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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적인 도시 - 뉴욕 걸어본다 3
박상미 지음 / 난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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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다의 걸어본다 시리즈의 신간 소식이 반가웠지만, 이번 세 번째 도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그리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편하게 읽히는 책 한 권을 만날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다 이 책을 얼마쯤 읽었을까, 저자의 글에서 '제임스 설터'가 몇 번 언급된 부분을 보다 생각났다. 아, 그 책의 번역가였구나. 제임스 설터의 전작 두 권을 읽으면서 봤던 이름이었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번역가의 이름을 기억하려고 했던 작품이었다. 감정적으로 흥분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제임스 설터가 그렇게 썼는지, 아니면 번역가의 번역 때문인지는 몰라도 제법 담담하게 읽었던 여운 때문이었다. 저자와의 그런 인연(?)이 생각난 순간, 이 책이 달리 보였다. 편하게 읽히기만 하는 게 아니라, 흥분되지 않는 감정의 선을 더 그어갈 수 있다고 생각되기 시작했다. 분명 어떤 감정이 들어가 있기는 한데, 내가 읽은 이 책은 감정의 흐름보다는 조금은 담담하게 읽혔다. 저자의 말투와 흐름이 여전했다는 느낌?

 

무엇을 강요하거나 억지스럽게 소개하려는 애쓰는 게 없다. 담담하게 풀어가는 일상의 한 부분이며, 저자의 생활 대부분을 이루는 책과 예술을 이야기한다. 이 책의 제목처럼 지극히 사적인 저자의 시선을 담은 뉴욕이란 도시 생활기이자, 그곳에서 살면서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일기처럼 풀어낸 글이다. 때론 타지에서 겪는 향수가 살짝, 삶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세상 보기가 약간, 그림과 작가에 대한 지식이 많이, 담겨 있다. 자신이 걸어온 길과 자신이 쓴 글을 되짚어보는 일이자, 앞으로의 시간을 꾸려갈 어떤 마음의 확인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시선으로 읽게 했다. 무엇보다 저자의 사적인 도시의 이야기다, 그동안 내가 뉴욕이란 도시에 가졌던 선입견을 흐리게 했다는 거다. 상당히 거리감 있게, 뭔가 어울리지 못하고 삭막하게, 바삐 돌아가는 세상의 표본처럼 여겼다. 그런데 말이다. 저자의 글을 읽다 보니, 뉴욕이든 어느 도시든 특별해지는 건 한순간이더라. 그 특별한 감정을 함께한 곳이 저자에겐 뉴욕이었을 뿐이다. 뉴욕에서 살면서 크게 작게 저자가 겪어간 시간이나 장면이 저장한 기억이 이 글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그러한 것들이 모여 저자에게 특별하고 사적인 도시로 만든 거다. 그 도시 전체가 아니라 저자를 품었던, 저자가 걸었던 그 길이 이젠 그냥 도시가 아니고, 그냥 길이 아닌 게 된 것. 읽다가 문득, '나에게 그런 도시는 어디인가?'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아쉽게도 그런 특별한 기억저장소로 들어갈 도시가, 나에겐 없더라. 그래서 저자가 말하는, 숨 쉬고 걸었던 그곳의 이야기가 사적이고 특별해 보였다. 반면에 그 특별함에 속하지 않은 나도 불편하지 않게 읽을 수 있게 한다. 낯선 곳을 걷는 기분으로, 낯선 사람들과 웃는 얼굴을 마주하는 표정으로, 낯선 기분을 즐기게 하면서.

 

사람들이 내가 쓴 책에서 원하는 것은 결국 뉴욕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사람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거의 처음부터 나에게 뉴욕이란 도시는 중요했다. 내가 태어난 도시가 아니라 내가 살기로 선택한 도시. 뉴욕은 나라는 개인에게 매우 사적인 은유였다. 내가 자라나며 불만을 품었던 중산층적 가치들의 전복이 일어날 수 있는 장소. 안정과 위생과 효율보다 도전과 거침과 우회가 인정되는 곳, 불가능하게 치솟은 빌딩들처럼 위대함이 꿈꾸어지고 시도되는 장소로서의 은유. 뉴욕은 내 삶의 변명들을 뭔가 다른 것으로 바꾸어가는 데 필요한 나만의 내면적 장치였다. (87~88페이지)

 

