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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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라는 영화가 예전에 개봉된 사실을 알았다. 평소 대중영화보다는 차라리 대중들이 기피하는 애니메이션 영화 혹은 예술영화 쪽으로 보는 편이었다. 대중들의 가치를 무시하거나 배척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중들이 보는 영화는 결국 Cliche라는 정해진 패턴을 늘 따라가야 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게다가 영화내용의 스토리와 더불어 그 스토리 안에 담론하는 의미까지 고려한다면 분명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 원작이 내포하고 있는 작가의 숨소리를 제대로 받아볼 수 없는 것이 한계라는 점이다. 작가의 글이 독자에게 문자서사로 통해 이미지를 요구한다면 영화는 그저 이미지로서 관객에게 전달된다.

 

의식적인 사고능력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수용만이 존재하기에 같은 작품이 문자서사와 영상서사로 나오는 것은 상당한 차이점이란 사실은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원작이 있는 영화를 잘 안 보려고 하는 이유는 원작에 대한 충실성과 더불어 그 충실성을 넘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영역도 같이 드러낼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다. 물론 영화 <은교>는 관람하지 않았고, 단지 소설 <은교>만을 읽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처음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주변에 듣기론 늙은 남자가 젊은 여자아이에 대한 집착적인 관심과 성불구자로서의 질투심이 있다고 한다.

 

물론 그런 장면은 소설을 읽다보면 나온다. 그는 아침 해를 바라보면서 유서를 적을 때 분명 70에 가까운 나이라고 한다. 인생의 황혼을 맞이한 것도 모자라 당뇨증세로 인해 각종 합병증으로 죽음의 문턱을 오고가고 있던 한 노초였다. 그런 노초에게 죽기 전에 만난 한은교라는 소녀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소설 제목이 <은교>라서 은(銀)과 교(橋)라는 은으로 만든 다리라고 생각했다. 막상 생각하여 은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이름조차 주변에서 본 적이 없다. 은교라는 작품이 결국 한 소녀의 이름이고, 그 한 소녀에 대해 늙은 시인과 중년을 바라보는 서지우라는 작가가 서로 라이벌 의식을 느꼈을 터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치정적인 부분과 은교에 대해 젊은 남성의 왕성한 성욕을 과시하는 서지우만의 모습만을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작품 내에서 두 남자가 한 소녀에 대해 가지는 마음은 상당히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왜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가? 혹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점이다. 은교라는 소녀는 분명 17세일 때 시인 이적요를 만났다. 이적요는 20대는 혁명을 위해 살았고, 30대는 감옥에서 살았으며, 40대 이후에는 시인으로 살았다. 누가 보더라도 그는 우리 역사에서 근대화라는 역사적 흐름에서 그 태풍의 주변에 머문 자였다.

 

본래 태풍의 눈은 항상 고요하나, 태풍의 주변은 강력한 바람과 비가 태풍이 지나가는 모든 것을 박살낸다. 군부독재시절 야당 정치인 쪽에 일한 이유로 지명수배자가 되고, 그 이전에는 가난함에 시달렸다. 그는 시인이란 엄청난 이름을 얻기 전까지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 자유를 위해 희생한 점이다. 그런 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시인 이적요는 <은교>에서 매우 뛰어난 문학시인이었다. 시적 영감과 더불어 그의 명성을 모든 이들에게 칭송받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적요는 자신의 이름처럼 적요했다. 아니 오히려 적적했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의 인생에 언제나 누군가에게 보상받지 못한 어둡고 깊은 슬픔이 있었기 때문이다. 감옥에 같이 들어왔는데, 모두 1년이 되기 전에 나가고, 그들이 다시 이적요에게 찾아와 회유하는 장면에서 그의 고집과 더불어 인격이 보인다. 그렇게 이적요는 자신의 청춘을 희생했다. 유일하게 그가 좋은 추억으로 남은 것이 D라는 한 소녀였다. 자신보다 분명히 나이가 많은 D라는 소녀가 어릴 적에 자신이 위기에 빠질 때 구해준 것이다. 부모님은 몸이 불편하여 적요에게 아무런 것도 해주지 못한다. 아마 피가 흘릴 정도로 맞은 적요와 그 적요를 문과 벽을 경계로 병든 아버지의 모습에서 자신의 미래의 모습은 병든 아버지란 사실을 복선으로 제공한 것 같았다.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아버지는 아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혹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거세를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아버지의 권위에 따른다. 적요의 아버지는 라이오스처럼 권력도 없고 그저 죽어가는 사람이고, 그는 거세의 위험을 적요에게 주지 않았다. 오히려 병이 들었기 때문에 아들을 주변의 폭력에서 구원해줄 수 없었다. 그 구원자는 D라는 소녀다. D라는 소녀의 이미지만이 유일한 적요의 안식처였다. 적요는 평생 D라는 소녀를 만나지 못한 채 외로운 인생을 보냈다. 그런 D라는 소녀가 과거의 존재했으나 현재는 그 시절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과거라는 것이 하나의 사실이기도 하나 또한 과거는 하나의 환상에 가깝다. 우리는 과거로 인해 현재를 구축하기도 하나 현재와 멀어지기도 한다. 그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적요에게 은교가 나타났다. 그것도 자신의 집에서 뜻한 햇빛을 맞으며 평온하게 낮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은교를 보자말자 늙은 시인의 마음은 마치 17세 은교처럼 17세의 소년으로 간 기분이었다. 은교가 자신과 성관계를 맺은 서지우에게 말한다. 할아부지가 오히려 더 젊다고 말이다. 육체적인 나이로 지우가 어리기에 그는 자신의 라이오스인 적요에게 충성하나 한편으로 은교로 통해 거세하고 싶었다.

