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스쿨 DxD 11 - 진급 시험과 우로보로스, Novel Engine
이시부미 이치에이 지음, 곽형준 옮김, 미야마 제로 그림 / 데이즈엔터(주)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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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스쿨 dxd 11권은 거대한 적이라고 생각했던 자가 나오면서 이상한 길로 틀어진다. 이때까지 테러와 각종 음모가 우로보로스라는 강력한 허무의 용에서 시작했는데, 오히려 그 당사자는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었다. 나이와 모습은 아무 상관도 없이 그저 자신이 원하는데로 모양새를 바꿀 수 있는 우로보로스 오피스는 이제 중학교에 올라갈 정도의 어린 소녀로 등장해 잇세이의 집으로 찾아온다. 오피스란 존재는 그인지 혹은 그녀인지 아니면 어린 사람인지 혹은 나이가 많은 사람인지 알 수 없다.

허무의 공간에서는 시간과 공간적 관념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해 논하자면 시간이란 것이 필요하다. 만약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고, 그것을 존재하고 있더라고 그 존재에 대한 존재성을 인지할 수 없으면 그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전에 읽어본 철학서적 중에서 이런 문구가 있었다. “왜 있는 것은 도대체 있고 차라리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은가?”

결국 오피스란 존재는 저런 의문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그 존재는 분명 외형은 인간이나 인간이 아니고, 지능과 판단능력은 어린아이 수준이나 그런다고 우리가 잴 수 없는 시간적인 경과를 지녔다. 비록 재미로 보는 라이트노벨이라고 하여도 결국 인간이 만들고 인간이 보고 즐긴다. 인간의 문화 활동에서 라이트노벨에서 보이는 관념적인 부분은 인간에 의해 관념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다. 오피스의 존재는 인간의 상상력 내지 신화적 존재성에서 모티브를 가지고 왔다.

물론 악마나 천사 그 외에 등장하는 많은 존재 역시 관념적인 존재에서 시작했다. 그들은 현실의 물질성에서 존재하지 않아도 관념적인 상상에서 존재한다. 그래서 그들의 존재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없는 것인가에서 우리의 관념적인 영역에서 물어 볼 수밖에 없다. 그런 관념적 상상과 판단들은 작품 내의 등장인물들이 생각을 좌우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여태까지 백룡제 발리를 비롯하여 수많은 적들이 침공했을 때 우로보로스란 존재에 대해 적대심으로 가득했다.

심지어 이상하게 동맹을 맺은 악마, 천사, 타천사의 세계에서도 오피스의 존재란 매우 위협적이다. 드래곤 중에서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오피스가 방문하여 마치 속이 비어버린 눈빛으로 멍하니 가만히 있고, 관찰만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전개다. 단지 오피스는 잇세이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찾아온 호기심만 가득한 존재였다. 공격의사나 타인에게 피해를 줄 생각조차 없었다. 그저 멍하니 잇세이나 주변 사람들을 관찰했다.

강력한 적이 오히려 일상적으로 같이 있으니 친구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뒤편에 보면 나오나 잇세이에게 구출된 오피스는 오직 그레이트 레드를 쓰러뜨리고 자신이 그 허무의 공간의 주인이 되고자 했다. 그 누구에게 자신의 원하는 바를 들어주면 단순히 도와주겠다는 약속만 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를 주변에 이기심이 가득한 사람들이 이용해 먹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문제는 그 이용하려는 존재들은 오피스를 이용하는 것에 지나 오피스의 힘을 빼앗으려고 했다는 점이다. 샤르바를 무찌른 잇세이지만, 마지막 편에서 잇세이는 사마엘의 저주로 이블 피스 8개만 남긴 채 사라진다. 문제는 사마엘은 강력한 저주로 드레곤과 관련된 그 모든 존재에게 큰 위험이 된다는 점이다. 적룡제인 잇세이와 백룡황인 발리의 경우 드레곤의 숙주가 되어 있기에 사마엘의 간단한 공격에도 큰 타격을 입는다. 그런 것은 오피스도 마찬가지다.

사마엘의 요소를 보며 생각한 점은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의 연계성이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 살면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처럼 살다가 어느 뱀이 이브에게 사과를 먹게 함으로서 그 죄악이 내려 결국 인간계에 추방되고, 평생 남자는 노동하고 여자는 아이를 낳게 되는 저주를 받았다고 한다. 서구사회와 유대인 사회에서 본다면 남성들이 여성들에 대한 지배해도 되는 이데올로기적인 헤게모니이나, 그 뱀은 신에게 미움을 받고 용과 뱀은 유사한 존재성을 가지기에 큰 저주를 받을 수 있다.

