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X소나기 - Seed Novel
류은가람 지음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소나기×소나기>를 처음 받아보는 순간 나는 황순원 선생님의 단편소설 <소나기>보다는 부활3집의 소나기가 생각났다. 왜 그럴까? 분명히 제목을 보면 <소나기×소나기>이고, 읽다보면 그런 느낌이 물씬 난다. 주인공 김군 역시 시를 읽다가 황순원 작가에 대한 애증의 눈빛과 그의 저서인 <소나기>를 잡고 몇 번이나 보고 또 본다. 그 책이 자신의 손에 떠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소나기는 대부분 국어 교과과정에서 소개되기도 하고, 교과서를 읽는 것에서 조금 더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라면 소설을 읽게 된다.

 

소설을 읽게 되면 알겠지만, 그렇게 좋은 이야기로 마무리가 아니다. 아련한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마지막으로 소년과 같이 놀던 옷을 자신의 수의 대신 입혀달라는 소녀의 소원은 왠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에 작은 구멍을 내는 것 같다. 그런 것일까? 부활3집에 나온 소나기 역시 그런 감정을 충실히 살렸다. 하지만 더 부활3집의 소나기가 더 가슴을 쓰리게 하는 이유는 그룹사운드 부활의 리더 겸 기타리스트인 김태원 씨가 메모한 글이다. “아! 재기가 바람으로 떠났다.” 부활3집 김재기 씨는 단 3곡의 노래만 녹음하고 사라졌다.

 

그래서 부활3집 1번곡이 소나기라는 점에서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보다는 나에겐 김재기의 목소리에서 소나기를 느낀다. 학창시절부터 꾸준히 듣던 부활3집을 오늘도 변함없이 출근길과 퇴근길에서 들었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어느 단편 소설 속에 넌 떠오르지, 표정 없이 미소 짓던 모습들이.

그것은 눈부신 색으로 쓰여 지다, 어느 샌가 아쉬움으로 스쳐 지났지.

한참 피어나던 장면에서 넌 떠나가려하네, 벌써부터 정해져있던 얘기인 듯.

온통 푸른빛으로 그려지다, 급히도 회색빛으로 지워지었지.

어느새 너는 그렇게 멈추었나, 작은 시간에 세상을 많이도 적셨네.

시작하는 듯 끝이나버린, 소설 속에 너무도 많은걸 적었네.

한참 피어나던 장면에서 넌 떠나가려하네, 벌써부터 정해져있던 얘기인 듯.

온통 푸른빛으로 그려지다, 급히도 회색빛으로 지워지었지.

어느새 너는 그렇게 멈추었나, 작은 시간에 세상을 많이도 적셨네.

시작하는 듯 끝이나버린 소설 속에 너무도 많은걸 적었네.

그렇게 멈추었나! 작은 시간에 세상을 많이도 적셨네.

시작하는 듯 끝이나버린 소설 속에 너무도 많은걸 적었네.

 

 

시작하는 듯 끝이 나버린 그 가사 가절에 담긴 아쉬움과 적막함 그리고 알 수 없는 기대하고 싶은 감정들, 부활3집에 담긴 소나기는 그렇게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듣고 있는 노래다. 물론 다른 노래도 있지만, 이 노래만큼 뭔가 아련한 기분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마 다시 올 수 없는 그런 허무함이 아닐까 싶다. 라이트노벨 <소나기×소나기>는 분명 작품 속성에 따라 나름 재미를 위해 억지로 상황을 연출하는 모습이 나온다. 학교에 3대 그룹인 학생회, 일진세력, 기숙사를 말이다. 평소 일본에서 나오는 라이트노벨보단 국내에서 나오는 라이트노벨을 읽다보면 뭔가 한국의 라이트노벨에서는 학교생활이 환상적인 공간으로 부여하기보단 항상 억압의 공간으로 보이는 것 같다.

 

이양과 김군이 다니는 학교를 보면 0교시부터 시작하여 밤 11시까지 이어지는 야간자율학습, 기숙사 생활의 엄격함과 점심시간에 운동장에 뛰어나가려는 젊은 혈기, 그 젊은 혈기를 보충하기 위해 식당에서 붐비는 장면은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여기까지 과장되지 않으나, 쉬는 시간만 보더라도 그 짧은 10분 동안 매점까지 뛰어가던 예전의 모습을 생각난다. 1학년 때는 그나마 학교 건물 1층에 있었으나 3학년이 되면서 제 위에 있는 3층으로 올라간 기억이 난다. 계단 1층의 차이라고 하나 그것은 분명 엄청난 페널티가 부여된다. 내려가는 계단은 수월할 줄 몰라도 올라가는 그 시간은 체력을 소비시키기 충분하다.

