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터의 꽃
김옥숙 지음 / 새움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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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로, 처음 알게 된 사실에 또 하나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생각해보니 이미 들어왔던 이야기 말고는 어떤 역사에 대해 알려고 들지 않았다. 배워왔던 것 말고는 더 알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오늘 하루 먹고 사는데 그게 필요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지난가을부터 시작된 우리나라의 참혹한 현실을 보고서는, 오늘 하루 끼니를 채우는 일이 사는 전부가 아님을 많이 느꼈다. 같은 뜻을 가진 사람이 모이니 나라가 바뀌는 기적(?)을 보고, 우리가 사는데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먼저인지 조금씩 알 것 같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함께하는 시간에 반드시 봐야 하는 것들. 제대로 아는 것, 큰 그림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여기 또 있었다.

 

정현재는 히로시마 원폭 관련된 소설을 쓰려고 합천을 찾아간다. 그 자신이 원폭 피해자 2세인 것을 숨긴 채로 살아왔는데, 소설을 위해 그 사실과 마주하게 된 거다. 한국의 히로시마라고 불리는 합천. 합천 원폭피해복지관에서 만난, 심하게 화상을 입은 얼굴로 그동안 고개 숙이고 살아왔던 강분희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눈 그는 캄캄하게 가려진 그때 그 시간을 본다. 전쟁 통에, 안 그래도 먹고 살기 힘들었던 강분희의 아버지 강순구는 임신한 아내를 데리고 히로시마로 향한다. 거기 가면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에 히로시마로 갔다. 유독 합천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던 히로시마. 어려웠지만 열심히 살았다. 거기서 자리 잡고 살면서 아이도 낳고, 어느 정도 살만해졌던 그때. 미국은 히로시마에 원폭을 터트린다. 하늘에서는 검은 비가 쏟아졌고, 터진 원폭으로 건물은 무너져 내리고, 사람들은 다쳤다. 다쳤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은 엉망이 되었다. 원폭 사건으로 강분희는 몸에 화상을 입고, 강분희와 마음을 나눴던 동철은 발을 다쳤다.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운 딸의 모습에 강순구는 가족을 데리고 합천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돌아온 합천에서도 먹고 살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 그래도 가족을 위해서라면 뭔들 못하랴. 강순구는 온몸을 다해 가족을 보살피려 애쓴다.

 

소설은 정현재의 현재와 강분희 가족의 역사가 교차로 진행된다. 단순히 소설 한 편 쓰겠다고 찾아간 합천에서 자기도 모르게 원폭 피해자들의 현실을 마주한 정현재는 자기가 피하려 했던 고통의 시간을 떠올린다. 그의 내면에 변화가 생긴 거다. 그의 변화는 원폭 피해자, 원폭 피해자 2세, 3세들의 이야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있는데 그걸 증명할 방법이 없어서, 아니, 그 사실에 책임을 질 사람이 없는 현실에 절망한 사람들에게서 힘을 얻었다. 원폭 피해자의 고통을 그대로 들으면서 그 자신이 부정하려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원폭 투하로 일본은 항복했고 대한민국은 해방되었다는 사실 이면에 자리한 것을 이제야 본다. 거기서 끝났다고 여긴 전쟁이 원폭 피해자에게는 계속되고 있던 거다. 비극이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졌을 때 모든 것은 후련하게 끝났다고 여긴 게 잘못되었다. 그때 거기 있던 조선인들을 잊고 있던 거다. 7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일본은 세계 유일의 피폭국이 아니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원폭 피해자가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란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사실이란 게 마음 아프다. 물론 나도 이 소설을 읽기 전까지는 몰랐다. 일본이 '유일'이 아니라 그냥 피폭국이라고 해도 그런가 보다 했다. 더군다나, 그때의 고통은 거기서 모든 상황을 평정하고 끝난 게 아니었다는 걸 이 소설로 새삼 알게 된다.