나름 작가인 이시부미 이치에이가 신화학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점은 다시 확인한 결과였다. 고대 그리스에서 여신인 아테네의 어머니는 메티스로 되어 있다. 메티스는 뱀의 몸을 하고 있으며, 여신의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페르세우스란 영웅이 안드로메다를 구출하는 장면에서 안드로메다는 나체의 상태로 포박되어 있고, 페르세우스는 안드로메다를 납치하여 감시하는 바다의 용을 창으로 찌르는 그림이 나온다. 이때 안드로메다는 좋은 표정보단 왠지 불만이 넘치는 표정으로 페르세우스를 바라본다. 그것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적 입문으로 보자면 페르세우스가 바다용에게 창은 꽂은 것은 안드로메다의 처녀를 잃은 것이란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째든 사미엘의 저주는 남근중심의 성경에서 따온 소재다. 그런 저주의 기원이 이브의 사과이고, 그 사과의 저주로서 용과 뱀에게 끊임없이 내려가는 것이다. <하이스쿨 dxd>라는 작품 자체는 학원물과 판타지와 더불어 하렘계열에 이르는 장르이나, 작품의 모티브나 소재를 생각해보면 나름 신화적인 요소를 곳곳에 잘 배열했다는 점이다. 그래도 드레곤은 고대 그리스뿐만 아니라 동양인 중국에서도 대모라는 존재 역시 뱀이고, 악마라는 존재는 남성적 존재보단 차라리 여성적 존재가 가깝다. 이분법적인 대립구도로 본다면 천사↔악마, 남자↔여자, 빛↔어둠, 이성↔감성 등과 같은 요소로 통해 본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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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스쿨 DxD 12 - 보충수업의 히어로즈, Novel Engine
이시부미 이치에이 지음, 곽형준 옮김, 미야마 제로 그림 / 데이즈엔터(주)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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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스쿨 dxd 12권은 주인공인 효도 잇세이가 없는 상태에서 다른 오컬트부원들이 헤쳐 나가는 이야기로 진행된다. 가장 나약하고 한심해 보이던 환생악마인 잇세이가 어느 순간 가장 듬직하고 강하고, 믿을만한 친구이며 동료가 된 순간 같이 동고동락을 하던 부원들에게 잇세이란 존재성이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육체가 소멸하고 리아스의 손에 8개의 이블피스가 남는 순간 모두들 당황하고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옆에서 그렇게 웃고 즐기며 힘든 과정을 보낸 친구가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것은 그 아무리 강철심장이라도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다.

그런 괴로움을 안고 오컬트부원들은 적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이때까지 적들에서 가장 나약한 육체일지 모르나 가장 강하고 무서운 조조와 싸우면서 이렇게 위기에 몰린 적은 없었을 것이다. 하이스쿨 dxd 시리즈를 계속 읽으면 보통 효도 잇세이를 중심으로 싸움이 전개되나, 이번 12권에서는 예전에 키바가 투혼이 빛이 난다. 지그프리트와 싸우면서 팔 하나가 잘려나가는 심한 부상에서 아시아의 치료와 피닉스의 눈물을 뿌려 다시 싸우는 투혼은 예전에 키바를 죽게 만든 바르퍼 갈릴레이와 타천사의 결투가 생각난다.

누구 하나가 쓰러지면 그 누구를 대신하여 그 몫까지 싸우자는 친구의 약속, 하렘 계통의 라이트노벨이라도 나름 소수의 남자가 다수의 여자를 점유하는 구도에서 남자와 남자끼리의 우정이나 의리도 등장한다. 그런 점에서 캐스퍼의 역할이 돋보인 것 같았다. 그 누구도 받아주지 않은 캐스퍼는 인간과 뱀파이어의 중간이 하프 뱀파이어로 나온다. 본래 영웅서사 내지 모험물에서 가장 불안한 존재가 가장 성장하기 좋고 가장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이미 정해진 힘과 규모라는 틀에 갇힌 게 아니라 그 틀이 불안정하기에 어디까지 올라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미 하프 뱀파이어에서 이블 피스도 변종을 흡수했기 때문에 그 무엇보다 불안하다. 초반에 리아스가 학교 어느 교실에 봉인하여 나둘 정도이고, 캐스퍼는 자신의 힘을 조절하지 못할 정도로 불안감을 느꼈다. 그런 캐스퍼를 잇세이가 계속 돌보고 위로해주고 친구처럼 대해주었다. 친구도 없이 외로운 시간을 보낸 캐스퍼에게 잇세이는 그 모든 것을 자신에게 줘도 바꿀 수 없는 존재였다. 잇세이의 죽음을 듣는 순간 정신이 나간 하프 뱀파이어는 마치 모든 것을 삼킬 듯한 강력한 마법으로 적을 공격한다.

(완전하지 않으나) 인간이 가진 것 중에서 감정의 폭발이란 무서운 것이다. 자신의 모든 힘을 극한으로 나오게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성적인 요소로서 판단력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하는 것이 리아스의 공격방법이다. 그러나 때로는 이성의 판단보다는 감정에 휘말려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힘 역시 강력하다. 잇세이의 죽음은 좌절과 절망에서 분노와 절규까지 더해준 것이다.