거의 모든 예술가의 도시라고 여겼던 곳. 뉴욕의 갤러리들과 거리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게 한다. 공연과 영화를 찾아다니며 음악으로 귀를 붙잡고, 그 시대의 패션과 스타일을 그리게 한다. (이 책은 2005~2010년까지의 기록이다) 예술 작품들을 이야기하고, 무심코 책 한 권을 꺼내 어느 구절을 찾게 한다. 사실 나에게는 저자의 관심사나 기록, 저자가 언급하는 예술 작품들의 흥미로움이 그대로 전해지지는 않았다. 내가 잘 몰라서 소화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다. 하지만 저자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예술을 대하는 자세와 의미를 고민하게 한다. 평범한 모습과는 사뭇 다른 공기가 존재하는 듯하면서도, 그 진지함과 특별함에 눈길을 머물게 하곤 했다. 한편으로는 그 분위기를 끌어가며 뭔가 더 말하고 가르쳐주려고 하는가 싶었는데,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무겁거나 부담스럽지 않다. 읽는 이에게 강요하는 게 없어서다. 그저 저자의 생활 주를 이루는 것들을 얘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이런 관심사가 있고, 이런 일을 하며, 이런 사람들과 이런 시간을 보내며 살고 있다. 바로 여기, 뉴욕에서...'라고 말하는 듯이.

 

언급되는 작품들과 작가들의 이야기에서, 미술을 보는 전문적인 눈을 가지면 좋겠다는 부러움의 시선도 가지게 된다. 그림을 자유롭게 보면 된다고 하지만, 제대로 볼 줄 아는 자연스러운 지식을 말한다. 여러 작가를 말할 때는 애정과 관심이 넘쳐 보였고, 그들의 작품과 생을 들려줄 때면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보내며 들을 수 있다. 여기서 좀 더 관심 두게 된다면 예술을 접하는 깊은 눈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많이 들어본 작가도 있었지만, 저자가 어디에 아껴두었다가 꺼낸 것처럼 생소하게 들리는 작가도 있었다. 아마도 여기서 저자의 취향을 살짝 엿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패션, 미술, 문학 등 다양하게 그 취향의 멋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자가 번역한 작품들, 애정 있게 보는 그림들, 시대의 흐름을 말하는 패션의 대가들. 서로 전혀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지만, 이상하게도 그 모든 작가와 작품들의 이야기가 연결된 듯하다. 같은 공간에서 자신의 작품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다.

 

위대한 질문이야말로 큰 영감을 준다. 위대한 예술작품들은 모두 위대한 질문이었고 다른 작가들이 밟고 올라서는 토대였다. 이렇게 우리가 방을 채워가는 수많은 답들은 그 자체로 다시 방만한 질문이 된다. 과연 우리가 이들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이 중요한 것들을 누구의 힘으로 어떻게 지킬 것인가. (171페이지)

 

뉴욕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느낌이 강했다. 오랜 시간 뉴욕에 머물면서 보고 듣고 겪었던 저자의 시선이 그대로 담겨 있다. 그곳과 이곳의 다리 역할을 하는 것처럼 말이지. 몰랐던 장면들에 낯선 시선을 던지면서도 신중하게 듣게 하면서, 단어 하나가 품은 여러 의미를 어느 순간에 어떻게 꺼내야 하는지도 고민하게 한다. 이건 아마도 살아가는 태도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적용하는 듯하다. 매일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적어낸 것을 이렇게 한 권으로 만나게 되어, 독자의 입장에서는 다행이다. '아, 이런 문화의 이야기가 여기서 들려오는군요.'라고 알게 되었다고 말해야만 할 것만 같다. 번역자로 만났던 저자 특유의 분위기가 글 곳곳에 녹아있어 이국의 도시를 이야기하는데도 친근함은 있다. 번역자로만 알고 있던 저자의 이름에 다른 이름이 많이 더해질 듯하다.

 

 

덧)

책 재킷을 벗겨내어 펼치면 안쪽에 자리한 뉴욕의 지도가 하나의 산책로로 정리되어 있다. 손끝으로 그 산책로를 짚어가며 눈으로 걷는 길을 만끽해도 좋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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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도 - 관점을 뒤바꾸는 재기발랄 그림 에세이
김수현 글.그림 / 마음의숲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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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괜찮아, 오늘도...『180도』

 

 

가끔, 뻔한 그 말을 듣고 싶을 때가 있다. 어느 가수가 부른 노랫말처럼 ‘수고했어 오늘도’라는 말에 위로를 얹어보고, ‘괜찮아’라는 말에 어깨를 기대고 싶은 순간이 있다. 별일 없는, 별 기대 없이 흐르는 하루였을지라도 말이다. 괜찮을 거로 생각했던 일들이 괜찮지 않은 것으로 결말이 나곤 할 때.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알게 되는 건 만만하지 않은 세상이라는 것, 없는 게 메리트라는 것만 확인하게 되는 순간의 반복. 입버릇처럼 쉬운 게 없다는 말. 휴... 그래도 살아가고, 또 살아내야 하는 게 인생이라는 듯 오늘도 숨 쉬고, 버티며 또 걷는다. 뚜벅뚜벅. 자신에게 거는 주문처럼.

