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마치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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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난 기억들을 맞춰가는 사이코드라마.

알츠하이머로 어그러진 기억들을 vr 치료를 통해 되짚어가는 이야기인데,
실종, 배신 등의 요소들이 끼어들어 불행의 이미지가 우세하다.

이렇게 어둡고 슬픈 이야기인가
결국 소중하게 살아내지 못한 삶에 대한 회한인가,
소중하게 대해지지 못해 관계의 갈증에 빠져있는 이마치라는 사람이 그림처럼 그려졌다.

그래도 후반으로 갈수록 조금 밟아져서 다행이랄까.
노아 준영과 함께 집에서 빵을 만들어 먹고, 타로점을 치고, 머리카락을 잘라주는 그 소소한 행위들로 씻김굿을 하듯 인생을 위로하는 장면에서 애잔함을 느끼게 된다.
그 작은 행위들로 누릴 수 있는 행복이라는 것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요즘 새삼 자주 생각.

그리고 읽으면서 타로카드의 이미지가 있다고 느꼈는데 어? 타로점치는 장면이 나왔다. 오호..

- 이마치는 오랜만에 그것들을 마주했다. 아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가끔은 그 애가 뉴질랜드나 캐나다 같은 곳으로 유학을 떠난 것 같았다. 이 모든 고통, 실패, 유실이 진짜로 일어난 일이라는 것,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 놀라워 스스로 눈을 찌르고 싶었다. - 19

- 그녀가 스스로를 인정하는 유일한 순간은 배우로서의 순간이었다. 그 외의 삶은 모조리 실패했고, 손아귀 사이로 빠져나갔다. 다른 사람의 가면을 쓰는 일, 그 일이 그녀를 살게 했다. 일은 그녀의 전부였다. - 24

- 포도가 떨어져 밟히면 단번에 포도주가 되는 줄 아는 사람들. 인생이 그렇게 간단치 않다는 것을 정말 모르는 것일까? - 28

- 두 가지 중 한 가지는 포기할 수밖에 없는 거야.
인생이란 그런 것 같아. - 97

- 이마치는 다른 여자들도 그 애를 보며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사람들이 인생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은 다만 죽어가는 과정이라는 것, 매끈하던 선이 뭉개지고 지워지는 과정, 조밀하던 이목구비가 흐물거리고 늘어지는 과정, 환했던 빛이 점차 희미해지는 과정. - 213

- 파도는 밀려오고 또 밀려왔다. 한낮의 부드럽고 나른했던 물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얼음 같은 물이었다. 그 안에서 무언가 발을 잡아채는 느낌에 이마치는 얼른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곳을 떠나지는 않았다. 이마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었다. 그녀는 일흔 살이었고, 아직도 삶이 놀라웠다. - 365

2025. mar.

#3월의마치 #정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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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8 - 5부 2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18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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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의 대하소설이라.. 이십여 권의 이야기가 아무래도 비극적이다.

읽는 나는 이제 광복이 다가오고 있다고 알고 있지만, 소설 속 대한 제국의 국민들은 끝이 안 보이는 폭압의 시절을 온몸으로 겪으며 정신적으로 지쳐 우울감에 잠식되어 있는 것이 느껴진다.

단지, 몇 달의 계엄 상황도 이렇게나 답답하고 수치스럽고 낙담하는 마음이 수시로 몰려오는데, 그 시절 그들의 독립에 대한 전망이 얼마나 거대한 우울이 되었을지...(요즘 토지의 후반부를 읽으면서는 늘 이 생각이 든다... 거듭되는 같은 감상을 어쩔 수가 없다)

양현의 이야기가 주로 서술되는데, 신분이라는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젊은 여성의 마음도 갑갑... 덕희라는 존재도.... 갑갑...

- "바보처럼 웃고 살자. 광대가 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
"언제까지?
순철은 환국의 눈을 깊숙이 쳐다보며 말했다.
"글쎄... 멀지 않았다고 믿어야지. 멀지 않았을 거야." - 20

- 세월이 비정한가 망각이 비정한가, 어느 쪽일까? 사람은 누구나 조금씩 잃어가며 살아간다. 자기 자신도 잃어가며 살아간다. 잃은 것의 시체가 추억이다. 그리고 마지막 잃는 것이 죽음일 것이다. - 188