 

자신의 다부진 몸과 거친 성행위로 은교를 지배할 수 있다는 집착을 말이다. 물론 적요도 은교에 대해 성적인 충동이 있었다. 하지만 지우와 달리 적요는 명곡의 팝송에서 항상 등장하는 eagles의 <Hotel California> 가사와 더불어 은교와의 성행위를 꿈꾼다. 그러나 그가 망상에서 즐기는 성행위는 지우와 다른 모습이다. 그는 은교를 하나하나 모든 것을 느끼려 했고, 지우는 오로지 자신의 페니스로서 남근적인 상징성을 보이려고 했다. 왜냐하면 지우는 자신의 작가로서 등단한 계기가 적요가 만들어준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지우는 재능이 없었고, 적요에겐 하늘이 내린 재능이 있었다. 그래도 지우는 적요를 존경하고 사랑했고, 지우는 적요가 부족한 것을 알기에 그를 보살펴 주었다. 게다가 적요는 자신의 사망 이후 모든 자신의 신변을 지우에게 부탁하려고 했다. 20대 같이 혁명을 꿈꾼 한 여성과의 짧은 추억에서 나온 자신의 친아들에게도 그러하지 않았다. 가족이란 인연의 끈에서 피보단 오히려 세월이란 물을 택했다. 아니 물보다는 술이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적요는 소주를 무척이나 좋아했으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마지막에 은교는 지우와 적요의 일기를 보고 눈물을 흘린다. 오히려 자신이 두 사람의 관계에서 소외되었다고 여겼으나, 지우의 일기를 넘어 적요의 일기를 보는 순간 얼마나 적요가 자신을 사랑했는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은교는 적요에게 할아부지라고 부른다. 자신의 친할아버지도 아닌데도, 적요는 그것이 좋다고 한다. 사실 지우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고 했기 때문이다. 스승과 제자, 그 두 사람은 마치 아버지와 아들처럼 아슬아슬한 관계가 보였기 때문이다. 어느 일정한 틀에 박힌 공간에 부자 같은 남자가 2명이 있을 때는 무척이나 가깝게 지내나, 그 사이에 여자가 1명이 들어갈 경우 그 균형을 파괴된다. 그런 소설이나 혹은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에도 많다.

 

어떻게 보면 <은교> 역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인 요소가 매우 심하게 반영된 것 같았다. 대신 남근중심적인 사회에서 <은교>는 탈(脫)남성적인 권위의식을 말하려고 한 것 같다. 이지적이고 늙은 남자와 감성적이고 어린 여자는 이분법적인 요소를 지닌다. 인간에게 자연과 문명이란 것은 언제나 자연은 문명에게 속박되어 지배당해야 하는 존재다. 하지만 은교는 오히려 자연이란 소녀라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감대로 움직인다. 움직이지 못할 때는 오직 강제로 지우의 손에 이끌려 성행위를 할 때이다.

 

소녀에서 이미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혹은 자신의 처녀성을 떼어버린 것에서도 할아부지라고 부른 적요의 글이 은교에게 더 크게 닿은 이유는 은교만이 유일한 적요의 어린 신부이고 소녀이고 아름다운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아직 어린 중고등학생 아니 초등학교에 다니는 남자아이조차도 자신이 원하는 여자와 같이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 <나만의 공간>에서 개인적으로 미학자로서 좋아하는 진중권 교수의 이야기가 인상이 깊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아이에 대해 알몸이 되어 같이 이불에 있는 꿈을 꾸었는데, 그것이 성행위인지 아닌지 그때는 구분하지 못했다고 한다.

 

요새처럼 더욱 발육이 좋은 아이들이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은교가 눈물을 흘린 이유, 그것은 은교에 대해 느끼는 적요의 사랑은 몸은 70이란 Seventy일지 모르나, 은교를 만나 자신의 감정에 대한 사랑은 Seventeen이었다는 점이다. 17과 70이란 시간적인 한계는 육체적으로 분명 존재하나 적요는 그것을 넘고자 했으나, 이미 검버섯이 피어나는 썩어가는 자신의 육체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것을 알기에 그 한계를 넘고자 하는 금기를 깨고 싶은 신화적 욕망이 바로 <은교>라는 소설인 것 같았다.

 

<은교>라는 소설에서 다른 맛은 단순히 치정과 질투만이 아니라 가볍게 스쳐가는 우리의 흔적이다. <은교>의 주인공인 적요와 지우는 시인과 소설가이고, 은교는 처음과 달리 시인을 하고 싶어 한다. 주인공이 소설가이고, 소설을 만든 사람도 소설가다. 물론 소설가이기에 소설을 쓰는 것은 당연하나 문학소설에서 반영된 인간의 역사 역시 놓치지 아니했다. 적요라는 한 인물로 통해 그동안 우리가 이렇게 살아오면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어릴 적에 느낀 그 순수하고도 아름다운 감정은 모두 사라지고 없어진 것인가? 우리는 과연 진정 아름다운 시간이 있었을까? 라는 것이다.

 

은교를 만나기 전의 시인인 적요는 세간에서는 기념관을 세우고 시청공무원이 바쁘게 돌아다닐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붙여진 호칭이나, 처음 <심장>이란 소설을 지우에게 줬을 때 자신이 기획하고, 지우의 이름으로 알려진 것에서 문학을 다룬다는 그 지식인의 세계를 비웃었다. 그래서 <은교>라는 작품은 그저 3남녀의 관계만 보는 것은 절대 바르지 못한 선택이라 들었다. 문학은 인간의 이야기를 다룬다. 혹은 시인이라 하더라도 시 자체가 하나의 문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에서 “시(詩)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지식인의 책임은 민중의 삶을 보고 끄집어내는 것이지 오히려 민중을 분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중문화라는 것은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주입하는 셈이다. 수업시간에 처음 적요의 수업에 들어온 지우에 대해 적요는 우리가 말하고 느끼는 것은 정말 개인이 느끼고 말하는 것인지 혹은 그렇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우리는 자신만의 언어가 아니라 강제로 부여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 거짓과 위선의 세계에 살아온 적요가 은교로서 자신의 본위로 갔다고 말하는 것이다.

 

