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편안한 죽음 을유세계문학전집 111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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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외부에서 기인한 폭력이라는 말에,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치열하게 싸우는 삶이구나 싶다. 한 사람의 죽음이 얼마나 복잡한 인생사인지 복기한다. 문장의 묘사가 눈앞에 그리는 장면과 일치해서 더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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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보러 가려고 다 등록해놓았는데, 이곳에서는 상영관이 없어서 양도합니다.

제가 예매 후, 예매번호 문자로 보내드리면 티판기에서 발권하시면 됩니다.


<체르노빌>

CGV 일반 2D만 가능.

총 4매 (선착순으로 드립니다.)

좌석 지정 안 됩니다.

예매 후 취소 불가입니다.

오늘 오후 3시까지만 댓글 확인 및 예매 가능.


댓글 남겨주실 때 정확한 상영 정보, 원하시는 매수, 연락처 남겨주세요.

예매 후 바로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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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여백
아시자와 요 지음, 김은모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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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가족이었던 딸이 자살했다. 아버지의 슬픔은 말할 수 없었고, 그 슬픔은 끝도 없었다. 수업 중에 울린 전화를 받았더라면 딸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까? 아버지는 그때의 선택을 계속 후회했지만, 이제는 소용없다. 딸은 없으니까. 몰랐을 테지. 절박한 순간에 딸이 걸어온 전화일 줄은. 더 힘들었던 건 딸이 왜 죽어야 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서다. 무엇이 딸을 자살로 이끌었는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오래전 아내가 죽고, 애지중지 키운 딸이었다. 없는 시간 쪼개서 딸의 성장 시간에 함께하고 싶어서 노력했다. 항상 유쾌하고 건강했던 딸인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아직도 실감하지 못하는 아버지다.


안도의 딸 가나에게는 친구가 두 명 있다. 사키와 마호. 서로의 스타일을 봐주고, 같이 어울리며 밥도 먹고, 거의 모든 일상에 두 친구가 있다. 물론 학교생활 내내 그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건 당연했다. 나는 이 설정을 보면서 참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가나는 사키와 마호와의 관계에 너무 의존하고 있었다. 꼭 두 아이와 같이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싶었는데, 이 교실의 분위기를 묘사하는 장면에서 조금씩 느끼게 됐다. , 이 또래의 아이들에게는 그들만의 무리가 형성되고, 마치 각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모임처럼 구분되는 어떤 게 있었다. 꼭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짙어질 무렵, 나의 청소년 시절을 떠올려 봤다. 똑같지는 않았지만, 그때도 절친이 있었다. 반 아이들 두루두루 알고 지내면서도 유독 더 가까이 지내는 몇몇이 있기 마련이다. 일상을 나누기도 했지만, 학교라는 공간에서 가까이해야만 하는 몇몇은 필요하다. 그 관계가 학교 밖에서도 이어지고, 혹은 졸업하고 나서도 계속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관계 역시 마음이 끌리고 자연스러워야 하는데, 유독 가나와 마호가 말하는 관계는 위태롭게만 보인다. 너무 일방적으로 한 사람에게 끌려가는 느낌? 그 사람이 아니면 학교생활을 할 수 없는 불안감 같은 거 말이다. 가나와 마호 그 중심에 사키가 있었다.


무덤덤하게 혼자 복도를 걷고, 체육시간에는 짝이 없는 다른 아이와 조를 짜고, 점심시간에는 혼자 점심을 먹고 조용히 책을 읽는다. 그런 아이가 반에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마호는 그러는 게 죽도록 싫었다. 창피했다. 혼자라는 것도, 혼자임을 남들에게 들키는 것도. (125페이지)