그런다고 잇세이가 정말 죽어 모든 것이 사라진다면 하이스쿨 dxd 시리즈는 더 이상 진행될 수 없는 서사구조다. 서사구조 상 중앙에 큰 위기에 봉착하여 다시 해소하는 플롯구조가 존재하기에 잇세이는 적룡제의 갑옷 안에 영혼을 보존할 수 있었다. 사미엘의 독은 무섭게도 육체의 소실만으로 타격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소실까지 이르는 무서운 저주였다. 적룡제는 잇세이의 영혼은 자신의 갑옷에 깃들게 하고, 사라지는 잇세이의 영혼 대신 여태까지 적룡제의 힘에 미쳐 날뛴 선배들의 영혼이 대신 잇세이를 지켜주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영혼보다는 그 영혼이 적룡제 안에서 탄식하고 고통 받은 기억이고, 사념이었다. 그러나 그 사념들은 잇세이의 찌찌 드레곤을 같이 느끼면서 끊을 수 없는 저주의 시간을 깨고 마음 편하게 사라진 것이다. 그렇게 잇세이는 영혼을 유지하고 그레이트 레드와 오피스의 도움으로 새로운 육체를 만들고, 기존의 인간인 육체에서 허무의 공간에서 만든 신룡의 선물은 더욱 강력한 육체가 되었다. 신룡인 그레이트 레드도 잇세이의 가슴열정에 빠졌는지 잇세이의 육체를 만들고 현세에 복귀를 도와주고 다시 차원의 벽으로 들어갈 때 “말랑말랑 아이잉!”을 외치고 사라진다. 물론 그런 말은 사라져간 적룡제 사용자들도 마찬가지다.

찌찌 드레곤의 부활에서 찌찌 드레곤 노래에서 들리는 “말랑말랑 아이잉!”이 도저히 빠질 수가 없던 것이다. 그리고 이에 반해 백룡황 발리의 선배는 여자의 엉덩이도 같이 사랑해주길 바란다고 한다. 인간의 신체구조에서 가슴을 상징하는 유방과 엉덩이가 있는 골반은 여성의 중요한 매력 포인트다. 결국 여자의 매력은 가슴의 크기이냐? 아니면 엉덩이 라인이냐는 것에서 근골계 구조로 본다면 나름 엉덩이가 탄탄한 여자가 가슴이 크다는 점이다. 이야기의 진행과 상관없이 인간의 몸을 유지하는 척추를 지탱하는 것이 골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 하이스쿨 dxd를 라이트노벨만 아니라 애니메이션을 볼 때도 나름 리아스나 아케노의 몸매를 관찰하면 허리라인과 엉덩이라인의 굴곡이 잘 어울린 것 같았다. 보통 만화학과에서 일러스트를 배우더라도 인간해부학을 배워야 그림체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어째든 인간의 육체가 아닌 드레곤의 육체로 부활한 잇세이는 다시 동료의 품으로 돌아가고, 폰 8개를 다시 받아 악마로 환생한다. 남은 것은 조조와의 사투, 전에 잇세이에 의해 눈 한 쪽을 잃은 조조는 이번에 메두사의 눈으로 자신의 눈을 대체했다.

11권의 사미엘의 저주가 용과 뱀에게 강한 점을 생각하여 잇세이는 사미엘의 피를 조조에게 뿌리고, 그 피로 인해 조조는 강력한 독과 저주를 받는다. 그 모습은 리아스가 억지로 피닉스가문에 결혼가기 전에 라이저와 결투 때 성수를 라이저에게 뿌린 것과 같은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조조는 제 아무리 지식과 판단력, 그리고 신마저도 죽일 수 있는 무기를 가져도 운명의 앞에서는 결국 잇세이에게 패배한다.

조조의 패배는 단순히 그의 야망이 아닌 것으로 나온다. 에필로그 부분에서 제석천인 손오공이 직접 조조에게 가서 제석천 자신이 조조에게 신물을 준 것과 더불어 조조에게 테러의 기회를 준 것을 암시한다. 제석천의 음모는 무엇인가? 솔직히 제석천인 손오공은 불교신앙을 중심으로 만든 서유기에 등장하는 원숭이신이다. 부처님에게 직접 미움을 받아 봉인되어 삼장법사에 의해 교화된 그가 오히려 조조를 돕는 것이라는 설정은 단순히 이야기는 조조만의 것이 아니라 조조를 그렇게 만들도록 사주한 세력이 있다는 점이다. 세력의 확장은 서양만 아니라 동양으로 넘어가고, 동·서양 내부에 등장하지 않았던 세력이 추후에 나올 것이란 암시를 던진다.

그리고 대부분 모험이나 전투가 있는 이야기를 가진 작품을 보면 초반에는 큰 구도 속의 적과 대치되는 상황이나, 결국 적은 자신의 동류가 아닌 다른 부류로 시작되나, 결국은 자신의 동류 사회에서도 존재하는 법이다. 잇세이 친구인 사지와 사지의 주인인 학생회장 역시 악마사회의 계급신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하려고 하나, 기존 악마사회에서는 비웃고 있다는 점이고, 잇세이의 등장과 활약에 나름 불편함을 느끼는 악마세력이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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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만화를 비평하다
상명대 만화애니메이션 학과 학생들 / 팬덤북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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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명대학교에 만화애니메이션학과가 같이 있는지 생각했으나, 막상 책을 열어보는 순간 만화학과로 따로 분리되어 있었다. 그래서 <만화를 비평하다>라는 제목처럼, 만화만 비평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이상을 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그러나 이 책이 네이버에서 지원하는 E-Book 시스템이므로 어느 정도 목차와 차례에 대해 미리 알아볼 수 있었다. 알아본 결과 단순히 만화만 보기에는 조금 부족하고, 차라리 만화애니메이션으로 묶어 봤다면 더 좋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만화에 대해 비평함에서 상명대학교에서 출간된 <만화비평> 창간호를 읽어본 적이 있었고, 이후에 발간된 <만화비평 2>도 조만간 구입하여 읽어볼 예정이다. 같은 대학교에서 담당교수 내지 대학원 과정 혹은 실제 현직에 계시는 분들의 저술한 <만화비평>과 학부생이 모여 만든 <만화를 비평하다>는 분명히 그 전문성에서 차이가 날 것이다. 대학생들이 도전하여 만든 점이고, 그것을 착안하여 과도한 비판의 날카로움은 자제하는 것이 바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만화를 비평하기보단 말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게 더 좋았지 않나 싶었다.