<은교>를 읽으면 남녀 간의 적나라한 성행위도 많이 표현되어 있고, 이른바 물장사라고 불리는 세계도 나온다. 노골적인 성행위와 더불어 은교에 대한 섬세하고도 시적인 표현에서 오히려 문학소설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본연적인 부분을 드러내는 것도 좋지 않은가 싶었다. 단지 그것이 그 자체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다양한 부분에서 그 중에 하나라는 점을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추악한 면을 가지고 있다. 그 추악한 부분을 인정하고 인식하기에 오히려 추악함을 막을 수 있다. 그 추악함을 부정하고 자신과 분리되었다고 여기는 순간 인간의 추악함이 드러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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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메에서 일본을 만나다
조성기 지음 / 어문학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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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메에서 일본을 만나다>를 읽는 순간, 예전에 일본 애니메이션 관련 연구도서를 읽은 것과 상당한 매치와 더불어 아쉬움이 느껴졌다. 미국 일본문학 전공 교수 수전 네피어가 만든 인문으로 보는 저패니메이션인 <아니메>라는 도서를 먼저 읽었고, 그리고 철학 사상 그리고 인문학을 연구하는 수유 너머에서 만든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그리고 한창완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의 <저패니메이션과 디즈니메이션의 영상전략>, 그 외의 저패니메이션의 서적을 읽었기에 이미 읽는 순간부터 <아니메에서 일본을 만나다>는 낯선 도서가 아니라 그 이전의 도서에 비교되는 도서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잘 정리된 내용은 전반적인 context라는 연관성이다. 가령 역사적인 사건부터 시작하여 문화와 관습, 기후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인자를 반영한 점이다. 그러나 그렇게 길게 뻗은 만큼 내용의 주제성은 약간 아쉽게 다가왔다. 일반적인 문화지식으로 다가가면 좋은 입문서일지 모르나 깊이를 들어가기에는 너무 내용 자체가 저자의 생각에 치우친 것이 아닐까 하는 심정이다. 애니메이션이란 단어가 Animation이고, 원래 Animate라는 생명이 없는 존재에 영혼을 불어넣는 것이기에 애니메이션에서 일본문화의 밀접성은 그 문화와의 특이성이 있다는 것을 나도 이 책을 읽기 전에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한국의 경우 전통사상으로 본다면 무(巫)를 기반한 원시적인 문화가 잔존하기 때문이다. 그런 무라는 것으로 통해 샤머니즘과 단군신화의 웅녀를 토대로 한 토테미즘은 전통적인 원시문화가 잔존함을 알려준다. 일본의 경우에는 샤머니즘이나 토테미즘보다는 차라리 애니미즘이라고 하는 물신숭배에 가깝다. 따라서 물신숭배인 애니미즘이 깊이 반영된 일본인들의 무의식에 애니메이션으로 영상을 표출함은 매우 독특한 문화 관념이 있다는 것이다. 즉, 형이상학적 관념의 세계를 영상이라는 형이하학적인 시각으로 만들어내는 점에서 일본의 아니메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보기엔 어린아이나 혹은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들이 그저 즐기는 세계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이 서적에는 제법 신화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 신화라고 하여 레비 스트로스 내지 혹은 마빈 해리스 등과 같은 인류학자들의 해석하는 신화학 영역보다는 그 신화라는 것을 소개하고 그것이 일본 문화에서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에 치중했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것은 일본문화라는 것을 아니메라는 영상미학으로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대해 생각하기 좋은 것은 분명하다. 단지 아쉬운 부분은 깊이성에 대한 부분이다. 일본의 벚꽃이라는 것은 흩어져서 날라 없어지는 것으로 유명하다.

 

즉 유미주의라는 소멸의 미학이 일본의 작품 내지 생활양식에 깊이 박혀있다는 것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함이다. 예전에 진중권 교수의 미학 도서에서 일본은 불꽃놀이와 벚꽃놀이를 좋아하는 것을 설명한다. 불꽃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번쩍 빛이 나면서 소멸해가는 모습이다. 큰 불덩어리가 작게 세분화 되어 없어지는 그 순간이 가장 아름답고, 벚꽃놀이에서 나무에 달린 벚꽃보단 그 나무에서 바람에 의해 날아가거나 떨어지는 벚꽃이 아름다운 법이다. 그래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초속 5㎝>이란 작품은 초속 5㎝로 떨어지는 것은 결국 벚꽃의 꽃잎이란 점이다.

 

과연 그것은 우리에게 어느 미를 안겨주는 것인가? 미학이란 것은 아름다움을 찾고 연구하는 학문이다. 물론 20세기까지 존재한 아방가르드에서는 반미학이라고 하여 기존의 관념을 전복하고 새롭게 보여주는 가치도 있다. 하지만 아방가르드라는 반미학 역시 미학으로 대체되는 순간 아방가르드의 존재의 의미는 사라진다. 20세기 마지막 아방가르드인 상황주의 인터내셔널(IS) 그대로 해체하고 사라지고 만다.

일본의 미학은 그런 반미학적인 요소는 없다. 왜냐하면 일본의 상징에서 예전에 <국화와 칼>이란 서적을 들은 바가 있었다. 화쟁과 전쟁, 그것은 서로 도모하여 친하게 지내거나 혹은 서로를 겨누고 싸우는 것이다. 화를 추구하는 정신에서 벚나무 아래의 차 한 잔은 분명 서로 간의 친목을 도모하나, 사쿠라 라는 벚나무 꽃잎을 일어로 들어보면 왠지 우리는 평화보단 전투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기분이다. 소멸해 가는 것은 아름다운 것인가? 사무라이 정신에서 그들은 죽음이란 단어를 주저하지 않았다.

 

아니 원래 일본이란 섬이 기후적으로 식량이 충분하지 못하고, 지진이나 해일 그리고 각종 자연재해가 일어나기에 그들은 항상 죽음의 위기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 것이다. 일본 사람의 이름을 들어보면 나무, 돌, 물 등과 같은 자연적인 요소가 많이 내포된 단어가 많다. 자연 속에서 그들의 인간생활은 결국 자연적인 요건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다. 그렇기에 애니미즘이란 물신숭배가 가능한 것이다. 그런 요소는 우리가 자주 알고 보는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이 많은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충분히 볼 수 있다.

 

또한 일본은 탈아시아론에 대한 점으로 자기 민족중심적인 작품과 더불어 옥시덴탈리즘 역시 강하다. 서구가 동양이나 아랍문화권에 대해 가볍게 보는 문화적인 용어를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한다면, 역으로 동양이 생각하는 서양의 이미지는 옥시덴탈리즘이다. 탈아시아적인 요소에서 그들만이 추구하고 만들어내는 유럽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바로 그런 옥시덴탈리즘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일본이란 국가적인 특성과 더불어 민족성 성향, 그리고 역사라는 과정이 문화라는 것에 의해 농축되고 표출되는 것이다. 문제는 애니메이션이란 의식적인 것보단 무의식적 영역이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화된 일본인의 사고를 애니메이션 영상이란 것으로 통해 언어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무의식의 세계를 하나의 언어로 통하여 일본을 보는 것에서 애니메이션만큼 좋은 것이 없다. 작가나 혹은 애니메이터들이 만들어낸 작품을 대중들이 열광하는 것은 결국 작가나 대중이나 모두 비슷한 사고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애니메이션만이 아니라 문학소설이나 드라마, 영화에서 등장하는 칼과 벚꽃은 일본인에 대해 충분히 공통적인 요소로 도출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다고 하여 모든 것을 귀결할 수 없으나 일본인이란 특징이 본래 옆 사람에 대해 참견하지 않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고, 그 개인적 성향으로 인해 집단주의적 행동도 강하다.

