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하의 즐거운 만화가게
박인하 지음 / 시공사 / 2002년 1월
평점 :
절판


한국이란 나라에 만화라는 것을 말하기란 정말 어렵다. 만화라는 인식 자체가 이미 어린 아이들이 보는 유치한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시간 죽이기를 위한 도구, 또는 불량하거나 성적에 도움이 되지 않은 불필요한 존재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만화라는 것은 텍스트라는 글이 아닌 그림으로 이루어진 서사구조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봐도 이해하기가 어렵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매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화가 가지는 전달력은 매우 효과적이면서도 탁월한 것이다. 만화가 왜 이렇게 탄압을 받게 되는 것일까? 최근에 제정되어 발효 중인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은 법의 취지로는 아동청소년들을 보호하자고 하는 것이나 막상 뒤돌아보면 사회전반저인 성에 대한 담론이나 표현의 자유 내지 의지를 박탈하는 것과 같다. 우리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고 하나, 한편으로 생물학적으로 동물이란 점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 성적인 충동이나 본능적 요소를 부정하기보단 억지로 막는 것보다 합리적인 대안이나 혹은 그 감정을 하나의 예술적인 감각으로 승화하는 편이 더 탁월하다.

 

그런 점에서 성에 대해 무조건 개방적이라든지 혹은 무차별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독특한 아이템으로 보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을 지나 청소년기라는 제2차 성징기로 통해 남녀들은 자신의 몸에 변화를 알고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상대성에게도 흥미를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어린 시절 여자의 나체를 보지 않아도 남자아이들은 몽정을 하고 한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성의 비밀에서 상상력이 발휘되고, 그 상상력은 청소년만 아니라 우리가 보는 위대한 예술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가령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여자의 음부를 가리고 있는 아프로디테가 큰 조개에서 탄생하는 장면이다. 여신의 음부를 가린다고 해도 유방이 돌출되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스시대부터 시작하여 르네상스의 예술을 돌이켜보면 그것이 하나의 외설인가? 아닌가에서 이미 예술로 인정받은 바이다. 만화에서 만약 유두가 나오면 그것은 하드코어라는 포르노 그래픽으로 차별당할 뿐이다. 물론 그것을 급격하게 강조하고 지나치게 드러내는 것은 분명 문제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그 장면이 필요한 계기가 있다. 영화 <남영동 1985>에서 고문을 당하는 민주운동가인 김종태의 역할을 맡은 박원상 씨가 고문의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의 성기가 드러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모자이크로 처리되었으나 근본적으로 남성의 성기노출이 영화에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고문을 하는 과정에서 인권을 무시한 채 옷을 전부 벗겨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했기 때문이다. 상황적 연출이라든지 혹은 그 작품에서 보여주고 싶은 의미를 상기하기 위해서 상상력 내지 혹은 reality한 요소를 부각해야 하는 점이다. 박인하의 <즐거운 만화가게>를 읽으면서 한국의 그런 상상력 부재를 만들 수밖에 없는 한국의 만화문화에서 아깝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래서 이 서평 초반부터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에선 만화에 대해 말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만화란 생각해보면 고대 라스코벽화에서 시작하여 고전주의 이전이나 당 시대, 그 이후의 르네상스 내지 바로크와 로코코, 심지어 아방가르드 예술인 큐비즘까지 만화에 차용되기 때문이다. 박인하 교수도 잘 지적한데로 국내 만화학과 아니 만화학과를 지나 만화애니메이션학과에서 강의 중인 교수진 대부분이 만화가보다는 서양화학과 많다는 것을 인정하다. 국내 만화애니메이션학회에서 활동 중인 각 대학의 교수들이나 혹은 박사과정을 밟는 분들도 회화를 전공한 분들이 많다는 점이다.

