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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3 - 4부 1권 ㅣ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13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광주를 비롯한 전국에서 항일 학생 궐기가 한창인 때다.
그 시절에 그런 전국적 궐기가 일어나기가 어려운 여건이었지만, 조선 민중 전반에 항일 의식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고, 생업에 대한 부담이 덜 했기에 학생들이 주축이 될 수 있었지 않았을까.
나라의 전반이 빈곤하기 이를 데 없는 시절이었으니 그런 추측을 하게 된다.
한복의 아들 영호가 학생 궐기에 앞서면서 마을에서는 오랜 동안 멸시와 핍박을 받았던 한복의 가족에 대해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동등한 권리를 인정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살인 죄인의 가족이라는 오명보다 나라를 위하는 영웅적 면모를 존중해주는 모양새다. 사실상 살인 범죄에 연관이 전혀 없는 가족들에게는 오랜 시간의 멍에였으나, 시절이 그랬으니...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경외하고 섬긴 최 참판댁이 가진 불행의 역사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일종의 견해를 가지게 되는 것은 의식의 근대화와도 상관이 있을지 모르겠다. 함부로 재단할 수 없던 높은 담 넘어의 양반도 같은 피와 살의 사람일 뿐이라는 의식. 그럼에도 쉽사리 넘지 못하는 심리적인 계급의 장벽 같은 것.
- 그런데 어찌하여 삼천리 강산 남의 땅으로 쫓겨간 사람이 부지기수인데 이 불운한 강산 거리거리에 거지들이 떼지어 방황하고 있는 것인가. 일인들 왈 조선에는 웬 거지가 이리 많으냐, 총독부에 가서 물어볼 일이다. 땅을 약탈하여 배가 불러 터지게 된 동척에 가서 물어볼 일이다. 조선인은 게으르다, 어째 게으른가 그 것 역시 총독부, 동척에 가서 물어볼 일이다. 조상 대대로 살아 온 땅에서 내쫓긴 수많은 사람들, 날품팔이 행상, 남의 집 고공살이, 그런 일자리나마 과연 충분하며 입에 풀칠할 만한 수입인가. - 14
- 확신할 수 없는 꿈, 아니 거의 불가능하리라는 막연한 예감 때문에 들뜨고 미치는지 모른다. 사실 희망이나 기대 같은 것도 그게 무엇을 향한 것인지 스스로 알지 못하는 상태라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독립되리라는 희망, 더더구나 좋은 세월이 와서 볏섬을 그득그득 쌓아놓고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 그것이 아니다. 현재가 견디기 어려우니 희망에 매달릴 수밖에 없고 생존을 포기할 수 없으니까 희망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가난한 자여, 핍박받고 버림받은 자여, 희망은 그대들의 것이며 신도 그대들을 위해 있나니, 희망의 무지개는 저 하늘과 하늘 사이에 걸리는 것, 그것은 미래인 것이다. - 76
- 인간 이용이, 홍이는 멋진 남자였다고 생각한다. 뇌리를 스쳐가는 간도땅에서의 수많은 우국 열사들, 흠모하고 피가 끓었던 그 수많은 얼굴들, 그러나 홍이는 아비 이용이야말로 가장 멋진 사내였다고 스스럼없이 생각한다. 열사도 우국지사도 아니었던 사내, 농부에 지나지 않았던 한 사나이의 생애가 아름답다. 사랑하고, 거짓 없이 사랑하고 인간의 도리를 위하여 무섭게 견디어야 했으며 자신의 존엄성을 허물지 않았던, 그 감정과 의지의 빛깔, 홍이는 처음으로 선명하게 아비 모습을, 그 진가를 보는 것 같았다. 사라져가는 아비 자취에 대한 마지막 전별의 순간인지 모를 일이었다. - 93
- 내게 베푼 사람은 진실로 할머님 한 분밖에 아니 계셨던가. 내 할머님, 그리고 위의 할머님 또 할머님, 그분들이 청상이 아니었던들 오늘날 최 참판댁 재물은 없었을 것이며 그 옛날에도 최 참판댁 재물은 없었을 것이다. 베푸는 자는 항상 무자비한 존재요 외로운 사람, 이 집안의 청상들은 끝내 베푸는 자리를 지켰으며 무자비한 군주였었더란 말인가. 청상은 베풂을 받아서도 아니 되고 능멸을 받아서도 아니되느니, 가을마다 곡식 섬의 수를 헤어야 했던 그 가는 손목의 과부들, 어찌 참혹하지 아니할꼬. 천형의 죄인이로다. - 128
- "아홉 폭 치마로 덮을라 캐도 있었던 일은 있었던 일, 죽음도 죽음 나름 아니겄소."
그 말에는 영산댁도 입을 다물어버린다. 딴은 그랬었다. 사실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외포 없이 최 참판댁을 생각할 수 없었다. 오랜 세월, 실질적인 영주로서 군림해온 권위에 눌려서도 그랬었지만 그보다 최 참판댁을 둘러싼 갖가지 불행한 내력과 불길한 사건은 마을 사람들의 잠재의식 속에 공포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 220
2024. a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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