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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4대비극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셰익스피어 연구회 옮김 / 아름다운날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셰익스피어에 이야기를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대한 극작가로 알려져 있다. 나는 그의 이름만 들었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잘은 모른다. 단지 아는 정도라곤, 언제나 클리셰처럼 나오는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햄릿왕자가 광대에게 전해준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수준일 것이다.
따라서 내가 셰익스피어를 대해 말하라고 누가 물어본다면 그렇게 많은 답을 줄 수 없다. 아니 나는 그렇게 문학을 많이 읽어본 사람이 아니다. 최근에 문학서적을 읽게 되었고, 현대문학도 좋지만 고대문학에도 손을 잠시 대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 고전문학 중에서 연극대본처럼 만들어진 셰익스피어의 극을 읽어 본 나는 이 비극들 속에서 오늘날에도 계속 고뇌되고 있는 인간상을 볼 수 있다.
일단 이 책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처럼 “리어왕”, “멕베스”, “오셀로”, “햄릿”이다. 사실 처음 책 안을 잠시 볼 때 그냥 일반 소설문체일 것이라 생각한 것과 달리 또 다시 언급한 것처럼 연극대사본이다. 따라서 작품 서사 전반적으로 당사자 내지 제3자의 관점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대본에 따라 연기하는 상황을 떠오르면 보았다.
물론 연극을 보는 관객이나 연극대본을 보는 독자 입장에서는 관찰하는 제3의 입장이 분명하나 연극대본을 받고 그 무대 위에 있는 사람은 제3자 사람을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그렇다. 그것은 모방이라는 것이다. 연극무대 위에서 마치 자신에게 일어난 재앙과 저주처럼 그 많고 많은 인생의 위기를 아주 강렬하게 구슬프게 때로는 아름답게 표현해야 한다.
그런 것처럼 배우가 청중에게 강렬한 느낌을 주기 위해 배우들이 외치는 대사가 상당히 매력적인 것처럼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에서 전해오는 느낌은 그런 강렬한 문자가 마치 음성으로 들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혹은 누군가의 모략으로 또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 의해 인간의 운명은 농락당한다.
그 농락의 대상인 4명의 남자는 권력과 사랑 그리고 우정과 신의 앞에서 울고 우며, 또한 분노하고 열을 내며, 다시 차갑고 얼음 같은 심장으로 전개한다. 사실 책을 보면서 비극적인 플롯이 너무 강하게 몰아쳐서 읽기가 낯설었다. 그렇지만 그런 몰아치는 듯한 전개와 그 전개에 따른 인물들의 강한 감정 이입은 4대 비극이 결코 그들만의 비극을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1번째 작품인 리어왕은 아버지의 권위와 딸의 배반, 그리고 치정의 관계, 거기서 피어나는 왕가의 몰락! 그것은 단순히 우리 인간사를 풍자하는 듯한 느낌이다. 효란 무엇인가? 태어나면서 천륜이라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 막내 공주 코데리아만이 그녀의 아버지 리어왕을 진심으로 섬겼다. 하지만 리어왕은 어리석게도 이기적인 코데리아의 2언니를 믿었다. 결국 코데리아를 내치고 후에는 2언니에 의해 거지 왕이 되어 참혹하게 살다가 자신이 보는 앞에서 사랑하는 딸을 잃는다.
하지만 이 작품의 중요성은 과연 효란 무엇인가? 그것을 말로 특히 미사어구적인 표현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오히려 사람에게는 가져야할 도리를 말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그렇지만 우리 인간은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기를 원한다. 이야기를 듣고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서사적인 존재이므로 그런 비극이 닥친 것이다.