- 언제까지 미쳐 날뛸까요? 얼마나 사람이 죽어야 전쟁은 끝나지요? 전쟁 미치광이 땜에 과학이 발달되고 부를 축적하기 위하여 과학이 발달되고 없어도 될, 아니 없어야만 할 것 때문에 자원과 인력이 동원되고 생산에 미쳐 날뛰는, 이 끝없는 낭비는 결국 인류가 전멸한 뒤에 끝이 날까요? 그래요. 군국주의는 망해야 해요! 식민지 정책은 끝이 나야 해요. 낭비와 축적의 이 병적 상황을 극복하지 않는 이상 사람답게 살 수 없고 생명이 부지될 수도 없을 겁니다. 제 사장 말대로 농춘은 거대한 군량의 저장소이며 노동자는 모조리 군수품의 부품, 뿐이겠어요? 노동자를 소모품으로 볼 때, 지주들이 농민으로 전락하는 것처럼 노동자 아닌 사람도 노동자로 공급이 될 것 아니겠어요? 이제는 저항 없어요. 망해야 합니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역사의 변혁을 위해서, 인류를 위해서 망해야 합니다.
오가다의 목소리는 비통했다. - 216

- 한 위인이 살다간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정서가 아닐까? 시일까? 타인에게 투영된 그 모습은 보는 사람에 따라 갖가지 정서로 재생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자체는 보는 사람에게는 풍경이며 시다. 위대하다는 그 자체가.
영광은 밑도 끝도 없는,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고 언어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깊은 사념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 304

- 이 서방, 파도가 눈에 뵈지 않는다고 바다가 조용한 건 아닐세. 상어떼가 무리를 지어 날뛰고 피래미 한 마리 숨을 곳이 없다면 조용한 그 자체는 더 무서운 것 아니겠나? 그러나 절망하지 말게. 민중들은 아직 순결하다. 친일파는 말할 것도 없지만 지식인들이 일본이라 할 때 대다수 민초들은 왜놈 왜년이라 하네. 역사적인 자부심과 피해의식은 그들 속에 굳게 간직되고 있어. 그들은 일본인을 두려워하면서도 모멸하고 복종하는 체하면서도 결코 섬기지 않아. 그들은 조선의 대지이며 생명이다.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고 그럴 계기가 주어진다면 민초들은 다 뛸 것이야. 의병의 의기는 아직 그들에게 등불로 남아 있어. - 320

- "나는 가끔 생각하네. 동학이 좀 일찍 일어났든가, 아니면 백 년쯤 후에 일어나든다..."
홍이는 범석을 쳐다본다. 무슨 뜻이냐 묻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홍이는 답답했고 이상했다. 도대체 앞서가자는 것인지 되돌아가자는 것인지 그의 진의가 아리송했다. 범석은 슬픈 눈빛으로 홍의 시선을 받았다. - 324

- "산다는 거는... 참 숨이 막히제?"
한복이는 그런 말 할 만했다. 그가 살아남았다는 그 자체가 기적이었으니까. 돌밭의 질기고 못생긴 무꽁댕이 같았던 그, 밟히고 또 밟히는 길가의 잡초같이 자란 한복이, 그에게도 수십성상의 세월이 실려 이제는 제법, 몸집은 작으나마 의젓하고 사려깊은 현자 같은 눈빛을 볼 수 있었다.
"숨이 가쁘지요."
한참 만에 홍이 대꾸했다. - 345


2025. feb.

#토지 #박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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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크라임 이판사판
덴도 아라타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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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 가해자들이 사건 후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대한 후일담인가..
뭐라 변명해도 범죄자들, 그들이 불안에 떨며 살아가든 말든 후회와 사죄는 알아서들 하라지 싶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가해자들이 태평 무사하게 살아가는 일이 파다하니 환기를 위한 이런 작품도 필요하다 싶다.

젠더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한국이나 일본이나 거기서 거기 소재가 많은 사회이기에 공감되는 부분이 만고,
눈에 띄는 부분이라면 본격적인 불평등의 시작이 '호칭'에서 부터라는 일본의 자각.
말이라는 것이 인식에 끼치는 영향을 생각한다면 중요한 부분이다.

- 두 신참 중에 어느 쪽이 쓸만한지는 분명해졌지만, 계급이 같다면 단지 남자가 낫다는 이유만으로 십중팔구 가와베가 더 책임 있는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 24

- "정말이지 구역질 나네요."
옆에 있던 시바가 실내에 다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늘 이런 식이잖아요. 결국 훌륭하신 어른들이 모여서 한다는 일이 피해 여성을 더 두드려 패는 거나 다를 게 없는 일입니까."
한순간 실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구라오카가 크게 헛기침을 하고 시바를 곁눈으로 보며,
"그래서 뭐. 요즘은 경찰도 강간에는 엄격해. 딸 가진 부모도 많고."
하고 평범한 목소리로 반론했다. "기껏 체포한 강간범을 사회에 풀어놓는 것은 경찰이 아니야. 연설이 하고 싶으면 변호사 회관이나 검찰청, 아니, 국회 앞에서 해." - 108

