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 - 앤드루 숀 그리어 장편소설
앤드루 숀 그리어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끔 이미 구매한 적 있는 책을 또 사는 멍청이 짓을 하곤 하는데.. 이 책도 두 권을 샀다.
이래서 책은 사자마자 읽어야 한다.
두 번째 구매할 때 너무 익숙한 표지 때문에 너무 오래 장바구니에 담아두어서 그런가 했었는데.....
책 배송을 받자마자 아.. 이 책 나 있는데 라고 깨달음.

기대가 크지 않았다고 기억하는데, 중년의 남자의 이야기라서 였을까.
그러나 읽으면서 점점 빠져들었고, 의외로 감동적이라 조금 놀랐다.

매가리 없고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는 아서 레스,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자꾸만 빠지지만 체념한 듯 받아들이는 아서 레스, 늙어간다는 것을 그저 삶이 주는 형벌로만 여기는 듯한 레스.
처연하고 우습지만 결국에는 응원하게 되는 주인공.

- 그것 하나하나가 장난, 그에 대한 장난이다. 신사 레스, 작가 레스, 관광객 레스, 힙스터 레스, 식민주의자 레스, 진짜 레스는 어디에 있을까? 사랑을 두려워하는 청년 레스는? 25년 전의 완전 진지한 레스는? 글쎄, 그 사람은 하나도 챙겨 오지 않았다. 그 모든 세월이 지난 지금 레스는 그 사람이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 45

- "내가 아는 가장 용감한 사람"이라니, 프레디는 무슨 뜻이었을까? 레스에게는 수수께끼다. 아서 레스가 겁에 질리지 않았던 날을 하루, 아니 한 시간이라도 대보라지. 칵테일을 주문하고 택시를 잡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책을 쓰는 일. 레스는 이 모든 일과 세상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일이 두려웠다. 하지만 이상한 건 모든 게 무서웠기에 다른 것보다 딱히 더 어려운 일은 없었다는 점이다. 세계 일주를 하는 것도 껌을 사는 것보다 두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루하루, 그날 분량의 용기. - 59

- 조라가 묻는다. "백인 중년 남자예요?"
"네."
"백인 중년 미국 남자가 백인 중년 미국인의 슬픔을 품고 걸어 다닌다?"
"세상에, 그런 것 같네요."
"아서.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그런 사람은 공감하기가 약간 어려워."
"게이라도?"
"게이라도." - 208

- "그러니까 이 모든......" 조라가 머리카락을 얼굴에서 쓸어 넘기며 말하고 있다 ."이 모든 여행이, 아서, 그냥 남자 친구 결혼식에 못 가기 위해서라는 거야?"
"남자 친구...아니야. 그리고 못 간다기보다는 혼란을 피하려는 거지." - 229

- 카를로스는 뭔가 결정한 것처럼 미소를 짓는다. "아서, 난 생각을 바꿨어. 너한테는 희극인의 행운이 있어.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는 불운이 따를지언정 중요한 문제에서는 운이 좋은 거지. 내 생각엔 - 아마 넌 동의하지 않겠지만 - 네 인생 전체가 희극인 것 같아. 전반부만이 아니라 전체가. 너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이상한 사람이야. 너는 모든 순간을 갈팡질팡 넘어가며 바보가 됐어. 오해하고 말실수를 하고 우연히 마주치는 그야말로 모든 것에, 모든 사람에 걸려 넘어지고도 네가 이겼어. 넌 그걸 깨닫지도 못하지만."
"카를로스." 그는 승리감을 느끼지 않는다. 패배한 기분이다. "내 인생은, 작년의 내 인생은......"
"아서 레스." 카를로스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끊는다. "너는 내가 아는 사람 중 최고의 인생을 누렸어."
이 말은 레스에게는 헛소리다. - 275

- 75세의 로버트가 무겁게 숨을 쉬며 말한다. "이런, 불쌍한 내 꼬마. 많이 사랑하는 거야?"
그래서 아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제 로버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는 누군가에게 사랑이나 슬픔에 대해 설명하라고 요구하는 일이 얼마나 이상한지 알고 있다. 사랑은 손가락으로 짚을 수 없다. - 295

2023.dec.