살다 보면 관계가 어그러질 수도 있다. 모든 관계에는 권태기도 있으니까, 잘 지내다가 뭔가 하나 미워 보이면서 거슬릴 수도 있다. 다시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하기도 하지만, 그게 잘 안 된다면 그 관계는 끝나기도 한다. 우리 사는 세상이 그렇다. 하지만 10대의 아이에게, 학교생활의 모든 것이 친구 관계에 좌지우지된다고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하루의 절반 가까이 학교에서 보내는데, 그 안에서 불편한 관계가 계속된다면 그 상처와 불안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이미 어른이 된 우리가 겪는, 가족 사이에서도 그렇고 사회생활에서도 그렇다. 그 축소판 같은 학교생활이야 더 말할 것도 없겠지. 인간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흐르듯 이 아이들의 관계도 그렇게 흘러가면서 어긋났다면 참 다행이었을 텐데, 인간의 본성이 저지르는 일을 누가 막을 수도 없었을 테다. 가나는 스스로 뛰어내렸지만, 그 죽음을 가나가 선택한 건 아니었다. 떠밀리듯, 불안한 마음으로, 관계회복의 유일한 길이라고 여겼던 유일한 선택이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야생이었다면 진 쪽이 도망치면 되겠지만, 수조에는 달아날 곳이 없어요.” (199페이지)


나라면 어땠을까? 내가 가나였다면 이 아이들의 은밀한 폭력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선뜻 한 가지 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저 괴로워만 하다가 시간이 흐르고 있었겠지. 그 무리에서 벗어나자니 이제는 새로운 그룹을 만들지도 못한다. 이미 학기 초에 형성된 아이들 각각의 그룹에 가나가 낄 자리는 없었다. 설령 가나가 다른 그룹에 들어갔다고 해도 마호와 사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겠지. 그러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을 감당하기만 하다가 뛰어내린 거다. 자기가 속한 그룹에서 배제되어 계속 힘들어하느니 이제는 좀 편해지고 싶다는 바람이 아니었을까.


어렵게 찾은 가나의 일기에서 시작된 충격은 이 소설의 결말까지 이어진다. 딸의 죽음 원인을 알아낸 아버지의 결심, 그 사실을 알게 된 악랄한 아이의 꼼수는 자기만 살겠다는, 자기 미래만 챙기겠다는 또 다른 이기심이었다. 이런 아이가 있을까 싶지만, 요즘 뉴스에서 보는 사건들만 봐도 이제는 아이가 아이로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니까 그동안 내가 알던 아이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상황도 많아서일까. 무엇이든 고정관념을 버리고 봐야 한다는 생각까지 들더라. 학교라는 사회에서 잘 보이지 않는, 아이들 세계에서 형성된 스쿨 카스트가 무엇인지, 그 관계가 어떤 폭력을 만들어내는지 보여준다. 학교 폭력의 현장이 얼마나 교묘하고 위험한지 증명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분리만이 답은 아닐 거라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의 해결책이 모두 맞지는 않는다는 것을 시사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결말이 인상적이다. 딸의 일기를 발견한 아버지가 딸을 괴롭힌 아이들을 죽이고 자기가 그 벌을 달게 받겠다는 다짐인 줄 알았다. 어차피 상처는 받을 대로 받았고, 그 트라우마는 지워지지 않을 테다.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하지만 아버지는 아버지의 방식대로, 다 죽여버리는 것 이상으로 딸의 죽음을 새겼다. 가해자가 용서를 구하고 반성을 한다고 해서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잖아. 피해자를 위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죄를 짓고 용서를 구하고, 사과하고 반성했으니 이제 그 죄에서 벗어났다고 여기는 건 아닐까? 벌을 주겠다는 아버지의 선택도 벌로 끝나는 건 아니다. 그 역시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었을지도 모르니까. 죄와 벌 그 사이에 존재하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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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6-30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를 마치면 그때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학교에 다닐 때는 그래야 한다고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어쩐지 혼자 있으면 안 좋을 것 같고, 어디에 잘 끼지도 못하고... 저는 그렇게 애매하게 지냈네요 그때 왜 책 몰랐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책이 다는 아니지만... 친구 사이도 같은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아이도 있는 것 같더군요 그런 건 소설에서 봤지만, 실제로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희선

구단씨 2021-07-02 12:17   좋아요 1 | URL
지나고 나서야 좀 알겠더라고요. 그때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들.
그리고 저도 님과 비슷하네요. 학교 다닐 때 책을 전혀 몰랐어요. 그때 책을 알았더라면 좀 다른 인생을 살아왔을까요? ㅡ.ㅡ;; 많이 아쉬운 부분이네요.
 