 

김수현이 전하는 뒤집어본 생각들 역시 그 걸음에, 위로와 용기에 한 손을 보탠다. ‘이렇게’ 보던 것을 ‘저렇게’ 볼 때 달라지는 것들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세상을 180도 뒤집어 바라보니 전혀 다른 방향에서 다가오는 것들로 살아갈 만한 세상을 꿈꾸게 한다는 것. 이런 말들과 생각 역시 별거 아닐 수 있는데, 그 별거 아님을 쉽게 찾지 못해서 이런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들려주는 게 아닐까 싶다. 어디 들어갈 데 없나 싶어 숨을 구멍을 찾아 헤매고, 이 비를 피할 곳 없나 싶어 넓은 처마 밑을 찾아 두리번거리게 하는 상황들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을 수 있다고 말하는 목소리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들, 그렇게 보면서 생각하는 것들이 고개를 약간 기울이면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일상의 여러 장면과 생각으로 풀어낸다. 30도에서 시작한 고개의 기울임이 60, 90, 120, 150, 180도에 이르러 정반대의 시선으로 왔을 때 비로소 느끼게 되는 것. ‘이렇게 보는 것도 괜찮네’ 하는 시선의 변화가 만들어낼 긍정의 후기가 그려진다.

 

안다.

사는 게 때론 계란 노른자 마냥 퍽퍽하다는 것을.

때론 삶의 중력에 짓눌려 버릴 것 같다는 것을.

그러나 이런 퍽퍽함 속에서도

누구의 ‘탓’인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결국은 나의 ‘몫’을 해나가는 것이다. (62페이지)

 

저자가 말하는 청춘의 특권, 실패할 수 있는 자유. 도망치거나 겁먹지 않고 용기 낼 수 있게 하는 한 마디가 짧은 글 속에 가득하다. 생각을 180도 바꾸니 세상이 180도 만만해진다는 정의를 몸소 실험해보고 싶게 한다. 실제 나를 둘러싼 환경이나 상황이 금방 바뀔 게 아님을 알지만, 그 불행이나 고통이 뒤집힐 수 있는 방법은 뜻밖에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늘 모르는 척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럴 때마다 이런 책, 이런 문장이 하나씩 찾아와 글자를 굵게 칠하고 상기하게 한다. ‘여기, 이런 말도 있는데? 이런 시선도 있는데? 어때? 괜찮지?’

 

사소한 일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이 뒤집어 본 생각 한 번으로 얼마나 다른 자세를 만드는지 굳이 여러 번 말할 필요는 없는 듯하다. 아니까 한 번만 더 언급하고, 아니까 더 잘해볼 수 있는 시도, 아니까 긍정의 결말을 기대하는 바람으로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김수현만이 전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에 저자가 보태고, 독자가 빠져들면 좋을 메시지들이다. 특별할 것 없고 부담스럽지 않는 읊조림 속에서 조금은 다른 세상을 맛보고 싶다면, 한 번쯤 펼쳐 들고 그 소박한 울림에 동참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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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목표를 찾지 못해 꼼짝달싹 못할 때에는, 그것이 나중에 어떤 의미 있는 것이 되리라고 생각하기 힘듭니다. 오히려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 초조해지겠지요. 하지만 나중에 되돌아보면 반드시 무언가 얻은 것이 있을 겁니다. 그 당시에는 아무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최종적으로는 쓸모없는 것이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힘 110페이지)

 

