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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유령들
자크 데리다 지음, 진태원 옮김 / 이제이북스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마르크스의 유령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마 그렇게 생각한다. 그 이유는 마르크스라는 인물이 만든 거대한 업적과 그리고 그의 업적에 따라 생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마르크스가 태어나고 죽고 하여도 여전히 마르크스의 이름은 아직도 공방 중에 있다.
차라리 이 서적에서 마르크스가 유령으로 되기 전에 헤겔, 칸트,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인물들은 그렇게까지 구설수로 떠오르지 않는다. 분명 현대 우리 인간사회에서도 철학하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영역은 여전히 미친다. 모든 서양철학사의 근거는 바로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과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철학과 서양에서의 기독교 사상은 다시 새로운 철학을 만들어 중세와 근대로 이어진다. 그런 와중에 칸트와 헤겔이 근대철학 이전 즉 마르크스 이전에 강력한 철학적인 사상가로 떠오르면서 당시 독일과 지금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우리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전수한다.
그래도 이것이 유령이란 이름보다 하나의 이념, 사상, 진리, 영혼 등으로 넓게 풀어 본다면 분명 마르크스의 유령이란 이름을 뛰어넘을 수 없을 것이라 본다. 일단 나는 이 책을 보면서 그렇게 이해되지 않는다. 자크 데리다라는 프랑스 철학자에 대해 이름은 이미 예전부터 알았다. 그리고 그가 해체주의로 통해 기존의 플라톤주의적인 서양철학에서 플라톤에게 속된 말로 맞짱을 뜨려던 학자라고 이야기 들었다.
그렇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그가 저술한 서적을 읽어본 것은 없었다. 단지 이래저래 모아 놓은 철학교양서 내지 현대철학안내지도 관련 도서에서 그의 이름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런 나에게 이번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보인 데리다의 느낌은 약간 감지했으나 이 서적의 맨 뒤의 진태원 선생님의 역자후기에서 나온 것을 보고 내 생각은 “지금 세계에서 마르크스의 사상들이 실패한 것처럼 보여도 그의 사상은 결코 무너지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계속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사실 1990년대 대한민국 남북군사경계선 위에 있던 북한과 그 위에 있는 소비에트 연방이 예전의 스탈린주의가 해체되고 소비에트는 과거 소비에트 이전의 러시아라는 국가로 돌아갔다. 단 러시아로 돌아갔다고 하나 러시아 왕국(王國)이 아닌 단지 러시아 공화국(共和國)우로서 말이다.
러시아가 소비에트 연방으로 활동할 때 소비에트 연방은 공산주의라 했으나, 실상은 국가자본주의였다. 단지 미국과 서방국가는 개인적 자본주의라면 소비에트 연방은 국가적인 자본주의였다. 사실 국가 이데올로기가 어찌 되었던가 싶어도 자본 즉 국가를 움직이든 기업은 움직이든 혹은 개인이 움직이든지 자본력은 필요했다.
하지만 소비에트 연방은 무너지고, 소비에트 연방은 올린 스탈린주의 붕괴되고, 스탈린 이전 볼셰비키 혁명의 주동자인 레닌주의가 몰락해버리고, 레닌이 어느 사람이 죽었을 때 지구의 두뇌가 한머리 만큼 줄었든 엥겔스, 그 엥겔스의 영원한 파트너인 마르크스까지 올라가서 무너진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목표로 하던 세상은 “노예 없는 주인”인 세상 즉 모든 사람에게 인권을 주어지는 세상이다. 이상하게도 마르크스가 원한 이념은 그런 것인데, 오히려 평범한 인민들을 억압한 것이다.
그것이 마르크스의 유령들 중에서 선의를 지닌 성령(聖靈)이 아니라 악령(惡靈)이 되어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웃기지만 그것은 마르크스가 직접 만들어낸 유령이 아니라 마르크스의 이름을 그러니깐 그를 하나의 유령으로 만들어버렸던 사람들이 만든 악령이었다. 그런 악령으로 인해 마르크스주의는 20세기에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녕 마르크스주의자들은 21세기에도 계속 존재하고, 여전히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읽히고 있다. 우리가 여기던 마르크스의 유령들 중에서 악령이라 여긴 부분은 사실 마르크스가 연출하고픈 것들이 아니었다. 마르크스의 이름 다른 사람에 의해 계속 다르게 변모되어 오나 그의 이름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위에도 밝힌 듯이 20세기 후반에 와서 지구세계에서 자본주의를 필두로 한 신자유주의가 승리한 세상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승리한 세상이라도 그것은 인간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질병, 인종차별, 빈곤, 테러, 조작 등의 일들이 신자유주의 국가의 상대국가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 내부에서 일어나는 점이다.
그런 상황들은 본다면 마르크스가 문제를 제기하고 고치려고 했던 그 흔적들 das kapital 즉 자본론(資本論)이 계속 21세기에 나타나 계속 세계 여러 국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1848년 2월에 엥겔스와 같이 선포한 <공산당 선언> 역시 계속 읽혀진다. 물론 이런 <공산당 선언>은 당시 유럽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현상 등을 어느 정도 이해하지 못하면 그저 마르크스가 악령으로 보일 뿐이다.
그런데 당시 유럽사회 즉 독일, 프랑스, 영국 등을 살펴보면 마르크스를 모르는 우리 어느 사람에겐 악령으로 보이겠으나, 사실 마르크스가 당시 서적을 저술할 때에는 그 사회 자체가 유령들의 사회였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에게 천부적인 인권이 있다고 하나 그런 인권은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으며, 국가경제규모가 발달하면 할수록 국민 대부분이 인간다운 삶보다는 인간보다 못한 삶으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살이에 대해 비관적으로 여길 수 있으며, 거기에 대한 반사적인 욕구로 공상적인 세계를 꿈꿀지도 모른다. 사실 지금이야 당시 마르크스가 원한 세계관은 다소 공상적일지도 모르나, 당시 마르크스가 본 세계에서 과학적이고 행동적인 가치관으로 통해 세상을 바꾸자 하였다.
그렇다면 정녕 마르크스는 유령에서 어떤 유령이 되어야 하는가? 분명 데리다가 적은 시점에서는 마르크스의 이념을 따라 세웠다는 국가들은 몰락해가고 있었다. 단지 그들은 정말 마르크스의 이념이 아니라 단지 마르크스의 이름을 빌려 하나의 유령으로 사용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아직까지 마르크스는 사라져가는 유령일까?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공산당 선언>의 서문에 올라가 있는 이 역사적인 2인물 “메테르니히”와 “기조”같은 인물이 현실에서 약자들을 더욱 가혹하게 착취하고 억압하고 있는 이상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