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쿠리코 언덕에서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이미 나이가 지긋하게 들어 그 감독의 자리를 본인이 하기 보다는 본인의 아들에게 그 위치를 인수하여 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스튜디오 지브리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위치는 상당히 강하다. 비록 그의 아들인 오료가 감독을 맡았는데 말이다. 미야자키 가문의 2대 연속 애니메이션 감독 출신은 매우 소중하고 귀한 일이다. 정녕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에서 데즈카 오사무 이후로 명맥을 이어온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제는 자신의 은퇴 후를 넘어 보아 미야자키 코드를 이어갈 다리를 만든 것이다.

이번에 2011년 스튜디오 극장용 애니메이션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이제 미야자키 하야오의 특유한 작품과 설정 그리고 맛을 볼 수 있었다. 물론 미야자키 고료라는 감독은 2006년 게드전기를 발표하였으나, 당시 미야자키 하야오가 2004년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2008년 “벼랑 위의 포뇨”에 대해 감독과 각본을 맡았다. 2010년 “마루 밑의 아리에티”에서 각본을 맡고 이번에 나온 “코쿠리코 언덕에서” 역시 각본을 맡았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제 정면적으로 애니메이션을 전두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후방에서 물량을 받쳐주는 지원군으로 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의 아들이 이번 작품의 감독을 맡은 것은 1941년도 태어난 70대 어르신으로 본다면 그는 역시 스튜디오 지브리를 이끌어 나갈 신인 애니메이터 지휘관을 받쳐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스튜디오 지브리라는 이름을 보면 미야자키 하야오와 타카하타 이사오라는 명감독이 이름을 떨치므로 그들의 그늘에서 쉽게 벗어나는 것은 어렵다. 왜냐하면 그들이 세운 업적이라는 것은 차마 따질 수 없을 만큼 상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일까? 이 작품을 그러니깐 이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애니메이션의 서사를 읽어보면 참으로 재미있는 부분이 나온다. 그것은 단순히 스토리 외적으로 흘러가는 부분이 아니다.

흔히 서사구조 즉 내러티브(narrative)에서는 중요한 구조를 가진다. 그것은 <발단 ☞ 전개 ☞ 위기 ☞ 절정 ☞ 결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갈등이나 혹은 위기를 발현하는 극적플롯이 존재하여 그것이 극대화되면 작품 내의 주인공들의 갈등과 위기상황을 연출하고 어떤 우연한 계기와 조력자로 통하여 그것을 해소하여 스토리의 결말을 이끌어 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詩學)으로 통해 철학적인 이야기를 펼쳐가며 해석하듯이 이 작품 역시 서사 속에 숨겨진 담론이 나의 눈에 들어온다.

작품 시기는 1963년 어느 바다마을로 중심이 되어 1964년에 일본 도쿄에서 올림픽이 열린다. 이때의 일본은 1945년 태평양전쟁 패전과 1950년 한국전쟁이라는 국내외 전쟁에서 큰 소용돌이가 몰아친다. 이때 일본은 한국전쟁으로 통해 미군 및 연합군의 군수물자 기지로서 큰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다. 그 경제적인 발달이 1960년대 일본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배경에서 이 작품을 새롭게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이야기에서 여자주인공 미츠자키 우미로 통해 단순히 남자주인공 카자마 슌과의 첫사랑 이야기의 비극과 비극의 해결이 주된 요소가 아니다. 이 작품의 제일 중요한 부분은 바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왜 아버지이라는 것이 등장할까? 여자주인공 우미는 자신의 아버지가 선원이었고, 그 아버지는 배를 타고 나와 영영 돌아오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그는 한국전쟁에서 군수물자 이동 시에 적의 공격으로 인해 배가 침몰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코하마 작은 어촌에서 우미는 아버지가 오기를 바라며 국기계양대에 깃발 2개를 항상 올린다.

그 깃발은 언제가 자신에게 돌아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자기에 대한 위로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 깃발에 모든 마음을 담은 우미에게 새로운 사람이 온다. 바로 학생회장 친구이면서 학교신문을 발간하는 카자마군을 만난 것이다. 그는 우미가 올린 깃발의 의미를 알고 그의 아버지 배를 탈 때마다 그 깃발이 항상 달린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학교 신문에 우미의 깃발 이야기를 시로서 풀어낸다.

카자마군은 그의 아버지가 선원이므로 뱃사람에 대해 잘 알고 깃발에 대해 알았으며, 모스 신호 역시 알았다. 하지만 우미의 깃발은 단순한 깃발이 아니라 아버지에 향한 딸의 사랑이었다. 이쯤되어 나는 이것을 생각했다. 마치 자신의 어머니인 클리템네스트라와 어머니의 간부인 아이기스토스가 생각났다. 물론 우미는 엘렉트라 신화에서 동생인 오레스테스를 이용하여 아버지 아가멤논 왕의 원수인 어머니와 어머니의 간부를 살인하지 않으나, 그런 심리적인 부분에서 신화에서 보이는 듯한 심리적인 상황을 반영했다.