[세트] 죄의 궤적 1~2 - 전2권
오쿠다 히데오 지음, 송태욱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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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섬 레분토에서 어설픈 어부로 살아가던 우노 간지는 사람들에게 바보라고 불린다. 아이들이 놀려도 그냥 웃고 마는, 부당한 대우에도 대응하지 못하는 존재다. 그는 정말 바보일까? 돈이 없으면 서슴없이 빈집털이하는 걸 보면 바보라고 하기에는 너무 똑똑하고, 남들이 험한 말을 해도 그냥 웃고 마는 걸 보면 정말 바보 같고. 우노 간지. 그는 누구인가.


그를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려웠다. 더불어 그가 저지른 죄를 어떻게 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야기에 푹 빠져 읽고 있었지만, 한 번씩 어떤 느낌이 차올라서 답답했다. 그는 이렇게 무서운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왜 한 번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거지? 머리를 다쳐서? 바보여서? 이게 죄라는 걸 몰라서? 그는 어쩌다가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 궁금증은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형사와 함께 달리면서 놀라움으로 변해갔다. 경악했다.


소설은 세 명의 시선이 교차로 진행된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여러 범죄의 용의자인 우노 간지. 이 사건에 뛰어들어 온몸을 불사르는 형사 오치아이 마사오. 가난한 노동자들이 모이는 산야의 여관 딸 마치이 미키코. 처음 돈이 필요해서 소소하게 저지르는 간지의 빈집털이는 금방 멈출 줄 알았다. 그는 바보 소리를 들으면서도 일하고 있었고, 어머니가 돈을 요구하지도 않았으니까. 그가 유흥을 즐기며 흥청망청하는 스타일도 아니었으니, 그의 범죄는 무엇을 위한 것인지 언뜻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그에게도 부족한 뭔가를 채워주는 수단이 되었겠지.


그의 재능이자 장기인 빈집털이를 계속하면서도 그는 사람을 헤치지는 않았다. 레분토를 떠나면서 사기를 당한 그는 위기도 잘 넘겼다. 물론 남의 것을 훔쳐서. 계속되는 범죄는 경찰의 추적을 받기 시작하지만, 간지는 쉽게 잡히지도 않는다. 더 의아한 건 간지의 태도다. 주변에 경찰이 깔려있고, 계속되는 사건에 간지가 용의자로 지목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거리를 활보하고 여자와 여행을 가다니. 이 무슨 강심장인가. 흔히 잘못을 저지르고, 언제 잡힐지 몰라서 숨어있는 처지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막 뛰지 않나? 두려움과 불안으로 심장이 두근거릴 것 같은데? 간지는 보통의 이런 감정을 넘어선 행동으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정말 생각이 없는 건지 뭔지, 도통 모르겠다.


처음 레분토의 다시마 사업가의 집에서 불이 난 사건, 도쿄의 은퇴한 사업가가 살해된 사건, 6살 아이의 유괴사건. 별도의 사건으로 보이는 이 범죄들이 우노 간지라는 한 사람을 용의자로 지목한다. 그러면서도 긴가민가. 형사들은 여러 가지 증거를 확인하면서 간지를 용의자로 추적하지만, 평소 간지의 행동으로 보면 도저히 이런 범죄를 저지를만한 인물이 아닌 거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를 아는 사람 모두 간지가 그 정도의 일을 저지를 거로 여기지 않는다. 그 바보가? 설마. 그래도 그가 했을지도 모를 범죄를 떠올리면 어떻게 해서든 간지를 붙잡아야만 했다. 그에게 물어보기라도 하려면 일단 그를 마주해야 하지 않겠는가. 간지는 도망치고, 형사들은 그를 잡기 위해 미친 듯이 달린다. 그리고 간지는, 붙잡힌다.