- "...... 당신, 나한테 뭘 시키고 싶은 건가? 원하는 게 뭐지?"
"뭐긴, 바로잡았으면 좋겠다는 거지. 이 세상을, 조금 더 믿을 수 있는 곳이 되도록." - 212

- 그것은 여자라는 성을 무의식 중에 낮춰보기 때문이겠죠. 성범죄라고 해도, 겨우 그것쯤이야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죠. 살인사건이었다면 체포영장 집행을 중지시켰겠습니까?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고 영혼을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는 잔인한 범죄라는 생각을 했다면 최소한 체포는 진행했을 것이고, 그 뒤는 제대로 된 경찰의 역할대로 검찰과 재판에 맡겼겠지요. 이것은 부장님만이 아니고 정치가만도 아니고 이 나라의 바탕에 있는 우리의......"
구라오카는 제 가슴을 쳤다. "우리의, 죄입니다." - 283

2025. feb.

#젠더크라임 #덴도아라타 #이판사판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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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명언 - “○○○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튼 시리즈 73
하지현 지음 / 위고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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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인지 얼굴을 알고 있는 정신과 의사인데 (왜지?)
아무튼 시리즈에 참여했다기에 궁금했다.

아무래도 상담을 주업으로 하는 정신과이다보면, 타인의 마음을 어떻게든 잘 정의해 주고 나아질 수 있게 하는 일을 해야 할 텐데, 그렇다면 명언이나 이런저런 통찰의 문장을 자주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일 년 정도 정신과 상담을 받아본 적이 있는데, 주로 잘 들어주는 것이 의사의 의무겠지만, 나도 정리할 수 없던 나의 상황에 가이드를 설정해 주는 그런 말들도 종종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하나 마나 한? 지당한 이야기가 명언 아닐까 하는데
그런 명언에 대한 이야기다 보니 기발한 무엇은 없다.

어쨌든 아무튼 시리즈의 초반 같은 출간되는 족족 사읽는 열의는 없어졌지만
가끔 만나면 반갑고 기분전환되는 시리즈다.

- 글쓰기에 있어 명언은 나에게 소중한 도구다. 명언의 문장은 구체적이지만 범용적 해석이 가능하다. 앞뒤에 놓인 글의 맥락을 따라 함께 움직이기에 메시지가 지나치게 퍼지지 않고, 은유적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그 문장을 읽는 사람의 기억을 건드려 글과 접점을 형성하게 해 예상치 못한 시너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명언은 익숙한 표현에서 출발하지만 전혀 새로운 발상으로 나아가게 해준다. 친숙함과 새로움의 조화, 아는 듯 낯설기도 한 느낌이 주의를 분산하는 게 아니라 적당한 긴장감을 주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익숙한 흐름에서 놓쳤던 본질로 나아갈 문이 열리기도 한다. - 8

- 걱정은 흔들의자와 같아서 계속 움직이지만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 27

- 무엇을 반복적으로 하느냐가 우리를 결정한다. 그렇다면 탁월함을 행위가 아니라 습관이다. - 59

- 불평하지 않는다.
잘난 척하지 않는다.
기분 좋은 상태를 유지한다. - 153

2025. feb.

#아무튼명언 #하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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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7 - 5부 1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17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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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시간이 폭력적인 상태로 흘러가고 있는데,
토지의 인물들은 전진하지 못하는 갑갑한 상황에 갇혀있다.
그 정적인 시간 속에서 내면의 폭풍을 감내하는 이들의 울분과 고뇌가 얼마나 치열했을지.

계엄 같은 개똥같은 일이 벌어지고 나니....
독립을 염원하던 그들의 그 긴 시간이 얼마나 암담했을까 싶은 마음이 더 커진다.

- 소나무와 자작나무가 산재해 있는 산속의 무덤 세 곳을 차례차례 돌며 술을 부어 놓고 절을 한 뒤 홍이는 월선의 무덤가에 앉아  담배 한 대를 태우고 일어섰다. 달리 할말도 없거니와 감회도 없었다. 할말이나 감회가 없었다기 보다 죽음과 이별의 냉혹함을 이제는 담담히 받아들였다 해야 옳은지 모른다. 절대적 침묵이 냉혹한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절대적 사실에는 누구든 길들여지게 마련이다. 홍이도 길들여졌던 것이다. 그리움이며 고마움이며 한 인간의 심신을 형성해 준 요람이었을지라도 그 인연들이 형체 없이 사라지고 청산이 되었는데 죽음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영원한 침묵의 냉엄함과 망각의 비정, 죽은 자와 산 자의 관계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등 뒤에서 넋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산새 울음, 그 소리를 들으며 산을 내려온 홍이는 상가로 향했다. - 17