2번째인 멕베스는 형을 죽이고, 사랑하는 동생까지 죽이는 비극이다. 리어왕처럼 이것 역시 왕권에 대한 욕심과 거기에 얽매인 형제의 비극이다. 멕베스는 그는 영웅이고, 충직하나 마녀의 속삭임을 듣고 거기에 홀린다. 물론 마녀의 예언으로 멕베스는 자신의 군주이고 형이고 친구인 던컨을 차가운 칼로 베여 버린다. 왕족의 후예답게 왕이 되었으나 그는 진심으로 왕이 되지 못했다. 죽은 자신의 형이 유령이 되어 그를 정신병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멕베스가 과연 마녀의 말만 믿고 했을까? 아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마녀가 살아 있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오만과 방종을 자신의 세계에서 찾기보다는 자신의 외적인 영역에서 찾는다. 멕베스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런 인물은 언제나 운명의 신에 의해 농락을 당한다. 마치 완벽하게 될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 결국 죽음으로 이르는 병으로 말이다.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은 멕베스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런데 마녀의 예언에서 멕베스는 영주가 되고 왕이 되지만, 멕베스의 충직한 부하요 친구인 벤쿠오에게는 멕베스를 왕이 된 후에 스코틀랜드 왕은 멕베스의 후손이 아닌 벤쿠오의 아들인 폴리언스라고 한다. 하지만 그 권좌는 던컨의 아들인 멜컴이 되었다. 마녀의 마지막 예언은 틀린 것이다. 마녀는 요상하게 인간을 유혹하고 있었고, 예언을 맞추었으나 최후의 예언은 빗나갔다. 결국 마녀는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회피하기 위한 장치임을 보여준 것 같았다.
3번째 오셀로는 세상에서 가장 정직하고 솔직한 인간이 어떻게 가장 추악하고 어리석은 가를 보여주었다. 오셀로는 멕베스처럼 정달 대단한 영웅이고 용감한 영혼을 가진 인간이다. 게다가 용기와 힘뿐만 아니라 이 세상 최고의 미녀인 데스데모나라는 여인이 오셀로의 영원한 사랑의 피앙세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인간이란 누구든 자신이 열심히 한다고 해도 만족하거나 혹은 하지 않아도 자신에게 좋은 것이 오기를 바란다. 그게 바로 이아고의 간악한 처세술이다. 우리는 이아고라는 극단적인 악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서사구조에서 안정된 세계에 외적인 침략이 들어와 이것을 극복하여 내부의 결속을 다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외부의 갈등이 있음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멕베스와 마찬가지로 전쟁이 끝난 평화는 오히려 평화가 아닌 저주의 그림자로 드리워진다. 이아고는 그런 평화로운 세계에서 평화가 과연 있을까라고 여기게 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 이아고를 보면서 우리들은 “정말 저 사람은 나쁘고 추악하고 이기적이야” 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오히려 이아고야 말로 우리 인간들이 보이는 그 추악한 모습을 그대로 들추는 것이 아닌가?
우리 인간들은 항상 자신들이 착하기 위해 자신들만 피해자인 것처럼 자신들이 정의를 가진 존재인 것처럼 위선을 떤다. 그 위선은 가식과 속임수를 만들어 상대방에게 풀어내지도 못함 올가미를 만들어 절망의 나락으로 밀어낸다. 그런 이아고를 보면서 과연 이아고만의 문제일까? 인간의 사소한 감정과 상대방에 대한 야유와 시기, 그리고 거기서 꽃처럼 피어나는 비극의 물꼬들!
그런 비극을 만들어 가면서 모든 희극적이야 할 존재들은 비극의 저주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죽어야할 이아고는 죽지 않고, 계속 그들의 죽음 속에서 살아남은 채로 존재한다. 물론 모든 음모는 발각되어 이아고의 죄는 어떻게든 보상받으려 하나 그 보상할 결과는 나오지 않는다. 그를 잔인하게 어떻게 고문하였는지 혹은 높은 나무걸이 위에 숨이 쬐어 오는 고통도 맛보게 하지 않고 말이다.
어떻게 본다면 이아고의 부정은 발각된 망정 그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는다. 대신 그가 사라지야 할 자리에는 죄 없는 많은 어리석은 바보들만 사라져간다. 하지만 이 바보들의 죽음은 이아고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바보들은 자기만 옳다고 여기고, 자신의 귀를 즐겁게 하는 사람만 믿었다. 진정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좋은 말만이 아니라 진실의 말도 필요하다.