모두가 간지를 쫓는다. 그가 정말 범인일까 궁금하면서, 그에게 듣고 싶은 말이 참 많았다. 범죄의 자백은 차치하고, 그가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그의 현재는 어떻게 흘러오게 되었는지 들어야만 했다. 이야기의 중심은 간지가 저지른 범죄의 시작과 과정과 결말이었지만, 점점 또 다른 방향의 이야기가 눈에 들어온다. 간지가 범죄를 저지르면서 보인 행동이 내내 이상했던 거다. 그는 타인의 감정에 신경 쓰지 않는다. 죽음을 보면서 슬퍼하지 않는다. 그냥 어떤 일이 일어난 상황 그대로만 받아들인다. 게다가 순간적으로 그는 그 자신을 버린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위험에 빠질 때마다 그의 정신은 안드로메다로 여행을 간다. 바로 자기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잊는다. 시간이 흐르고 정신을 차려보면 일을 다 끝났다. 누가 죽어 있거나, 앞의 사람이 화가 잔뜩 났거나, 내내 상대가 하는 말을 듣지 못했거나. 간지의 처지에서 보면 참 좋은 방식인데, 그가 언제부터 이런 태도로 세상을 살아왔는지 추적해야 했다.


그렇다. 어릴 적 삿포로에서 살던 때 어머니의 결혼 상대에게 매일 야단을 맞았다. 젓가락을 쥐는 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욕을 먹고, 법을 흘린다고 엄한 꾸지람을 들었다. 어느 날 자신은 감정의 스위치를 내리는 기술을 익혔다. 그 이후로 무서운 것이 없어졌고 긴장하는 일도 없어졌다. 설사 사람을 죽인다고 해도,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2, 99페이지)


작가는 1963년 일본에서 실제로 발생한 유괴사건을 모티브로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소설의 내용으로 추측하자면, 이 시기는 전쟁이 끝나고, 사는 것은 넉넉하지 못했을 테고, 여기저기 노동자의 모습이 많이 보였던 시절인 듯하다. 각 가정에 전화가 막 보급되기 시작했던 시절이기도 했단다. 유괴사건은 그 전화가 중요 단서가 되어 실마리를 잡는다. 간지를 붙잡고 보니 그의 성장 과정의 흑역사가 현재의 간지를 만들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지금까지 간지가 빈집털이를 놀이처럼 해왔고, 유괴하고,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으로 만들어진 건 시작이 있었다는 거다. 그가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자기의 욕망에 집중하고, 범죄를 저지를 때마다 기억을 잊으면서 살아왔던 건 누구의 책임일까. 소설은 그가 불우한 어린 시절을 지내왔고, 그 과정에서 그에게 일어난 일들 때문에 현재의 그가 만들어졌다는 걸 설명한다. 그에게 죄를 물어야 하는데, 그의 인생을 만든 환경을 무시할 수도 없으니. 그의 이야기를 다 들은 우리는 이제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까.


범죄자는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아마 후자에 가까울 것 같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여기에 적용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누구나 좋은 흐름을 가까이하면 그 흐름에 섞인다. 자라나는 시기에 보고 듣고 배운 것들로 어른의 바탕이 된다. 이 소설이 그 증거라도 되는 것처럼, 간지의 시간을 보여준다. 죄의 근원을 물으면서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가 저지른 일은 범죄이며, 살인이고, 용서받을 수 없다. 단숨에 읽히면서도, 이야기에 푹 빠져들면서도, 소설의 결말과는 상관없이 독자만의 결말을 아직 내리지 못하게 한다. 어렵고 또 어렵기만 하다.



#죄의궤적 #오쿠다히데오 #은행나무출판사 #소설

#범죄 #선과악 #추리소설 ##책추천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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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6-25 0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많은 사람이 죄를 지으면 잡힐지도 모른다 생각하기도 할 텐데, 우노 간지는 그런 모습이 아예 보이지 않다니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책을 볼 듯합니다 범죄자는 만들어지기도 하죠 어릴 때 좋은 어른을 하나라도 만났다면 좀 나았을 텐데, 그런 일은 없어서 감정의 스위치를 아예 내려버리게 됐군요 그런 거 안되기도 했지만, 저지른 죄가 있으니 안됐다고만 생각할 수도 없겠습니다


희선

scott 2021-06-25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읽고 싶었는데 구단님 리뷰 읽고 바로 7월용 책으로 쟁여둠요 ^ᆞ^
 