#레스 #앤드루숀그리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찰 살해자 마르틴 베크 시리즈 9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다.
읽어버리는 게 아깝기도 하고 워낙 쌓여있는 책이 많기도 해서 시리즈 마지막 권이 출간되고서야 경찰 살해자를 읽는다.

이제 아는 사람 같은 친근감도 있는 데다, 이들의 냉소에 가까운 유머 코드는 정말이지 애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무미건조함 속에, 진절머리 나는 현실 속에 경찰로서의 당면한 의무에 성실한 이들을 보고 있자면 그야말로 소설 같은 캐릭터가 아닌가 싶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감정적인 면을 배제한 채 흘러가는 이야기 스타일 덕에 기대치 않은 불행한 사건이 일어날까 솔직히 조금은 불안한 마음을 갖게 하기도 한다.

폴케 벵트손은 분명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관료주의적이고 성과주의에 매몰된 사법당국에 의한 인권 침해를 받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팽배한 권위에 대한 불신과, 그 권위를 가진 자들의 우스꽝스러운 면을 충분히 그려내고 있다. 그건 스웨덴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은 보편의 모습인지라 충분을 넘어서는 공감을 할 수밖에 없다.
마이 셰발, 페르 발뢰의 사회주의자적 관점의 많은 부분에 동의하는 지점.

시리즈의 시작인 로재나를 읽을 때만 해도 이런 템포와 감성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지만, 지금은 어떤 범죄 시리즈 보다 사랑하게 된 마르틴 베크.

마지막 권도 바로 읽기 시작해야겠다.

- 예전부터 콜베리는 경찰을 떠나고 싶다는 바람을 간간이 내비쳤고, 최근에는 그 충동을 실행에 옮길 결심이 점점 더 굳어지는 듯했다. 마르틴 베크는 콜베리를 응원하기도 말리기도 싫었다. 경찰에 대한 콜베리의 결속감이 바닥났다는 것을 알았고, 콜베리가 양심의 가책을 점점 더 많이 느낀다는 것도 알았다. 한편 콜베리가 이만한 대우에 만족스러운 직업을 새로 구하기가 몹시 어려우리라는 것도 알았다. 젊은이들에게 특히 해당되는 이야기지만 대학 졸업자에 경력까지 있는 전문가들조차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고실업 시대에 쉰 살 전직 경찰관의 전망은 밝지 않았다. 이기적인 관점에서만 보자면 콜베리가 남기를 바랐으나, 마르틴 베크는 별로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콜베리의 결정에 영향을 미쳐야겠다는 생각은 애당초 들지도 않았다. - 34

- 비행장은 법으로 보호되는 자연경관을 망쳤다. 광범위하고 회복 불가능한 파괴는 생태학적으로 극악한 행위였다. 정부가 '더 인간적인 사회'라고 자칭하는 이 나라가 갈수록 반인도주의 사회가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였다. 사실 '더 인간적인 사회'라는 모토 자체가 워낙 냉소적인 것이어서 보통 사람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 38

- 문득 요즘 사람들이 나라의 현 상태에 불만을 토로할 때 쓰는 표현이 떠올랐다. '스웨덴은 썩은 나라이지만 아주 예쁘게 썩은 나라다.' 누가 말 혹은 글로 쓴 표현이었겠지만 누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 94

- 법치라는 단어는 이미 썩을 대로 썩은 단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입에 올리기를 꺼리거니와 누군가 진지하게 저 말을 하는 걸 들으면 놀라서 입을 헤벌렸다. 스웨덴에 법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최근 상황은 정부와 체제가 법을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늘 그렇듯이 시민들만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 158