- "한마디로 말해서 조선민족은 일본의 볼모다. 일본이 망하리라는 희망적 정세 앞에서 우리가 앞날을 어둡게 절망적으로 내다보는 것은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우리 민족이 얼마나 소모될 것인가, 얼마나 살아남을 것인가, 해서 희망과 절망의 양면을 지닌 날카로운 칼끝에 우리가 서 있다고 말한 게야. 벌써 수많은 우리 동포가 각처로 끌려나가 고혈을 짜내고 있으며 현재까지는 지원이지만 머지않아 징병으로 우리 젊은이들을 전선으로 몰아낼 것이며 남경학살 때도 그랬지만 여자들은 성의 도구가 될 것이다. 일본은 조선민족을 지옥까지 동반할 거야. 참으로 무슨 힘의 가호 없이는."
일본의 패색이 짙어가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볼모가 된 조선민족이 저들의 패망 과정에서 어떠한 환난을 겪게 될지 모른다는 것도 먹물 들고 의식 있는 사람이면 대개 해보는 걱정이다. - 32

- 그런 사람들 때문에 독립이 될 거라는 달콤한 꿈도 꾸지 않습니다. 내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은 애국애족, 독립을 논하지 않으면 순 날건달로 치부하지만요. 소위 운동하고 투쟁하는 사람들을 그 실체 이상으로 침소봉대해서 감격하고 찬양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나도 동참하고 있다는 자기 만족 같은 것 아닐까요? 그것은 환상, 일종의 환상이며 기만입니다. 마른 자리에 앉아서 손뼉만 치고, 그러고는 말 없는 사람을 비난합니다. 과연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요? - 65

- 이중구조야. 이를테면 수구와 개화가 따로 있는 게 아니구 함께 있는 거야. 함께 얽혀 있는 거야. 너도 그렇구나도 그 이중구조의 희생물이라 할 수 있어. 신여성이라 일컫는 교육받은 여성들, 그 대부분이 완상품이며 고가품일 뿐 사람으로서의 권리가 없다. 좋은 혼처에서 주문하는 고가품이요 돈푼 있는 것들이 제이 제삼의 부인으로 주문하는 완상품이다 그 말이야. 그러면 진보적인 쪽에선 어떤가. 그들 역시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여자에게 주려고 안 해. 이론 따로 실제 따로, 남자의 종속물이란 생각을 결코 포기하지 않아. 여자가 인간으로서 있고자 할 때 인형처럼 망가뜨리고 마는 것이 현실이야. 신여성이 걸어간 길은 완상품이 되느냐 망가지느냐 두 길뿐이었다. - 107

- "용기가 없는 양심... 오늘날 우리 조선인들, 특히 지식분자들이 앓는 병 아닐까요?"
서의돈은 새삼스럽게, 또 전에 없이 신중한 태도로 말을 꺼내었다.
"아무것도 되는 일 없고 이룩하는 일도 없고 자기 자신만 갈아먹는 병, 사실 총독부에 폭탄 하나 던진다고 독립이 되겠소? 길가에서 독립만세 부른다 독립이 되겠어요? 그러나 그것은 용기 있는 양심이지요." - 142

- 수많은 역사, 사연이 똬리를 틀듯 둘러싸여 있는 평사리의 최참판댁, 고래등 같은 기와집, 꿈에서도 잊지 못했던 탈환의 최후목표였던 평사리의 집을 거금 오천 원을 주고 조준구로부터 되찾았을 때, 그것으로 서희의 꿈은 이루어졌고 잃었던 모든 것을 완벽하게 회수했던 것이다. 그때 서희의 감정은 기쁨보다 슬픔이었고 허망했다. 그리고 뭔지 모르지만 두려움 낯섦, 과거에 대한 두려움이었고 낯섦이었다. 서희는 회수한 평사리의 집에 꽤 오랫동안 접근하지 못했다. 그렇다. 서희는 과거를 두려워한 것이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일들은 모두 음산한 비극뿐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평사리의 집은 의식 속에 방치된 채, 서희는 현실에 쫓겼는지 모른다. - 346

- '바로 그게 세월일 거야. 잡히지 않는 안개 같은 그게 세월일거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시시각각 달아나고 희미해지는 것을, 새삼스럽게 서희는 가슴이 죄어드는 것을 느낀다. 묵은 상처들이 모조리 들고 일어나듯 가슴이 아파온다. - 371

2024. dec.

#토지 #박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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