아주 편안한 죽음 을유세계문학전집 111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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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장례식에 다녀왔다. 돌아가신 분은 103. 이 나이까지 사신 분을 처음 봤고, 최근에 장례식에 다녀온 것도 오랜만이었다. 코로나 상황에 장례식은 조촐했다. 가장 낯설었던 것은, 기존에 경험했던 장례식의 분위기와 너무 달랐던 거였다. 죽은 이를 보내는 자식들의 나이가 보통 70~80. 아무리 인간의 수명이 길어졌다고 해도, 이 정도 나이라면 죽음이 가까워지지 않았던가. 실제로 죽은 이의 가장 큰 자식은 오래전에 먼저 하늘로 갔다고 한다. 103세의 부모를 보내는 70~80대 자식들의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오래 사셨다면서 슬픔을 거두는 표정이었지만, 아무리 나이 많은 부모를 보내는 일이라도, 같이 늙고 죽어가는 나이의 자식이라도, 부모의 죽음이 어떻게 슬프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낯선 감정은 사라지고, 오직 부모의 죽음을 애도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보였다. 슬픈 건, 슬픈 거다.


돌아가셨어.”

우리는 병실로 올라갔다. 그토록 기다렸으면서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시신의 모습을 한 존재가 엄마 대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시신의 손과 이마는 차가웠다. 그건 여전히 엄마였지만, 앞으로 엄마는 영원히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움직이지 않는 얼굴을 둘렀단 가제 천이 턱을 받치고 있었다. (124페이지)


시몬 드 보부아르가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하고 쓴 글을 읽는 게 쉽지 않았다. 언젠가 내가 겪을 일이고, 그 순간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지금, 이 글이 어떻게 읽힐지 가늠되지 않았다. 어쨌든 슬픔이고, 그래서 슬퍼질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글은 의외로 담담했다. 어머니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간이 마냥 슬픔으로 채워진 게 아니라, 그 기회로 한 여자의 생을 더듬고 육체의 죽음을 바라보며, 딸의 시선으로 어머니를 본다. 죽어가는 엄마의 옆에 머물면서 모녀 사이의 거리를 좁힌다. 이제야 엄마를 조금 알게 된 것 같다.


1963년의 어느 날, 시몬은 로마의 한 호텔에서 전화를 받는다. 어머니가 욕실에서 넘어져 다쳤다는 것. 겨우 전화기까지 간 어머니는 친구에게 전화하고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된다. 넘어져서 다쳤으니 병원 생활은 누워있는 것이 전부다. 곧 시몬과 여동생이 왔고, 자매는 교대로 엄마의 곁을 지킨다. 넘어져서 다친 것을 치료하려고 간 병원에서 어머니가 암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엄마가 욕실에서 넘어지지 않았다면 암에 걸린 것도 몰랐을 테니, 오히려 넘어진 게 다행인 건가 싶기도 하지만, 그 어떤 병 앞에서도 다행인 건 없으리라. 이제 수술이라는 중요한 선택이 남았다. 수술하면 한 달 정도 더 살 수 있을지도 모르고, 수술하지 않으면 곧 죽는다고 하고. 근데 나는 여기서 참 궁금하더라. 수술하고 한 달을 더 사는 것과 수술하지 않고 곧 죽는다는 시간의 차이는 얼마나 될까. ‘이라는 시간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어서 정말 고민이 되더라는. 그래서 다시 이 상황에 나를 대입하면서 문장을 읽어내려갔다. 나는 이 상황에서, 엄마의 죽음과 수술을 앞에 두고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자매는 어머니에게 복막염 수술이라고 말하고 암 수술에 동의한다. , 여기서 또 궁금해지네. 엄마는 정말 자기가 복막염 수술을 했다고 믿었을까? 자식들이 자기 앞에서 병을 숨기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면서 모른 척한 건 아닐까? 어쨌든 시몬의 어머니는 수술을 받고 회복하는 듯 보이다가 통증이 심해지다가 다시 괜찮아지는 듯하면서도 결국 나아지지 않는 쪽으로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어느 날은 깊은 잠에 빠져 꿈속에서 헤매고, 어느 날은 자식도 알아보지 못하고, 누군가의 문병에 담소를 나누다가도 귀찮아하고, 아주 오래전 기억을 꺼내기도 한다. 아무래도 이렇게 가까이서 서로 함께 있는 시간이 생기다 보니, 으레 그렇듯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거리를 좁힌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어머니의 삶이 이제 조금씩 보이는 일을 여기서도 듣는다. , 인간은 왜 그래야만 하는 걸까. 왜 항상 지나고 나야 보이는 것들이 이렇게도 많은 거냐고. , . 그냥 그때 그 순간에 바로 알게 해주면 안 되나? 매번 뒤늦게 알아채는 것들 때문에 가슴을 치며 후회하는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괴롭다.