 

과거에서 머물지 않는 고통이 얼마나 지독한지 정현재가 만난 인물들의 인터뷰로 확인할 수 있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이, 그때 그 순간에 끝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때 그곳에서 머물렀다는 이유로, 몇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고통받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 고통이 대물림된다는 게 이 소설이 전하는 핵심이자 우리가 봐야 할 문제다. 현재진행형은 고통. 강분희의 화상은 겉으로 보이는 고통이 전부일 것 같지만, 아니다. 그녀의 첫아이는 사산되었고, 그녀의 딸 박인옥은 병명도 모를 병에 태어나면서부터 잘 걷지도 못하고 평생 고통받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대퇴부무혈성괴사증이라는 병명을 알았다) 박인옥의 큰아들은 중증 뇌성마비를 앓고 있다. 3대에 걸친 원폭 피해를 들려주는 이 소설은 끝났어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로 남는다. 여전히 그들의 삶은 진행 중이며 고통은 역시 삶과 함께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원폭의 참상이 얼마나 거대한지 이들에게서 듣는다. 동시에 우리, 아니 전 세계가 같이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남긴다.

 

한국의 히로시마 합천, 원폭 피해자의 2세, 3세들로 이어지는 피해들. '합천'이 왜 '한국의 히로시마'인가 하는 물음으로 시작된 소설은, 이야기가 흐르면서 더 깊고 오래된 곳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단순하게 생각했던 일들이 생각보다 컸다. 그동안 보고 들어왔던 것에 가려진 것들이 들춰지면서, 고통의 시작점을 찾게 한다. 유일한 원폭 피해국이라는 일본에 가려진 대한민국의 원폭 피해자들, 더 깊고 많은 이유로 원폭을 투하한 미국, 검은 비를 맞으며 유전되는 고통. 언제 또 되풀이될지 모를 비극에 맞서 원폭 피해자뿐만 아니라 모두가 함께 관심 두고 최선의 답을 찾아야 할 문제라는 걸 인식해야 한다.

 

기억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기억은 과연 힘이 될 수 있을까. 기억은 어쩌면 땅에 씨앗을 뿌리는 것이 아닐까. 한 사람의 기억은 미약할지라도 수백 명, 수천 명, 수만 명, 수억 명의 기억이라면 기억은 숲이 되고 산이 되고 거대한 산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진정 기억해야만 하는 것은 빛이 아니라 어둠이 아닐까. 어둠을 기억해야만 빛이 존재할 수 있으므로. (255페이지)

 

그의 꿈은 보통 사람처럼 살아보는 것이었다. 보통의 사람들처럼 연애를 하거나 직장을 갖거나 가정을 가질 수 없는지 끊임없이 자신에게 되물어야 했던 삶. 그가 꿈꾼 것은 결코 큰 것이 아니었다. 지하철 계단을 힘차게 오르내리고, 아침이면 출근을 하고 퇴근시간에는 동료들과 어울려 술 한잔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연애도 하는 삶. 자식 노릇을 하고, 동생 노릇, 친구 노릇, 애인 노릇을 하는 것. 인간이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들, 작고 소소한 것을 꿈꾸는 일조차 그에게는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206~207페이지)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그저 안녕한 하루를 보내겠다고, 평범한 인생을 살겠다는 게 너무 큰 바람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보는 일이었다. 이 얼굴로 누굴 사랑할 수 있을까, 이 몸으로 낳는 아이는 괜찮을까... 참혹한 현실을 겪어내는 것도 고통스러웠지만, 치료도 되지 않는 병을 자식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었다. 부모만이 겪을 수 있는 아픔이겠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아무리 노력해도 그 보통에 이르지 못하는 삶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계속 그 고통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는 현실이 감당이 안 되더라. 그런 현실이 자식에게 이어진다는 것을 보는 마음은 또 어떨까. 사실, 평범한 삶이라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원폭 피해를 모르는 나도 안다. 그러니 원폭 피해를 대물림받은 그들에게는 얼마나 어려운 길이겠나. 그래서 이 소설이 전하는 울림이 크다. 이렇게 알게 되었으니 기억해야 하고, 기억하고 있으니 해결을 위해 나아가야 하고... 그 끝이 어디일지, 언제쯤 그 끝에 다다를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나, 많은 시선이 모이는 힘은 우리가 이미 경험했으니 길이 보이지 않을까. 여전히 그 길이 쉽지는 않겠지만, 작은 손 하나씩 모여 변화를 시작한 우리였으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겠느냐고. 물음과 동시에 답을 내놓는 소설이다. 2017년 5월의 대한민국을 떠올리며 희망을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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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잘 모르시죠?...... 노무현입니다.

 

 

엄마가 손수건을 들고 가야 한다고 그랬는데,

정말 그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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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2017-05-26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손수건 준비하고 봤어요. 가슴이 먹먹해요.

