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계약론 현실적 담론

   ◦ 21세기는 이른바 민주주의 사회이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고, 모든 국가의 주권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이나 세계 민주주의국가 헌법에서 국민주권 사상은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인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나왔다.

   <사회계약론>은 민주주의의 교과서이기도 하지만, 혁명가들의 복음서라고 불린다. 민주주의의 토대가 된 <사회계약론>이 혁명가의 복음서가 된 동기는 우선 유럽에선 1789714일 프랑스 파리 바스티유 감옥을 함락시킨 프랑스대혁명부터 시작하여 미국의 독립전쟁, 19세기 남미 시몬 볼리비아의 독립혁명, 20세기 러시아 볼셰비키혁명까지 이어진다.






   





   ◦ 민주주의국가 체계에서 자유주의국가와 사회주의국가에 대한 부분에서 루소의 사상은 <사회계약론>에서 좌우파적인 분리가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는 자유와 평등을 가장 중시했고, 자유와 평등에서 루소는 평등을 중시했는데, 그 이유는 자유를 가질 수 있는 평등권이 인간에게 보장받아야 한다고 한 것이다.

   자유권과 평등권에서 현실적 정치사회경제 영역에서 다소 어긋난 반응이 나오는데, 그 이유는 루소가 살던 시절은 자본주의체계가 도입하려던 시기고,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에서 프랑스대혁명은 자본주의 정치체계가 도입되고, 영국의 산업혁명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도입이라고 말한다.









   

   ◦ 평등은 인간의 생명을 보장받을 수 있는 생존권이고, 자유는 인간의 권리나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사유권이다. 하지만 루소의 사상을 보면 생존을 위한 자유이다. 자본주의 사회구조와 <사회계약론>에서의 간극은 바로 소유권에 대한 관점에서 루소에게 좌파와 우파의 영역이 겹치는 것이다.

 

프랑스대혁명과 사회계약론

   세계 3대 혁명으로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 1789년 프랑스대혁명, 1917년 러시아혁명이다. 프랑스대혁명과 러시아대혁명은 영국의 명예혁명과 달리 민중이 국가의 주인이 되기 위한 혁명이다. 혁명이란 기존의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 칭하는 헤게모니를 뒤집어 피지배계급 대상이 지배계급으로 되는 정치사회적 현상이다.

   루소가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가 될 수 있던 계기는 그가 살던 시절, 계몽주의자와 백과사전파인 볼테르, 디드로, 달랑베르와 함께 지식인 사회에 있었다. 다른 자들은 프랑스국왕과 귀족의 어리석은 행정을 비웃고 공격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민중은 없었다. 프랑스의 대부분 국민들은 가난한 농민이나 노동자였던 것이다. 루소는 계몽주의 엘리트와 다르게 오히려 자연과 벗하는 농민을 존중했고, 도시에 가난한 노동자의 비참한 생활을 안타까워했다.











   <인간불평등기원론>처럼 인간의 불평등은 자연적·신체적 불평등보단 오히려 사회적·도덕적 불평등에 목격했고, 오히려 후천적인 불평등이 모든 것의 원인이라 보았다. 루소는 살아생전 <에밀><사회계약론>으로 국권과 교권에 대한 비판으로 현상수배자로 몰렸으며, 그가 50~60대부터는 엄청난 탄압과 멸시 속에 살았다.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를 읽으면 그가 지나가던 길에 거리에서 달려오던 큰 개와 부딪혀서 기절했는데, 이 소문을 들은 파리 경찰청의 간부가 군악대를 거느리고, 루소 집에 와서 연주를 했다고 한다. 루소에게 일어난 사소한 이야기들은 루이16세가 있는 왕궁까지 찾아와 조롱거리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루소의 <에밀>은 금지도서가 되었지만, <에밀>에서 모든 사람들은 목수가 되어야 하거나 농업기술자가 되어 자신만의 기술을 가져야 한다는 말에 루이16세의 취미생활은 자물쇠제작이었다. 또한 당시 프랑스 상류여성들은 자녀를 출산하면 자신의 모유가 아니라 유모의 모유를 수유했는데, <에밀>에서 친모가 수유해야 아이의 심신이 탁월해진다는 말에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모유를 직접 수유했다.

