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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린 가이드
김정연 지음 / 코난북스 / 2021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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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코트 메뉴 앞에서 서성이던 기억, 메뉴판 앞에서 뭘 골라야 할지 몰라서 시간만 보내던 일. 나만 있는 거 아니지? 선뜻 메뉴 선택이 어려울 때 도움을 받는 건 메뉴의 설명도 있지만, 눈으로 보이는 음식 모형이다. ‘음, 내가 이 음식을 주문하면 이렇게 나오겠군!’ 이런 기대를 하고 주문하곤 하는데, 언제나 역시나 늘 그렇듯 음식 모형과 똑같이 나오는 법은 없었다. 게다가 기대감 때문인지 맛으로 만족하는 때도 드물었다. 그저 배고픔을 좀 달래준다는 정도면 되겠지 싶은 포기? 가짜인 걸 알면서도 음식 모형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 모형의 맛에 기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 나는 정말 아직도 잘 모르겠단 말이지.
워낙 입소문을 탄 작가의 전작 때문인지, 이 책은 읽기도 전에 기대감에 부풀었다. 소개 글 따위 읽지 않았다. 표지와 제목만 봐도 다 알 수 있는 거 아녀? 어, 아냐, 아니었어. 미슐랭 가이드의 한국판으로 생각했다. 이세린 가이드로 우리에게 맛의 천국을 열어줄 거로 믿었지 뭐야. (아, 나는 작가의 이름을 알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 이름이 이세린이라고 계속 생각했다. 대체 뭐야?) 작가는 맛의 천국을 열어주긴 했다. 맛집 투어 같은 소개가 아니라, 음식점에 진열될 음식 모형을 만들면서 이야기를 담았다. 그 음식에 관한 기억, 슬쩍 과거로의 여행, 먹는 일의 고됨과 의미까지. 그러고 보니 음식을 만드는 우리 엄마의 이야기이면서, 음식 모형을 만드는 직업으로 가기까지의 성장 과정, 인생사에 끼어드는 온갖 웃음과 눈물까지 담았네그려.
보지 못한 시간만큼 달라지는 사람들.
그렇더라도…
“오랜만이다.”
함께하는 식사라서 생기는 관계의 빈틈에
음식은 고맙게도 늘 할 것이 되어준다.
‘내가 너희의 갈 길 잃은 눈과 손을 구해줄게! 빈틈을 메꿔줄게!’ (272페이지)
이세린은 음식 모형 만드는 일을 하는데, 조직에서 나와서 혼자서 일한다. 이른바 자영업자. 따로 작업실에서 일하고 집으로 퇴근한다. 제법 오래 이쪽 일을 해서 그런지 꾸준한 재주문도 있고, 섬세한 작업도 있다. 우리가 음식점에서, 혹은 어디 박물관이나 전시관에서 봤던 음식 모형을 생각하면 금방 이세린이 떠오를 것 같다. 진짜 같은 가짜를 만든다. 먹음직스럽게, 사실과 거의 흡사하게 만드는 작업이 쉽지는 않다. 이태리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들어내듯, 이세린의 음식 모형도 그러하다. 집중하고 또 집중해서 흐트러짐 없이 완벽하게 만들어내야 한다. 그런 집중력에도 틈틈이 끼어드는 게 있다. 그녀의 이야기다. 오빠들 밑에서 딸이라는 이유로 존중받지 못하던 시절, 너무 마른 체형에 엄마도 본인도 괴로웠던 순간들, 유전처럼 아버지에게 모형 만드는 일을 물려받은 남매들. 왜 하필 그녀는 음식 모형일까?
