모습과 과거의 역사에 얽매이는 일본을 마치 카르티에 라탱의 먼지처럼 털어내어 자신들의 역사를 새롭게 고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잘못된 부분을 털어내려 한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6도의 악몽 - 소설보다 무서운 지구온난화와 환경 대재앙 시나리오
마크 라이너스 지음, 이한중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환경공학이란 학문을 배우다 보면 각종 환경오염이나 거기에 따른 현황에 대해 여러 가지 메커니즘(mechanism)을 배운다. 하지만 본인이 막상 환경공학을 배운다고 하여도 환경 문제를 제대로 집어내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왜냐하면 환경이란 것이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아스팔트 도로나 콘크리트 구조물처럼 우리 시선을 확실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눈앞에서 보이는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수질 같은 경우 가령 하천에 다량의 토사유출이 발생하여 하천을 오염시킨 것이 있다. 분명히 우리는 그것이 오염되어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대처하는 것에 대해 한 가지 큰 문제가 있다. 그것은 물이란 특히 하천구조는 상류에서 하류로 흘러가고, 흘러가는 도중에 각종 인자에 따라 오염물질이 분산되거나 혼합되는 형태를 보인다. 또한 하천이 다른 하천과 합치거나 분류되는 경우 그 시점에서 주변 지형이나 혹은 주변 오염인자에 의해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

눈에 보이고 있는 수질오염조차도 그대로 대처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환경은 한곳에 가만히 눌러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또한 수질 이외에 눈에 확연히 띄는 것은 토양이 있다. 그런데 토양의 문제는 토지의 표면에만 오염되는 것이 아니라 토지 내부로 스며들어 지하수까지 도달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예전에 뉴스에서나 혹은 신문에서 큰 이슈로 떠오른 불법 매립한 오염물질이 어떻게 큰 문제를 일으켰는가에 대해 소개 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그나마 조금 좋은 상황이지도 모른다. 왜냐고 물어본다면 그나마 눈으로도 볼 수 있는 범위가 있고, 물리적으로 손을 댈 수 있는 여지라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존재라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우리가 언제나 옆에 있으면서 옆에 있는 것을 모르고 착각할 만큼 소중한 공기, 특히 그 공기 안의 산소의 중요성은 인간만이 아니라 지구 생물의 중요한 생존 인자이다.

그런데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오염되는지 알 수 없다. 그나마 알 수 있는 것은 길가다가 자동차 배기가스에 나오는 검은 연기나, 공장 굴뚝에서 보이는 노란 연기, 길거리에서 보이는 아지랑이 현상(사물이 그대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일그러지게 보이는 현상)을 본다면 조금 대기상태가 좋지 않구나? 하고 여길 것이다. 그래서 대기질의 오염은 진짜 심각한 수준에 오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것은 마치 간암 환자가 그동안 아픈지도 모르고 술을 계속 마시다가 우연히 뱃속이 고통스러워 병원에 찾아가니 간암 말기를 선고받는 느낌일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대기오염은 다루기가 어려운 환경 분야인 것이다. 그런데 이 대기오염 중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무엇일까? 참으로 여러 가지 인자가 있다. 산성비, 오존파괴, 광산화물질 발생, 황사, 지구온난화 등등 우리가 뉴스, 미디어, 시사에서 다루는 대기오염 문제에서 항상 우리의 관심을 이끌어 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이다. 공기라는 것은 눈으로 직접 보이지 않은 이상 그것이 인간 자신에게 치명적인 위협으로 돌아오지 않은 이상 알 수 없다.

이런 위험스러운 대기오염 중에서 특히 지구온난화 문제 중에서 <6도의 악몽>은 그야말로 최악의 대기오염 시나리오 중에서 기온 1℃씩 상승할 때마다 나타날 것이란 악몽은 그야말로 지옥에 다가가는 한편의 영화 대본과도 같다. 사실 이 최악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위험한 영화대본은 이미 액션이 시작했다. 물론 서사구조에서 발단 ☞ 전개 ☞ 위기 ☞ 절정 ☞ 결말이라는 흐름 속에서 이미 위기의 시나리오는 발단을 지나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전개 자체가 위기이고 절정이다.