   루소가 실제적으로 프랑스에서 유명인사가 된 것은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 등과 같은 오페라를 제작했고, 낭만주의 소설 <신 엘로이즈>는 당시 여성들의 모든 마음을 빼앗았다. 프랑스대혁명 이전 유럽은 책 가격이 아주 비쌌다. 보통 책 1권이면 가족4명인 가정에서 2주 동안 생계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루소의 명성은 높아지고, <사회계약론>은 프랑스 현실에 비관하는 젊은 지식인 사이에서 읽혀지고, 추후 프랑스대혁명에서 혁명가 지도자 중 로베스피에르, 당통, 마라 등은 <사회계약론>을 토대로 혁명과 혁명정부를 수립한다. 로베스피에르와 공포정치를 주도했던 생 쥐스트는 국민공회에서 프랑스헌법을 <사회계약론>을 토대로 만들었고, 혁명 이전부터 이들은 찻집이나 호프, 혹은 시장거리에서 루소의 사상을 전파했다.

   토크빌의 <앙시앵레짐과 프랑스혁명>에서 프랑스대혁명의 시작은 미국독립운동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프랑스는 자신의 적대국인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독립전쟁을 지원하고, 전쟁에 따른 예산낭비는 국고를 바닥나게 했다. 부족한 세수를 해결해야 하나, 귀족과 성직자들은 세금납부를 거부했고 계속 농민과 노동자에게 그 짐을 부과했다. 게다가 봉건영주의 지방자치통치가 중앙집권화로 이어지고, 지방의 농민들은 점점 빈곤과 부조리에서 불만이 쌓여갔다. 전쟁이나 세금, 그리고 이 상황에서 왕족과 귀족의 생활의 현상유지는 프랑스 전역의 국민들을 불만을 야기했고, 그 불만의 에너지가 일정수준에 이르자 프랑스대혁명으로 이어졌.











   프랑스대혁명에서 루소의 사상을 보고 사람들이 혁명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혁명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민중의 분노가 우선 누적되어야 한다. 하지만 분노를 하더라도 그들이 겪은 문제가 어디서부터 오는지,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고,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이나 방법론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고려해야 했다. 프랑스 국민의 분노는 도화선 없는 화약덩어리라면, 루소의 사상은 그 화약덩어리에 도화선을 붙여준 셈이었다.


1부 시간에 나온 질의 및 의문사항 정리

수동적인 인간에 대하여

   루소가 말하는 수동적인 인간은 자신의 판단력에 의해 모든 것을 관찰하고 결정하는 게 아니라 주변의 인기나 유행이나 타성의 존재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을 말한다. 이런 부분은 단순히 정치사회적인 요소가 아니라 학문과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에서 인간의 진보가 인간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주었는가에서 루소는 부정적인 관점으로 답했다. 학문은 권력자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가 되었고, 예술은 자신의 권력과 재력을 자랑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루소는 타인의 가치에 치중하는 인간을 비판했다. 이런 요소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행의 시대>에도 담론할 수 있다. 루소의 사상은 18세기이나 21세기 현대철학자에고 통용되는 이유는 바로 인간의 수동성을 제대로 비판한 사상가였기 때문이다. 유행에 매몰된 인간은 스스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대중매체에 파묻혀 구경꾼에 불과하게 된다. 자크 랑시에르의 <해방된 관객>처럼 예술과 미디어는 인간에게 수동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길 바란다.

   인간의 생활에서 능동적인 삶이 아니라 주어진 것에 의지하게 만드는 것이다.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현대사회를 스펙타클이란 단어로 통해 정의했다. 스펙타클이란 이미지가 매개되어진 사회이다. 이미지란 눈에 보이거나 혹은 우리 관념 속에 자리잡은 것이다. 아침에 거리를 걷는 사람이나 차로에 움직이는 차조차도 스펙타클의 사회이다. 스펙타클은 이미지가 매개되는 미디어에 비판되는데, 미디어에 의해 사람들은 의존하고 열광한다.











   자신의 생각이 아닌 주어진 정보에 의해 자신의 의지가 상실되고 대신 미디어에 따라 움직인다. 수동적인 인간이 스펙타클이란 미디어에 드러난 이미지에 열광하면 할수록 더 심각한 스펙타클러가 된다. <루소사상의 이해>에서 루소는 달랑베르에게 연극에 관한 편지를 보내면서 프랑스에 유행중인 연극에 대해 비판했다. 연극을 보는 관객들은 수동적인 인간이 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다는 점이다. 연극에서 일어난 이야기 속에 치중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망각한다는 점이다.