이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나. 나중에 되돌아보면?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그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난 후에, 많은 것이 떠나간 후에, 사라진 후에야 알 수 있다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그럼 그렇게 지나간 시간과 많은 것은 어떻게 되찾아야 하는 건지 답이 없다. 아니, 그렇게 들렸다. 막연하게 하는 말은 내 입에서 맴도는 것으로도 충분한데, 굳이 인문학자까지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싶어 암담했다. 너무 느긋하게, 아무런 불행도 겪어보지 않은 채로, 그냥 다 잘될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좀 삐딱해졌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런 느낌도 잠깐이었다. 뭔가 위로와 토닥임을 건네는 듯한 그의 말에, 근거 없는 안도감까지 밀려오는 것처럼 잠시 멍해도 좋을 것만 같았다. 혹시나 차근차근 말하는 투가 지루한 설득처럼 들리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오히려 그 반대다. 차분히 들을 수 있어서 진중하게 들리는 그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다. 흔하디흔한 단어처럼 들리는 ‘마음’이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지, 어떤 힘을 얘기하면서 세상 살아가는 모습과 접목하려 하는지 기대됐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과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토대로 저자의 마음 이야기는 시작한다. ‘왜?’ 왜 굳이 그 두 책으로 마음의 힘을 꺼내려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강상중의 책을 끝까지 읽은 게 없어서 아쉬운 마음에 펼쳐 들고 싶었던 이유가 크다. 두 책을 이미 읽은 독자라면 저자의 이 책으로 같이 얘기 나누는 듯한 느낌을 받을 듯하다. (아마 독서토론 하는 분위기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마음』이나 『마의 산』을 읽지 않았다고 해서 저자의 이야기를 소화하거나 공감하기에 무리가 되진 않는다. (책의 뒷부분에 두 책의 대략적인 줄거리가 친절하게 소개되어 있다) 『마음』의 주인공 ‘나’(선생을 지칭하는 ‘나’와 선생의 유서를 받은 ‘나’)의 생각과 『마의 산』에서는 요양소에서 7년의 세월을 보내게 되는 주인공 한스의 여정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이야기의 토대로 삼는다. 답 없는 고민과 방황으로 세월을 보낸 것처럼 보이는 두 주인공의 삶을 비춘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혹은 모양에 관한 언급은, 잠깐 이렇게 돌아가도 괜찮다는 말을 대신하는 것으로 들린다. 저자 자신이 재일 한국인으로 살아가면서 받은 상처와 고민이, 성장의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러서 이런 삶의 자세를 만든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어쨌거나 지금 그의 모습은 이런 말을 해도 좋을 것처럼 안정되어 보이니, 괜한 믿음에 저자의 생각을 그대로 전달받을 수 있다. 과거의 그러한 시간이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삶의 연속성으로 해석된다. 그 의미를 담아 이야기를 계승한다는 것을 궁극적으로 표현하려 했다.

 

마음이란 것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지금까지 어떤 인생을 걸어왔는지, ‘그리고, 그래서’ 어떻게 살아갈 건지에 대한 나름의 자기 이해와 밀접하게 맞물려 있습니다. 따라서 마음은,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이야기’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힘 20페이지)

 

사람은 생물이기 때문에 죽어 버리면 당연히 그걸로 끝입니다. 하지만 그 끝나 버린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받은 누군가가 있어서 그것을 다른 이에게 전하고, 그 사람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 주고, 그걸 떠맡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는 일이 계속된다면, 죽은 사람의 인생이 그냥 끝났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영원이 되는 것이지요. 이야기가 계승됨으로써 그저 사라질 줄 알았던 누군가의 삶에, 다시 한 번 생명의 등불이 켜지는 것입니다. (마음의 힘 166페이지)

 

『마음』과 『마의 산』 두 작품 모두 제1차 세계대전 전후를 배경으로 한다. 저자는 100년 전의 두 청년이 마주한 현실과 지금 우리가 보는 현실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하면서, 유예(모라토리엄)의 시간을 인정하고 보듬게 한다. 사람의 마음은 그가 걸어온 인생과 그에게 의미 있는 이야기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말의 의미를 알 것도 같다. 소설 속에서 ‘나’와 한스는 그 후에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갔는지 말하진 않는다. 그래서 저자의 생각이 덧붙여진다. 두 사람이 만나 대화하듯 풀어가는 소설 형식으로 서로의 마음을 드러낸다. 과거의 그 시간을 거치지 않았다면 지금의 항로가 불가능했을 거란 것. 소설 속 청년들이 평생 붙잡아 묻고 있던 질문과 답을 찾기 위한 과정의 길이 그들의 마음에 있다는 깨달음으로 저자의 말을 전한다. 저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방황하던 자신의 청년 시절에 버팀목이 되어준 두 소설과 함께 이야기 전달자의 역할을 하고자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야기의 계승이야말로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우리 삶의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거라고. 세대를 뛰어넘어 삶의 바탕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말이다.

 

입버릇처럼 살기 어렵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불안은 친숙하고, 희망은 멀어진 단어이며, 대책 없는 문제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남들과 비슷하게라도 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좌절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손 내밀면 누군가 잡아줄 사람이 없다는 관계의 어둠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엇보다 돈이 우선시 되는 현실이 앞을 캄캄하게 만들기 일쑤다. 그런 세상에서 남들보다 다르게, 느리게 간다는 게 선뜻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저자는 그 부분에 대해 충분히 걸어도 좋을 시간이라 말한다. 마음은 시대와 함께 있으며 마음 안에 자리한 시대의 질병과 고민을 치유하면서 가야 한다는 말로 들렸다. 때로는 삶을 리셋할 수도 있고, 지금 가진 것을 버리고 떠날 수도 있다는 것. 그래도 인생은 계속된다는 확신을 할 필요도 있음을 시사한다. 복수의 선택지가 얼마든지 있으니 막연한 불안과 공포를 느끼며 그저 무의미한 달리기를 계속할 이유가 없다는 것. 지금 그렇게 달리고 있는 것이 무엇을, 누구를 위한 것인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의미 없는 개념에 끌려다니고 있는 건 아닌지 살펴봐야 할 때다.