구단씨 2017-05-29 15:53   좋아요 1 | URL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첫 장면에서부터 울컥하더라고요... ㅠㅠ
 

 

김훈의 남한산성 특별판이 나왔더라.

 

 

 

 

 

 

 

가격도 상당하지만, 그 안에 담긴 그림이 더 궁금하다.

사실 김훈 작품을 완독한 건 몇 편 안 된다.

가장 최근에 읽은 <공터에서>도 어렵기만 하더라고.

그래서 이번 특별판이 나왔다는 소식에도 출간 소식만 접했지

구매해야겠다는 생각까지는 안 했는데... (나는 아직 남한산성도 읽지 않은 독자다.)

이번 기회에 예쁜 책으로 <남한산성>을 읽어볼까 심각하게 고민 중...

 

 

황석영의 신간 소식도 들린다.

황석영 역시 나에게는 쉽게 읽히는 작가는 아니다만,

신간이 나오면 왠지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는 해...

 

 

 

 

 

 

 

 

 

 

 

 

읽어보겠다고 다짐만 하다가 매번 기회를 놓쳐버린 <시녀이야기>

방영 전에 다시 읽어보겠다고 또 한 번 다짐하는데 눈에 들어온 특별판이다.

아, 역시 타이밍도 잘 맞춰 나오는구나.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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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장미 2017-06-01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녀이야기....너무 궁금해졌어요.ㅎ
구단님도 아직 안보셨다니...물어보질 못하겠네요.
특별판은 늘 이쁨이 넘치는군요. 쳇.

구단씨 2017-06-02 09:03   좋아요 0 | URL
결국은 샀어요.
이제 읽는 일만 남았네요. ^^
글고 책도 예뻐요~

2017-06-07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좋아하시고 역사좋아하시면 남한산성은 부담없이 읽을수있어요 저는 몇번 읽을때마다 넘슬퍼서 눈물이 줄줄 났습니다
 
죽은 올빼미 농장 (특별판) 작가정신 소설향 19
백민석 지음 / 작가정신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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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잘못 배달된 편지로 시작된 소설은 미스터리한 분위기였다. 배달된 주소는 맞으나, 수신인은 달랐다. 화자인 ‘나’는 그 편지 속 장소에 찾아가기로 한다.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나 배달된 편지를 읽고 그 편지의 발송지를 찾아가지 않는다는 게 이상할 정도로 끌림이 있었다. 어디서, 왜, 누가 보낸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을 테지. 이 소설을 읽는 나도 그랬다. 그 시작을 찾아보지 않고서는 답답함이 계속될 것 같았다. ‘나’는 ‘인형’과 함께 편지 속 동생이 ‘죽은 올빼미 농장’이라고 이름 붙인 곳으로 간다. 하지만 그곳에 가서 더 혼란스러울 뿐이다. 주소가 맞는지도 알 수 없고, 그 장소가 맞는다고 알려준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소설은 ‘나’가 잘못 배달된 편지를 근거로 그 주소를 찾아가고, 그곳에 무엇이 있었을까 고민하는 시간에 현재 그의 모습을 같이 보여준다. ‘나’는 작사가다. 계약된 글을 써야 하고, 가끔 친구인 ‘민’을 만나 이야기를 하고 밤을 함께 보낸다. 동료로 보이는 작곡가 ‘손자’의 투정도 받아줘야 했고, 사무실에 나가 일정관리도 해야 했다. 꽉 막힌 듯한 일상을 보내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소설 속 문장으로 표현되는 그의 분위기를 상상하면 그것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그에게는 너무 자연스럽다. 답답할 정도로 보이는 좁은 그의 행동반경,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모르게 대화를 주고받는 ‘인형’, 여고생 신인가수의 집에 초대받고서도, 그 아이의 불법적인 행동을 보고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약한 어른의 모습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추측하게 된다. 자기 자신의 너머를 잘 보지 않는, 볼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 같다. 좁은 아파트 한 채가 그의 세상 전부로 보일 정도다.