 

왜냐하면 비평이라는 것은 비판적으로 평론한다는 의미이기에 비평적 가치로서는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그동안 이 서평을 적는 본인도 국내 만화애니메이션학과, 일어일문학과, 영상미디어학과 등 각종 만화애니메이션 내지 코스튬 플레이 문화를 다루는 논문 등을 읽어봤으며, 심지어 교재로 사용되는 도서도 직접 구매하여 보았다. 전공자도 아닌 비전공자의 입장으로서 꾸준히 만화와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까지 리뷰 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전반적으로 아쉬운 부분은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에 들어간 내용을 그대로 발췌하여 그것을 정리하고 나열한 정도까지가 아쉬웠다. 특히 모에에 대한 연구에서는 일본 인문학자 겸 서브컬쳐 전문가인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 대해 읽어봤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이었다. 그 이유는 모에라는 속성이 이 서적 다른 챕터에 등장하는 <오디션>이란 작품을 두고 연장선상으로 판단하자면, 분명 연관성이 존재한다.

 

대중문화에서 주로 나이가 젊은 청소년들이 가진 팬텀현상에서 아이돌에 대한 환상적인 끌림과 애니메이션 내지 만화에서 나오는 아이돌스타에 대한 작품은 유사한 부분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령 최근 일본에서 완결된 <아이돌마스터>라는 작품은 단순히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구성될 뿐이지 실제를 생각해보면 리얼TV로 방영되는 실사판 아이돌 특집방송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아이돌이란 대상이라 파생실재이냐? 혹은 현실부재라는 시뮬라크르(simulacre) 요소에 무엇이 다른지 생각해보면 만화로 보는 대중문화 및 매체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석사학위 논문 참고에서 통계표나 그림을 인용하는 것은 좋으나 결국 대부분 자료로서 만들고 비평적인 견해는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고 아쉬운 부분이다. 물론 다른 챕터에서는 이와 달린 좋은 고찰이 있었다. 최근에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통해 웹툰이 갤툰이라고 하여 스마트폰으로 통해 만화를 보는 것이다. 이미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에서는 그런 웹툰에 대한 부분과 스마트폰으로 통해 게임을 하는 요소까지 연구한 사례와 발표도 있었기에 스마트폰으로 이용한 만화영역에 대한 확장은 좋은 연구라고 생각했다.

 

그런 웹툰과 갤툰으로 통해 기존 만화책과 달리 새로운 시도 내지 패러디까지 연구함에서 만화라는 장르를 좀 더 다양하게 표현하거나 한국만화에 대해 낯선 인상을 가진 대중에게 좋은 기회로 가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방향이다. 단지 인터넷이란 매체는 무료라는 결재시스템을 대중들이 선호하기에 웹툰작가에 대한 경제적 조건이 불리한 점과 또한 웹툰을 그저 웹툰으로 끝내기 보다는 강풀작가의 웹툰처럼 영화 및 연극과 같은 콘텐츠로 전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최근에 배우 송강호 씨가 출현한 <설국열차>도 유럽 만화의 원래 스토리고, 예전에 흥행에 성공한 <올드 보이> 역시 일본 만화책이 원작이다.

 

스토리텔링적인 요소에서 웹툰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며, 영화도 컴퓨터그래픽으로 통해 충분히 표현이 가능하기에 웹툰에서 주제만 좋으면 대중적으로 효과를 누릴 수 있으며, 또한 새로운 부가가치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일본 문화콘텐츠 사업은 이런 부가적 효과를 노린다. 이번 도서에도 일본 유명만화인 <원피스>에 대한 비판적 수용이 왜 불가능한지 다루고 있었는데, 예전에 필자가 술집가게에 가보니 <원피스> 관련 작은 프라모델 내지 피규어가 있었다.

 

만화로 처음 나온 <원피스>가 애니메이션화로 나오고, 게임으로 나왔으며, 기타 음반이나 코스튬 상품 등으로 제작되어 수많은 콘텐츠상품으로 일본뿐만 아니라 국내 시장에도 다가왔다. 그런 상품적인 요소에서 국내 만화콘텐츠의 차용에 대한 부분이 없는 점이 조금 아쉬웠으나, <원피스>라는 작품이 가진 장단점에서 단점을 어느 정도 인지한 부분에서 조금 좋아 보였다. <원피스>라는 작품은 <블리치>와 더불어 주인공 중심인 소수와 더불어 그 소수에 대적되는 다수의 적으로 구성되어, 주인공 편이 정의라는 가치관과 우정, 명예, 의리를 내세운다.