우리는 엄마가 임종 직전까지 갔다가 다시 회복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걸 보는 게 괴로웠다. 또한 그걸 지켜보면서 모순적 감정을 느끼는 우리의 처지로 인해 특히나 힘들었다. 고통과 죽음 사이에 경주가 벌어지는 가운데 우리는 죽음이 이기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죽은 듯 잠든 엄마의 얼굴을 바라볼 때면, 우리는 시계를 매달아 둔 검은색 리본이 미미하게나마 움직이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엄마가 입고 있는 하얀색 실내복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조심스레 관찰하곤 했다. 이게 마지막 경련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위가 쪼그라들 정도로 괴로워하면서. (106페이지)


원래 이 작가가 이렇게 글을 쓰는가 싶을 정도로,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보는 과정을 차분하게 적은 느낌에 놀랍기도 했다.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하나 싶기도 했다. 작가의 다른 작품을 완독한 게 없기에 안다고 말할 수도 없으니, 비교 대상이 없다.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모를 애매한 분위기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읽기에는 충분했다. 더불어 내가 경험할 죽음을 동시에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엄마는 어제 코로나 백신 2차 접종을 하고 오셔서 1차보다 심한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 이러다가 뉴스에서나 보던 심각한 부작용 사례를 내가 눈앞에서 보는 건 아닐까 걱정하다가, 마침 읽고 있던 이 책을 생각하니 또 죽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도 없었고. 원래 병원행이 잦았던 엄마였지만, 최근 반년 사이에 병원 생활은 사람을 너무 지치게 했기에 다시 또 경험하고 싶지 않은 시간의 기억은 떠올리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러니 작가가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담기 시작했던 많은 것이 내 눈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는 거다. 그 문장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라, 아마 자신의 경험이 가장 정확한 죽음의 이야기가 될 거라는 거다. 그러니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앞에서 시들시들 누워계시는 엄마를 생각하며 문장의 여러 곳을 곱씹었다.


어머니가 죽어가는 시간에야 비로소 화해의 시간이 시작되었다는 게 또 다른 슬픔이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자, 어머니의 삶을 보면서 거북했던 딸의 시선은 어머니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다다르는 과정에서 온전히 받아들인다. 외면했던 장면들을 되살리고 그 외면의 일부였던 어머니를 소환하며 화해한다. 그걸 화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싶지만, 적당한 표현을 못 찾겠다. 어쩌면 작가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고, 어머니는 또 다른 시선으로 딸을 보고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어머니는 그동안 한 번도 딸을 외면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마지막 순간까지도 어머니를 다 알게 되지는 못할 테니까.


자기 생각을 스스로 반박해 보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자주 많은 걸 얻게 된다. 하지만 어머니는 전혀 다른 경험을 했다. 자신의 뜻을 거스르며 살았던 것이다. 다양한 욕망을 품고 있었지만 그것을 참아 내기 위해 엄마는 온 힘을 쏟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분노를 느껴야만 했다. 엄마는 유년 시절 내내 규범과 금기라는 갑옷을 두른 채 몸과 마음 정신을 억압당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끈으로 옭아매도록 교육받았다. 그런 엄마의 내면에는 끓어오르는 피와 불같은 정열을 지닌 한 여인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뒤틀리고 훼손된 끝에 자기 자신에게조차 낯선 존재가 되어 버린 모습이었다. (58페이지)