 

지금 자기가 사는 곳, 그곳을 벗어난 장소와 사람에 대해 굳이 들여다볼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 어디로든 돌아갈 곳이 없고, 우리가 고향이라 부르며 회귀의 본능을 일으키는 곳도 없을 것 같은 그다. 그러면서도 항상 느끼는 공허감의 근원을 둘러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아니, 그 근원을 찾고 싶으나 찾을 수 없던 거였을까? 알 수 없다. 그 자신도 모르게 부유하듯 자기가 있는 현재의 자리에서 사는 방법만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살면서 느끼는 어느 순간의 기쁨도 있을 테지만, 그렇게 살면서 찾아드는 감정의 고통이 더 클 것 같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이 그런 느낌이다. 작곡하는 ‘손자’는 동성 애인을 따라 현재의 삶을 정한다. ‘인형’은 현재를 잘 지내지 못하는 인물에게 적나라한 조언을 하면서 현재의 책임을 회피하며 정리할 방법을 부추긴다.

 

아무리 생각해도 돌아가는 방법을, 현재의 불완전함을 변화시킬 방법을 알 수 없다, 는 생각이 들게 하는 소설이다. 끝까지 모를까? 아니면, 언젠가는 알게 될까. 소설은 내내 그 불안함을 놓지 않게 한다. 처음부터 나오는, 그는 잊은 자장가를 자꾸 기억해내려 애쓰면서도 잘 떠오르지 않는데, 읽는 동안 그게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가 그 자장가를 끝까지 기억해내지 못한다면, 그의 남은 오늘과 내일은 어떻게 흘러갈까. 그러다가 소설이 진행되면서 잊힌 자장가는 그 소절을 늘려간다. 한 줄씩, 한 단락씩. 그가 편지의 주소지로 찾아가 무언가를 더 찾으려 하면서 결국 들샘을 파내기까지 했을 때, ‘손자’가 발에 줄을 묶고 베란다를 향해 달렸을 때, 자장가의 남은 부분을 적어냈으면서도 그게 끝인지 알 수 없었을 때까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소설은 분위기를 바꾼다. ‘민’이 재개발로 허물어져 가는 아파트의 빈 곳을 보며 죽어가는 아파트라고 말할 때는 매번 어느 시간을 반복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태어나고 이별(죽음)하고, 다시 태어나고 이별하고. 낡은 아파트가 철거되고 새 아파트가 올라가듯, 우리는 계속 나아가듯 성장하지 못한 채로 나이라는 시간만 먹어가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다가 들샘의 바닥을 파헤쳐 어깨너머의 인형 목소리를 던져 넣었을 때 어쩌면 돌아갈 방법을 찾은 건 아니었을까 하는 희망을 엿본다. 현실의 팍팍함도, 나아가지 못하는 마음의 유아성도 사라지게 할 어떤 시작점의 순간을 볼 기회가 이제는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고 맘에 따라선 변형도 시킬 수 있는 실체인 이 빈 땅은, 정작 무엇도 가르쳐주고 있지 않았다. 먼 길을 온 내게 정작 가르쳐주고 있는 건,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다라는 사실뿐이었다. 지금 보고 있는 것 외의 다른 것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사실뿐이었다. 빈 땅 외의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177페이지)

 

시간은 흘렀으나, 외모는 변했으나(늙었으나), 마음은 성장하지 못한 어른들의 소외감을 느꼈다. 아껴주지 못하고 진정으로 보듬어주지 못하는 자세를 가진 우리의 모습만 확인한 것 같다. 많은 것을 보고 살면서 모든 순간 잘 건너갈 방법을 배우는 것 같지만, 정작 우리 안에 자리한 서늘함과 위태로움을 모른 채로 세상을 산다고 착각하며 지내온 건 건 아닐까 하고. 살아가는 시간만큼 어디론가 가는 듯한 인생이지만, 정작 그 자리에서 매번 반복하기만 하는 걸음은 아니었을까 하는 순간들을 떠올린다. 그때마다 찾아오는 상실감을 우리 안에서 나갈 줄 모르고 쌓여가면서 그 크기를 키워갔을 거라고. 그렇게 절망하면서 읽어 가는데 조금씩 찾아오는 듯한 어떤 느낌. 그가 자장가의 구절을 하나씩 떠올릴 때마다 높아지는 기대는 인형을 들샘에 수장했을 때 정점을 찍는다. 퇴화하지 않고 진화하는 내면을 마주할 우리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게 한다. 현실에 적응할 수 있는, 결핍의 양을 줄여가는 내면의 성장을 불러올 것을... 여전히 미성숙하고 현실의 많은 부분에 힘들게 적응하는 모습이 남아있을 테지만, 현재를 사는 법을 보여준 것 같다. 농장이 있던 빈터, 사라진 들샘. 현재의 그곳 모습이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빈 땅에 채울 수 있는 것도, 그릴 수 있는 것도, 많다.