 

그들이 러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서 광기에 빠진 것이 가능한 이유도 그런 민족적 기질에 가깝다는 것이다. 신화학적으로 신화는 결코 단절된 세계가 아니라 영원히 이어지는 과거, 현재, 미래의 대화방법이다. 일본인의 신화적인 요소가 곧 문학적 요소와 더불어 그것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들의 정체성은 하나의 문화적 상품과 더불어 문화적 공격도 생각할 수 있다. 언어는 곧 그 문화의 특성과 더불어 하나의 권력적 요소를 지닌다. 나 역시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나, 그것을 좋아하기에 일본에 대한 호의도가 있는 것은 나 이외의 많은 향유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바이다.

 

그렇게 잘 알기에 우리는 애니메이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으로 통해 일본을 봐야 하는 것이다.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것이 만들어졌던 하나의 과정을 봐야 한다. 당연히 그 과정에는 역사와 문화, 기후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요소가 전제되는 게 당연하다. 물론 현재를 알기 위해서는 과거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은 좋으나, 이 서적은 너무 과거에 중점을 둔 게 아쉬웠다. 가령 전공투와 단카이 세대에 대해 자세히 다룬 것이 좋았다고 본다. 애니메이션이란 산업이 일본에서는 1970년대부터 시작되고, 이때 시대상과 더불어 경제호황과 불황 그리고 사회적 불안이 연결되는 것은 상세히 다루는 것이 옳다고 본다.

 

오타쿠 문화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대한 부분은 저패니메이션 관련 도서에서는 중점으로 다룬다. 이 책에서는 너무 팔을 여기저기 뻗치는 만큼 현대적인 조건과 현상에 대해 약간 아쉬웠다. 과거가 있기에 현재가 있지만, 그 현재의 조건성도 새롭게 추가되는 점이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래도 다양한 관점으로 본다는 것은 좋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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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5집 - 불의 발견
부활 노래 / PLYZEN (플라이젠)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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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5집 불의 발견은 부활의 앨범에서 새로운 발견이라고 생각한다. 본래 불이라는 것은 인간의 문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에 대해 생각하면 불이 곧 파괴와 생성을 두 가지를 지니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요소이다. 불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추위와 배고픔을 해결해주는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나, 때로는 인간의 모든 것을 빼앗고, 심지어 인간의 근본이 되는 자연조차 파괴한다. 매년 우리나라에 산불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산림이 훼손되고 사라지고 있는가? 불의 발견이란 인간에게 있어서 편리함과 동시에 불편함을 안겨주는 극단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이런 불의 발견의 테마처럼 연주곡에서 프로메테우스라는 곡이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지혜와 번영을 알려주는 불을 전해준 이유로 그 벌로 절벽에 묶여 맹금류에게 살을 파여 먹히는 벌을 받는다. 인간에게 불이란 것을 준 대가로 영원한 고통을 받는다. 하지만 고통이란 프로메테우스만 받는 것만은 아니다. 부활5집의 프로메테우스를 듣다보면 전쟁이란 큰 비극이 사운드로 들려준다. 폭탄이 떨어지고, 전투기가 날아가는 소리는 불의 발견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분명 Elga의 희망과 영광의 나라를 기타 에드립으로 들을 때는 불이란 인간에게 희망을 주는 하나의 상징이다.

 

그런 것이 고통의 분란이란 점에서 얼마나 부활5집이 서사적인 주제를 담고 있는가? 서사의 주제에서 마지막은 역시 희망이다. Any time이라고 계속 반복하는 보컬링에서 우리에게 이런 비극의 극복을 넘을 수 있는 미래는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부활의 불의 발견은 그렇게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해준다. 그런 만큼 노래 역시 의미심장하다. 여태까지 부활의 노래를 들었다면 5집의 첫 곡부터 매우 놀랄 수밖에 없다. 보통 전자기타와 어쿠스틱 기타 음이 시작되는 것보단 신디 음이 경쾌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Lonely Night, 내가 처음 듣자말자 엄청나게 쇼크를 받은 곡이었다.

 

부활이 이런 곡을 하다니 말이다. 박완규의 시원하고 터지는 듯한 목소리는 부활의 기존의 이미지를 벗어 서정적인 것보다 도전적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물론 슬픔 바램이란 곡이 있었으나 21세기 불경기나 믿음이란 곡은 상당히 현실에 대한 회의감이 가득한 곡이다. 21세기 불경기에서 가사 하나하나가 공감이 간다. 술잔에 기울이고 낭만 따위는 없이 그저 이방인처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비애라고 할까나? 믿음 역시 인간의 과도한 믿음이 파멸을 부르는 것을 말한다. 불이라는 것은 결국 문명이기에 문명사회라고 하는 현실이 과연 우리 인간에게 행복을 주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그런 것에서 우리에게 안식을 주는 것은 추억 내지 지나간 일들에 대한 단상이다. 부활 2집의 이승철이 부른 회상을 다시 박완규가 부른 것에서 마지막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아 지나간 세월에 대한 어린 시절의 그리움을 더 그립게 한다. 마치 부활3집에 있는 그리움 그리운 그림처럼 부활5집은 오히려 저돌적이고 경쾌하기에 그리움과 회상이란 아련함을 떠오른다.

 

기타리스트 김태원이 펼치던 부활5집에서 사운드의 세계는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예전에 부활1집에서 김태원의 기타가 붉은색 펜더 스트라토캐스터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이번 5집에선 상당히 비주얼이 돋보이는 ESP 기타를 들고 있는 점에서 신기했다. 조금 5집 이전에는 수수한 차림과 분위기였다면, 5집에선 임팩트가 넘치는 코디와 장비였는지 매우 느낌이 신서했다. 물론 지금도 부활은 다른 스타일과 새로운 음악 스타일을 가지고 있으나, 아마 5집이 최고 혁명적이라고 본다. 기존의 부활의 틀을 제일 심하게 전복시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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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Story - 역사라고 불리는 그들만의 이야기
닉 테일러 지음, 엄연수 옮김 / 글과생각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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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라는 단어를 영어단어로 찾아보면 ‘History’라고 한다. ‘History’에 대해 단어를 다시 재분리 및 조합을 해보면 ‘His’와 ‘Story’의 합친 단어이다. 결국 역사라는 것은 그의 이야기를 두고 맞춘 것이다. 단어 선택 점에서 결국 남녀라는 이분법적인 구도가 영어단어에서 나온 것처럼 ‘History’라는 것은 남자들의 이야기고, 거기서 남자가 아닌 여자들은 분리되어 가려진 이야기란 점이다. 여자가 나오는 역사적인 사건들은 많지 않다는 점과 있다고 하여도 ‘History’의 보조 내지 부연적인 내용만 첨부하는 수준이 되었다.