이 불안한 시나리오 최후의 이야기인 결말은 갈등의 결말로 이어질 것이다. 문제는 갈등을 모두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갈등조차도 나올 수 없는 결말 없는 결말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미 그 위험한 영화들은 우리는 이미 보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른바 하이퍼 리얼리티 즉 그것은 비현실이나 초현실이 아닌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 현실 자체와의 ‘허구적인 유사함’으로 수정되고 일신된 현실 속에서 TV로 통해 이미 보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 영상 안의 이야기다. 물론 현대 대중은 이런 하이퍼 리얼리티로 통해 현실과 가상의 구분에서 왜곡된 정보를 그대로 수용하기도 한다.

단지 거대한 재앙들이 실제 영화관에서 보는 재앙영화처럼 실제처럼 다가오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비극들은 우리 주변에 찾아온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좋다. 우리나라 지형이나 주변 해역에서 지구온난화의 위기는 조금씩 우리의 목을 옭아맨다. 이 책을 보면 지구의 온난화는 수위면 상승과 태풍과 폭풍의 활동행위 증가, 홍수와 가뭄현상의 가속화는 지금 우리에게 계속 일어나는 일이다.

가령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우리나라는 단백질공급을 가축사육으로 통해 얻기도 하나 바다에서 나오는 어패류에게 얻는다. 그런데 지구온난화로 인해 지구의 냉장고인 북극과 남극의 얼음이 줄어들고, 그 외의 얼음들이 줄기 시작하면서 위쪽에서 흘러오는 차가운 해수가 줄어들면서 생선 어획에서 문제가 생긴다. 가령 우리나라가 온대성 기후였다면 최근에 (아)열대성 기후로 변모된다. 예전에는 소나무와 같은 침엽수림에서 이제는 활엽수림이 늘어가고 있다.

국가 전체적으로 식물군락이 변동이 생기고, 바다에서는 물고기가 잡히는 것도 달라진다. 어느날 나는 환경스페셜과 같은 방송에서 남해안 일부 해안가에서 어촌 마을에 잡혀야 할 어획물이 생선과 조개 등이 아니라 해파리와 같은 종이었다. 문제는 해파리는 각종 해산어류를 잡아먹음으로 바다 내의 생태환경을 망치는 것뿐만 아니라 일부 해파리는 독까지 가졌다. 또한 한국에서는 상어가 잘 출물하지 않으나, 따뜻한 해류를 따라 백상어리와 같은 식인상어도 나타난다.

이것이 그냥 단순한 자연 내의 변이나 진화단계이기 보다는 자연 그 자체적인 변화로 인해 발생한 문제다. 그것은 기온상승 즉 지구온난화다. 지구온난화는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우리 지구의 물이 97.2% 바다로 구성되어 있고, 만년설이 2.15%이다. 그러니깐 우리가 사영할 수 있는 물은 1% 조차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지하수가 0.62%, 담수호 0.009%, 염수호 0.008%, 하천수 0.00009%, 토양수가 0.005%로 차지한다.

따라서 우리가 사용가능한 수원 중에 담수가 0.6%도 안되고,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수자원은 0.01% 이내다. 그런데 이런 수자원이 기온상승으로 인해 큰 차질을 빚었다. 대부분 우리가 수자원을 이용하기 위해 배우는 기상학, 토목공학, 환경공학 등의 학문은 경험적인 공식이나 이론을 근거로 한다. 그런데 온도상승으로 인해 기존 경험식을 이용한 방법들이 조금씩 틀어진다.

즉 예측이 불가하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최근 우리나라에서 예측하지 못한 홍수피해로 수재가 난 것이나 또는 심각한 가뭄으로 땅이 메마른 점이다. 기온상승은 몬순 기후에 있는 국내에서 여름철에 지나친 강우가 더 지나치게 내리게 되는 점이다. 이에 반해 아프리카 일부 유럽국가에서는 비가 내리지 않아 수자원 공급 문제와 비가 내리지 않아 기온을 조절하지 못해 열사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경우가 발생했다.