 

그리하여 저자는 모라토리엄을 권한다. 두 소설 속 ‘나’와 한스가 머물렀던 공간과 시간. 한스가 아무 의무감 없이 몸과 마음을 뉘였던 요양소 같은 곳을 떠올리게 한다. 그곳에서의 7년이 무의미하게 흘러간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가 사람과 세상을 배울 수 있었던 최적의 시간과 장소가 아니었나 싶은... 너무 한가한 소리처럼,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때로는 충전의, 성장의 시간으로 자리할지도 모른다. 그런 시간도 필요함을, 가져도 좋음을 말한다. 남들에게 떠밀리듯 조급하게 가는 길이나 다른 이의 말에 휩쓸리는 시간들은 자칫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저자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자신만의 가치관을 갖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변의 시선에, 남들의 말에 휩쓸려 살아가는 인생으로 머물지 모른다는 경고처럼 들린다. 정작 나를 나로 살아가게 하는 건, 나 자신의 마음이 발휘하는 힘이 아닐 텐가. 그러니 나 자신을 위한 유예가 때로는 필요한 것임을 상기하게 한다.

 

그날 이후로 우리들은 어디를 어떻게 지나 지금 어디까지 걸어온 걸까. 나는 또 버려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또 모르는 사이에 엉뚱한 곳으로 쓸려와 버린 것일까.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마음의 힘 133페이지)

 

두 소설과 이 책 속의 또 다른 소설로 인생길에서 저절로 보일 수 있는, 메마른 우리 마음의 치유를 위한 힘을 끌어낸다. 저자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그 치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이야기의 흐름과 이어짐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그 이야기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면서도 물들지 않는, 다양한 의견을 새겨 넣으면서도 자기 갈 길을 가는 것을 권한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쓰고, 이어가고, 그리고 이 이야기를 훗날의 언젠가, 누군가 읽고 계속 이어받아 가길 바란다.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건, 내 안에서 머물고 우러나고 힘을 발휘하는 마음뿐이라고. 요즘 같은 세상에서 그 마음을 나누며 함께 한다는 게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기 위해 저자와 같은 목소리가 계속 필요한 게 아닐까 싶다. 눈으로 보이지 않은 마음의 작용과 용기를 다독이기에 충분한 멘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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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5-06-18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읽고 <담론>을 읽게 되었는데 모라토리엄 시간을 깊게 보내신 우리시대 최고의 스승을 만난 느낌이었어요.

구단씨 2015-06-18 23:08   좋아요 1 | URL
저는 아직 <담론> 펼쳐보지 못했어요. 곧 저에게도 그 책을 접할 기회가 왔으면 좋겠네요.
보물선님의 말씀으로 더 만나고 싶은 책이 되었어요.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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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
한창훈 지음 / 교유서가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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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다 읽고 났을 때, ‘한창훈이 섬을 떠난다면 소설을 계속 쓸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의 소설을 다 읽은 적도 없는데 이상하게 이런 걱정부터 되더라. 내가 느낀, 그가 말하는 섬은, 그에게 단순히 사는 장소 이상의 것이었다. 지금, 소설가로 살아가는 그의 삶에 많은 부분 바탕이 된 곳이며 그가 오롯이 숨 쉴 수 있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의 삶의 자취를 같이 밝아가는 동안 이어지곤 했다. 그가 글을 쓰는 이유를 답해줄 것처럼 제목에서부터 말하고 있지만, 굳이 그 답은 필요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삶이 녹아든 시간과 경험이 그의 모든 글에 그대로 녹아있었을 것을 저절로 알게 되기에 말이다.