물론 추후에 설명하겠으나, 이 작품에서 우미의 어머니가 등장한 것은 카자마군에 대한 체념 후에 등장한 것이다. 일단 왜 우미가 카자마군과 중요한 역할과 그것이 보이는 일본의 역사적 배경은 어떻게 이어질까? 카자마군은 자신의 학교에서 낡고 허름한 동아리건물을 철거에 반대하기 위해 시위를 한다. 그리고 동아리 건물 아래에 있는 작은 인공 수원지에 몸을 날린다. 그때 우연히 만난 카자마군과 우미는 운명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지만 이것은 두 사람으로 통해 이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단순하게 연애를 주제로 하는 작품으로 오인하게금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건물로 가면 알 수 있다. 낡은 건물안에 있는 카자마군을 만나기 위해 우미와 우미의 동생 하나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듣는다. 이 건물이 매우 오래되어 너무 지저분하다는 점과 이 건물이 낡아 이제 철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카자마군은 어느날 학생집회 토론에서 이 건물을 부수지 말고 존치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반대로 많은 학생들은 이 건물을 헐고 새로운 건물을 지어야 한다고 했다. 이 작품의 진정한 숨은 이야기는 바로 이 낡고 허름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다. 대사 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카르티에 라탱' 안의 “먼지도 문화”라고 말이다. 이 건물은 일본 경제성장과 더불어 지난 과거가 고스란히 담긴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건물을 모조리 없애려고 한다.

건물을 없애 버리는 것은 좀 더 생각하면 과거 일본의 이야기를 없애는 것과 같다. 과거 일본 태평양전쟁 이후 패전과 더불어 경제성장하여 과거의 자신의 잘못을 그대로 누적(카르티에 라탱 안의 먼지처럼)하다가 이제 없애는 것은 과거를 모조리 없애 버리는 것이다. 그런 점을 카자마군은 반대했다. 오히려 과거부터 이어온 잘못된 점은 모두가 고쳐나가고 이것을 계속 이어나가야 할 전통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을 학생들이 보고 서로 간의 대립이 이어지는 것이 한참 보인다. 그런데 이 토론의 갈등도 우연히 학교 교장과 교사의 등장으로 인해 멈춘다. 그들은 과거 일본의 상징이다. 늙고 낡은 과거의 치적을 모조리 없애고 새로운 일본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게다가 이 낡은 공간에서는 여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여기 이 폐쇄되고 낡은 공간에서 유일한 최초 방문자는 미츠자키 자매였고, 그런 카르티에 라탱을 지켜낸 핵심적 뿌리는 우미였다. 

 

우미는 여학생들을 이 낡고 늙은 공간을 다시 들어가서 청소하고 정리하고 새롭게 변모했다. 과거 일본 즉 태평양전쟁 시대에서 그 사회적 분위기는 군국주의적이면서도 남성이 모든 것을 좌우하던 시대였다. 하지만 이제 학교 내에서 자발적으로 여학생이 카르티에 라탱을 변모하면서 학교 학생들이 변하고 심지어 이 건물을 철거하는 계획까지 막아낸다. 과거 붉은 돼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소녀는 상당히 강했다. 그런데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인 오료 역시 소녀가 강했다.

단지 차이점이라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하늘을 공간으로 펼쳐갔다면 아들은 이번에 바다로 통해 풀어간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소녀와 하늘은 결코 빠질 수 없는 필수적인 아이템이다. 이번 작품 역시 요코하마의 작은 마을에서 어느 고등학교를 바꾼 것은 이 소녀이다. 물론 이 소녀는 처음에는 카자마군으로 시작했으나 어느 순간 그것이 바뀌기 시작한다. 이 모든 학교 안의 카르티에 라탱을 지키기 위해 우미, 카자마군, 학생회장 3명은 학교 이사장을 만나로 간다.

그런데 그 이사장이 우미에게 묻는다. 아버지가 누구냐고 말이다. 그 말에 우미가 아버지는 선원이고, 한국전쟁에 죽었다. 다시 이사장은 묻는다. 그 건물을 지키고 싶은 이유가 뭐냐고 말이다. 우미는 아무런 미련 없이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이 작품에서 우미는 자신의 잃어버린 아버지를 스토리 외적으로는 카자마군에게 겹쳤고, 스토리 내의 의미에서는 카르티에 라탱에게 겹쳤다.
 

