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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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라는 영화가 예전에 개봉된 사실을 알았다. 평소 대중영화보다는 차라리 대중들이 기피하는 애니메이션 영화 혹은 예술영화 쪽으로 보는 편이었다. 대중들의 가치를 무시하거나 배척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중들이 보는 영화는 결국 Cliche라는 정해진 패턴을 늘 따라가야 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게다가 영화내용의 스토리와 더불어 그 스토리 안에 담론하는 의미까지 고려한다면 분명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 원작이 내포하고 있는 작가의 숨소리를 제대로 받아볼 수 없는 것이 한계라는 점이다. 작가의 글이 독자에게 문자서사로 통해 이미지를 요구한다면 영화는 그저 이미지로서 관객에게 전달된다.

 

의식적인 사고능력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수용만이 존재하기에 같은 작품이 문자서사와 영상서사로 나오는 것은 상당한 차이점이란 사실은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원작이 있는 영화를 잘 안 보려고 하는 이유는 원작에 대한 충실성과 더불어 그 충실성을 넘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영역도 같이 드러낼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다. 물론 영화 <은교>는 관람하지 않았고, 단지 소설 <은교>만을 읽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처음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주변에 듣기론 늙은 남자가 젊은 여자아이에 대한 집착적인 관심과 성불구자로서의 질투심이 있다고 한다.

 

물론 그런 장면은 소설을 읽다보면 나온다. 그는 아침 해를 바라보면서 유서를 적을 때 분명 70에 가까운 나이라고 한다. 인생의 황혼을 맞이한 것도 모자라 당뇨증세로 인해 각종 합병증으로 죽음의 문턱을 오고가고 있던 한 노초였다. 그런 노초에게 죽기 전에 만난 한은교라는 소녀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소설 제목이 <은교>라서 은(銀)과 교(橋)라는 은으로 만든 다리라고 생각했다. 막상 생각하여 은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이름조차 주변에서 본 적이 없다. 은교라는 작품이 결국 한 소녀의 이름이고, 그 한 소녀에 대해 늙은 시인과 중년을 바라보는 서지우라는 작가가 서로 라이벌 의식을 느꼈을 터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치정적인 부분과 은교에 대해 젊은 남성의 왕성한 성욕을 과시하는 서지우만의 모습만을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작품 내에서 두 남자가 한 소녀에 대해 가지는 마음은 상당히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왜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가? 혹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점이다. 은교라는 소녀는 분명 17세일 때 시인 이적요를 만났다. 이적요는 20대는 혁명을 위해 살았고, 30대는 감옥에서 살았으며, 40대 이후에는 시인으로 살았다. 누가 보더라도 그는 우리 역사에서 근대화라는 역사적 흐름에서 그 태풍의 주변에 머문 자였다.

 