- 사법제도 내부의 소통은 보통 지루하고, 장애가 많고, 각종 서류 작업과 관료주의적 요식이 따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가끔은 그 과정이 아예 없는 듯했다. 누군가 전화를 들고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면 그만이었다. - 208

- 카스페르는 자기 삶이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스웨덴의 다른 많은 젊은이들이 그렇듯, 그는 사회적 지위와 물질적 부만이 개인의 가치를 재는 잣대인데다가 젊은이들에게 정직하고 비교적 보람찬 일자리를 제공하지도 못하는 사회질서에 아무런 충성심을 느낄 수 없었다. 죄의식의 문제는 이렇게 해소되었고, 이제 그는 다른 많은 또래들과 같은 의견을 품고 있었다. 자신은 시민들에게 거짓과 기만을 주면서 그들에게 연대감을 요구하는 이 염세적 정치체제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그는 또 부끄럽게 여겨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나라의 운영자들이라고 생각했다. - 331

- 몬손이 앞에 놓인 보고서 중 하나를 보았다.
"네, 반사회적 타입. 사회에 저항하는. 교육을 다 받지 않았고 직장을 가졌던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폭력 범죄로 형을 산 적도 없어요. 이따금 무기를 소지하기는 했던 모양이지만. 터프하게 보이고 싶었겠죠. 또 약물의존자였습니다."
콜베리는 한숨을 쉬었다. 이른바 복지국가에 이런 타입의 사람이 너무 많아져서, 이제 개개인을 추적하여 관리하기란 불가능했다. 더 나쁜 점은 그들을 어떻게 하면 좋은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 356

- 세상에는 평범하고 정직한 노동을 최고로 훌륭하고 행복한 것으로 여기는 나라들도 있는 듯했지만 ,여기서는 그런 말을 삼년에 몇 주씩, 즉 선거 기간에만 들을 수 있었다. 그마저도 위선적이고 고상 떠는 용어로 이야기되었고, 그 속은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했다. - 430

-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기분이 어때, 렌나르트?"
"나빠. 하지만 덕분에 뭔가 깨달은 것 같아. 어쩌면. 아무튼, 우리 동료라는 자들이 어떤 인간인지."
"엿 같은 은직업이지." 군발드 라르손이 말했다. - 446

2024. jan.

#경찰살해자 #마이셰발 #페르발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맨스필드 파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6
제인 오스틴 지음, 김영희 옮김 / 민음사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난한 집을 떠나 친척 손에 자라게 된 페니의 이야기.

인간이 도덕적으로 어떤 포지션을 잡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결국엔 보상받고 응징 받는다는.

여성의 활동 영역이 제한적 시대의 이야기니 감안하고 읽어야 할 부분이 있지만,
섬세한 인물 묘사와 시대상 표현은 언제나 재미있다.

큰 이모인 노리스부인과, 버트럼가의 두 딸. 밉상도 이런 밉상들이 있을까 싶은 설정이고, 결국 이들에게는 징벌적 결말이 주어진다는 게 좀 구태의연하기는 하지만.
늘 친절한 마음으로 사촌을 대해주던 에드먼드와의 엔딩은 정해져 있었겠지만, 주인공인 페니와 더불어 아무리 봐도 무매력이라는 점도 읽는 내내 드는 생각이었다.
중반 이후 필사적으로 헨리 크로퍼드의 구애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페니의 상황이 답답하기도 했지만, 서둘러 이야기가 마무리된다는 느낌이 있다.

결혼에 대한 신랄한 대사가 인상적이다. 순수한 애정에 기반한 결혼이 얼마나 환상에 가까운 일인지도 생각하게 되고.
돌봄을 받기 위해 페니를 키웠다는 점은 충분히 드러나있고, 페니의 해방도 동생 수전이 그 뒤를 이어주었기 때문이고.
ㅋㅋ 여러 면으로 으악 싶은 것이지만, 재미는 충분했다.