자연사박물관 쪽으로 모형의 꿈을 키웠던 그녀가 직장에서 음식 모형으로 처음 시작했던 게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모형이지만 그녀가 음식 만드는 장면을 보면 온 마음을 다한다. 음식에 이어진 먹는다는 일에 생각한다. 프로 정신으로 모형을 만들면서, 누구보다 따뜻하고 애틋한 음식의 기억이 있다. 더불어 그 음식을 먹고 성장하는 그녀에게 눈물과 웃음이 배어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당연히 음식 모형이다. 음식 모형 제작자의 삶을 처음 봤다. 음식점에서 흔하게 보던 게 이런 과정으로 만들어진다는 게 놀라우면서도,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을 반성했다. (아마도 내가 그걸 보고 음식 주문하고 먹은 후의 배신감을 너무 자주 느껴서 그런 건지도. ㅠㅠ) 모형이지만 그 음식에도 나름대로 역사와 사연이 있다. 누구와 먹었는지, 그 음식 먹으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개인이 아닌 풍습처럼 계속된 음식의 역사가 줄줄 들려온다. 그렇게 듣는 음식의 역사는 사실인 듯 풍문인 듯, 믿거나 말거나 하는 식이기도 하지만, 낯설지 않다. 이세린의 상상이든 아니든, 음식으로 엮어낸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맛있다. 내가 지금 입으로 넣는 이 작은 조각 하나에도 역사가 있다고 생각하면 다시 보이지 않나? 맛도 달라질지 모른다. 음, 어쨌거나 맛있으면 그만. ^^
그런 다양한 음식 모형을 만들면서 이세린은 어떤 이야기를 떠올릴까? 알맹이는 없고 보이는 부분만 채워 넣어서 보기 좋게 만드는 걸 보면 모형과 이야기의 진심 사이는 멀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눈에 보이는 음식 자체에는 모든 게 담긴 듯하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열다섯 가지 메뉴는 흔하면서도 특별하다. 캘리포니아 롤, 와플과 번데기, 비빔밥, 배추김치, 곶감과 굴비, 떡국과 미역국, 매운라면, 녹차크림 바움쿠헨, 밥, 한상차림, 모둠 튀김, 청주와 탁주, 인절미빙수와 팥빙수, 불고기 도시락, 주말 전골. 이 음식들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했는데, 우리집에서 보고 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닮은 이야기와 세상의 이런 사연도 있구나 싶은 이야기가 겹쳐진다. 비슷한 듯 다른 듯,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를 것 같은 이야기들이 가슴속으로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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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만 떠올려보자면, 맨 위에 올려지는 양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는 것 같은 인절미빙수와 팥빙수. 잘 만들다가 재채기 한 번에 콩가루가 다 날려버리는 장면을 상상하다가 인상을 썼다. 이거 치우려면 힘들겠군, 다시 만들려면 괴롭겠어. 똑같은 거로 여겼던 가래떡과 떡국 떡의 차이를 이제야 알았다. 장수를 기원하는 가래떡, 잘리는 모양으로 엽전을 연결했다던 떡국 떡은 재물을 의미한다지. 새해에 장수와 재물을 기원하는 마음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 시작은 몰라도 계속하게 되는 습관처럼, 우리는 내년 설날에도 가래떡을 뽑고 그 가래떡을 잘라서 떡국을 끓여 먹고 있겠지. 곡물에 곰팡이를 번식시킨 누룩으로 술을 만드는 일. 발효가 끝난 술독에 용수를 박아 거르면, 맑은 부분은 청주 탁한 부분은 탁주가 된단다. 두 가지 술이 한꺼번에 만들어지네? 교도소에서까지 수감자들이 술을 만들어 먹을 정도라고 하던데, 술이 그렇게 간절한 게 되어버리는구나.