 


왜냐하면 우미의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우미는 자신의 아버지를 매일 생각하고, 그런 아버지 모습을 카자마군에게 본 것이다. 하지만 우미는 아버지의 그늘을 카자마군에게 전이시키려 했으나,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의 아버지가 카자마군의 친아버지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실 카자마군이 자신의 마음에 들어올 때 우미가 올린 깃발은 다른 모습이었다. 호쿠토라는 깃발에서 기존 2개의 깃발이 5개로 늘어났다. 그녀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카자마군의 고백에서 그녀는 카자마가 친오빠인 것으로 오인했다. 그런 오인의 절망에서 다시 깃발은 2개로 바뀌게 된다. 하지만 이야기의 끝은 이게 아니었다. 언제나 아버지가 오기를 기다리며, 또한 기다리는 아버지 대신하여 카자마군을 사랑하던 우미가 절망에 빠질 무렵 유력한 조력자가 등장한다. 그것은 우미의 어머니였다. 우미의 어머니는 우습게도 우미가 자신의 아버지를 그리워 한 후에 그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는 카자마군을 만난 후 다시 그 카마자군과의 사랑을 포기하고 난 뒤에 나타났다.

사실 우미는 죽을 것으로 설정된 아버지가 돌아와서 그녀를 안으려고 할 때 분명 어머니는 등장하지 않을 설정이었다. 왜냐하면 정말 카자마군이 우미의 친오빠라면 카자마는 우미의 어머니와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인 요소가 발생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그렇지만 우미의 어머니가 등장하고 나서는 오히려 그 갈등은 이어지기 보다는 해소되었다. 우미의 아버지는 카자마군을 놓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 친구가 전시에 죽고, 그의 아이가 고아원에 보내기를 거부했다. 다시 우미의 아버지는 그 아이를 카자마군의 아버지에게 맡긴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자리이동에서 지난 일본의 슬픔을 알 수 있다.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카자마군의 친아버지는 죽었다. 그리고 우미의 아버지는 한국전쟁으로 죽었다. 2사람의 아버지는 결국 일본 근대화의 역사에서 지나간 아버지였고, 우미는 그런 아버지의 그늘 아래 살아가고 있었다. 작품 마지막에 우미는 다시 깃발 2개를 올리면서 미소를 띄운다. 그것은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음을 알아도 학교 동아리 건물인 카르티에 라탱을 지켜서 아버지에 대한 마음을 지킬 수 있었으며, 또한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는 카자마군과의 사랑 역시 지킬 수 있었다. 

 


이 작품의 이야기는 우미의 첫사랑인 카자마군과의 관계에서 이른바 친남매라는 오해의 갈등에서 시작했으나 알고 보니 두 사람은 친남매가 아니라는 점과 또한 이들이 학교 안의 소중한 공간인 카르티에 라탱을 지켰다는 것이다. 스토리로 본다면 요지는 간단한다. 하지만 그 간단한 요지 뒤에 보이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즉 과거의 자신의 이야기는 어떻게 풀어가는지 알 수 있다. 아버지의 이름은 2가지다. 그립기도 하나 한편으로 부끄럽거나 미운 대상이다.

그렇다면 그들(지나간 역사 내지 과거들)을 강제로 없애 버리거나(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덮어버리거나) 할 수 있지만, 그것조차도 현재 자신의 모습이었다. 싫든지 좋든지 과거가 어떻게 되어 왔어도 현재 살아가는 인간이 형성된 모습이었다. 과거를 부정하면 현재도 없고, 다시 미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과거의 모습에서 아버지들은 떠돌아다니는 혼령으로 되어 계속 괴롭힘을 후세에 주는 것일까? 아니면 모두의 정신을 병들게 하는 망령이 되어 악몽을 꾸게 하는 것일까?

이 작품의 결말은 그런 아버지와 과거의 모습을 버리기 보다는 새롭게 먼지를 털어(자신들의 오류를 스스로 인정하고 청산하여)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기를 바란 것이다. 이 작품을 보기 전후에 기회가 닿는다면 한번 미야자키 하야오의 붉은 돼지를 보기를 바란다. 붉은 돼지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전형적인 정신세계와 관념이 들어가 있다. 파시즘을 거부하는 돼지, 그는 전쟁과 착취를 떠나 모든 것을 초월하여 돼지가 되었다.

또한 미야자키 하야오는 독일 사회철학자 칼 마르크스를 좋아하던 마르크스주의자다. 그런 그가 일본 근대화의 역사에서 어두운 전쟁에 죽은 아버지를 추모하는 작품을 만들게 한 것은 어긋난 아버지의 모습과 과거의 역사에 얽매이는 일본을 마치 카르티에 라탱의 먼지처럼 털어내어 자신들의 역사를 새롭게 고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잘못된 부분을 털어내려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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