 

문제는 그런 이데올로기적인 관점에서 계속 만화에 몰입하게 되면 다른 관점이나 부분에 대해 맹신적인 부정을 하게 되는 점이다. 만화라는 서사에서 이분법적인 선악 내지 자타적인 관계는 그런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원피스>는 비판적으로 대하는 것이 문제인가? 라는 질문조차 나오는 것이 어렵다는 점이 국내 만화에 대한 비판적인 수용이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작품 개인적 비평에서 색채로 통해보는 <염소의 맛>이 괜찮아 보였으며, 최근 화제가 된 <진격의 거인>도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 <진격의 거인>에 대해 필자는 마빈 해리스의 문화인류학적인 요소로 통해 문화유물론적인 관점으로 고찰해본 적이 있었다. 이때 청강문화산업대학의 박인하 교수님과 약간 유사한 생각을 했는데, 그것은 단순히 일본이란 나라의 군국주의적인 요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거인과 인간의 대립이 결국 인간과 인간의 대립이란 내적 갈등에서 시작했을 것이란 점이다.

 

생각해보면 <진격의 거인>에서 계급화 된 사회구조와 그 구조로 통해 쉽게 거인에게 잡혀 먹히는 최하계급의 주거지 사람들을 생각해도 그런 맥락으로 연결 지을 수 있으며, 식량에 대한 위기의식은 더욱 그런 부분을 강조한다. 자본주의구조에서 자본이라면 <진격의 거인>에서는 자본보단 식량에 중요 포인트가 맞추어져 있다. 문화인류학적으로 식량으로 통해 인구통제를 할 수밖에 없는 점에서 <진격의 거인>은 자원이 한정된 사회에서 인구통제가 되지 않으면 그 사회는 붕괴될 수 있을 것이란 불안심리가 보이며, 한편으로 성벽으로 확장하려는 피지배계층의 의지를 지배계층이 원하지 않거나 부정하는 점에서 <진격의 거인>을 보면 정작 주인공이 속한 조사병단의 적이 성벽 밖의 거인인지 혹은 성벽 안의 인간인지 모호하게 만든다.

 

어째든 평소 취미생활로 만화애니메이션을 리뷰하거나 비평하고, 만화애니메이션 및 코스튬플레이 문화를 적어보면서 실제로 이런 내용이 비록 E-Book으로 발매되어도 대학교에서 발간되었다는 점이 매우 놀랐다. 대부분 만화애니메이션학과에서 가르치는 과정이 주로 만화창작과 그리기 내지 애니메이션 동화작업 위주인 것으로 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 만들기보단 만들어진 것에 대해 어떻게 볼 것인가는 그렇게 흔하지 않은 전경이다. 우연히 만화애니메이션 비평이란 검색으로 들어간 블로그나 카페를 보면 만화나 애니메이션 영상이 가득한 것을 보면 참 유감이 아닐 수가 없다. 만화에 대한 비평은 단순히 만화를 넘어 그 사회에 대한 하나의 담론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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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켜다 - 무도한 세상에 맞서는 세상의 울림
표정훈 지음 / 을유문화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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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철학 입문서 내지 혹은 철학자 관련 도서를 읽으면서 어떤 철학자가 있는지 그 철학자가 살아간 시대적 배경과 상황, 그리고 그가 이룬 업적들을 다룬 것들을 보았다. 문제는 그런 서적을 읽는 순간 그 철학자들이 제시하는 사상적인 부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이번 서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철학자의 서적들을 읽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보면서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철학자에 대한 소개나 그 시대적 배경을 다루는 책들을 보면 늘 아쉬운 게 그저 철학교양서적에 불과한 점이다. 그런 점에서 <철학을 켜다> 역시 그런 책에서 크게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대부분 철학도서가 그렇듯이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칸트와 마르크스라는 큰 틀에 몇몇 잘 모르는 인물들이 나왔다.

 

그래도 그나마 인상적인 인물은 스피노자라고 할까나? 스피노자에 대해 일반적으로 철학도서에 많이 나오는 편은 아니다. 그의 일생이 항상 고독과 위기 그리고 미완의 저술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한 업적은 개인적인 부분이 대다수의 대중을 이끌지 않았다. 적어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학교를 세워 제자들을 양성했으며, 그들은 당시 그리스 사회에선 어느 정도 지위를 확보했기에 어느정도 연구자료가 전해온 것이다.

 

스피노자의 경우는 그러지 못했다. 하다못해 평생 쫓기는 신세가 되어 말년에 정신적인 피해망상에 시달린 루소조차 많은 지식인들의 심금을 울렸고, 병으로 죽은 마르크스의 경우에도 국제노동자협회에 글을 적어 보낼 정도로 활발히 활동했다. 스피노노자는 고독과 고독으로서 살아간 것이다. 예전에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에서 나온 내용처럼 스피노자그는 생물학적으로 살아있어도 사회적으로 죽은 인간이었다.