   루소가 원하는 예술은 모두가 같이 참여하는 예술행위이다. 가령 한국에서 농촌에서 행해지던 농악놀이나 부산 어촌에서 행해지는 용왕제일 것이다. 모두 같이 의식을 즐기며 너나 할 것 없이 스스로 행위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루소의 예술사상은 20세기 아방가르드와 포스트모더니즘 사상하고 연결된다. 그의 반미학적 관점은 아방가르드 운동에서 프랑스 상황주의 운동과 맥락이 있고, 소외된 민중을 주체대상으로 또한 식민지 개발반대와 미개인들의 문화를 존중하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인민이란 무엇인가?

   인민(人民)이란 국가나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자연인이다. 즉 국민(國民)은 국가를 이루고 있는 사람이나, 인민은 국민과 다르다. 프랑스대혁명 시대, 왕정시대의 국민(國民)은 국가주권을 가진 민주주의사회의 인간이 아니다. 그렇다면 왕정시대와 프랑스대혁명 시기의 인간을 무엇이라 칭해야 하는가? 프랑스대혁명 이후 파리의 사람들은 모든 남녀노소를 이렇게 칭했다. 시민(citoyen)이라 불렀다. 영어 citizen이란 시민(市民)이란 뜻으로 어느 특정지역에 살고 있는 거주민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민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거주자와 구성하는 자에서 후자 쪽이 능동적인 인간이다.

   인민(人民)이란 단어를 영어로는 people이란 뜻이다. 왕정시대에 국가주권이 없는 국민은 신민(臣民)에 불과했다. 그들은 주권 없는 국민이나, 혁명을 일으킨 사람이고 결국 국가를 만들었다. 인민은 국가수립 전부터 그 곳에서 살고 있던 인간을 말한다. 하지만 인민은 국가를 만들기도 하나, 또한 사회를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사회의 범주를 어디에까지 넓혀야 하나?











   20세기 미국 자유주의 철학자 중에 존 롤즈가 있다. 빌 클린턴이 하버드대학교 시절의 은사이고, 그가 대통령 시절 백악관에 초빙되어 식사대접을 받던 미국 철학자 중에 위대한 사상가이다. 그의 저서로 <정의론>, <정치적 자유주의>가 있지만, 그가 죽기 전에 창간한 도서로 <만민법>이란 책이 있다. 영어로 The raw of peoples이다. 여기서 만민(萬民)이란 peoples이고, 만민은 인민들이란 뜻이다.

   롤즈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나 실현가능한 유토피아적 자유주의 철학을 추구했고, 그의 사상은 칸트의 사상에서 나왔으며, 칸트는 루소의 <에밀>을 읽은 후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3대 비판을 내었다. 칸트는 영구평화론이란 저자를 집필했으며, 루 소 역시 <생피에르 영구평화안 발췌>, <생피에르 영구평화안 비판>처럼 자유주의철학은 이상적인 세계건설에서 이성적 인간을 추구했다.











   롤즈는 칸트주의자로서 <만민법>을 집필했고, 그가 추구한 사상은 합리적 인간이 아니라 합당한 인간을 추구했다. 합리적인 것은 상대방에게 서로 피해주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이라면 합당한 인간은 타인에게 선을 제공하여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사상인 점이다. 그러나 인민이란 단어가 오용되는 경우가 있는 북한 같은 독재국가나 중국 같은 겉으로 공산주의라 말하면서 속으로 자본주의와 유교이념을 동시에 추구하는 국가를 볼 수 있다.

   인민에 대한 관점으로 20세기 여성사상가 한나 아렌트의 사상으로 볼 수 있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저자로, 나치 아우슈비츠수용소장인 아이히만에 대한 연구서적을 작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나 아렌트는 정치적 관점에서 인간을 3부류로 구분한다. people(시민 내지 인민), mobs(선동가), mass(대중 내지 군중)이다. people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고, mobsmass를 선동하는 자이다. mass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people 내지 mobs의 말을 듣고 거기에 따라 행동하는 부류다. 따라서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말하는 인민(people)이란 모든 정치사회적 행위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옳은 것을 추구하는 참된 인간상을 말하는 것이다.