이 책에서는 그런 심각한 문제를 1℃ 상승으로 통해 아주 끔찍하게 아찔하게 혹은 비극적으로 몰고 간다. 이미 물과 식량, 에너지로 인해 많은 국가의 사람들은 심각한 생명위기를 느끼고 있는 게 사실이고, 얼음의 유실로 야생동물이 멸종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단지 직접 보이지 않고 당하지 않아 모르고 갈 뿐이다. 혹은 당하더라도 일시적이고 국부적인 현상으로 그저 망각적인 태도로 임할 뿐이다.

이런 환경오염은 항상 심각하게 당하지 않으면 모른다. 그러나 당하면 매우 심각하다. 그런 상태에서 유일하게 과거의 문헌기록 및 지질학·고고학적·생태적인 정보로 통해 유추하여 경고만 하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6도의 악몽>에서는 그런 악몽조차도 이미 0.1~1℃ 사이의 증가를 기본으로 걸고 시작했다. 사실 그 사이의 악몽도 나에겐 끔찍한데, 그 이상은 정말 끔찍하고도 남는다.

전에 사무실에서 지구기후변화 관련된 조약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혹은 그런 지구기후변화에 따른 많은 환경적인 정책들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우리나라는 이런 지구온난화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환경적인 업무에 도입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이 2008년도에 나온 것을 생각한다면 이 책에서 지구기후변화가 얼마나 위협적인지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발전적인 대처방안을 무엇인지 한번 생각하게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문제를 대처하기는 정말 많이 어려운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환경오염 문제는 산업화에 따른 자본주의 가속화에 대한 잉여적인 부산물이다. 그 부산물은 우리가 직접 관리하고 처리하고 저감하기 보다는 단지 돈이 벌리지 않는다는 이유나 혹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외면 받았다는 사실이다. 사실 환경공학과를 전공하여 환경업무를 하는 본인도 국내에서 환경을 말로만 중요하다고 하나 그 대우나 처우 그리고 사회적인 인식은 여전히 부실하다. 

앞으로 지구온난화와 교토의정서에 따른 국제협약, 탄소배출권에 따른 경제개발 제약에서 환경 문제는 우리가 결코 무시하지 못할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무엇을 어떻게 보고 생각하고 있는가? 제일 중요한 사실은 대기오염과 더불어 지구온난화에 대한 문제를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시켜 앞으로 조금씩 변화해야한다는 점이다.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정유사와 자동차 제조사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연비 좋은 자동차 생산 내지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제대로 개발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물론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나, 적어도 국내에서 경차, 소형차에 대해 배척하는 태도나 수동기어보다는 자동기어로서 편함만을 생각하면 대기에 들어가는 탄소량은 계속 늘어만 갈 것이다.

분명 앞으로 우리는 에너지 사용은 늘어가고, 문명의 이기와 편익을 위해 우리는 계속 그 혜택을 누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계속 대기환경에 부담을 준다고 해서 2007년 탄소농도 360ppm에서 내려가지 못할망정 계속 올라갈 것이다. <6도의 악몽>에서는 우리의 잘못된 소비습관을 비판하고 있다. 계속되는 소비의 촉구와 그 소비의 촉구가 곧 인생의 성공이라고 하는 미디어가 결국 에너지의 과소비로 이어지고, 그것은 대기오염으로 간다는 사실을 말이다.

또한 지나친 육식은 가축사육을 위해 사용되는 곡식을 심각하게 소모하였으며, 그런 소모들은 식량부족을 겪는 약소국에서 삼림을 파괴하거나 개간하게 하고, 이런 문제는 다시 식량문제로 통해 대기오염 즉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정화할 숲까지 파괴한다. 지구의 허파인 아마존이 이렇게 위기에 봉착한 현실에서 우리의 욕망은 끝없이 달려간다. 그러나 그 욕망의 결말은 우리 인간이 욕망조차 느낄 수 없는 파탄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