 

교사건물에서 식당매점까지 뛰어서 왕복 2분, 매점 내의 대기타고 있는 긴 줄, 생각해보면 전쟁은 현실에서 소소한 일들에서도 보인다. <소나기×소나기>에서 그런 치열한 학생들의 삶이라고 할까? 벌써 시기는 입학과 개학이 시작되는 3월인데도 그 치열함은 솔직히 옛날 생각을 나게 만든다. 단지 내가 다닌 학교는 급식자체가 제한적인 게 특징이다. 맛이 좋다고 하나 언제나 병영의 조식, 중식, 석식이 같은 메뉴라면 학교식당의 맛이 좋아도 한계가 온다. 그런 것까지 묘사한 것이 <소나기×소나기>이였다.

 

철저히 학교 안의 생활, 학교 안에서 그 젊은 혈기들이 같이 잠잘 때를 제외하고 같이 있는 것만큼 지루하고도 지겹고 때로는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을 어찌하랴? 바로 그 운명과 같은 만남이 바로 김군과 이양에게 기다리고 있었다. 작가가 네이밍 센스가 없기보단 마치 막 붙인 이름들은 누구나 김군과 이양이 될 수 있다는 개연적인 요소를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물론 김군과 이양의 학교에서 보이는 좌충우돌은 왜만한 싸움꾼도 보여주지 못할 혈투였다. 작품에서 김군이 싸우고 와서 교복을 보니 형이상학적 모습이라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나는 전위적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눈에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해 말하기보단 눈에 보이나 낯설고 충격적인 모습이 더욱 단어사용으로 어울리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었다. 그 전위적인 교복이 될 수 있는 김군은 이양과의 격투를 즐기고 있었다고 할까? 수업시간에 시도 때도 없이 그것도 모자라 벌로 화단을 정리하는 도중에서 말이다. 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전에 좌의정과 우의정인 이양과 김군의 조상 할아버지가 결국 우의정인 김군의 조상님이 영의정이 되고부터 사이가 틀어졌다고 한다. 그렇게 내려오다 이양의 집안 독립운동가로 가문이 몰락하고, 김군의 집안은 거기서 무사히 눈치 보며 살았다.

 

그런 이를 빠득빠득 갈던 두 집안이 시공을 초월해 조선시대에서 대한민국까지 내려온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렇게 서로 원수처럼 여긴 2사람이 나온 작품명이 <소나기×소나기>란 점에서 차라리 <로미오×줄리엣, 줄리엣×로미오>처럼 만들어도 괜찮지 않을까 처음에 생각했다. 하지만 복선은 역시 소나기다. 그리고 소나기가 내리는 날인 비가 내리는 날은 뭔가 인간에게 감성적으로 만들기도 하고, 그 감성이 때로는 인간의 지난 과거를 다시 찾아오게 한다. 인간은 세상에서 그 무엇을 피해갈 수 있어도 자기 자신의 과거를 피해갈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이양의 과거는 이때까지 자신이 속이고 싶은 것이고, 자신은 그 환상에서 살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지는 시간적 흐름은 항상 소나기가 내리는 우울한 하늘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 곧 사건의 연결되는 접점이라고 할까? 김군과 이양의 만남에서 이양의 모습은 자신이 잊고 싶은 과거에서 환상 속에 가려진 현실, 그리고 미래를 기다리는 희망이었다. 인간은 우연에 의해 그것이 우연일지라도 필연에 의해 굴러가는 존재인 것 같다. 이양의 아버지가 노동조합위원장이고, 김군의 아버지가 공장사장이란 점이 대립할 수밖에 없는 존재를 충돌을 보여준다.