 

작가정신에서 ‘소설향 시리즈’ 특별판으로 내놓았다. 이번에 출간된 다섯 권 모두 궁금했지만, 백민석의 <죽은 올빼미 농장>과 정영문의 <하품>이 가장 궁금했다. 어쩌다 <죽은 올빼미 농장>을 먼저 읽게 되었는데, 시리즈를 한 권씩 다 만나고 싶어진다. 짧고 매력적인 소설들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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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폭에 담긴 붉은 그리움
지연희 지음 / 봄출판사(봄미디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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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 TV 뉴스만 보고 다른 것을 거의 안 봐서 몰랐는데, 주말에 배우 박민영이 나와서 하는 말을 듣고 새로운 드라마가 시작하는 걸 알았다. 제목이 <7일의 왕비>라고 하던데... 7일? 왕비? 게다가 사극? 감이 오더라. 어떤 소재로 만든 드라마인지 느낌이 왔다. 그러면서 머릿속에 자꾸 물음표가 떠다니는데, 나, 이런 소설 얼마 전에 읽은 것 같은데? 뭐였지? 소설 제목을 한참 떠올리면서 드디어 찾아냈다. 지연희의 『치마폭에 담긴 붉은 그리움』이었다. 로맨스소설 좋아하는데도 시대물은 취향에 안 맞아서 잘 못 읽고 있다가, 이 소설 읽고 나서 종종 이런 시대물도 즐길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이와 같은 소재로 드라마가 나온다니 더 궁금해져서 소설을 다시 찾아봤다. (얼핏 살펴보니 드라마는 소설과, 혹은 역사적 사실과 많이 다르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들긴 하다만...)

 

임금의 동생으로 대군이라 불리는 역은 유유자적 한가하게 보일 정도로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었다. 권력 싸움에 관심도 없었다. 왕이 되고자 하는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그저 자기가 품은 첫정을 나눈 아내와 백년해로하는 게 유일한 바람인 남자다.

역의 아내 여의는 천방지축이라 불릴 정도로 밝은 성정이다. 아무리 봐도 지고지순한 현모양처의 이미지는 아니다. 바깥바람이 그립고 여기 저기 둘러보면서 살고 싶으면서도, 지아비의 사랑만으로도 하루하루가 행복한 여인이다. 부부인이라 불리는 대군의 아내로서는 불합격일지 몰라도, 역의 아내로는 충분했다. 역의 마음에 들어온, 죽을 때까지 사랑하고 싶은 유일한 여인이었으니까.

 

소설은 처음부터 부부였던 두 사람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역과 여의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사이다. '아니, 그 시대에 얼굴 한 번 안 보고 혼인하였을 터인데, 이런 분위기가 가능한가?' 싶은 순간에, 역이 아는 어린 여의의 모습이 이야기가 흐르는 중간에 한 번씩 드러난다. 궁 안의 소년이 만났던 어린 소녀, 어차피 왕권과 상관없는 자리이니 이 소녀에게 건넨 손을 붙잡는 것도 괜찮겠지. 그렇게 소년과 소녀는 혼인을 하고 부부가 된다. 물론 여기서 여의는 역의 그런 마음과 과거를 모른다. 그냥 현재의 자기 남편을 아끼고 사랑할 뿐이다. 소박한 일상을 즐기는 여느 부부를 보는 듯했다. 시대가 다를 뿐이지, 오늘날 우리가 바라는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잖아. 여염집 아낙의 평범하고 행복한 하루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역은 여의에게 교과서적인 아내상은 바라지 않는다. 완전하게는 아니겠지만 여의가 숨통 열어놓고 활발하게 지내길 바랐다. 그런 둘의 모습이 그동안 그 시대의 여인들에게 강요되었던 분위기가 아니어서 소설이기에 가능한 캐릭터겠지 싶으면서도 나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만들어가는 사랑이 보고 싶었던 거지, 여의의 행동이나 생각을 문제 삼을 이유는 없으니까. 마치 처음부터 마치 그들 사이의 어떤 방해도 없을 것이라고, 그러니 그들의 집 담 밖의 일들 따위 아무렇지도 않다고, 관심도 없는 일에 시선을 둘 여력이 없다고, 오직 둘만 바라보면서 살이게도 아까운 시간이었던 거다. 어린 소년과 소녀가 우연처럼 만났던 그 잠시의 순간, 손바닥 위의 꽃잎이 날릴 때 바랐던 소원이 이루어져 행복한 남자가 계속 웃을 수 있기를, 읽는 내내 나도 바라게 된다.

