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여백
아시자와 요 지음, 김은모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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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가족이었던 딸이 자살했다. 아버지의 슬픔은 말할 수 없었고, 그 슬픔은 끝도 없었다. 수업 중에 울린 전화를 받았더라면 딸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까? 아버지는 그때의 선택을 계속 후회했지만, 이제는 소용없다. 딸은 없으니까. 몰랐을 테지. 절박한 순간에 딸이 걸어온 전화일 줄은. 더 힘들었던 건 딸이 왜 죽어야 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서다. 무엇이 딸을 자살로 이끌었는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오래전 아내가 죽고, 애지중지 키운 딸이었다. 없는 시간 쪼개서 딸의 성장 시간에 함께하고 싶어서 노력했다. 항상 유쾌하고 건강했던 딸인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아직도 실감하지 못하는 아버지다.


안도의 딸 가나에게는 친구가 두 명 있다. 사키와 마호. 서로의 스타일을 봐주고, 같이 어울리며 밥도 먹고, 거의 모든 일상에 두 친구가 있다. 물론 학교생활 내내 그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건 당연했다. 나는 이 설정을 보면서 참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가나는 사키와 마호와의 관계에 너무 의존하고 있었다. 꼭 두 아이와 같이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싶었는데, 이 교실의 분위기를 묘사하는 장면에서 조금씩 느끼게 됐다. , 이 또래의 아이들에게는 그들만의 무리가 형성되고, 마치 각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모임처럼 구분되는 어떤 게 있었다. 꼭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짙어질 무렵, 나의 청소년 시절을 떠올려 봤다. 똑같지는 않았지만, 그때도 절친이 있었다. 반 아이들 두루두루 알고 지내면서도 유독 더 가까이 지내는 몇몇이 있기 마련이다. 일상을 나누기도 했지만, 학교라는 공간에서 가까이해야만 하는 몇몇은 필요하다. 그 관계가 학교 밖에서도 이어지고, 혹은 졸업하고 나서도 계속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관계 역시 마음이 끌리고 자연스러워야 하는데, 유독 가나와 마호가 말하는 관계는 위태롭게만 보인다. 너무 일방적으로 한 사람에게 끌려가는 느낌? 그 사람이 아니면 학교생활을 할 수 없는 불안감 같은 거 말이다. 가나와 마호 그 중심에 사키가 있었다.


무덤덤하게 혼자 복도를 걷고, 체육시간에는 짝이 없는 다른 아이와 조를 짜고, 점심시간에는 혼자 점심을 먹고 조용히 책을 읽는다. 그런 아이가 반에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마호는 그러는 게 죽도록 싫었다. 창피했다. 혼자라는 것도, 혼자임을 남들에게 들키는 것도. (125페이지)


살다 보면 관계가 어그러질 수도 있다. 모든 관계에는 권태기도 있으니까, 잘 지내다가 뭔가 하나 미워 보이면서 거슬릴 수도 있다. 다시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하기도 하지만, 그게 잘 안 된다면 그 관계는 끝나기도 한다. 우리 사는 세상이 그렇다. 하지만 10대의 아이에게, 학교생활의 모든 것이 친구 관계에 좌지우지된다고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하루의 절반 가까이 학교에서 보내는데, 그 안에서 불편한 관계가 계속된다면 그 상처와 불안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이미 어른이 된 우리가 겪는, 가족 사이에서도 그렇고 사회생활에서도 그렇다. 그 축소판 같은 학교생활이야 더 말할 것도 없겠지. 인간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흐르듯 이 아이들의 관계도 그렇게 흘러가면서 어긋났다면 참 다행이었을 텐데, 인간의 본성이 저지르는 일을 누가 막을 수도 없었을 테다. 가나는 스스로 뛰어내렸지만, 그 죽음을 가나가 선택한 건 아니었다. 떠밀리듯, 불안한 마음으로, 관계회복의 유일한 길이라고 여겼던 유일한 선택이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야생이었다면 진 쪽이 도망치면 되겠지만, 수조에는 달아날 곳이 없어요.” (199페이지)


나라면 어땠을까? 내가 가나였다면 이 아이들의 은밀한 폭력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선뜻 한 가지 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저 괴로워만 하다가 시간이 흐르고 있었겠지. 그 무리에서 벗어나자니 이제는 새로운 그룹을 만들지도 못한다. 이미 학기 초에 형성된 아이들 각각의 그룹에 가나가 낄 자리는 없었다. 설령 가나가 다른 그룹에 들어갔다고 해도 마호와 사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겠지. 그러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을 감당하기만 하다가 뛰어내린 거다. 자기가 속한 그룹에서 배제되어 계속 힘들어하느니 이제는 좀 편해지고 싶다는 바람이 아니었을까.


어렵게 찾은 가나의 일기에서 시작된 충격은 이 소설의 결말까지 이어진다. 딸의 죽음 원인을 알아낸 아버지의 결심, 그 사실을 알게 된 악랄한 아이의 꼼수는 자기만 살겠다는, 자기 미래만 챙기겠다는 또 다른 이기심이었다. 이런 아이가 있을까 싶지만, 요즘 뉴스에서 보는 사건들만 봐도 이제는 아이가 아이로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니까 그동안 내가 알던 아이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상황도 많아서일까. 무엇이든 고정관념을 버리고 봐야 한다는 생각까지 들더라. 학교라는 사회에서 잘 보이지 않는, 아이들 세계에서 형성된 스쿨 카스트가 무엇인지, 그 관계가 어떤 폭력을 만들어내는지 보여준다. 학교 폭력의 현장이 얼마나 교묘하고 위험한지 증명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분리만이 답은 아닐 거라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의 해결책이 모두 맞지는 않는다는 것을 시사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결말이 인상적이다. 딸의 일기를 발견한 아버지가 딸을 괴롭힌 아이들을 죽이고 자기가 그 벌을 달게 받겠다는 다짐인 줄 알았다. 어차피 상처는 받을 대로 받았고, 그 트라우마는 지워지지 않을 테다.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하지만 아버지는 아버지의 방식대로, 다 죽여버리는 것 이상으로 딸의 죽음을 새겼다. 가해자가 용서를 구하고 반성을 한다고 해서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잖아. 피해자를 위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죄를 짓고 용서를 구하고, 사과하고 반성했으니 이제 그 죄에서 벗어났다고 여기는 건 아닐까? 벌을 주겠다는 아버지의 선택도 벌로 끝나는 건 아니다. 그 역시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었을지도 모르니까. 죄와 벌 그 사이에 존재하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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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6-30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를 마치면 그때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학교에 다닐 때는 그래야 한다고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어쩐지 혼자 있으면 안 좋을 것 같고, 어디에 잘 끼지도 못하고... 저는 그렇게 애매하게 지냈네요 그때 왜 책 몰랐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책이 다는 아니지만... 친구 사이도 같은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아이도 있는 것 같더군요 그런 건 소설에서 봤지만, 실제로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희선

구단씨 2021-07-02 12:17   좋아요 1 | URL
지나고 나서야 좀 알겠더라고요. 그때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들.
그리고 저도 님과 비슷하네요. 학교 다닐 때 책을 전혀 몰랐어요. 그때 책을 알았더라면 좀 다른 인생을 살아왔을까요? ㅡ.ㅡ;; 많이 아쉬운 부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