 

바다와 바람 외에는 모든 결핍의 장소. 이별과 쓸쓸함만큼은 풍족한 곳. 사람도 섬을 닮아버린다. 각자 독립된 고립이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풍경이 된 채 달이 가고 해가 바뀐다. 섬을 고독을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견디기 힘들다. (80페이지)

 

'글을 왜 쓰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원고료 때문이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아, 이 얼마나 솔직하고 직선적인 대답이란 말인가. 당연하지. 돈이 되는 글쓰기를 하며 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건 전업 작가의 가장 우선시되는 조건이 아닐까. 본인의 삶도 영위해야 하지만 딸의 아빠 노릇도 해야 하니까. 그는 소설가 한창훈이기에 앞서, 아버지이고 가장이었던 거다. 그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그런 우선순위가 정해질 것 같다. 그의 글쓰기의 이유는 이렇게 원고료와 함께 남을 누르고 올라서는 종자는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이기도 하다. 주변의 기록을 남기기 위한 것도,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도 그가 글을 쓰는 이유가 된다. 사실 이유야 세다 보면 더 많을지도 모르지만, 그 이유를 감당하는 숫자가 중요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그건 이 산문에서 그가 말하는 그 섬 이야기를 들을수록 분명해진다.

 

이상하게도, 소설을 읽으면 작가는 '소설가'로 보인다. 그런데 소설가가 쓴 산문을 읽으면 '그냥 한창훈'으로 보인다. 섬사람들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습에서 섬마을 아저씨 같은 인상을 풍긴다. 그의 글에서 종종 등장하는 섬사람들의 일상과 사연은 그의 글의 배경이나 소재가 되기도 한다. 항구를 기점으로 떠나는 사람들과 섬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 삶의 안녕을 기원하게 된다. 그가 태어난 줄기로 이어진 친척들의 생과 사를 들을 때면 사람 사는 게 다 이런 건가 싶어 애틋하고 서글퍼지기도 했다. 그가 글로 교류하며 인연 맺어온 문인들과의 에피소드는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흥미로웠는데, 그들에서 문학을 갈망하는 모습이 그대로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어지는 작가의 이야기.

 

그가 보고 듣고 느끼는, 지금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모든 것이 문학으로 이어지는 거라고 말하는 듯한 여운이 듣기 좋다. 떠나고 기다리고 돌아오는 것들을 무심히 바라볼 수도 있는 시선을 갖게 하는 건, 그가 발 디디고 있는 그 섬에서 피부에 닿아 몸이 되어버린 것들이었음을 느낀다. 그의 글쓰기의 원천은 바로 이런 것들일 거다. 그의 발길이 닿았던 거문도, 여수, 부산 등 바닷냄새 나는 곳들, 그와 함께 고생과 술잔을 같이 기울인 사람들, 글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문인들과의 추억이 지금 그의 글과 함께하고 있다. 그 시간을 함께한 많은 사람이 그의 소설 속 주인공이면서 이야기의 바탕이 되는 존재들이다. 치열한 삶을 같이 부대끼며 걸어온 그들이 그의 소설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래서 그가 계속 그 섬에 머물 것 같고, 계속되는 이야기가 멈출 것 같지도 않다. 늘 그 자리에서 이야기는 다시 시작될 것이다.

 

목수가 십수 년 동안의 망치질 총량을 어느 날 문득 헤아려보고는 몸서리를 치는 행위와 소설쓰기는 비슷하다. 책 속에 그때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러면서 다시 망치를 잡듯 그다음 소설을 쓴다. (105페이지)

 

이 책에 대해 혹시나 글쓰기를 가르치는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니라고 말해두고 싶다. 내가 느낀 이 책은 그의 일상이 쌓여간 시간을 적은 책이지, 그의 글쓰기 노하우를 전하는 책은 아니다. 글쓰기의 기교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방법의 연속으로 글쓰기가 이어지는 거였다. 사람의 마음을 보고, 바닥을 공감하며, 눈물 나는 버팀을 아는 이가 본 세상.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그에게 글이 동반한다. 바다 냄새를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이제야 그의 소설을 제대로 만날 마음이 생긴다. 그 배경의 고백을 들었으니, 과감히 그의 소설을 펼쳐 들어도 좋겠다. 정식으로 문학을 배운 적 없는 그가 이렇게 써야만 했던 이유를 그의 소설에서 더 듣고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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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영 지음 / 새움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아이고, 짠하다. 짠하다는 한마디로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있지만, 암튼 그렇다. 최선이라고 선택한 길이 인생 막장으로 데려가는 고속열차였으니 어쩜 좋을까나. 늦었다고 생각될지라도 잘못 탄 줄 알았을 때 바로 다른 열차로 올라타는 것. 그게 가장 현명한 판단이다. 『하여가』의 등장인물들에게 그런 갈아타기를 본 것 같아 흥분된다. 이 아그들을 어쩌면 좋을까 싶어 눈물이 날 것 같지만, 이미 내 입은 웃고 있다. 계획도 없이 즉흥으로 일어난 사건들에 이들의 인생이 휩쓸려 가는 게 안쓰러워 웃음이 난다. 안쓰러운데 웃음이 나는 게 맞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뭔가 도와주고 싶고 밧줄 하나 던져주고 싶을 만큼 간절함이 묻어나는데도 이들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 불안함마저 폭소다. 이거 이거, 조폭 맞아? 군인 맞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어떤 인간들이 이들을 잉여라 불렀다. 하지만 이들이 잉여라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으면서도 정작 잉여의 자리를 차지한 꼴통들이 따로 있음을, 잉여라 불리는 이들은 잉여가 아님을 안다. 이들이 청춘이니까, 실컷 패고 두들겨 맞으면서 아픔을 느끼는 거다. 그게 가능한 나이여서, 배짱이어서 듬직하다. 군발아, 내 다리 몽댕이 하나 부러뜨려줘라! 깍뚝아, 내 머리통 좀 빠개주라니까!

