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Story - 역사라고 불리는 그들만의 이야기
닉 테일러 지음, 엄연수 옮김 / 글과생각 / 2013년 6월
평점 :
품절


역사라는 단어를 영어단어로 찾아보면 ‘History’라고 한다. ‘History’에 대해 단어를 다시 재분리 및 조합을 해보면 ‘His’와 ‘Story’의 합친 단어이다. 결국 역사라는 것은 그의 이야기를 두고 맞춘 것이다. 단어 선택 점에서 결국 남녀라는 이분법적인 구도가 영어단어에서 나온 것처럼 ‘History’라는 것은 남자들의 이야기고, 거기서 남자가 아닌 여자들은 분리되어 가려진 이야기란 점이다. 여자가 나오는 역사적인 사건들은 많지 않다는 점과 있다고 하여도 ‘History’의 보조 내지 부연적인 내용만 첨부하는 수준이 되었다.

 

 

만약 ‘History’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 발생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런 일은 있어서도 안 되고, 만약 일어나면 어떻게든 눌러버리려고 한다. 가령 이 책에서 등장한 어느 인류학자인 여성 학자도 영국에서 단지 자신이 여자라는 이유로 정당한 조건에서 차지할 수 있는 위치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영국에서는 전형적인 백인 금발 남성을 중시하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남성중심의 문화, 물론 영국에 엘리자베스 여왕의 경우, 여성이면서도 여왕이란 업무를 수행하였으나, 그녀는 자신의 여성이길 인정하기보단 남성이 가지고 있는 것이 나에게도 있다고 선언한다.

 

 

남성이 지배하거나 혹은 남성의 지배력을 빼앗거나 공유하거나 협상하는 방법들이 권력이라는 ‘History’에서 늘 다른 모습으로 나왔다. 문제는 이런 ‘History’ 요소들은 과거에도 그렇지만 앞으로 계속 일어난다는 것이 문제다. 남자 중심의 사회에서 남자들은 생명의 탄생과 보장보다는 생명의 파괴와 해체라는 것으로 자신들을 돋보이려 한 점이다. 책 내용은 ‘History’이기에 역사학적으로 보이나 책의 내용을 계속 읽다보면 인류학에 더 가까운 내용이다. 또한 남성의 이야기 뒤에 가려진 폭력과 억압, 착취의 역사 속에서 희생된 여성과 소수성애자들까지 생각하면 여성학적인 부분도 같이 보인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환경생태와 생물진화적인 부분까지 나오니 단순히 ‘History’는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연과 문화 그리고 지구 그 자체까지 담론이 확대된다. 바로 남자들의 이야기가 모든 것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남자의 폭력적인 요소에서 피라는 것이 조금 인상 깊은데, 이 글을 적는 나 역시 남자라서 다소 의아한 부분으로 여성들은 임신을 하기 위해 배란을 걸쳐 월경이란 생리적 반응을 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생리혈이 난관으로 빠져나와 몸 밖으로 배출하게 되는 것이다. 생리를 하게 되면 남자인 나로서는 그 고통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피가 나오는 모습조차 알지 못하기에 뭐라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나 여자들이 피를 몸 밖으로 방출하면 남자들은 방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열등의식이 결국 폭력적 행위로 통해 피를 본다는 점이다. 자신의 피를 보지 못하므로 상대방의 피를 보는 것에서 말이다. 자신은 생명을 창출하지 못하기에 생명을 창출하는 여성의 몸, 그것을 부정하고 싶다는 생각이 결국 생리현상에서 생기는 피를 좋지 못한 것이라 보는 것이다. 대신 남을 해치지 않은 여자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전쟁에서 타인의 피로 얼룩지는 것은 영광으로 생각한다. 남자는 타인의 피를 보고, 그 피를 보는 과정에서 상대방에 대한 폭력이 그대로 수반된다. 폭력의 결과가 결국 성과라는 것이 남자의 역사라는 점이다.

 

 

물론 생각하면 인류의 역사는 마치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다. 인류는 문화가 생성되면서 끊임없이 전쟁을 해오면서 목숨을 빼앗고, 문명과 자연을 파괴하고, 기술과 과학을 발전시켜왔다. 덕분에 인간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과학기술을 발전시켰고, 그 중심에는 항상 전쟁이란 얼굴이 있었다. 우리가 사용하는 의학기술, 자동차, 비행기, 심지어 전화기까지 전부 전쟁의 산물이었다. 우리에게 물질적인 혜택을 준 전쟁의 산물인 문명이었으나, 도리어 그것이 인류의 생명을 위협한다.

