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하는 삶 - 개정판
이창래 지음, 정영목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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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의 들뜬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고요한 책을 읽어야 겠다는 의도로 집어든 책.

결과 만족.

그러나 마음이 휑해지는 느낌은 어쩔 수가 없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어느 계절의 잔잔한 수영장의 표면같은 베들리런.

끈적하고 불쾌한 전염병이 휩쓴 듯한 공기가 가득 채워진 밀림속의 웅덩이 표면같은 인도네시아의 병영.

이렇게 상이한 느낌의 두 공간이 예고도 없이 불쑥 교차되는 시점을 지날 때는 알것 같기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한 기분이 들고 마는 것이다.

이 두 공간은 물리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매우 멀지만,

얇고 뒷장이 훤히 비치는 매끈한 종이 한장을 사이에 둔 것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삶의 표면을 스르륵 미끄러지듯 살아온 프랭클린 하타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중반까지도 갈팡질팡했다.

완벽한 일등 시민으로 살아가는 이민자의 모습인가,

전쟁의 한 가운데 반인륜적인 범죄를 눈 질끈 감고 외면한 목격자인가,

역사의 광풍 속에 이리저리 휩쓸린 나약한 인간인가.

결국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책을 덮었지만...

표지의 강렬함도 묵직하다.

2015. Dec.

사실 무시무시한 것은 우리가 중심에 있었다는 것이다. 순진하게, 동시에 순진하지 않게 더 큰 과정들을 구성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 전쟁 기계에 우리 자신을, 또 서로를 먹이로 내주고 말았다는 것이다. - 들어가는 글.

히키 씨는 벽의 옷걸이에서 점퍼를 낚아챘다. "다 집어치워."
그는 밖으로 성큼성큼 나가 버렸다. 문은 활짝 열어 놓은 채였다. 히키 부인은 정신을 수습하고는 문을 닫았다. 무척 화가 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나 때문에 무척 창피해하고 미안해하는 것도 분명했다. 나는 그녀에게, 남편이 엄청난 압박감에 시달리다 보니 생긴 일이므로 내 감정이 상할까 봐 염려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히키부인은 좋게 봐 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나는 뭐라고 토를 달지는 않았지만, 내가 좋게 봐 준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이해였다. 극한 상황에 처한 사람은 비뚤어진태도를 보일 수 있고, 심지어 충격적인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이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 중 무엇이 진정하고 핵심적인 것인지, 또 무엇이 어느 모로 보나 비정상적인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 입장에서도 쓸데 없이 되풀이해 생각하기보다는 빨리 잊어버리는 편이 좋은) 순간적인 실수인지 아닌지를 분별해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나는 나 나름의 경험을 통해 그래야 함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 p. 22

나는 처음에는 베로니카에게 네가 절대적으로 옳다, 이 세상(또는 우리가 만든 세상)에서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가장 빈약한 축복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늘 영광과 찬양을 받는 것 같지만 실제로 아름다움을 가진 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대부분 악의와 비참뿐이다, 라고 말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나는 이제 그것을 안다. - p. 101

나는 이제 뭘 `본다`해도 내가 보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그것이 현실인지, 아니면 내가 만든 것인지, 아니면 그 중간쯤으로 우리가 삶에 기대하는 것 때문에 만들어 놓고 공유하는 환상인지, 아니면 이렇게 묻는 것이 오히려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최대한 버텨 내고 만족하고 목적을 부여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만 할까? - p. 116

그녀에게 약간의 평화를 주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했을 것이다. 그녀가 요구하는 대로 무슨 일이든 실행에 옮겼을 것이다. 심지어 그녀의 탈출이라도 도왔을 것이다. 그녀가 요청한다면, 또는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면, 다른 인간을 해치는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느낌이란 얼마나 특별하고 가혹한 것인지. 얼마나 무시무시할 정도로 순수한 것인지.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기운이 쭉 빠진다. 만족을 얻은 남자는 평범하든 잔인하든 인간적이든 어떤 행동이라도 아주 쉽게 결심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의적인 의지로 영원히, 영원히 자신의 기억에 남을 일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 - p. 361

리브의 계산이 정확하고 모든 것이 잘된다면, 나에게는 이곳을 떠나 얼마가 남았는지 모르는 내 여생을 수수하게 살 수 있는 돈이 남을 것이다. 서니 같으면 가지 않을 곳, 남부나 서부, 아니면 그것보다 더 멀리 바다를 건너 이전에 알던 바닷가에 내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순례 같은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 운명이나 숙명을 찾아 나서지 않을 것이다. 나는 창조주의 얼굴에서 위로를 구하려 하지 않을 것이며, 죽은 자들에게서 용서를 구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내 살, 그리고 피, 그리고 뼈를 짊어지고 가겠다. 깃발을 흔들겠다. 내일, 이집이 그득해지고 활기가 넘칠 때 나는 밖에서 들여다보겠다. 나는 이미 어딘가를 걷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 타운일수도 있고 다음 타운일수도 있다. 아니면 8000km 쯤 떨어진 곳일 수도 있다. 나는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이곳에 이를 것이다. 마치 귀향을 하듯. -p. 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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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5-12-26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자가 바뀌어 새로 출간되었군요.
그러고 보니 말씀하신 것 처럼 이창래 작가의 책은 읽고 나면 어느 책이나 다 휑하는 느낌이 있었던 것 같아요.

hellas 2015-12-26 17:32   좋아요 0 | URL
번역이 중요한 작가이기도. 휑한 그 느낌이 필립로스나 존 윌리엄스와 비슷하기도 하고. 여튼 좋아하는 작가가 된건 확실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