 

 

만약 ‘History’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 발생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런 일은 있어서도 안 되고, 만약 일어나면 어떻게든 눌러버리려고 한다. 가령 이 책에서 등장한 어느 인류학자인 여성 학자도 영국에서 단지 자신이 여자라는 이유로 정당한 조건에서 차지할 수 있는 위치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영국에서는 전형적인 백인 금발 남성을 중시하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남성중심의 문화, 물론 영국에 엘리자베스 여왕의 경우, 여성이면서도 여왕이란 업무를 수행하였으나, 그녀는 자신의 여성이길 인정하기보단 남성이 가지고 있는 것이 나에게도 있다고 선언한다.

 

 

남성이 지배하거나 혹은 남성의 지배력을 빼앗거나 공유하거나 협상하는 방법들이 권력이라는 ‘History’에서 늘 다른 모습으로 나왔다. 문제는 이런 ‘History’ 요소들은 과거에도 그렇지만 앞으로 계속 일어난다는 것이 문제다. 남자 중심의 사회에서 남자들은 생명의 탄생과 보장보다는 생명의 파괴와 해체라는 것으로 자신들을 돋보이려 한 점이다. 책 내용은 ‘History’이기에 역사학적으로 보이나 책의 내용을 계속 읽다보면 인류학에 더 가까운 내용이다. 또한 남성의 이야기 뒤에 가려진 폭력과 억압, 착취의 역사 속에서 희생된 여성과 소수성애자들까지 생각하면 여성학적인 부분도 같이 보인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환경생태와 생물진화적인 부분까지 나오니 단순히 ‘History’는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연과 문화 그리고 지구 그 자체까지 담론이 확대된다. 바로 남자들의 이야기가 모든 것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남자의 폭력적인 요소에서 피라는 것이 조금 인상 깊은데, 이 글을 적는 나 역시 남자라서 다소 의아한 부분으로 여성들은 임신을 하기 위해 배란을 걸쳐 월경이란 생리적 반응을 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생리혈이 난관으로 빠져나와 몸 밖으로 배출하게 되는 것이다. 생리를 하게 되면 남자인 나로서는 그 고통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피가 나오는 모습조차 알지 못하기에 뭐라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나 여자들이 피를 몸 밖으로 방출하면 남자들은 방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열등의식이 결국 폭력적 행위로 통해 피를 본다는 점이다. 자신의 피를 보지 못하므로 상대방의 피를 보는 것에서 말이다. 자신은 생명을 창출하지 못하기에 생명을 창출하는 여성의 몸, 그것을 부정하고 싶다는 생각이 결국 생리현상에서 생기는 피를 좋지 못한 것이라 보는 것이다. 대신 남을 해치지 않은 여자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전쟁에서 타인의 피로 얼룩지는 것은 영광으로 생각한다. 남자는 타인의 피를 보고, 그 피를 보는 과정에서 상대방에 대한 폭력이 그대로 수반된다. 폭력의 결과가 결국 성과라는 것이 남자의 역사라는 점이다.

 

 

물론 생각하면 인류의 역사는 마치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다. 인류는 문화가 생성되면서 끊임없이 전쟁을 해오면서 목숨을 빼앗고, 문명과 자연을 파괴하고, 기술과 과학을 발전시켜왔다. 덕분에 인간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과학기술을 발전시켰고, 그 중심에는 항상 전쟁이란 얼굴이 있었다. 우리가 사용하는 의학기술, 자동차, 비행기, 심지어 전화기까지 전부 전쟁의 산물이었다. 우리에게 물질적인 혜택을 준 전쟁의 산물인 문명이었으나, 도리어 그것이 인류의 생명을 위협한다.

 

 

책을 읽으면서 인상 깊은 구절이 있었는데, “‘마지막 나무가 죽고, 마지막 강물이 오염되고, 마지막 물고기가 잡히고 나면, 우리는 돈을 먹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을 것이다.’라고 크리족 인디언의 속담이 잘 설명한다.”이었다. 사실 자연이란 것은 우리의 재산이 아니라 우리가 후손으로 빌려온 부채이다. 부채는 빌리면 원금에 이자까지 상환하는 것이 도리이나, 우리는 그 이자를 역으로 먹고 있다. TV,뉴스, 혹은 각종 미디어에서 말하는 것이 환경오염이다. 우리나라인 한국의 경우도 만만치 않게 그 이야기는 나온다.

 

 

1월부터 전국에 갑작스런 폭설, 3월부터 황사현상, 5월부터 시작하는 여름까지 생각하면 말이다. 봄과 가을이란 계절이 짧아지고, 여름은 점점 길어진다. 벼농사에 적합한 몬순기후인 한국이 점점 아열대기후로 변화하고 있으며, 제주도는 거의 아열대 지역으로 여겨도 무방한 정도다. 이런 문제를 야기하는 것은 결국 환경파괴이고, 환경파괴는 인간의 문명과 산업활동에 의해서다. 자연이란 존재는 같이 살아가고 보호하고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착취하고 이용해야할 대상이다. 서구의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은 자연이란 존재는 인간의 문화와 이성적 존재와 분리하였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하는 명제는 인간처럼 이성이 없는 동물은 잔혹하게 죽거나 이용되어도 문제없다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많은 동물들이 계속 착취당하고, 우리는 고기를 사서 먹을 수 있으나 질 좋은 고기보다 처리과정이 알 수 없는 고기를 먹는다. 예전에 광우병 파동이 일어날 때, 솔직히 생각하여 나는 광우병의 문제보단 도축과정에 대해 더 불안했다. 아니 사육과정이 더 불안했다. 소에게 같은 소를 갈아 만든 사료를 먹이는 것은 인간에게 같은 인간을 먹이는 행위와 같은 것이며, 도축과정에서 오물처리 문제 역시 그러하다.

 

 

닭장 속에 있는 닭의 피부에는 온갖 피부병이 도져 있었고, 돼지는 류머티스나 위장병과 같은 질병은 앓고 있었다. 그런 육질이 좋을 리도 없고, 인간에게 좋은 영양분을 주기도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먹어야 했다. 자연적으로 방목하거나 혹은 시골농촌의 농장도 소유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서는 시장경제에서 이익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심, 그리고 ‘History’는 그런 자연적으로 자라는 동물을 용납하지 않는다.