 

주먹이 운다는 건 괜한 속담이나 영화 제목이 아니다. 과학이다. 꼭지까지 올라간 혈압을 어쩌지 못하고 참다 보면 주먹 안에서 땀이 난다. 그게 불쌍한 내 주먹이 흘리는 눈물 아니고 뭔가. (172페이지)

 

이십 대의 두 남자가 도로 한복판에서 하나로 엉켜 뒹굴고 있다. 한 명은 탈영병, 한 명은 조폭 똘마니. 도로를 사이에 두고 눈빛으로 싸우다가 보행자 신호가 바뀌자마자 달려들어 물어뜯는 녀석들. 그래도 죽기는 싫었는가보다. 교통 신호는 참 잘도 지키네. 일면식도 없는 이들을 뭐가 부딪치게 하였는지,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뒹굴게 했는지, 이 싸움의 끝장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있을까.

찌질하고 스펙도 없고, 가진 게 없어 여자친구에게 차이고 군대로 들어간 김 일병. 자신의 실연 이야기를 듣고 더 갈구는 곽 병장을 이해할 수 없던 어느 날, 귀신에게 홀린 듯 탈영한다. 그냥? 아니. 선임들을 거침없이 까는 유진만을 흠씬 두들겨 패고, 그가 죽은 줄 알고 정신을 놓았을 때, 곽 병장의 탈영에 동행한 거다. 왜? 몰라... 주먹맛은 더 세지고 거칠 게 없어 보이는 대책 없음 하나만 믿고 달려보는 거다.

무게 좀 잡아보겠다고 범단(조폭)에 들어갔는데, 이건 뭐 계속 따까리만 하고 있으니 별 볼일도 없고 인간대접도 못 받고... 원래 그런 거 알고 있었지만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닌가. 이젠 하다 하다 회장(두목) 실수까지 묻으러 가라고 하니 이걸 해, 말어?

 

폭발한 거다. 이게 아닌 걸 알았을 때도, 상대의 신발 앞 코를 보며 고개 숙이면서도 확신할 수 없었던 마음을 그때 제대로 알아챈 거다. 정신 차린 거지. '이거 아니잖아?' 그러니까 죽기 살기 이판사판. 누구 하나 걸리기만을 바랐던 것처럼 벼르고 별렀던 순간 딱 맞춰 상대가 눈에 띈 거다. 군바리와 깍두기. 자, 덤벼!

 

최소한의 인간다움. 두 청년이 마지막에 선택한 것은 너무나 인간다운, 감정이 폭발하여 폭음이 들릴 거로 생각했던 순간에 보여준 이성이었다. 반듯한 삶의 자세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아닌 걸 알면서 계속 가느니, 찌질하게 인생 막장으로 사느니, 걷어차 버리련다. 이제야 만난 삶의 전환점이다. 그마저도 코믹하여 깔깔대게 하지만 사는 게 다 웃긴 거지 뭐. 카페 <옛날 소품> 주인장 역시 마찬가지다. 젊은 날 패기 있게 전단 날리고 다니던 열정은 언제 다 사라진 건지도 모르게 살아왔다. 죽지 못해 살고, 숨 쉬고 있으니까 사는 지금 자신의 모습이 두 청년의 혈투로 한심하게 보인다. 인생 뭐 있어?! '싸움 끝났으면 맥주 줄게, 들어와서 시원하게 한잔 해.'

 

뜬금없이, 어젯밤 장인 영감이 나를 몰아붙이며 욕을 하듯 던졌던 질문이 생각나면서, ‘쟤들은 지금 몇 번일까, 야전병원의 1, 2, 3번 중 몇 번일까….’ 싶어졌다. 전쟁터 야전병원에선 의사들이 환자를 세 부류로 나눈다나. 치료를 받든 받지 않든 어쨌든 살아날 사람 1번, 치료를 받아도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 2번, 치료를 받지 않으면 죽을 사람 3번, 이렇게.