본래 태풍의 눈은 항상 고요하나, 태풍의 주변은 강력한 바람과 비가 태풍이 지나가는 모든 것을 박살낸다. 군부독재시절 야당 정치인 쪽에 일한 이유로 지명수배자가 되고, 그 이전에는 가난함에 시달렸다. 그는 시인이란 엄청난 이름을 얻기 전까지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 자유를 위해 희생한 점이다. 그런 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시인 이적요는 <은교>에서 매우 뛰어난 문학시인이었다. 시적 영감과 더불어 그의 명성을 모든 이들에게 칭송받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적요는 자신의 이름처럼 적요했다. 아니 오히려 적적했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의 인생에 언제나 누군가에게 보상받지 못한 어둡고 깊은 슬픔이 있었기 때문이다. 감옥에 같이 들어왔는데, 모두 1년이 되기 전에 나가고, 그들이 다시 이적요에게 찾아와 회유하는 장면에서 그의 고집과 더불어 인격이 보인다. 그렇게 이적요는 자신의 청춘을 희생했다. 유일하게 그가 좋은 추억으로 남은 것이 D라는 한 소녀였다. 자신보다 분명히 나이가 많은 D라는 소녀가 어릴 적에 자신이 위기에 빠질 때 구해준 것이다. 부모님은 몸이 불편하여 적요에게 아무런 것도 해주지 못한다. 아마 피가 흘릴 정도로 맞은 적요와 그 적요를 문과 벽을 경계로 병든 아버지의 모습에서 자신의 미래의 모습은 병든 아버지란 사실을 복선으로 제공한 것 같았다.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아버지는 아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혹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거세를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아버지의 권위에 따른다. 적요의 아버지는 라이오스처럼 권력도 없고 그저 죽어가는 사람이고, 그는 거세의 위험을 적요에게 주지 않았다. 오히려 병이 들었기 때문에 아들을 주변의 폭력에서 구원해줄 수 없었다. 그 구원자는 D라는 소녀다. D라는 소녀의 이미지만이 유일한 적요의 안식처였다. 적요는 평생 D라는 소녀를 만나지 못한 채 외로운 인생을 보냈다. 그런 D라는 소녀가 과거의 존재했으나 현재는 그 시절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과거라는 것이 하나의 사실이기도 하나 또한 과거는 하나의 환상에 가깝다. 우리는 과거로 인해 현재를 구축하기도 하나 현재와 멀어지기도 한다. 그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적요에게 은교가 나타났다. 그것도 자신의 집에서 뜻한 햇빛을 맞으며 평온하게 낮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은교를 보자말자 늙은 시인의 마음은 마치 17세 은교처럼 17세의 소년으로 간 기분이었다. 은교가 자신과 성관계를 맺은 서지우에게 말한다. 할아부지가 오히려 더 젊다고 말이다. 육체적인 나이로 지우가 어리기에 그는 자신의 라이오스인 적요에게 충성하나 한편으로 은교로 통해 거세하고 싶었다.

 

자신의 다부진 몸과 거친 성행위로 은교를 지배할 수 있다는 집착을 말이다. 물론 적요도 은교에 대해 성적인 충동이 있었다. 하지만 지우와 달리 적요는 명곡의 팝송에서 항상 등장하는 eagles의 <Hotel California> 가사와 더불어 은교와의 성행위를 꿈꾼다. 그러나 그가 망상에서 즐기는 성행위는 지우와 다른 모습이다. 그는 은교를 하나하나 모든 것을 느끼려 했고, 지우는 오로지 자신의 페니스로서 남근적인 상징성을 보이려고 했다. 왜냐하면 지우는 자신의 작가로서 등단한 계기가 적요가 만들어준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지우는 재능이 없었고, 적요에겐 하늘이 내린 재능이 있었다. 그래도 지우는 적요를 존경하고 사랑했고, 지우는 적요가 부족한 것을 알기에 그를 보살펴 주었다. 게다가 적요는 자신의 사망 이후 모든 자신의 신변을 지우에게 부탁하려고 했다. 20대 같이 혁명을 꿈꾼 한 여성과의 짧은 추억에서 나온 자신의 친아들에게도 그러하지 않았다. 가족이란 인연의 끈에서 피보단 오히려 세월이란 물을 택했다. 아니 물보다는 술이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적요는 소주를 무척이나 좋아했으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마지막에 은교는 지우와 적요의 일기를 보고 눈물을 흘린다. 오히려 자신이 두 사람의 관계에서 소외되었다고 여겼으나, 지우의 일기를 넘어 적요의 일기를 보는 순간 얼마나 적요가 자신을 사랑했는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은교는 적요에게 할아부지라고 부른다. 자신의 친할아버지도 아닌데도, 적요는 그것이 좋다고 한다. 사실 지우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고 했기 때문이다. 스승과 제자, 그 두 사람은 마치 아버지와 아들처럼 아슬아슬한 관계가 보였기 때문이다. 어느 일정한 틀에 박힌 공간에 부자 같은 남자가 2명이 있을 때는 무척이나 가깝게 지내나, 그 사이에 여자가 1명이 들어갈 경우 그 균형을 파괴된다. 그런 소설이나 혹은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에도 많다.

 

어떻게 보면 <은교> 역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인 요소가 매우 심하게 반영된 것 같았다. 대신 남근중심적인 사회에서 <은교>는 탈(脫)남성적인 권위의식을 말하려고 한 것 같다. 이지적이고 늙은 남자와 감성적이고 어린 여자는 이분법적인 요소를 지닌다. 인간에게 자연과 문명이란 것은 언제나 자연은 문명에게 속박되어 지배당해야 하는 존재다. 하지만 은교는 오히려 자연이란 소녀라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감대로 움직인다. 움직이지 못할 때는 오직 강제로 지우의 손에 이끌려 성행위를 할 때이다.