 

그가 본 부당한 세계, 그 세계라는 것이 하나의 도덕이고 하나의 진리라는 비틀린 사회가 그의 철학을 일깨워주었다. 철학은 자기비판과 더불어 자기가 속한 세상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에서 프랑크푸르트대학 사상가가 단 1명의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세계는 철학을 멈추면 안된다고 했다.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철학이라면, 그 지혜라는 것을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물론 여러가지 종류와 방법이 있을 것이나, 철학은 인간이 인간이기를 바라는 학문이다. 요새같이 자본주의 논리가 하나의 가치기준이 된 세상에선 인간의 존재조차도 자본에 비례하는 실정에 이르게 되었다. 스피노자와 같이 호모 사케르들은 당시 막혀있는 사회적 규율과 도덕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는 자본에 따라 그 존재감이 희비로 엇갈릴 수 있다. 영화 <두 개의 문>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호모 사케르라는 존재는 그 어디서 찾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어도 찾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우리 인간들이 타인에 대한 배려나 이해는 이미 쇠퇴해질 때로 쇠퇴한 것인가? 생각해보면 중세시대의 소설에서도 황금은 모든 것을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인간의 도덕적 타락을 두고 보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이 문제가 아닌가 싶다. 철학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인간이 타락해서 필요한 게 아니라, 그 타락으로 인해 인간 세상에 큰 위기와 상황이 닥친다는 점이다. 버트런드 러셀과 같은 경우 그의 업적에서 평생 반전, 반핵을 위해 노력했다.

 

어떻게 보면 스피노자와 같이 충분히 그도 좋은 가문에서 좋은 환경에 좋은 인생을 보낼 수 있었으나 과감히 버리고,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 덕분에 20세기 위대한 철학자 이름에서 러셀은 빼놓을 수 없는 영국신사이다. 하지만 여전히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 길은 어렵다. 어렵고 쉽지 않아 누구나 가지 않은 길이기에 그들의 사상이 전해내려오고 그들의 이름이 내려온다.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당시 가장 배척받고 가장 무시당한 자들이 오늘날에 성인에 이르기까지 한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인류역사상에 가장 많이 팔린 성경과 동급으로 많이 팔린 서적이고, 19세기 이후 20세기를 넘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준다. 어떻게 보면 그의 예언이라고 할지 아니면 그의 예상이라고 할지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현상을 보면 철학이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란 점에서 인간의 선견지명은 분명히 지혜로운 인간의 머리에서 나오는 보배와 같은 것이다.

 

철학을 계속 켜고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이 유일하게 지금 가는 길의 중심에서 현재 위치를 알려면 오직 철학만이 제시할 뿐이다. 철학이란 문제를 해결해주는 만능요술지팡이가 아니라, 적어도 철학이란 어느 문제가 왜 생겼는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주는 도구이다. 원인조차 모르고 대안을 찾아야 하는 인간의 어리숙함에서 철학은 인류가 가야할 길을 밝혀주는 하나의 등불이다. 하지만 등불이 있더라도 앞의 성난 파도를 막아주지 않는다. 단지 성난 파도가 오고 있다는 정도만 알게 해주는 것이다.

 

철학을 켜다는 결국 그런 인류의 역사에서 인류가 앞을 보고 갈 수 있는 등불을 켜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나로서는 루소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의 사상덕분에 우리나라 헌법정신인 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이 성립이 가능한 것에 대해 감사하게 여긴다. 단지 그 사상과 헌법을 모른 채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을 보며, 이 책에서 소개되지 않은 니체의 사상을 왜 다루지 않았는지 조금 아쉬운 면도 없지 않지만 말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스피노자와 관련하여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오늘 나는 한 그루의 나무를 심겠다." 지금 살아가는 우리 인간은 얼마나 현재에 충실할까? 덧붙여서 스피노자의 인상은 아마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루이 알튀세르 영향이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자였으나, 자신에 대해 스피노자주의자라고 한다. 부당한 도덕관에 대해 부당한 현실에 대해 끊임 없이 고찰하고 지적하고 대항한 스피노자로 본다면 인류의 스승이라 칭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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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하의 즐거운 만화가게
박인하 지음 / 시공사 / 2002년 1월
평점 :
절판


한국이란 나라에 만화라는 것을 말하기란 정말 어렵다. 만화라는 인식 자체가 이미 어린 아이들이 보는 유치한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시간 죽이기를 위한 도구, 또는 불량하거나 성적에 도움이 되지 않은 불필요한 존재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만화라는 것은 텍스트라는 글이 아닌 그림으로 이루어진 서사구조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봐도 이해하기가 어렵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매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화가 가지는 전달력은 매우 효과적이면서도 탁월한 것이다. 만화가 왜 이렇게 탄압을 받게 되는 것일까? 최근에 제정되어 발효 중인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은 법의 취지로는 아동청소년들을 보호하자고 하는 것이나 막상 뒤돌아보면 사회전반저인 성에 대한 담론이나 표현의 자유 내지 의지를 박탈하는 것과 같다. 우리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고 하나, 한편으로 생물학적으로 동물이란 점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 성적인 충동이나 본능적 요소를 부정하기보단 억지로 막는 것보다 합리적인 대안이나 혹은 그 감정을 하나의 예술적인 감각으로 승화하는 편이 더 탁월하다.

