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연습 위픽
김지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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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모든 순간이 생방송처럼 흘러간다. 연습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는 게 어울리지 않게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실수하면 실수로 기억되는 그 순간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니 이 책의 제목이 처음부터 이상하게 다가오는 건 당연했다. 새해, 연습이라니. 궁금하기도 했지만, 맥락 없이 연습이란 말에 꽂혔다. 실수해도 실수로 봐줄 수 있는 시기는 이미 한참 지나버려서, 연습할 시간 따위 없이 흘러가는 순간들이 야속해서 말이다.


나는 그 장면을 보려고 돌아서 왔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서기로 결정하던 순간의 기분이 떠올랐다. 이만큼이나 살았는데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장면은 또 오래 보고 싶어서 그게 새롭다고 생각되어서 걸음을 돌린 것이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싶어서 그게 새로운 것이어서 자극이 되어서 삶에 활력이 되어줄까 봐 그랬다. 넘어진 소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얼른 걸음을 돌렸다. 너무 오래 살았다는 기분이 든다. (68페이지, 할머니 양지의 일기 중에서)


어느 날 주인공 홍미에게 날이든 소식, 있는 줄도 몰랐던 할머니 양지의 죽음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홍미의 부모는 이혼했다. 일찌감치 혼자인 게 익숙하게 살아왔던 홍미에게, 부모도 아니고 얼굴 본 적도 없는 할머니의 죽음이라니. 할머니는 어떤 인생을 살아왔기에 죽는 순간마저 혼자였을까. 고등학교 졸업 후 공장에 들어가 일하면서 기숙사에 살았고, 가족도 친구도 없이 살아온 홍미였다. 어쩌면 할머니의 죽음은 마치 거울을 보듯, 오랫동안 혼자였던 홍미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게 했다. 이게 아닌데. 굳이 모른 척하려고 애쓰지도 않았겠지만, 이렇게 자신의 상황을 마주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을 텐데.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그러는 건지 무섭기까지 하다.


할머니가 남긴 건 18년간 써온 일기장뿐이었다. 굳이 이걸 읽어야 하나 고민하는 것도 잠시, 홍미는 할머니의 일기를 하나씩 읽으면서 그대로 파쇄한다. 나도 궁금했다. 도대체 할머니가 18년을 채워온 일기장에는 무슨 말이 가득했을까. 혹시 어디에 숨겨둔 유산이라도 찾아야 하는 상황이 숨겨진 건 아닐까? 홍미의 현재 상황에서는 그게 더 반가운 소식일 것 같은데. 회사는 그만두고 싶지만 더는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세 들어 사는 집은 어느 채권자가 압류했다고 하고. 홍미의 현실이 녹록지 않지만, 지금 딱히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아서 위태로운 순간이니까. 그런데, 할머니의 일기장 안에는 유산이 아니라 단조로운 일상, 공백에 묻어둔 외로움이 느껴졌다.


어떤 기시감일까, 아니면 두려움일까. 이 책을 읽는데 헉, 하고 숨이 막히는 순간이 있었다. 미래의 어떤 날에 내가 마주할 장면이 아닐까 두렵기도 했다. 할머니의 일기장 속에는 한 사람만이 등장했다. 할머니 양지’. 그리고 가끔 할머니를 찾아오는 공 씨. 단조롭다 못해 무료하게 느껴질 정도의 일상에 공 씨의 등장은 이 외로움을 달래주려고 누군가 보낸 선물 같았다. 가끔 안부를 물어주는 공 씨는 할머니에게 어떤 존재일까. 공 씨는 어떤 의무로 할머니를 찾아주는 사람이었지만, 할머니에게 공 씨의 목적이 그리 중요하게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 같다. 누군가가 나를 찾아와주고 나의 안부를 물어주는, 그 자체로 공 씨의 존재는 할머니에게 위로가 되었을 테니까. 그러면서 할머니가 이루고 싶었던 인생, 현실의 할머니 처지가 아니라 할머니가 바랐던 다른 삶을 거짓으로 적어놓은 일기장의 비밀을 알게 된다.