“넌 지금 그 1, 2, 3번 중에 어느 쪽 같으냐?” (245페이지)

 

각자 화자가 되어 두 사람, 탈영병과 조폭의 이야기가 따로따로 들려오는데 마지막에 가서야 두 사람이 조우하며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된다. 바로 그 장면, 차도를 사이에 두고 서로 우연히 마주친 눈빛이 시작이다. 눈깔아 안 깔아? 그래, 해보자. 신호가 바뀌자마자 달려드는 두 사람의 전투력은 말 그대로 사생결단이었다. 끝장을 보자는 의미.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달려들고 죽자고 덤비는 게 평범한 모습은 아니잖아? 그런데 내 눈이 이상한 마법에 걸린 듯하다. 미친 듯 전투력 상승하는 둘의 모습이 너무 평범하고 당연해 보이니 어쩌란 말이냐. 이 장면은 두 사람이 꼭 한번 그렇게 만나야 할 것만 같은, 그게 정답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생각으로 이렇게 살아가는 게 옳은 게 아니라는 판단이 섰을 때 누가 나에게 확신을 줬으면 하고 바라는 순간. 누가 나 좀 어디 한 군데 부러뜨려줘, 라고 간절하게 바랄 때 상대가 나타났다. 탈영병에게는 조폭이, 조폭에게는 탈영병이. 그 둘을 어이없이 바라보던 카페 주인까지. 모두에게 필요한 딱 그 순간이 찾아온 거다.

 

이런 막장이 어디 있어? 라며 읽기 시작했는데, 이건 막장이 아니라 끝장이었다. 팔팔 끓어오르는 용광로 같았다. 뭔가 터지는 시점이 어디쯤일까 싶은 마음으로 한 페이지씩 넘겼다. 영화 같은 장면에서 ‘아하~! 이 녀석들답구나’ 싶었다. 그래, 그 정도는 보여줘야 잉여를 밟아버릴 배짱이 있는 거지. 작가가 되겠다고 전공을 살리다가 아나운서로 진로 전향하는 설희가 현실이다. (설희는 군바리의 찬 전 여친) K대는 일류가 아니라 S대 못 간 애들이 가는 대학이라며, 자신보다 스펙 좋은 남자를 선택한 여친의 결혼식에 가서 난동을 부리고 말았던 곽 병장은 엿 같은 세상의 진실이다. 두목보다 위에 있는 사람, 두목 싸모가 진짜 두목이라는 건 조직에서도 적용되는 피라미드 생존방식이다. 두목 싸모가 대놓고 똘마니를 강간해도 할 말 없는 게 약자가 강자를 바라보는 본능 같은 것.

 

아, 더 이상은 안 되겠다. 반칙에 반칙을 더 해서라도 세상과, 불평등 부조리와, 지리멸렬한 삶과 화해가 아니라 들이밀고 보는 거야. 반칙 좀 하면 어때서!

인생이란 뭐냐.

이 철학적 질문은 누군가에게 된통 두들겨 맞고 나서 담배 한 대 피울 때면 꼭 든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어느 댄 그게 질문 자체, 인생보다 더 궁금하다. ‘된통’에다 억울하게까지 맞았을 땐 질문이 한층 깊어진다.

도대체 이놈의 인생이란 뭐란 말이냐, 썅! (214페이지)

 

이게 뭔가 싶은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유쾌했다. 물론 이들의 앞날이 평탄할 거란 생각은 안 한다. 이렇게 흘러가도, 저렇게 굴러가도 앞으로 가는 것에 목적을 두고 살아가지 않을까 추측하지만, 그것마저도 알 수 없다. 내가 탈영병도 아니고 민간인으로 귀화한 조폭 똘마니도 아니니까. 그럼에도 알 수 있는 건 그렇게 살아가면 언제 어느 때 불쑥 찾아올 이성, '이게 아닌데?' 싶은 마음이 머리를 두드릴 때 다시 또 전투력 상승하여 혈전을 벌일 수도 있다는 거다. 그렇게 한 번씩 부딪치면서 앞으로든 옆으로든 또 굴러가고 흘러갈 테니까 말이다.

 

문장 곳곳에 녹아 있는 재치가 이 책을 즐겁게 읽게 한다. 사투리와 비속어, 유행처럼 번지던 은유의 말을 보는 재미가 상당하다. 세상 풍자극을 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청춘소설이라 불리지만 우울한 게 아닌 웃음 나면서 통쾌하기까지 하니 개운하게 뛰고 땀 한 바가지 흘린 기분이다. 이야기의 재미가 뭔지 그대로 느끼게 해 준 소설.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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