 

이런 부부가 있을까? 그 어떤 것도 가로막을 수 없고, 오직 자기 배우자만이 유일한 존재이며, 그 무엇으로도 둘 사이의 신뢰를 무너뜨릴 수 없다고 믿는 사이. 마음속 간절한 바람과는 다른 선택을 해야만 하는 일들이 살면서 얼마나 많이 다가올 텐가. 그런 것도 아무런 의미 없다고,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으니 오직 당신만이 내 옆에 있으면 된다고 여기는 삶. 아름다웠다. 역과 여의의 모습은 어느 부부에게나 이상향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연회에 참석해도 화려함을 자랑하는 기녀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마음만 먹으면 두는 여러 명의 첩도 역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 오직 여의뿐이다. 할 말 다하면서도 수줍어하고, 마음속 바라는 것을 이야기하면서도 위험한 줄 몰라 가슴을 철렁하게 하지만,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인을 어찌 눈에 담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평생 당신만을 보며 살겠다고 다짐하는 역의 시선이 너무 당연해 보여서 이상할 게 없을 정도였다. 자칫 권력에 욕심낼 것도 같은 위치였으나, 그에게는 여의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다는 게 그대로 보였으니, 이런 멋진 남자의 사랑이 끝까지 멈추지 않기를 바라면서 읽게 되는데...

 

그들의 사랑은 마냥 행복해 보여서 좋았는데, 어떤 악역도 보이지 않아서 힐링 드라마 같았는데, 잔잔한 물결이 이는 것처럼 흐르는 이야기로 보여서 안심했는데, 이상하게 불안했다. 뭔가 폭풍 전야의 고요처럼 느껴졌다. 이대로 흐르면 그냥 해피엔딩의 행복한 결말일 텐데, 뭔가 자꾸 숨어있는 채로 자기 역할을 소화할 때를 기다리는 게 아닌가 싶어 가슴이 두근거렸던 거다. 페이지를 넘기면서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들에게 혹시 무슨 일이 닥치지 않을까, 어디선가 복병처럼 튀어나온 일이 이들의 사랑을 훼방 놓을까 싶어서 긴장하면서 읽게 된다.

 

읽는 내내, 그렇게 이상했던 부분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아, 이들의 사랑은 끝난 건가? 하는 슬픔이 밀려온다. 본인들은 아니라고 해도 기어코 그사이에 비집고 들어오는 것들이 있다. 믿음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믿음이 사라지게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 때문에 결국 밀어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해야만 하는 상황. 알 것 같다. 시대가, 신분이, 자리가 그렇게 만든다. 백성들은 불안했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은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폐위된 어머니의 복수라도 하듯 피바람이 멈출 날이 없었다. 이대로 두고 볼 수 없던 사람들이 나라의 안위를 위해 반정을 꿈꿨다. 위기에서 나라와 백성을 구해줄 현명한 왕을 바란다고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들이 잡을 정권에 세워둘, 반정의 명분을 합당하게 해줄 왕이 필요했던 거다. 역은 그 역할에 안성맞춤처럼 존재했다. 역이 원하지 않아도, 권력의 욕심이 없어도 그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들과 의견을 같이하던지, 반정을 알았으니 죽음을 택하던지. 사실 역에게는 그 무엇도 의미 없다. 그들의 말에 따라도, 따르지 않더라도, 오직 여의의 존재만이 그를 있게 하는 것이므로. 여의만 옆에 함께 한다면 그 어떤 자리라도 개의치 않으리. 그가 선택하는 기준은 오직 여의와 함께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역과 여의는 어떻게 되었을까. 둘이 함께 나란히 손잡고 궁으로 들어가 정권의 우두머리가 되었을까? 아니면 그들과 뜻을 함께하지 않겠다며 죽음을 택했을까?

 

계속 슬픈 생각을 하던 차에 읽었기 때문인지, 마냥 고요하게 흐르던 이야기 속에서 내내 슬픔을 느꼈다. 계속 긴장하며 읽었다. 어디선가 기다렸다가 튀어나올 슬픔의 한 조각이 그림 전체를 채울 것 같아서 불안했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선택을 한 두 사람이다. 그 선택의 결과가 서글펐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 순간의 마음이 읽힌다. 현실에서도 그러할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런 선택의 강요가 존재할 터였다. 그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모두가 아프기 마련이다. 누구라도 덜 슬프게, 덜 아프게 하는 선택을 해야 할 터였다.