 

만화는 회화처럼 예술적 영역으로 보자면 비슷하기도 하나 다른 부분은 회화는 개인적이고 일부 특정계층을 위한 것이라면, 만화는 많은 사람들이 누구나 접할 수 있는 것이야 한다. 심지어 예술만화를 보더라도 기법이나 회화구도가 독특해도 많은 사람들이 보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오히려 만화기 때문에 예술적 요소를 더 실감이 넘치게 전달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기 위해 기준이나 방법조차 모른다. 이른바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제시하는 기준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 기준을 정하는 기준의 기준이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가 만화에 대해 그저 일반적인 세견으로 정하는 것보다 다양한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현상에 따라 context적인 요소로 만화를 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만화역사에서 주로 코믹스보단 카툰이 발달했다고 소멸한 이유는 만화라는 것은 그림으로 되어 있으며, 어려운 글을 쓰기보단 누구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화역사에서 한국은 풍자만화가 시초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전후로 시대정신과 더불어 그것에 대해 탄압하려 했던 것이다. 해방 이후와 군사정권에는 풍자만화는 오히려 규제대상이고, 오로지 명랑만화로 가야만 했다. 만화라는 것은 아이들이나 혹은 시간을 때우는 하나의 유치한 변모한 것이다.

 

우리 만화란 그렇게 암울한 시대와 폭력적인 정치적 이해에 따라 문화적으로 쇠퇴한 것이다. 우리의 상상력을 억압하고, 그저 주조공장에서 나오는 주조물처럼 되기를 바란 것이다. 만약 인간이 주조물의 원재료인 금속이나 플라스틱인 경우 문제가 없으나 인간은 생물이란 점이다. 동물은 감정을 가지고, 때로는 성적본능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 인간의 본연의 욕망은 사회적 통제에 반발하기 마련이다. 그런 반발심이나 또는 자유분방함을 만화로 표현하거나 즐기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인간 내적 심리에 쌓여 있는 스트레스나 억압적 기제를 해방하는 것과 같다.

 

또한 그런 억압적 요소는 인간의 본연보단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처럼 태어난 이후 사회적으로 살아가면서 성립되는 것이다. 인간의 불평등은 태어날 때 생물학적인 불평등을 가지기도 하나 사회적인 요건으로 교육정도, 가정경제력, 권력의 현황, 그 인간이 살아가는 인간사회의 전반적인 상황에 따라 불평등적인 요소가 발생하는 것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어가는 그 순간, 아니 죽어서도 불평등적인 삶과 죽음 이후의 삶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살아가는 것은 늘 자기에게 불안과 억압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것을 해방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욕망이나 억압을 해방하는 것이다. 단지 그것이 상대방에 대한 폭력과 자신에 대한 자해성이면 심각하겠지만, 그것을 다른 방법으로 돌린다는 것은 좋은 이야기 소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화를 보면서 일본을 항상 생각하는 것은 일본의 만화와 그리고 만화와 관련된 애니메이션, 게임, 라이트노벨이 다양한 소재와 주제로 넘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요건이 되어 스토리텔링이 형성되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겉으로 만화를 무시하나 방송국에서 방영했던 허영만 화백의 <식객>이나 영화로 상영한 <Beat>는 엄청난 흥행을 거두었고, 일본 만화원작인 <꽃보다 남자>나 국내 작가가 만든 <풀하우스>, <궁> 등과 같은 작품도 흥행을 거두었다.

 

만화책의 소재가 결국 드라마와 영화의 세계로 가는 점에서 스토리텔링의 중요도가 하나의 문화산업으로 큰 효과를 보는 것을 생각하면 만화의 발전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만화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문화에서 보이는 한계점에 부딪히나 그것을 제일 쉽게 나타내기 좋은 것이 만화다. 만화는 영화, 드라마처럼 거대한 자본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문학소설처럼 생각한 내용을 글로서 계속 나타낼 필요 없이 생각하는 그 자체를 그리면 되는 것이다. 단지 그리기 위해서는 그림에 대한 실력이 필요하나, 누구나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 박인하 교수가 인터넷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엉덩국이란 고등학생 만화가에 대한 글을 본적이 있었다. 그림실력이나 이야기흐름은 흔히 속된 말로 병맛만화라고 하나, 그 병맛에 담긴 대중들의 호응이나 그림 뒤에 보이는 한국사회의 모순은 큰 흥행을 불러 일으켰다. 그 덕분에 엉덩국은 인터넷에서 많은 팬을 보유하게 되었고, 최근에 스마트폰 어플까지 등장하여 만화의 새로운 조류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는 분명 정식 만화가도 아니고 만화학과 학생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가 보여준 만화의 역량은 사회적 이슈로 된 것은 분명하다.