 

 

인간의 경제활동에서 개인적으로 내가 살아가는 한국에서는 토지를 이용한 부동산 경제가 대표적이다. 부동산 경제의 특징은 땅을 개발해야 그 가치가 남는다. 땅을 개발하면 토지개척을 해야 하며, 기존의 숲과 늪, 바다와 강, 심지어 지상이 아닌 지하의 지하수와 토양까지 모두 파괴해야했다. 그 덕분에 식물들의 군락이 사라지고, 동물들은 숨어버렸다. 인간에게 달콤한 꿀과 식물의 생식을 보조하던 벌들도 사라졌다. ‘History’에서는 자연이란 오로지 착취해야할 존재인 것이다. 자연의 착취에서 예전에 읽어본 하버트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에서 인간은 점점 자연을 착취하게 되자, 더 이상 자연을 착취할 수 없게 되어 인간은 인간을 착취한다고 했다.

 

 

자연을 착취는 결국 한정적이나, 인간은 계속 생식만 가능하면 영원히 착취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자연의 착취에서 인간의 감수성이 파괴되고, 인간의 삶의 조건이 퇴락하게 된다. 영국의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가들은 바로 이런 문제를 발견했다. 자연의 혜택을 주는 공원과 녹지가 사라지자 인간은 휴식처를 잃고, 심지어 건강까지 나쁘게 되었다. 녹지의 나무에서 주는 맑은 산소와 숲의 수로에서 주는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었으나, 최소한의 물과 공기를 공급받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병으로 죽게 되었다.

 

 

인간에 대한 착취는 바로 자연에 대한 착취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우리는 그런 착취로 통해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맑은 물을 마시기를 바란다. 예전에 낙동강페놀사건을 생각해도 그렇다. 산업화 과정도 좋으나, 그 결과로 페놀이나 각종 오염물질이 하천으로 방류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피부병에 걸리거나 수돗물을 불신하게 되었다. 그런 현상에서 우리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나? 자연과 감정에 대해 조화를 추구하기보다 자연을 착취하여 파괴하고, 인간의 이성만이 절대적이라고 믿는 비이성적 행위가 바로 그런 세계를 만든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인간은 과연 진화했다고 봐도 되는 것인가? 나는 인류의 문명은 진화했어도 인간 그 자체는 진화하지 못했다고 여긴다. 분명 인간은 과거보다 물질적으로 풍부하고, 수명도 전보다 길어졌다. 하지만 그만큼 병의 종류와 규모가 강력해졌으며,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는 것은 인간의 신체적 진화보다는 문명에 따른 의약기술의 발전이다. 물론 그 대가는 실험실에서 무참히 죽어가는 수많은 척추동물이 있기에 가능했다. 도리어 인간은 퇴화했다고 본다. <진화의 종말>이란 책이름처럼 인간은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이 오염되어감에 따라 자신의 몸을 직접 사용하지 않는다.

 

 

오직 도구로 이용한다. 근력이나 체력은 옛날 사람보다 못하며, 저항력 역시 옛날보다 못하다. 옛날 사람들이 수명이 짧다고 하나, 그것은 면역체계에서 백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신의 개발은 변종 병원균을 만들었다. MRSA 내지 VRSA라고 하는 슈퍼박테리아가 탄생한 것이다. 메타실린이나 반코마이신과 같은 독학 약물로도 죽일 수 없는 황색포도상구균이 나오면서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기도 하고, 에볼라나 AIDS, 삭스나 조류독감 등과 같은 이상한 바이러스가 나타나기도 했다.

 

 

인간의 과학이란 이성이 결국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고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것이다. 물질에 대한 욕망에서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처럼 일주일에 이틀 정도 3시간 이내 일하는 부시맨을 생각하면 문명인이라는 우리는 과연 행복한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길에 차가 막혀 정체된 도로 위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행복이란 가치를 물질의 혜택에서 찾고, 그것은 착취와 파괴, 환경오염으로 전해간다. 자연이란 가이아라는 대지의 여신은 생명을 주는 에로스에서 이제는 그 역으로 죽음을 전해주는 타나토스로 변해간다.

 

 

남자들의 이야기에서 배제된 여자들의 이야기와 그리고 자연의 이야기, 옛날 마녀라고 불리는 자들은 약초나 민간요법을 잘 알았다고 한다.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를 읽어봐도 마녀들은 자신의 성기나 피부에 각성제를 바른다고 한다. 지팡이를 타고 하늘을 나는 여자들은 아무리 봐도 성적욕망을 품는 여자다. 자연적인 성적욕망을 이성적 규율이란 도덕 아래 모조리 억압을 당했다. 조금이라도 이성으로 무장한 광기에 의심하거나 흠집을 내면 피가 강을 이루는 공포가 역습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지구는 더워지고, 우리의 몸은 더위를 느껴, 선풍기에도 만족하지 않아 에어컨을 작동하여 전기를 사용한다. 그 전기 역시 자연을 파괴하여 만든 에너지라는 점을 생각하면, 계속되는 자연의 파괴는 인간의 욕망을 채울 수가 없게 되었다. 자연의 공존은 결국 어머니의 세계로 돌아가는 길이다. 인간의 태초적인 감정을 살리고, 일어버린 기억과 신화도 찾아야 한다. 물론 급작스럽게 되돌리거나 모두 뒤집는 것은 아니다. 조금씩 공존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 점이다.

 

 

공존의 길을 열어가는 것은 인식의 전환이다. 인식하는 계기가 이미 손을 써도 소용없을 때 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위기를 넘어 절망의 인식보다 사전에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책을 보면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여자와 남자의 이분법적인 관계에서 매릴린 옐롬의 <유방의 역사>라는 책이 생각났다. ‘His-story’ 속에 잃어버린 ‘Her-story’를 찾아 ‘whole-story’로 되는 것이 답이라는 게 이 책의 주장이다. 그런 점에서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남자의 공격성은 인간 그 본질적인 것보다 차라리 마빈 해리스가 제기한 것이 더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남자가 공격적인 것은 남자의 심리적인 바탕이 공격적인 것보다 문화적으로 공격적으로 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공격적인 것이 문화적이라면 비공격적인 것도 문화적으로 가능하다. 그 가능성은 공존의 세계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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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X소나기 - Seed Novel
류은가람 지음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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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소나기>를 처음 받아보는 순간 나는 황순원 선생님의 단편소설 <소나기>보다는 부활3집의 소나기가 생각났다. 왜 그럴까? 분명히 제목을 보면 <소나기×소나기>이고, 읽다보면 그런 느낌이 물씬 난다. 주인공 김군 역시 시를 읽다가 황순원 작가에 대한 애증의 눈빛과 그의 저서인 <소나기>를 잡고 몇 번이나 보고 또 본다. 그 책이 자신의 손에 떠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소나기는 대부분 국어 교과과정에서 소개되기도 하고, 교과서를 읽는 것에서 조금 더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라면 소설을 읽게 된다.