 

연연불망이라 했다. 연(戀)연(緣)불망(不忘). 잊을 수 없는 그리움, 끝나지 않은 인연. 역과 여의의 사랑이 해피엔딩인지 새드엔딩인지, 읽는 순간에 따라 매번 다르게 다가올 것 같다. 그래서 여운이 더 짙어질 지도... 마지막에 뒤돌아서서 가던 여의의 발걸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역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내내 궁금해하고 있다.

“단언하건대, 제비꽃이 으뜸이었소. 모란도 난초도 곱기는 하나 제비꽃에 비할 수는 없었다오.”

 

실제 역사 속 인물인 중종과 단경왕후를 배경으로 가져왔다고 하지만, 많이 다른 듯하다. 연산군의 폭정을 반대하던 사람들이 진성대군을 왕으로 이끌면서 기록된 중종반정. 진성대군이 이끌고 원해서 이뤄낸 정권이 아니었기에, 정권을 바꾸겠다는 세력에 끌려온 그가 왕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을 것이다. 허수아비 임금이었을지도 모르지. 그런 그가 아내라고 지킬 수 있었을까? 7일 만에 쫓겨난 중전으로 기록된 단경왕후는 연산군의 정비였던 폐비 신씨의 조카였으니, 새로운 정권의 세력들은 단경왕후 역시 폐비가 되어야 한다고 외쳤겠지. 그걸 거부할 힘이 중종에게 있었을까. 그렇게 7일 만에 궁에서 나온 단경왕후는 인왕산 아래의 사직골 옛 거처에서 지냈다고 한다. (검색해서 찾아보니) 부인을 잊을 수 없던 중종은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 기슭을 바라보고 했는데, 이 말을 들은 단경왕후는 자기가 입던 붉은 치마를 경회루가 보이는 바위에 올려두었다고. 그 바위를 치마바위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마도 그에게 '나는 잘 지낸다...'는 말을 그렇게 표시한 거 아니었을까. 이 소설은 중종반정이 이뤄지기까지의 시간을 그렸는데, 내내 긴장되는 반정의 준비라기보다는 역과 여의 두 사람에 초점이 맞춰졌다. 소설 속에서 그는 한없는 사랑을 바라는 남자로 그려졌고, 그녀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실제 중종은 이미 잡은 왕권을 놓고 싶지 않았던 인물이라던데, 아내를 버리고 끝까지 돌아보지 않을 만큼 냉정한 사람이었다고 하던데 정말일까? 아마도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게 중종에게도 적용된 게 아니었을까, 하는 궁금증도 생기고... 그래서 소설 속 역의 모습이 더 애틋하고 아프게 보인다. 아내를 버리고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 냉정하고 권력 욕심을 부린 사람이 아니라, 한 여자를 향한 사랑밖에 몰랐던 나약하고 여린 사람으로 비춰져서 그가 왕위에 오르고 보낸 몇 십 년의 세월이 죽은 상태였을 거라고.

 

소설의 처음부분에서는 그저 어느 시대의 이야기이겠거니 했는데, 마지막을 향해갈수록 암시하는 내용에 어렵지 않게 그 시대를 연상할 수 있다. 중간에 등장하는 정암 역시 마찬가지여서, 그 시대의 이야기를 다시 찾아보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중종과 단경왕후의 최후만큼은 드라마나 소설의 모티브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계속 들더라. 반정으로 이룬 왕권, 7일 만에 폐위된 왕비, 전해지는 치마바위 이야기에 '7일'이라는 시간은 많은 이야기를 그려낼 수 있는 소재가 될 것 같다. 이번에 드라마 <7일의 왕비>도 그런 의미로 궁금하긴 하다. 애절하고, 아프고, 슬프고, 동시에 많은 이야기를 품은 채로 여러 갈래의 길을 열어주는 듯해서 말이다. 그런데 드라마 소개 부분을 잠깐 봤는데, 연산군과 중종과 채경(중종의 아내)을 거의 삼각관계 분위기인 것처럼 보이던데... 그게 맞나? 어차피 드라마이니, 소설을 읽는 것처럼 보면 그만일지도 모르지만, 기록된 역사에서 많이 벗어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소심한 바람이 있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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