뭐니 뭐니 해도 최고의 작품은 배추김치가 아닐까. 주문받은 일 때문에 대용량으로 배추김치 모형을 만들면서 엄마를 생각하는 건 당연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인데, 힘드니까 김치 담그지 말아라, 조금씩만 하셔라, 안 먹으니까 안 보내주셔도 된다, 그러다가 툭 배송된 김장김치 택배. 안 먹는다, 싫다, 보내지 말라 하면서도, 막상 일 끝나고 동료와 먹겠다고 선택한 저녁 메뉴가 묵은지 김치찜이다. 김포족(김장을 포기한 사람들)들도 김치를 먹기는 한다. 김장을 안 할 뿐이지. 암만. 해마다 엄마랑 둘이 김장을 하는 나는 이제 둘만의 김장을 당연하게 여긴다. 딱 먹을 만큼만, 식구들 조금씩 보내줄 만큼만, 무리하지 않게 적당히. 그러다가 어느 해는 김장을 안 하기도 했다. 하기 싫으면, 못하겠으면 안 하면 되지. 그해 우리는 주변 사람들이 준 김장김치 몇 포기로, 온라인으로 주문한 김치를 먹었다. 그래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잖아? 아직도 나는 김장에 목숨 걸듯이 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김장 안 하면, 작년보다 조금만 하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아는 사람들. 김장김치,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먹고 살아집니다. 큰일 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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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세끼 먹고 사는 일은 고단하다. 그저 먹기만 하면 되는 것 같지만, 단순하지 않다. 그러니 음식이 음식으로만 기억되지 않고 좋고 나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거겠지. 삐쩍 마른 딸이 잘 먹지 않는다고 오히려 엄마를 나무라는 일이 빈번하고, 밥상머리 교육이라고 먹는 데 자꾸만 잔소리하고 혼내고. 먹는 일이 왜 먹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을까. 하나하나 더듬어보면 참 많은 이야기가 음식에 쌓이고 쌓였을 것 같다. 이세린은 그런 일들, 그런 마음을 음식 모형을 만들면서 독백한다. 마치 누가 옆에서 듣고 있는 것처럼. 읽으면서 나도 옆에서 끄덕이고 있었다. ㅎㅎㅎ 같이 이야기하듯 들으면서 웃고 욕하고 그랬다. 허를 찌르는듯한 말에는 더 쓰라리고, 아픈 기억도 꺼내 봤다. 명절 음식 남은 거로 비빔밥을 질리도록 먹었다는 이야기에는 괜히 밥상을 엎고 싶기도 했다. 아, 정말 싫다. 당연하게 차별하던 시절의 이야기에 울컥하고 원망스럽고. 소개된 음식이 열다섯 가지가 아니라 더 많았더라면, 더 많은 이야기가 푹푹 녹아 있겠네. 할 말이 더 많아졌겠어. 음식으로 천일야화 한번 쓰는 거 아녀?
참고로 우리 집은 더 이상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
엄마가 암 진단을 받고 투병을 시작하게 되면서
일할 사람이 없어지자 가족회의가 있었고…
"흐음."
"뭐 어쩔 수 없지."
"세상이 많이 바뀌었지. 할 만큼 했으니 우리도 이제 그만해도 될 거야."
남자들의 차례가 되면 세상은 바뀐다. (180페이지)
음식을 만들고, 차리고, 먹는 일에 관해 생각한다. 단순히 먹는 행위에 비할 수 없는, 많은 것이 담긴 게 음식일 테다. 이야기가 담긴 음식이 앞으로의 시간에 더 쌓이겠지. 앞으로 어떤 음식에 어떤 이야기가 더 쌓여갈지 기대된다. 눈물이나 분노보다는 웃음이나 행복이 쌓이는 음식이 많았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음식 앞에서는 맛있게 먹는 게 가장 먼저라고 본다. 아님?
그러고 보니 나는 내일 엄마 집에 김치 담그러 간다. 전라도에서만 먹는다는(근데 요즘에는 다른 지역에서도 종종 보이던데?) 고구마순(고구마 줄기) 김치. 여름의 별미지. 예전에는 정말 많이 먹었는데, 언젠가부터 잘 안 먹게 되더라. 일단 더운 여름에 김치 담그는 게 귀찮기도 하지만, 고구마순 그거 껍질 벗기는 거 장난 아니거든. 손끝이 까매지니까 일단 손에 짝 붙는 비닐장갑 하나 끼고 까야 한다. 허리 아프게 그 단순노동에 푹 빠져 있어야 일의 끝이 보인다. 그렇게 힘들게 까고 김치 담그고 나면 양이 얼마 안 된다. 이런 슬픈 일이. 그래도 그거 맛 좀 보겠다고 그 힘든 노동을 시작하는 게 참 아이러니. 먹고 싶은 걸 어쩌겠어. 맛있게 먹을 그 순간을 기대하며 기합 한번 넣고 작업 시작해야지. 나중에 엄마 안 계시면 고구마순 김치 어디서 구해 먹냐. 에이, 아무래도 나중에 나의 음식 역사에는 고구마순 김치가 슬픔으로 기억될지도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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