 

소설을 읽게 되면 알겠지만, 그렇게 좋은 이야기로 마무리가 아니다. 아련한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마지막으로 소년과 같이 놀던 옷을 자신의 수의 대신 입혀달라는 소녀의 소원은 왠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에 작은 구멍을 내는 것 같다. 그런 것일까? 부활3집에 나온 소나기 역시 그런 감정을 충실히 살렸다. 하지만 더 부활3집의 소나기가 더 가슴을 쓰리게 하는 이유는 그룹사운드 부활의 리더 겸 기타리스트인 김태원 씨가 메모한 글이다. “아! 재기가 바람으로 떠났다.” 부활3집 김재기 씨는 단 3곡의 노래만 녹음하고 사라졌다.

 

그래서 부활3집 1번곡이 소나기라는 점에서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보다는 나에겐 김재기의 목소리에서 소나기를 느낀다. 학창시절부터 꾸준히 듣던 부활3집을 오늘도 변함없이 출근길과 퇴근길에서 들었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어느 단편 소설 속에 넌 떠오르지, 표정 없이 미소 짓던 모습들이.

그것은 눈부신 색으로 쓰여 지다, 어느 샌가 아쉬움으로 스쳐 지났지.

한참 피어나던 장면에서 넌 떠나가려하네, 벌써부터 정해져있던 얘기인 듯.

온통 푸른빛으로 그려지다, 급히도 회색빛으로 지워지었지.

어느새 너는 그렇게 멈추었나, 작은 시간에 세상을 많이도 적셨네.

시작하는 듯 끝이나버린, 소설 속에 너무도 많은걸 적었네.

한참 피어나던 장면에서 넌 떠나가려하네, 벌써부터 정해져있던 얘기인 듯.

온통 푸른빛으로 그려지다, 급히도 회색빛으로 지워지었지.

어느새 너는 그렇게 멈추었나, 작은 시간에 세상을 많이도 적셨네.

시작하는 듯 끝이나버린 소설 속에 너무도 많은걸 적었네.

그렇게 멈추었나! 작은 시간에 세상을 많이도 적셨네.

시작하는 듯 끝이나버린 소설 속에 너무도 많은걸 적었네.

 

 

시작하는 듯 끝이 나버린 그 가사 가절에 담긴 아쉬움과 적막함 그리고 알 수 없는 기대하고 싶은 감정들, 부활3집에 담긴 소나기는 그렇게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듣고 있는 노래다. 물론 다른 노래도 있지만, 이 노래만큼 뭔가 아련한 기분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마 다시 올 수 없는 그런 허무함이 아닐까 싶다. 라이트노벨 <소나기×소나기>는 분명 작품 속성에 따라 나름 재미를 위해 억지로 상황을 연출하는 모습이 나온다. 학교에 3대 그룹인 학생회, 일진세력, 기숙사를 말이다. 평소 일본에서 나오는 라이트노벨보단 국내에서 나오는 라이트노벨을 읽다보면 뭔가 한국의 라이트노벨에서는 학교생활이 환상적인 공간으로 부여하기보단 항상 억압의 공간으로 보이는 것 같다.

 

이양과 김군이 다니는 학교를 보면 0교시부터 시작하여 밤 11시까지 이어지는 야간자율학습, 기숙사 생활의 엄격함과 점심시간에 운동장에 뛰어나가려는 젊은 혈기, 그 젊은 혈기를 보충하기 위해 식당에서 붐비는 장면은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여기까지 과장되지 않으나, 쉬는 시간만 보더라도 그 짧은 10분 동안 매점까지 뛰어가던 예전의 모습을 생각난다. 1학년 때는 그나마 학교 건물 1층에 있었으나 3학년이 되면서 제 위에 있는 3층으로 올라간 기억이 난다. 계단 1층의 차이라고 하나 그것은 분명 엄청난 페널티가 부여된다. 내려가는 계단은 수월할 줄 몰라도 올라가는 그 시간은 체력을 소비시키기 충분하다.

 

교사건물에서 식당매점까지 뛰어서 왕복 2분, 매점 내의 대기타고 있는 긴 줄, 생각해보면 전쟁은 현실에서 소소한 일들에서도 보인다. <소나기×소나기>에서 그런 치열한 학생들의 삶이라고 할까? 벌써 시기는 입학과 개학이 시작되는 3월인데도 그 치열함은 솔직히 옛날 생각을 나게 만든다. 단지 내가 다닌 학교는 급식자체가 제한적인 게 특징이다. 맛이 좋다고 하나 언제나 병영의 조식, 중식, 석식이 같은 메뉴라면 학교식당의 맛이 좋아도 한계가 온다. 그런 것까지 묘사한 것이 <소나기×소나기>이였다.

 

철저히 학교 안의 생활, 학교 안에서 그 젊은 혈기들이 같이 잠잘 때를 제외하고 같이 있는 것만큼 지루하고도 지겹고 때로는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을 어찌하랴? 바로 그 운명과 같은 만남이 바로 김군과 이양에게 기다리고 있었다. 작가가 네이밍 센스가 없기보단 마치 막 붙인 이름들은 누구나 김군과 이양이 될 수 있다는 개연적인 요소를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물론 김군과 이양의 학교에서 보이는 좌충우돌은 왜만한 싸움꾼도 보여주지 못할 혈투였다. 작품에서 김군이 싸우고 와서 교복을 보니 형이상학적 모습이라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나는 전위적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눈에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해 말하기보단 눈에 보이나 낯설고 충격적인 모습이 더욱 단어사용으로 어울리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었다. 그 전위적인 교복이 될 수 있는 김군은 이양과의 격투를 즐기고 있었다고 할까? 수업시간에 시도 때도 없이 그것도 모자라 벌로 화단을 정리하는 도중에서 말이다. 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전에 좌의정과 우의정인 이양과 김군의 조상 할아버지가 결국 우의정인 김군의 조상님이 영의정이 되고부터 사이가 틀어졌다고 한다. 그렇게 내려오다 이양의 집안 독립운동가로 가문이 몰락하고, 김군의 집안은 거기서 무사히 눈치 보며 살았다.