 

 

책을 읽으면서 인상 깊은 구절이 있었는데, “‘마지막 나무가 죽고, 마지막 강물이 오염되고, 마지막 물고기가 잡히고 나면, 우리는 돈을 먹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을 것이다.’라고 크리족 인디언의 속담이 잘 설명한다.”이었다. 사실 자연이란 것은 우리의 재산이 아니라 우리가 후손으로 빌려온 부채이다. 부채는 빌리면 원금에 이자까지 상환하는 것이 도리이나, 우리는 그 이자를 역으로 먹고 있다. TV,뉴스, 혹은 각종 미디어에서 말하는 것이 환경오염이다. 우리나라인 한국의 경우도 만만치 않게 그 이야기는 나온다.

 

 

1월부터 전국에 갑작스런 폭설, 3월부터 황사현상, 5월부터 시작하는 여름까지 생각하면 말이다. 봄과 가을이란 계절이 짧아지고, 여름은 점점 길어진다. 벼농사에 적합한 몬순기후인 한국이 점점 아열대기후로 변화하고 있으며, 제주도는 거의 아열대 지역으로 여겨도 무방한 정도다. 이런 문제를 야기하는 것은 결국 환경파괴이고, 환경파괴는 인간의 문명과 산업활동에 의해서다. 자연이란 존재는 같이 살아가고 보호하고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착취하고 이용해야할 대상이다. 서구의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은 자연이란 존재는 인간의 문화와 이성적 존재와 분리하였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하는 명제는 인간처럼 이성이 없는 동물은 잔혹하게 죽거나 이용되어도 문제없다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많은 동물들이 계속 착취당하고, 우리는 고기를 사서 먹을 수 있으나 질 좋은 고기보다 처리과정이 알 수 없는 고기를 먹는다. 예전에 광우병 파동이 일어날 때, 솔직히 생각하여 나는 광우병의 문제보단 도축과정에 대해 더 불안했다. 아니 사육과정이 더 불안했다. 소에게 같은 소를 갈아 만든 사료를 먹이는 것은 인간에게 같은 인간을 먹이는 행위와 같은 것이며, 도축과정에서 오물처리 문제 역시 그러하다.

 

 

닭장 속에 있는 닭의 피부에는 온갖 피부병이 도져 있었고, 돼지는 류머티스나 위장병과 같은 질병은 앓고 있었다. 그런 육질이 좋을 리도 없고, 인간에게 좋은 영양분을 주기도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먹어야 했다. 자연적으로 방목하거나 혹은 시골농촌의 농장도 소유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서는 시장경제에서 이익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심, 그리고 ‘History’는 그런 자연적으로 자라는 동물을 용납하지 않는다.

 

 

인간의 경제활동에서 개인적으로 내가 살아가는 한국에서는 토지를 이용한 부동산 경제가 대표적이다. 부동산 경제의 특징은 땅을 개발해야 그 가치가 남는다. 땅을 개발하면 토지개척을 해야 하며, 기존의 숲과 늪, 바다와 강, 심지어 지상이 아닌 지하의 지하수와 토양까지 모두 파괴해야했다. 그 덕분에 식물들의 군락이 사라지고, 동물들은 숨어버렸다. 인간에게 달콤한 꿀과 식물의 생식을 보조하던 벌들도 사라졌다. ‘History’에서는 자연이란 오로지 착취해야할 존재인 것이다. 자연의 착취에서 예전에 읽어본 하버트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에서 인간은 점점 자연을 착취하게 되자, 더 이상 자연을 착취할 수 없게 되어 인간은 인간을 착취한다고 했다.

 

 

자연을 착취는 결국 한정적이나, 인간은 계속 생식만 가능하면 영원히 착취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자연의 착취에서 인간의 감수성이 파괴되고, 인간의 삶의 조건이 퇴락하게 된다. 영국의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가들은 바로 이런 문제를 발견했다. 자연의 혜택을 주는 공원과 녹지가 사라지자 인간은 휴식처를 잃고, 심지어 건강까지 나쁘게 되었다. 녹지의 나무에서 주는 맑은 산소와 숲의 수로에서 주는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었으나, 최소한의 물과 공기를 공급받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병으로 죽게 되었다.