- 결혼 문제에서는 더더욱 그렇지요. 이미 결혼한 분들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언니, 여자든 남자든 속지 않고 결혼하는 사람은 백에 하나도 안 될걸요. 어디를 보나 온통 그런 사람들뿐인걸요. 사실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겠다 싶어요. 세상의 온갖 거래 중 상대방한테는 가장 많은 것을 기대하면서 자기는 가장 부정직하게 나오는 게 결혼이니까요. - 68


2024. jan.

#맨스필드파크 #제인오스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 끝의 살인 첩혈쌍녀
아라키 아카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첩혈쌍녀 시리즈.
두 명의 여성이 이끌어가는 이야기.

세상의 종말이 진행되는 상황에 태연하게 운전교습을 다니는 도입부는 충분히 흥미를 끌기 좋았다.
그러나 딱 고 정도의 흥미로 마무리된 좀 아쉬운 이야기.
학폭의 가해자로 지목되어 방에 칩거한 남동생과 둘만 남은 주인공과 정의 실현에 대한 압박감을 가지고 있는 전직 형사가 살인사건을 파헤치는 내용.

살인자에게 낙원이 되어 버린 종말의 시대에 대한 상상은 이미 레퍼런스가 충분하여 그리 어렵지 않게 그려진다.

- "뭐 하러 왔어. 이런 곳에?"
그것이 강사의 첫 마디였다. 면허 따러 왔다고 하자 강사는 신기한 곤충이라도 관찰하는 눈으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굳이? 임시면허가 있다면 운전에 대해서는 대강 알 텐데?"
"음, 그래도 무면허 운전은 곤란하다 싶어서요."
"재미있군. 지금 온 세상이 무법천지야. 이런 판국에 누가 무면허 운전 따위에 신경 쓴다고."
"그래도, 강사님도 여기 계시잖아요?" - 43

2023. dec.

#세상끝의살인 #아라키아카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L의 운동화
김숨 지음 / 민음사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거의 출간 직전에 구입했다. 1판 1쇄를 샀으니.
그럼에도 이제까지 못 읽고 있었던 건 무거운 마음이 따라붙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동화의 복원이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역사의 이야기도, 저항하다 스러져간 사람들의 이야기도, 예술의 이야기도 담겨있다.

조금 울컥하는 마음이 들 때가 많아서 자주 쉬어가며 읽은 책이다.
이제서야 책을 다 읽었다고 해서 후련한 마음이 들지도 않는 책이다.

- L의 운동화는 유물도 그렇다고 예술 작품도 아니다. 이것 역시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는 게, L의 운동화는 역사적인 가치를 지니는 물건이었다. L이라는 한 개인의 유품을 넘어서서 시대의 유품이 된. - 25

- 그러고 보면 그 어떤 존재를 가장 강렬하게 느끼는 때는, 그것이 죽어 갈 때가 아닐까, 희미해져 갈 때, 변질되어 갈 때, 파괴되어 갈 때, 소멸되어 갈 때. - 33

- 발생년월일 : 1987년 6월 9일
사망년월일 : 1987년 7월 5일 오전 02시 05분
6월 9일부터 7월 5일까지 L의 운동화는 어디에 있었을까? 질문과 함께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L의 운동화로 향한다. - 51

- "피해자도, 증인도 없는 법정을 상상해 보았어요. 피해인석과 증인석은 비어 있고, 사건과 사건 번호와 배심원들과 재판장과 피의자만 있는 법정을요. 그럴 때 L의 운동화가 피해자이자 증인이 되어 줄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하다.
"피해자이자 증인이요?"
"네, L을 대신해서요."
"......"
"피해자가 이미 죽고 없으니, 피해자를 대신할 운동화를 어떻게든 살려야 하지 않을까요? 피해자이자 증인이니, 어떻게든 살아서 증언하도록요." - 55