어머니의 늙은 육체를 보는 것도 어색하고 어렵기 그지없었다. 늙어가는 게 어디 육체의 한 군데뿐이겠냐마는, 언제 봐도 적응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다. 작가의 놀란 마음을 어느 정도 알 것 같아서 그대로 전해진다. 한 달에 두세 번 정도 엄마랑 목욕탕에 가는데, 예전에는 미처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씩 보일 때마다 놀랍고, 마음이 아프다. 엄마의 등을 밀어드리는데, 갈수록 늘어지는 근육에 타올을 낀 내 손이 다른 방향으로 밀릴 때마다, 혹시나 살이 아프지 않을까 물어보면서 조심스럽게 등을 미는 일을 계속하는 게 그저 편하지만은 않다. 작가가 적어낸 그 과정을 보는 것처럼, 이렇게 늙어가는 엄마의 몸은 어느 순간 죽음에 훨씬 더 가까워져 있을 것을 아니까 말이다. 그 어떤 말을 해도 경험을 능가하는 감정과 표현은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빨리 그 경험을 내 것으로 만들어서 완벽하게 공감하고 싶지도 않다. 어차피 그 공감에 바탕에 되는 건 슬픔일 테니.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그 과정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이야기가 작가에게 어떤 의미일까 궁금했다. 작가는 이 시간 동안 죽음이 우리 곁의 일상으로 여긴다. 그래서인지 죽음의 민낯을 드러낸다. 고통 속에서 죽어갔을 어머니를 곁에서 지킨 가족들이 있었으니 다행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작가는 이것도 알았다. 어떤 죽음도 자연스럽지 않으며, 누구라도 죽음을 맞이한다는 걸 알지만, 외부에서 기인한 것들로 죽어가는 인간에게 죽음은 폭력이라고 말한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보면서 자신의 장례식 예행연습을 하는 거로 생각한다. 한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는 일은 단순하지 않았다. 그것도 가족을, 어머니를 보내는 일에 많은 사유가 담겨 있었다.


자연스러운 죽음은 없다. 인간에게 닥친 일 가운데 그 무엇도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지금 이 순간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이는 그 자체로 세상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각자에게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고다. 심지어 자신이 죽으리라는 걸 알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부당한 폭력에 해당한다. (153페이지)


이런 글을 볼 때마다, 아직 엄마가 내 옆에 있을 때 시간을 좀 더 같이 보내야지 하는 한 가지 바람만이 남는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라도, 앞집 아저씨 뒷말을 하는 의미 없는 수다라도, 아픈 엄마를 옆에서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시간이라도. 작가의 말처럼, 자기가 죽을 나이가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나의 엄마 역시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흔히 노인들이 어서 죽어야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엄마는 이해가 안 된다고 한다. 자기는 죽기 싫다고, 이제야 좀 숨 쉴만한데 왜 죽냐고, 자식들하고 손주들하고 더 오래 같이 있고 싶다고. 나는 엄마가 이렇게 말해주어서 정말 고맙다. 다행이다. 아마 엄마가 내 앞에서 입버릇처럼 어서 죽어야지 한다면 막 화를 냈겠지. 듣기 싫다고. 아직 엄마를 보낼 준비가 되지 않은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화내는 것밖에는 없어서.


작가가 써 내려간 죽음의 정의 같은 문장들은 언젠가 내가 겪을 순간을 준비하는 것만 같다. 병원 생활이 더 잦아지는 엄마를 보는 일은 괴롭고, 그때마다 혹시 모를 죽음을 생각하는 것도 고통스럽다. 어떤 죽음도 자연스럽지 않으며, 돌아가실 만큼 연세를 잡순 사람도 없다. 그러니 103세 노인의 죽음이 호상이라며 장례식장에 있던 사람들의 말은 틀렸다. 죽음은 죽음이고, 어떤 죽음도 평범하지 않으며, 죽음 앞에서 나이는 없다. 죽음은 인간에게 닥친 사고일 뿐이라는 작가의 말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저, 우리에게 다가온 일상의 불행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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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6-24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보면서는 누구나 죽고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생각해도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런 생각은 못하겠지요 103세에 세상을 떠나다니... 죽음은 나이와는 상관없이 다 슬프겠습니다 작가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걸 쓰기도 하는데, 그것도 애도가 아닐까 싶네요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이고 생각할 것 같기도 해요


희선

구단씨 2021-06-24 21:18   좋아요 1 | URL
정말요. 읽으면서도, 타인의 경험을 보면서도 느껴요. 이렇구나. 이렇게 받아들여야 하는구나...
하지만 그 죽음을 바라보고 감당하는 게 내 몫이 되면 또 생각대로 다가오지는 않더라고요.
작가의 애도 방식이 이 책으로 남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