 

 

인간에 대한 착취는 바로 자연에 대한 착취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우리는 그런 착취로 통해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맑은 물을 마시기를 바란다. 예전에 낙동강페놀사건을 생각해도 그렇다. 산업화 과정도 좋으나, 그 결과로 페놀이나 각종 오염물질이 하천으로 방류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피부병에 걸리거나 수돗물을 불신하게 되었다. 그런 현상에서 우리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나? 자연과 감정에 대해 조화를 추구하기보다 자연을 착취하여 파괴하고, 인간의 이성만이 절대적이라고 믿는 비이성적 행위가 바로 그런 세계를 만든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인간은 과연 진화했다고 봐도 되는 것인가? 나는 인류의 문명은 진화했어도 인간 그 자체는 진화하지 못했다고 여긴다. 분명 인간은 과거보다 물질적으로 풍부하고, 수명도 전보다 길어졌다. 하지만 그만큼 병의 종류와 규모가 강력해졌으며,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는 것은 인간의 신체적 진화보다는 문명에 따른 의약기술의 발전이다. 물론 그 대가는 실험실에서 무참히 죽어가는 수많은 척추동물이 있기에 가능했다. 도리어 인간은 퇴화했다고 본다. <진화의 종말>이란 책이름처럼 인간은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이 오염되어감에 따라 자신의 몸을 직접 사용하지 않는다.

 

 

오직 도구로 이용한다. 근력이나 체력은 옛날 사람보다 못하며, 저항력 역시 옛날보다 못하다. 옛날 사람들이 수명이 짧다고 하나, 그것은 면역체계에서 백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신의 개발은 변종 병원균을 만들었다. MRSA 내지 VRSA라고 하는 슈퍼박테리아가 탄생한 것이다. 메타실린이나 반코마이신과 같은 독학 약물로도 죽일 수 없는 황색포도상구균이 나오면서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기도 하고, 에볼라나 AIDS, 삭스나 조류독감 등과 같은 이상한 바이러스가 나타나기도 했다.

 

 

인간의 과학이란 이성이 결국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고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것이다. 물질에 대한 욕망에서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처럼 일주일에 이틀 정도 3시간 이내 일하는 부시맨을 생각하면 문명인이라는 우리는 과연 행복한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길에 차가 막혀 정체된 도로 위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행복이란 가치를 물질의 혜택에서 찾고, 그것은 착취와 파괴, 환경오염으로 전해간다. 자연이란 가이아라는 대지의 여신은 생명을 주는 에로스에서 이제는 그 역으로 죽음을 전해주는 타나토스로 변해간다.

 

 

남자들의 이야기에서 배제된 여자들의 이야기와 그리고 자연의 이야기, 옛날 마녀라고 불리는 자들은 약초나 민간요법을 잘 알았다고 한다.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를 읽어봐도 마녀들은 자신의 성기나 피부에 각성제를 바른다고 한다. 지팡이를 타고 하늘을 나는 여자들은 아무리 봐도 성적욕망을 품는 여자다. 자연적인 성적욕망을 이성적 규율이란 도덕 아래 모조리 억압을 당했다. 조금이라도 이성으로 무장한 광기에 의심하거나 흠집을 내면 피가 강을 이루는 공포가 역습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지구는 더워지고, 우리의 몸은 더위를 느껴, 선풍기에도 만족하지 않아 에어컨을 작동하여 전기를 사용한다. 그 전기 역시 자연을 파괴하여 만든 에너지라는 점을 생각하면, 계속되는 자연의 파괴는 인간의 욕망을 채울 수가 없게 되었다. 자연의 공존은 결국 어머니의 세계로 돌아가는 길이다. 인간의 태초적인 감정을 살리고, 일어버린 기억과 신화도 찾아야 한다. 물론 급작스럽게 되돌리거나 모두 뒤집는 것은 아니다. 조금씩 공존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 점이다.

 

 

공존의 길을 열어가는 것은 인식의 전환이다. 인식하는 계기가 이미 손을 써도 소용없을 때 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위기를 넘어 절망의 인식보다 사전에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책을 보면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여자와 남자의 이분법적인 관계에서 매릴린 옐롬의 <유방의 역사>라는 책이 생각났다. ‘His-story’ 속에 잃어버린 ‘Her-story’를 찾아 ‘whole-story’로 되는 것이 답이라는 게 이 책의 주장이다. 그런 점에서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남자의 공격성은 인간 그 본질적인 것보다 차라리 마빈 해리스가 제기한 것이 더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남자가 공격적인 것은 남자의 심리적인 바탕이 공격적인 것보다 문화적으로 공격적으로 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공격적인 것이 문화적이라면 비공격적인 것도 문화적으로 가능하다. 그 가능성은 공존의 세계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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