 

<소나기×소나기>를 읽기 전에 김연수 작가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라는 소설을 읽었다. 주인공 카밀라 정희재는 잃어버린 자신의 어머니, 정지은을 찾아 한국에 온다. 희재의 할아버지인 지은의 아버지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 일어난 것처럼 근로환경 개선을 위해 회사 측과 대립하고 있었다. 그런데 회사 측에 부른 용역깡패가 지은의 아버지의 동료들을 무참히 폭력을 가해 사람이 죽게 되고, 지은의 아버지는 그런 절망에 이기지 못해 자살을 선택했다. 지은의 아버지는 노동자 프롤레타리아, 그리고 정희재가 다시 2012년에 한국에 올 때,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이희재의 아버지는 부르주아에서 <소나기×소나기>에서도 그런 비슷한 구도가 보인다.

 

이양의 아버지는 노동조합위원장에서 프롤레타리아였고, 김군의 아버지는 부르주아란 사장이었다. 당시 IMF라는 금융위기로 모두 어려워할 때 두 사람의 아버지는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와 같이 대립하기보단 오히려 화해를 선택했다. 그러나 플롯이란 장치란 그렇게 잘 되게 만들지 않는다. 비오는 날 교통사고로 모두 잃어버린 이양, 그런 이양이 이때까지 자신을 속이고 거짓된 환상에서 살았다. 그런 그녀 앞에 김군이란 그 환상을 부수고, 혼자만 보이던 할아버지의 존재마저 부정당했다.

 

라이트노벨치고는 상당히 재미도 부각했었고, 나름 현실적 학교생활을 보여주었으며, 게다가 역사적 사실을 하나의 설정으로 집어넣었다. 그래서 생각보다 매우 의외의 느낌을 받았다. 한국적 라이트노벨의 특성일까? 그것은 역사적 사실적 조건들을 많이 부여한 느낌에서 말이다. 환상적인 부분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이양의 환상에 살던 할아버지는 이양의 세계만 진실로 존재했던 환상인 것이다. 그 환상을 깨는 것이 속죄인 소년 김군, 그는 원래부터 웃지 못했다. 아니 웃고 싶어도 웃을 수 없는 루게릭병이었다.

 

얼굴의 근육이 마비되어 표정조차 짓지 못하고, 최후에 전신이 마비되어 호흡곤란으로 사망하는 무서운 병이다. <소나기×소나기>이라는 제목과 같이 그 소나기는 2가지로 양분되었다. 두 사람 관계에서 다시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소년이 했다는 점이고, 최후에 관에 담긴 채 이승과 이별하는 사람은 소녀였으나, <소나기×소나기>에서는 소년이야 했다. 자신의 목숨에 대한 미련 없이 그저 3주 동안 추억을 만들려고 했다. 수술에 대한 비관적 태도에 김군은 지금 당장 죽는다고 해도 미련을 버리고 가고 싶었다. 죄책감이란 미련을 말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양과 싸우면서 김군은 가슴 한편에 살고 싶다! 라는 의지가 들은 것이다.

 

이양에 대한 사죄에 대해 모든 것을 포기한 김군이나 그런 김군에게 유일한 희망은 이양의 정면 돌파였다. 야구를 무척이나 좋아하던 김군, 그는 중학교까지 야구선수생활하면서 죽어라 야구만 했다. 하지만 병이 심각해지면 왼손에 마비가 오고, 그 마비가 자신 스스로에 대한 삶의 의지를 죽게 만들었다. 공항 가는 길, 비가 무척이나 내린 고속도로에서 이양의 던진 야구공에 대해 배트로 휘두른 김군은 희망을 찾은 것이다. 그래서 황순원의 <소나기>는 미완의 만남이라면, 라이트노벨 <소나기×소나기>는 미완의 이야기로 끝난 것이다.

 

아니라면 시작하는 듯 끝이나버린 것이 아니라 끝이 나듯이 시작하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소녀는 5월 무더운 햇살을 바라보며 화단 앞에서 미소 짓는다. 비가 오는 만남의 3월의 비와 조금 이를 것만 같은 5월의 장마를 말이다. 비는 대지의 생명에게 생명을 주듯이 흐린 날에 내리는 비는 우울함만이 아니라 희망도 올 것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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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14-05-02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라노벨 치고는?

하. 문하~악 하시는 분이신가베. 길게 늘어놨지 도통 핵심은 못잡는 글일세!

만화애니비평 2014-05-03 00:08   좋아요 0 | URL
아마 그런가봅니다.
책 내용 자체가 핵심이 없었습니다.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를 모티프로 한 것은 아는데, 결국은
사이 나쁜 아이들이 사이 좋게 된 것..끝...핵심따위 뻔한 걸 잡을 이유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