 

그런 점에서 성에 대해 무조건 개방적이라든지 혹은 무차별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독특한 아이템으로 보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을 지나 청소년기라는 제2차 성징기로 통해 남녀들은 자신의 몸에 변화를 알고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상대성에게도 흥미를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어린 시절 여자의 나체를 보지 않아도 남자아이들은 몽정을 하고 한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성의 비밀에서 상상력이 발휘되고, 그 상상력은 청소년만 아니라 우리가 보는 위대한 예술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가령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여자의 음부를 가리고 있는 아프로디테가 큰 조개에서 탄생하는 장면이다. 여신의 음부를 가린다고 해도 유방이 돌출되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스시대부터 시작하여 르네상스의 예술을 돌이켜보면 그것이 하나의 외설인가? 아닌가에서 이미 예술로 인정받은 바이다. 만화에서 만약 유두가 나오면 그것은 하드코어라는 포르노 그래픽으로 차별당할 뿐이다. 물론 그것을 급격하게 강조하고 지나치게 드러내는 것은 분명 문제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그 장면이 필요한 계기가 있다. 영화 <남영동 1985>에서 고문을 당하는 민주운동가인 김종태의 역할을 맡은 박원상 씨가 고문의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의 성기가 드러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모자이크로 처리되었으나 근본적으로 남성의 성기노출이 영화에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고문을 하는 과정에서 인권을 무시한 채 옷을 전부 벗겨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했기 때문이다. 상황적 연출이라든지 혹은 그 작품에서 보여주고 싶은 의미를 상기하기 위해서 상상력 내지 혹은 reality한 요소를 부각해야 하는 점이다. 박인하의 <즐거운 만화가게>를 읽으면서 한국의 그런 상상력 부재를 만들 수밖에 없는 한국의 만화문화에서 아깝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래서 이 서평 초반부터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에선 만화에 대해 말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만화란 생각해보면 고대 라스코벽화에서 시작하여 고전주의 이전이나 당 시대, 그 이후의 르네상스 내지 바로크와 로코코, 심지어 아방가르드 예술인 큐비즘까지 만화에 차용되기 때문이다. 박인하 교수도 잘 지적한데로 국내 만화학과 아니 만화학과를 지나 만화애니메이션학과에서 강의 중인 교수진 대부분이 만화가보다는 서양화학과 많다는 것을 인정하다. 국내 만화애니메이션학회에서 활동 중인 각 대학의 교수들이나 혹은 박사과정을 밟는 분들도 회화를 전공한 분들이 많다는 점이다.

 

만화는 회화처럼 예술적 영역으로 보자면 비슷하기도 하나 다른 부분은 회화는 개인적이고 일부 특정계층을 위한 것이라면, 만화는 많은 사람들이 누구나 접할 수 있는 것이야 한다. 심지어 예술만화를 보더라도 기법이나 회화구도가 독특해도 많은 사람들이 보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오히려 만화기 때문에 예술적 요소를 더 실감이 넘치게 전달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기 위해 기준이나 방법조차 모른다. 이른바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제시하는 기준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 기준을 정하는 기준의 기준이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가 만화에 대해 그저 일반적인 세견으로 정하는 것보다 다양한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현상에 따라 context적인 요소로 만화를 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만화역사에서 주로 코믹스보단 카툰이 발달했다고 소멸한 이유는 만화라는 것은 그림으로 되어 있으며, 어려운 글을 쓰기보단 누구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화역사에서 한국은 풍자만화가 시초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전후로 시대정신과 더불어 그것에 대해 탄압하려 했던 것이다. 해방 이후와 군사정권에는 풍자만화는 오히려 규제대상이고, 오로지 명랑만화로 가야만 했다. 만화라는 것은 아이들이나 혹은 시간을 때우는 하나의 유치한 변모한 것이다.

 

우리 만화란 그렇게 암울한 시대와 폭력적인 정치적 이해에 따라 문화적으로 쇠퇴한 것이다. 우리의 상상력을 억압하고, 그저 주조공장에서 나오는 주조물처럼 되기를 바란 것이다. 만약 인간이 주조물의 원재료인 금속이나 플라스틱인 경우 문제가 없으나 인간은 생물이란 점이다. 동물은 감정을 가지고, 때로는 성적본능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 인간의 본연의 욕망은 사회적 통제에 반발하기 마련이다. 그런 반발심이나 또는 자유분방함을 만화로 표현하거나 즐기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인간 내적 심리에 쌓여 있는 스트레스나 억압적 기제를 해방하는 것과 같다.

 

또한 그런 억압적 요소는 인간의 본연보단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처럼 태어난 이후 사회적으로 살아가면서 성립되는 것이다. 인간의 불평등은 태어날 때 생물학적인 불평등을 가지기도 하나 사회적인 요건으로 교육정도, 가정경제력, 권력의 현황, 그 인간이 살아가는 인간사회의 전반적인 상황에 따라 불평등적인 요소가 발생하는 것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어가는 그 순간, 아니 죽어서도 불평등적인 삶과 죽음 이후의 삶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살아가는 것은 늘 자기에게 불안과 억압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것을 해방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욕망이나 억압을 해방하는 것이다. 단지 그것이 상대방에 대한 폭력과 자신에 대한 자해성이면 심각하겠지만, 그것을 다른 방법으로 돌린다는 것은 좋은 이야기 소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화를 보면서 일본을 항상 생각하는 것은 일본의 만화와 그리고 만화와 관련된 애니메이션, 게임, 라이트노벨이 다양한 소재와 주제로 넘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요건이 되어 스토리텔링이 형성되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겉으로 만화를 무시하나 방송국에서 방영했던 허영만 화백의 <식객>이나 영화로 상영한 <Beat>는 엄청난 흥행을 거두었고, 일본 만화원작인 <꽃보다 남자>나 국내 작가가 만든 <풀하우스>, <궁> 등과 같은 작품도 흥행을 거두었다.