 

소녀에서 이미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혹은 자신의 처녀성을 떼어버린 것에서도 할아부지라고 부른 적요의 글이 은교에게 더 크게 닿은 이유는 은교만이 유일한 적요의 어린 신부이고 소녀이고 아름다운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아직 어린 중고등학생 아니 초등학교에 다니는 남자아이조차도 자신이 원하는 여자와 같이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 <나만의 공간>에서 개인적으로 미학자로서 좋아하는 진중권 교수의 이야기가 인상이 깊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아이에 대해 알몸이 되어 같이 이불에 있는 꿈을 꾸었는데, 그것이 성행위인지 아닌지 그때는 구분하지 못했다고 한다.

 

요새처럼 더욱 발육이 좋은 아이들이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은교가 눈물을 흘린 이유, 그것은 은교에 대해 느끼는 적요의 사랑은 몸은 70이란 Seventy일지 모르나, 은교를 만나 자신의 감정에 대한 사랑은 Seventeen이었다는 점이다. 17과 70이란 시간적인 한계는 육체적으로 분명 존재하나 적요는 그것을 넘고자 했으나, 이미 검버섯이 피어나는 썩어가는 자신의 육체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것을 알기에 그 한계를 넘고자 하는 금기를 깨고 싶은 신화적 욕망이 바로 <은교>라는 소설인 것 같았다.

 

<은교>라는 소설에서 다른 맛은 단순히 치정과 질투만이 아니라 가볍게 스쳐가는 우리의 흔적이다. <은교>의 주인공인 적요와 지우는 시인과 소설가이고, 은교는 처음과 달리 시인을 하고 싶어 한다. 주인공이 소설가이고, 소설을 만든 사람도 소설가다. 물론 소설가이기에 소설을 쓰는 것은 당연하나 문학소설에서 반영된 인간의 역사 역시 놓치지 아니했다. 적요라는 한 인물로 통해 그동안 우리가 이렇게 살아오면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어릴 적에 느낀 그 순수하고도 아름다운 감정은 모두 사라지고 없어진 것인가? 우리는 과연 진정 아름다운 시간이 있었을까? 라는 것이다.

 

은교를 만나기 전의 시인인 적요는 세간에서는 기념관을 세우고 시청공무원이 바쁘게 돌아다닐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붙여진 호칭이나, 처음 <심장>이란 소설을 지우에게 줬을 때 자신이 기획하고, 지우의 이름으로 알려진 것에서 문학을 다룬다는 그 지식인의 세계를 비웃었다. 그래서 <은교>라는 작품은 그저 3남녀의 관계만 보는 것은 절대 바르지 못한 선택이라 들었다. 문학은 인간의 이야기를 다룬다. 혹은 시인이라 하더라도 시 자체가 하나의 문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에서 “시(詩)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지식인의 책임은 민중의 삶을 보고 끄집어내는 것이지 오히려 민중을 분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중문화라는 것은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주입하는 셈이다. 수업시간에 처음 적요의 수업에 들어온 지우에 대해 적요는 우리가 말하고 느끼는 것은 정말 개인이 느끼고 말하는 것인지 혹은 그렇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우리는 자신만의 언어가 아니라 강제로 부여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 거짓과 위선의 세계에 살아온 적요가 은교로서 자신의 본위로 갔다고 말하는 것이다.

 

<은교>를 읽으면 남녀 간의 적나라한 성행위도 많이 표현되어 있고, 이른바 물장사라고 불리는 세계도 나온다. 노골적인 성행위와 더불어 은교에 대한 섬세하고도 시적인 표현에서 오히려 문학소설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본연적인 부분을 드러내는 것도 좋지 않은가 싶었다. 단지 그것이 그 자체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다양한 부분에서 그 중에 하나라는 점을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추악한 면을 가지고 있다. 그 추악한 부분을 인정하고 인식하기에 오히려 추악함을 막을 수 있다. 그 추악함을 부정하고 자신과 분리되었다고 여기는 순간 인간의 추악함이 드러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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