사유재산에 대하여

   루소는 인간의 불평등에 대해 사유재산이 문제라고 한다.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강자와 약자, 최후에 주인과 노예로 이어져 영구 불멸한 인간불평등이 시작되는 것으로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말하고 있다. 루소가 토지점용에 대해 허락하는 점은 아무도 그 땅에서 살지 않고 필요한 땅에서만 농사를 지어가는 것이다.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ics)에서 경제적인 관점은 돈을 많이 버는 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생활용품을 전달해주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중상주의 내지 중금주의 시대 유럽이 아니라 무역의 교류와 분업을 통해 필요한 재원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 조금 더 나은 생활을 하는 것이 목표인 것이다. 루소의 그런 관점은 <정치경제론>에 드러나는 바이고, 루소 역시 인간의 생계를 위해 농촌을 황폐화 시키지 말 것을 권용했다.










   루소는 식량이 가장 싼 이유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만일 식량이 너무 비싸면 인간은 삶을 영위하지 못한다. 하지만 밀은 가장 필요한 사람에게 가는 게 아니라 가장 필요 없는 사람이 먼저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밀로 가발을 만들고, 주스를 만들기 위해 물을 소모하여 물과 식량이 부족해진다. 식량을 생산하는 농촌이 가장 식량이 부족하여 농민은 논밭을 버리고 도시로 몰려든다. 도시의 성장은 농촌을 착취하는 것부터 시작되었으며, 농촌의 황폐화는 식량문제와 더불어 현대에서 말하는 환경오염의 문제도 일어난다.










   19세기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의 원리>에서 농지에 대한 부분이 나온다. 가령 1토지에 노예1인의 생산량과 자유농의 생산량의 차이는 3배라고 한다. 자신의 생계를 위해 자신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미래를 위해 일구는 토지에서 높은 수준의 식량이 많이 나온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식량의 질과 양은 저하된다. 루소가 말한 것처럼 너무 많은 땅을 가진 자는 자신이 아니라 주변 인간을 농노로써 농사를 짓게 한다. 노예인 자들의 능동적으로 농사를 하는 게 아니라 수동적으로 농사를 하는 것이다.










   루소의 <정치경제론>에서 재미있는 말이 나온다. “나는 부유하고 당신은 가난하니, 당신에게는 내가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 서로 합의하자. 내가 당신에게 명령하는 수고에 대해 당신이 갖고 있는 사소한 것을 내게 준다는 조건으로 나를 섬기는 영예를 허락하노라.”, 이 단어는 마르크스의 <자본>에 그대로 인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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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09-01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덜덜한 페이퍼네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자들이 정권을 잡아서인지, 그런 흐름이 전세계적인 추세여서인지 올해 책을 읽으며 가장 자주 접하게 되는 저자가 루소네요.

2016년은 루소의 해인듯. 전작해야겠습니다 ^^


만화애니비평 2016-09-01 19:19   좋아요 0 | URL
루소사상은 맑스와 롤즈를 시작해도 닿인 곳이죠.
무서운 양반입니다..참

붉은돼지 2016-09-01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소생은 루소는 하나도 읽은게 없군요 ㅜㅜ
제가 요즘 고백을 좀 많이 하고 있어요 ....

만화애니비평 2016-09-01 19:19   좋아요 0 | URL
루소의 <고백>이 생각나는데, 9월은 고백의 달이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9-01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소하면 만애비, 롤스 하면 만애비 !

만화애니비평 2016-09-01 20:04   좋아요 0 | URL
맑스도 포함해줘용~~

기억의집 2016-09-01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루소 페이퍼 올리신 적 있을실 때 루소의 책을 샀는데 아직도 안 읽고 있네요. 루소가 대단하긴 합니다. 불평등한 신분제 시대에 자유와 평등을 말하다니.

만화애니비평 2016-09-01 23:14   좋아요 0 | URL
그런 개념조차 없던 민중을 앞으로 올린 점에서 참 대단한 사상가죠

기억의집 2016-09-01 23:23   좋아요 0 | URL
참 이런 거 보면 사회 변혁의 시작점이라는 관점에서 볼때 이런 사상가(철학자)가 위대한 단순히 지식을 전파하는 게 아니고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