이루고 싶은 인생의 모습. 저마다 바라는 삶의 그림이 있을 거다. 어떤 성공을 이루고 싶기도 하고, 다정하고 화목한 가정의 분위기를 원하기도 하겠지. 할머니가 일기장에 채워 넣은, 단조롭지만 평온한 세월의 기록은, 할머니가 이루지 못한, 언젠가 그리고 싶은 삶이었다. 마치 그런 삶을 이루기 위해 지금 이 일기장에 연습처럼 적어놓는다는 듯이. 그렇게 적어놓고, 지금 생을 연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이 순간에도 이 연습이란 단어가 마냥 부정적으로만 들려서,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새해 인사를 미리 하는 홍미의 목소리가 듣기 싫었다. 눈앞의 문제는 전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도 않는데, 발랄하게 꺼내는 인사가 불편했다. 그러면서도 어김없이 다가올 새해를 홍미처럼 맞이하고 싶기도 했다. 내가 싫다고 해도 새해는 올 거고, 어떤 희망을 품고 있어도 불안과 절망이 같이 다가올 거기에, 그때마다 내가 미리 준비할 수 없는 상황은 또 펼쳐질 거니까. 그 두려움 속에서도 아주 잘살아 보고 싶어서 미리 연습하는 마음으로 인사를 건네는 홍미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아서 말이다.


서둘러 집을 향해 걸어가면서 홍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 생각할 때가 더 많았고 그날도 그랬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알기 전에 자신을 둘러싼 환경 속에서 무엇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지를 알아내는 데 통달했다. 그러므로 그것은 선택이 아니었지만 홍미는 자신이 최선의 것을 고를 안목이 있다고 착각했다. 홍미는 다음 날도 평소와 같이 출근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할 것이다. (60~61페이지)


결국, 할머니는 일기장에 적는 것으로(그것을 연습으로 볼 수 있다면) 그친 인생이었지만, 홍미에게는 아직 다른 내일이 있었다. 새로운 직장도 구해야 하고, 사는 집의 경매 문제도 해결되어야 전세 보증금이라도 구할 수 있다. 듣기만 해도 막막하고 울고 싶은 일들인데, 홍미 자신이 착각하는 것처럼 최선의 것을 고를 안목이 있다고 믿고 싶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운다고 달라질 것도 없고, 착각이든 안목이든 이 상황을 해결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도 없지 않은가. 이런 순간들을 연습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으니까. 할머니의 일기장을 읽는 홍미도, 할머니 양지와 홍미의 이야기를 읽은 나에게도 새해가 되면 잘살아 보고 싶다. 이런 순간들을 연습으로 더 단단해졌을 테니까, 적어도 지금보다는 괜찮은 날들이지 않을까?


누군가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으면 매일이 일종의 연습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생각부터 한다. 쓰고 버려지는 습작들을 떠올려서만은 아니다. 매 순간 하는 일들이, 처음 만나는 사람과의 인사나 오래전 연락이 끊긴 사람과의 안부 인사도, 평생 안 하던 짓을 해보는 것이나 하던 짓을 그만두는 것이나, 살면서 갈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장소에 가보는 것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그 모든 것이 실전이면서 또한 연습이기도 하다는 것을, 수많은 좌절을 겪으며 새삼 깨닫고 있다. 좌절할 것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내가 여전히 무언가를 기대하고 마음 상해하기도 한다는 것이, 역시나 오래전 그 사람이 나에 대해 한 말은 틀렸다는 증거 같았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계속 더 오래 연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쓴 것 같다. 실패로 끝난다 해도 그게 완전한 절망은 아닐 거라는 마음에서. 그토록 속아놓고도 다시 또 기대에 차 해피 뉴 이어라고 말하는 입 모양을 떠올리면서. (100~101페이지,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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