 

만화책의 소재가 결국 드라마와 영화의 세계로 가는 점에서 스토리텔링의 중요도가 하나의 문화산업으로 큰 효과를 보는 것을 생각하면 만화의 발전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만화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문화에서 보이는 한계점에 부딪히나 그것을 제일 쉽게 나타내기 좋은 것이 만화다. 만화는 영화, 드라마처럼 거대한 자본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문학소설처럼 생각한 내용을 글로서 계속 나타낼 필요 없이 생각하는 그 자체를 그리면 되는 것이다. 단지 그리기 위해서는 그림에 대한 실력이 필요하나, 누구나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 박인하 교수가 인터넷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엉덩국이란 고등학생 만화가에 대한 글을 본적이 있었다. 그림실력이나 이야기흐름은 흔히 속된 말로 병맛만화라고 하나, 그 병맛에 담긴 대중들의 호응이나 그림 뒤에 보이는 한국사회의 모순은 큰 흥행을 불러 일으켰다. 그 덕분에 엉덩국은 인터넷에서 많은 팬을 보유하게 되었고, 최근에 스마트폰 어플까지 등장하여 만화의 새로운 조류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는 분명 정식 만화가도 아니고 만화학과 학생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가 보여준 만화의 역량은 사회적 이슈로 된 것은 분명하다.

 

만화라는 것이 매력적이라고 보는 것은 바로 누구나 만들고 보고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점은 누구나 자기의 생각이나 의지를 표현하고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다. 만화에 사소한 것만이 아니라 사소하지 않은 것들까지 넣어 나온다는 것은 때로는 누구에겐 불편한 진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책 본문에서 과거 만화문화 탄압이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만화라는 그 자체보단 사회적 흐름과 시대적 상황에 초점을 맞추었다. 만화라는 것은 현실과 별개로 보고 있겠지만, 사실 만화 역시 현실에 의해 가장 쉽게 영향을 받는 것이다. 영향을 쉽게 받으므로 그만큼 많은 주제와 표현들이 올라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 만화를 쉽게 보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많은 몸부림이 필요하다. 만화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고, 그 만화가 우리나라에서 어떤 것이며 또한 무엇이 있으며,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 각국의 만화는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만화라는 것은 쉽게 볼 수 있어도 막상 만화라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것은 쉽게 볼 수 없다. 만화는 그 자체를 보면 만족할 수 있어도, 만화라는 것은 무엇언지를 알려면 그 자체를 넘어 메타적인 영역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기존에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대해 다루는 서적들을 읽으면서 생각한 점은 어려운 부분이 많다는 점이다. 말 그대로 만화 역시 영화나 문학과 같이 비평적 영역에서 다루는 것은 옳겠지만, 비평만이 아니라 대중들까지 읽으면서 같이 즐길 수 있는 입문서가 부족한 점이다. <즐거운 만화가게>의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표지에 있다. 만화방에서 만화를 보는 이들은 까까머리의 애부터 아이를 돌보는 큰 누나도 있다. 많은 어린아이들이 추억의 만화로 불릴 만화책을 서로 나누어 본다.

 

만화라는 것은 서로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왜 살아가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면 결론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고, 그 인간다움에는 행복이 있을 것이고, 행복에는 즐거움이란 요소가 반드시 필요하다.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거리가 필요하다. 우리는 거대한 시장경제구조에 놓인 자본주의사회에 살고 있다. 상대적인 경제적 부로서 우리의 행복의 척도를 부의 절대적 상급자에 맞춰 살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즐거움을 향하여 살 수밖에 없다. 물론 그것은 드라마, 영화, 소설 등을 보거나 또는 조깅, 배드민턴, 테니스 등과 같은 운동이나 꽃꽂이나 다도와 같은 여러 가지 취미생활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취미생활이 인간에게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억압으로 인해 지쳐있는 심신을 위로할 수 있다. 만화라고 우리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지 말란 법이 없다. 오히려 만화책처럼 손쉽게 구하고 읽고 즐길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경직되고 단순한 것에 지나 상상력을 펼쳐 우리가 알지 못한 것도 알고, 볼 수 없는 것도 볼 수 있다. 만화라는 즐거움은 새로운 상상력이 있고,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반전도 있다.

 

조금 슬픈 이야기나 박인하 교수의 아버지 일화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자신의 자녀에게 관대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져봤다. 그런 관대함이 박인하 교수를 탄생하게 해준 것이다. 그 분께서는 자신의 자녀에게 즐거움과 동시에 추억까지 안겨주었다. 즐거운 만화가게 그것은 분명히 만화라는 것이 모든 것의 기준이 아니라도 만화라는 것이 얼마든지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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