- "6월 10일 자정부터였어요. 스무 날하고 이레 동안 중환자실 침대에 누워 있는 우리 아들 곁에서 신문지 한 장을 이불 대신 깔고 덮고 자는 학생들을 보면서 신문지 한 장만 있어도 사람이 살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신문지 한 장만 있어도 사람이 죽지 않고 살겠구나...... 신문이 내게는 그런 것이에요."
그녀는 또다시 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말을 잇는다.
"우리 아들이 어디서 죽었을까...... 왜 죽었을까...... 도망가다 죽었을까...... 하지 말라고 했는데...... 하더라도 뒤에서 하라고 했는데..... 뒤에서...... 뒤에서 하라고 했는데..... 위험하니까 하더라도 앞에서 하지 말고..... 사진을 보니까 앞에서 했더라구요...... 앞에서......"- 125

- 이미 '사망 선고'가 내려진 L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는 내게 반문한다. 심장 박동이 멈춘 환자를 붙들고 애를 쓰는 것이.
"저도 의미를 찾는 중입니다."
내가 L의 운동화를 복원하기로 결심하는 데, L의 어머니의 고백이 결정적이었다는 말을 나는 그에게 하지 않는다. 아들의 운동화라고 하니까, 아들의 운동화인가보다 한다는 고백이, 당신의 아들이 신었던 운동화인지 모르겠다던 그 솔직한 고백이. - 136

- 붓에 다시 파라로이드를 찍어 조각으로 가져가던 나는 움찔한다.
번개가 치듯, 조각에 금이 간다.
하나이던 조각이 두 개가 된다.
잘 굳나 싶던 조각이 바스러진다. 바스러지는 조각을 나는 속수무책의 심정으로 바라볼 뿐이다. - 158

- L의 운동화를 지켜보는 시간이 더 길다. 그것을 만지는 시간보다 조용히 지켜보는 시간이. - 159

- "이제 촛불을 켜야 할 때입니다."
"그것도 L의 일기에 있는 문장인가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느껴진다.
"촛불은 우리를 조용히 의자에 앉게 합니다. 그곳에는 타다가 또 타는 우리의 삶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 187

- 이틀 내내 잠자코 지켜보기만 할 뿐, 나는 L의 운동화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울 때가 있다. 뭔가를 할 때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 197

- "오늘 낮에 L의 운동화를 주웠다는 이를 만났어요. 뜻밖에도 제 지인의 친구분이었어요. 여자분으로, 자신도 그날 L이 피격을 당하던 현장에 있었다고 했어요. 사람들이 부축해 가는 L의 발에서 떨어진 운동화를 자신이 주웠다고요. 운동화를 찾아 주려고 병원까지 따라갔다고 했어요. 나아서 집에 가려면 운동화가 있어야 할 텐데 싶어서요. 운동화가 있어야 그것을 신고 집에 갈 텐데 싶어서...... 그 여자분은 L이 나아서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L과는 개인적으로 모르는 사이라고 했어요. 운동화를 아무에게나 줄 수 없어서 손에 꼭 들고 있었대요. 밤 11시가 넘도록 운동화를 손에 꼭 들고 응급실 한쪽에 가만히 서 있다가 L의 어머니께 전해 드렸대요. 그 후로 까맣게 잊고 살다가, 신문에서 L의 운동화를 를 복원한다는 기사를 읽고 무척 놀랐대요. 그날 병원 응급실까지 따라가 집에도 못 가고 기다리다가 L의 어머니께 전해 드린 운동화가, 신문 한 귀퉁에 실린 L의 운동화가 맞나 싶어 혼란스러웠다고 했어요."
전화 통화를 끝내고 나는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다. 운동화가 있어야 집에 갈 텐데 싶어서 L의 어머니가 올 때까지 운동화를 꼭 들고 응급실 한쪽에 서 있었던 마음, 그 마음이 지난 28년 동안 L의 운동화를 버티게 해 준 게 아닌가 싶어서. - 270

2024. jan.

#L의운동화 #김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