마지막 햄릿은 비극적인 요소를 참으로 장치적으로 보여주었다. 햄릿을 사랑하는 많은 백성과 친구, 그리고 어머니, 하지만 햄릿에게는 많은 관심과 인심이 비추어도 그는 기쁘지 않았다. 아니 그는 오히려 슬프고 좌절했다. 그가 사랑하고 존경한 인자하고도 훌륭한 국왕이 죽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모자라 자신의 어머니는 상복을 벗어 던지기가 무섭게 햄릿의 아버지 동생인 클로디어스와 결혼한다.
국왕이 죽자 국왕의 동생이 국왕의 아내와 결혼했다. 어떻게 본다면 근친상간에 대한 욕망일 수도 있고, 권력에 대한 욕망을 보여준 것이다. 이런 비극이 원통하게도 죽은 이의 혼이 사라지지 못할 정도로 햄릿의 아버지는 유령이 되어 성안에 출몰한다. 그의 원통한 죽은 햄릿에게 전파되고, 햄릿은 이전부터 여긴 아버지의 부재로 고뇌하던 것이 이제 그를 미치게 한다. 물론 그는 미친 것이 아니라 미친척을 했다.
그것은 가짱 아버지인 클로디어스를 속이고, 자신이 살아남아 복수를 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그의 물증과 심증을 잡기 위해 미친 척을 하고, 자신이 진정 사랑하던 아름다운 여성 오필리아를 상처주면서 말이다. 햄릿이 미친 사람처럼 헛소리할 때 오필리아에게 내뱉은 그 장난도 아닌 농담들은 오필리아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최후에 오필리아가 자살할 때 햄릿은 자신이 사랑한 여자 오필리아의 죽음에 깊은 비통을 겪는다.
햄릿은 자신의 대의와 아버지의 복수, 그리고 어머니를 되찾기 위해 미쳤다면, 가엾게도 오필리아는 정말로 미쳐서 죽었다. 그것은 슬프게도 그녀가 가장 사랑한 햄릿의 손에 죽은 오필라이의 아버지 사건 때문이었다. 어떻게 서로가 사랑해도 사랑을 진실로 표현하지 못하고 광기에 쌓여 한쪽은 연극으로 한쪽은 진실로 나온다는 말인가? 게다가 오필리아 아버지 클로니어스의 죽음에 복수심을 다지던 오필리아의 오라버니인 레어티스는 햄릿과 가까운 사이고 좋은 남자였지만, 그 역시 순간적 이성을 놓치고, 자신의 간악한 꾀에 스스로 파멸로 이끈다.
햄릿과의 최후의 결투에서 독을 바른 칼을 서로의 손에 잡고 서로에게 상처 내어 죽음으로서 서로를 화해한 2사람의 우정은 서로 친한 친구라도 순간의 악의와 오류로 되돌리수 없는 비극을 보여주었다. 그런 비극을 만든 클로디어스는 햄릿을 논에 가시처럼 여겨 포도주에 독을 탔으나, 그 포도주는 햄릿의 축배로 햄릿을 독살하려 했으나, 그 독배는 클로디어스와 햄릿이 사랑하던 아내요 어머니인 거트루드의 입에 들어간다.
결국 햄릿의 어머니는 햄릿이 보는 앞에서 독이 온 몸에 퍼져 죽고, 햄릿의 친구인 레어티스는 자신의 독칼에 죽고, 이것을 보고 분노한 햄릿은 그 모든 원흉을 죽이고, 자기 역시 칼에 묻은 독에 의해 운명한다. 자기 운명을 결코 이렇게 비극으로 갈 생각이 없었으나 세상은 혹은 거대한 인간의 욕망은 결국 모든 것을 잡아 삼켜 그들을 하데스의 지하궁전으로 데려가 버린다.
그러나 이 모든 비극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만 숨쉬는 것이 아니다. 비극적인 연극에서도, 이 각본을 이용한 영화에서도, 혹은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계에서도 일어난다. 비극은 멈추지 않는다. 비극이 이토록 쉽게 일어나는 것은 우리는 누구를 너무 시기하거나, 너무 쉽게 믿거나, 쉽게 화를 내거나, 쉽게 남을 우습게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의 희생자들은 자신에게 악의가 없이 선의로 가득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우리도 죽음이 아니더라도 이런 비극은 비켜가는 것이 불가능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