 

그런 이를 빠득빠득 갈던 두 집안이 시공을 초월해 조선시대에서 대한민국까지 내려온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렇게 서로 원수처럼 여긴 2사람이 나온 작품명이 <소나기×소나기>란 점에서 차라리 <로미오×줄리엣, 줄리엣×로미오>처럼 만들어도 괜찮지 않을까 처음에 생각했다. 하지만 복선은 역시 소나기다. 그리고 소나기가 내리는 날인 비가 내리는 날은 뭔가 인간에게 감성적으로 만들기도 하고, 그 감성이 때로는 인간의 지난 과거를 다시 찾아오게 한다. 인간은 세상에서 그 무엇을 피해갈 수 있어도 자기 자신의 과거를 피해갈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이양의 과거는 이때까지 자신이 속이고 싶은 것이고, 자신은 그 환상에서 살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지는 시간적 흐름은 항상 소나기가 내리는 우울한 하늘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 곧 사건의 연결되는 접점이라고 할까? 김군과 이양의 만남에서 이양의 모습은 자신이 잊고 싶은 과거에서 환상 속에 가려진 현실, 그리고 미래를 기다리는 희망이었다. 인간은 우연에 의해 그것이 우연일지라도 필연에 의해 굴러가는 존재인 것 같다. 이양의 아버지가 노동조합위원장이고, 김군의 아버지가 공장사장이란 점이 대립할 수밖에 없는 존재를 충돌을 보여준다.

 

<소나기×소나기>를 읽기 전에 김연수 작가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라는 소설을 읽었다. 주인공 카밀라 정희재는 잃어버린 자신의 어머니, 정지은을 찾아 한국에 온다. 희재의 할아버지인 지은의 아버지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 일어난 것처럼 근로환경 개선을 위해 회사 측과 대립하고 있었다. 그런데 회사 측에 부른 용역깡패가 지은의 아버지의 동료들을 무참히 폭력을 가해 사람이 죽게 되고, 지은의 아버지는 그런 절망에 이기지 못해 자살을 선택했다. 지은의 아버지는 노동자 프롤레타리아, 그리고 정희재가 다시 2012년에 한국에 올 때,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이희재의 아버지는 부르주아에서 <소나기×소나기>에서도 그런 비슷한 구도가 보인다.

 

이양의 아버지는 노동조합위원장에서 프롤레타리아였고, 김군의 아버지는 부르주아란 사장이었다. 당시 IMF라는 금융위기로 모두 어려워할 때 두 사람의 아버지는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와 같이 대립하기보단 오히려 화해를 선택했다. 그러나 플롯이란 장치란 그렇게 잘 되게 만들지 않는다. 비오는 날 교통사고로 모두 잃어버린 이양, 그런 이양이 이때까지 자신을 속이고 거짓된 환상에서 살았다. 그런 그녀 앞에 김군이란 그 환상을 부수고, 혼자만 보이던 할아버지의 존재마저 부정당했다.

 

라이트노벨치고는 상당히 재미도 부각했었고, 나름 현실적 학교생활을 보여주었으며, 게다가 역사적 사실을 하나의 설정으로 집어넣었다. 그래서 생각보다 매우 의외의 느낌을 받았다. 한국적 라이트노벨의 특성일까? 그것은 역사적 사실적 조건들을 많이 부여한 느낌에서 말이다. 환상적인 부분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이양의 환상에 살던 할아버지는 이양의 세계만 진실로 존재했던 환상인 것이다. 그 환상을 깨는 것이 속죄인 소년 김군, 그는 원래부터 웃지 못했다. 아니 웃고 싶어도 웃을 수 없는 루게릭병이었다.

 

얼굴의 근육이 마비되어 표정조차 짓지 못하고, 최후에 전신이 마비되어 호흡곤란으로 사망하는 무서운 병이다. <소나기×소나기>이라는 제목과 같이 그 소나기는 2가지로 양분되었다. 두 사람 관계에서 다시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소년이 했다는 점이고, 최후에 관에 담긴 채 이승과 이별하는 사람은 소녀였으나, <소나기×소나기>에서는 소년이야 했다. 자신의 목숨에 대한 미련 없이 그저 3주 동안 추억을 만들려고 했다. 수술에 대한 비관적 태도에 김군은 지금 당장 죽는다고 해도 미련을 버리고 가고 싶었다. 죄책감이란 미련을 말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양과 싸우면서 김군은 가슴 한편에 살고 싶다! 라는 의지가 들은 것이다.

 

이양에 대한 사죄에 대해 모든 것을 포기한 김군이나 그런 김군에게 유일한 희망은 이양의 정면 돌파였다. 야구를 무척이나 좋아하던 김군, 그는 중학교까지 야구선수생활하면서 죽어라 야구만 했다. 하지만 병이 심각해지면 왼손에 마비가 오고, 그 마비가 자신 스스로에 대한 삶의 의지를 죽게 만들었다. 공항 가는 길, 비가 무척이나 내린 고속도로에서 이양의 던진 야구공에 대해 배트로 휘두른 김군은 희망을 찾은 것이다. 그래서 황순원의 <소나기>는 미완의 만남이라면, 라이트노벨 <소나기×소나기>는 미완의 이야기로 끝난 것이다.

 

아니라면 시작하는 듯 끝이나버린 것이 아니라 끝이 나듯이 시작하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소녀는 5월 무더운 햇살을 바라보며 화단 앞에서 미소 짓는다. 비가 오는 만남의 3월의 비와 조금 이를 것만 같은 5월의 장마를 말이다. 비는 대지의 생명에게 생명을 주듯이 흐린 날에 내리는 비는 우울함만이 아니라 희망도 올 것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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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14-05-02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라노벨 치고는?

하. 문하~악 하시는 분이신가베. 길게 늘어놨지 도통 핵심은 못잡는 글일세!

만화애니비평 2014-05-03 00:08   좋아요 0 | URL
아마 그런가봅니다.
책 내용 자체가 핵심이 없었습니다.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를 모티프로 한 것은 아는데, 결국은
사이 나쁜 아이들이 사이 좋게 된 것..끝...핵심따위 뻔한 걸 잡을 이유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