 

만화라는 것이 매력적이라고 보는 것은 바로 누구나 만들고 보고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점은 누구나 자기의 생각이나 의지를 표현하고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다. 만화에 사소한 것만이 아니라 사소하지 않은 것들까지 넣어 나온다는 것은 때로는 누구에겐 불편한 진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책 본문에서 과거 만화문화 탄압이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만화라는 그 자체보단 사회적 흐름과 시대적 상황에 초점을 맞추었다. 만화라는 것은 현실과 별개로 보고 있겠지만, 사실 만화 역시 현실에 의해 가장 쉽게 영향을 받는 것이다. 영향을 쉽게 받으므로 그만큼 많은 주제와 표현들이 올라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 만화를 쉽게 보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많은 몸부림이 필요하다. 만화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고, 그 만화가 우리나라에서 어떤 것이며 또한 무엇이 있으며,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 각국의 만화는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만화라는 것은 쉽게 볼 수 있어도 막상 만화라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것은 쉽게 볼 수 없다. 만화는 그 자체를 보면 만족할 수 있어도, 만화라는 것은 무엇언지를 알려면 그 자체를 넘어 메타적인 영역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기존에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대해 다루는 서적들을 읽으면서 생각한 점은 어려운 부분이 많다는 점이다. 말 그대로 만화 역시 영화나 문학과 같이 비평적 영역에서 다루는 것은 옳겠지만, 비평만이 아니라 대중들까지 읽으면서 같이 즐길 수 있는 입문서가 부족한 점이다. <즐거운 만화가게>의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표지에 있다. 만화방에서 만화를 보는 이들은 까까머리의 애부터 아이를 돌보는 큰 누나도 있다. 많은 어린아이들이 추억의 만화로 불릴 만화책을 서로 나누어 본다.

 

만화라는 것은 서로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왜 살아가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면 결론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고, 그 인간다움에는 행복이 있을 것이고, 행복에는 즐거움이란 요소가 반드시 필요하다.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거리가 필요하다. 우리는 거대한 시장경제구조에 놓인 자본주의사회에 살고 있다. 상대적인 경제적 부로서 우리의 행복의 척도를 부의 절대적 상급자에 맞춰 살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즐거움을 향하여 살 수밖에 없다. 물론 그것은 드라마, 영화, 소설 등을 보거나 또는 조깅, 배드민턴, 테니스 등과 같은 운동이나 꽃꽂이나 다도와 같은 여러 가지 취미생활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취미생활이 인간에게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억압으로 인해 지쳐있는 심신을 위로할 수 있다. 만화라고 우리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지 말란 법이 없다. 오히려 만화책처럼 손쉽게 구하고 읽고 즐길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경직되고 단순한 것에 지나 상상력을 펼쳐 우리가 알지 못한 것도 알고, 볼 수 없는 것도 볼 수 있다. 만화라는 즐거움은 새로운 상상력이 있고,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반전도 있다.

 

조금 슬픈 이야기나 박인하 교수의 아버지 일화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자신의 자녀에게 관대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져봤다. 그런 관대함이 박인하 교수를 탄생하게 해준 것이다. 그 분께서는 자신의 자녀에게 즐거움과 동시에 추억까지 안겨주었다. 즐거운 만화가게 그것은 분명히 만화라는 것이 모든 것의 기준이 아니라도 만화라는 것이 얼마든지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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