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이치조 미사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모모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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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우리를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가. 아니,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사랑해야 하는가. 아니, 이것도 아닌 것 같다. 사랑하면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가느냐고 묻는 게 맞겠다. 일부러 사랑의 자세를 정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어가는 이런 사람. 내가 사랑하는 상대에게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어지는 건 너무 당연했다. 내가 상대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존재가 된다는 것. 누군가에게 좋은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 게 사랑의 긍정 효과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랑해야 하고,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웃으며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그 사람에게로 이어졌다.

나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건 내가 바라 마지않던 힘찬 충동이었다. (179페이지)


이 아이들도 그런 사랑을 했다. 비록 자신들이 바라는 대로 사랑이 흘러가지 않았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그게 최선이라고 믿고 행동했다. 오늘을 행복한 기억으로, 웃게 해주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 각자에게 간절한 날들이었기에, 그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이 사랑을 믿었다. 그것뿐이었다.


히노 마오리는 사고로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 오늘의 일을 내일 기억하지 못한다. 자고 일어나면 기억이 리셋된다. 이런 병도 있을까 싶을 정도로 히노의 기억 장애는 불행이었다. 그렇다고 오늘을 살 수 없지는 않은가. 그녀만의 방식대로 오늘을 기록하고 내일을 살아간다. 휴대전화와 수첩, 메모지에 오늘의 모든 일을 기록한다. 다음 날 아침 자고 일어나면 전날의 기록으로 기억을 복구한다. 매일 그녀의 일과다. 그러다 우연히 사귀게 된 가미야 도루와의 시간을 걱정한다. 그래서 조건부 연애를 시작했다. ‘학교 끝날 때까지 서로에게 말 걸지 않고, 연락은 짧게 하고, 정말 좋아하지는 말라는 조건으로 히노는 도루가 내민 손을 잡는다.


처음 히노의 연애 조건을 들었을 때는 뭐가 이렇게 수상한가 싶었다. 그녀가 감추는 게 무엇이기에 이렇게 유치하고(?) 말도 안 되는 조건으로 상대를 수용하는지 모르겠다는 마음이었다. 알고 나니 그녀 나름의 생존 방식이었고, 상대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기억 상실이 그녀에게 끼칠 위험을 막기 위함이었다. 장난처럼, 다른 친구를 구하려고 히노에게 연애 제안을 한 도루에게도 이 연애가 순수한 시작은 아니었다. 학교폭력을 당하는 친구를 구하려고 나선 게 히노에게 연애를 하자고 말하는 거였다. 히노는 당황했겠지만, 바로 이 상황을 설명하면 되니까 일단 부딪혔다. 그런데 의외의 결과가 두 사람 앞에 놓인 거다. 히노는 도루의 연애 제안을 받아들였고, 도루는 장난과 임무였다는 처음 의도를 바로 털어놓지 못했다. 이 연애 어디로 갈까?


이렇게 시작한 연애였으니 두 사람의 연애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하겠지. 거짓(?)으로 시작된 연애가 온전한 적이 없었으니 이 위태로움도 곧 터지고야 말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 아이들은 이미 한참 나이를 먹은 내가 불신으로 사랑을 바라보는 걸 지적하는 것처럼, 너무 천진난만하고 순수하게 오늘을 사랑했다. 방과 후 만나고, 이야기하고, 서로를 더 알기 위해 애썼다. 함께 벚꽃을 보고 같이 도서관에 가고 놀이공원을 걸었다. 뜨거운 여름날에 자전거를 탔다. 히노는 도루에 관한 걸 알아낼 때마다 기록했고, 도루는 히노의 웃음에 자꾸만 빠져들었다. 이제 이들의 연애 조건은 변경되어야 했다. 진짜 좋아해 버렸으니, 어떻게 해야 할까. 조금씩 더 알게 되는 서로의 진짜 이야기들은 이 연애에 자양분이 된다. 상대를 더 깊게 알아간다는 건 연애의 기쁨이다. 사랑이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각자의 불행과 상처에 자리한 것이 영역을 넓혀가기 전에, 행복하고 좋은 일을 더 많이 만들고 싶어졌다. 내일이면 지워질 오늘이 아니라, 내일 더 잘 지내고 싶은 오늘을 살아가고 싶어졌다. 이거 아닌가? 간절하게 기다릴 내일이 있고, 그런 내일을 위해 오늘 더 충실하고 값지게 살아가는 일. 사랑의 의미는 그렇게 또 쌓여간다. 이런 사랑이 틀릴 리가 없다.


새롭고 즐거운 일상을 시작하자. 그게 바로 희망일 것이다.

안 그래, 히노?

계획이 있던 나는 평소라면 짓지 않을 표정으로 씩 웃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마음이 풍족해지는 일이라고 말하듯이. (128~129페이지)


누군가를 좋아하고 마음에 담아두는 일을 본다는 건 그 자체로 설렌다. 게다가 이 아이들은 고등학생이다. 막연하게 누굴 좋아한다고 보이는 게 아니라, 그 상태의 감정이 어떻게 스며들고 흘러가는지 보여주는 소설이다. 히노는 히노대로 그녀가 기억을 잃고 복원하는 일을 반복함으로써 불안했던 것이 도루와의 연애가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호기심에 시작했다. 도루 역시 아버지와 둘이 사는 가정환경에, 학생이자 살림꾼으로 지내는 날들의 빈틈을 히노와의 시간으로 채웠다. 엉뚱하게 시작된 만남이지만, 이 아이들은 그 연애를 완전하게 이끌고 있었다. 그건 진심이 아니면 이루어지지 못할 일이다. 시작이야 어땠든지, 함께하는 시간에 마음을 다한다는 건 사랑이 아니면 보여주지 못한다. 누가 뭐래도 지금 이 아이들이 하는 건, 사랑이다.


이 소설이 단순히 히노와 도루의 사랑만으로 채워졌다면 이 복잡한 감정을 쉽게 설명하지는 못할 듯하다. 두 사람 곁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했을 때 이 시간은 더 완벽해졌다. 히노의 기억 장애를 잘 아는 친구 와타야 이즈미는 도루의 접근에 히노를 걱정하면서도 두 사람의 진심을 알았을 때는 누구보다 응원했다. 어떻게 해야 이 두 사람이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지 지켜보고 도움을 주었다. 도루의 아버지는 아들의 연애를 응원했다. 그리고 지금은 따로 지내지만, 누구보다 도루의 삶을 염려하는 누나 역시 이 관계의 든든한 조력자다. 각자의 인생도 챙겨야 했기에 모든 시간을 같이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인생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히노와 도루에게는 든든한 힘이 된다. 성장한다는 것, 꿈을 찾아가는 게 무엇인지 보여주고 증명한 이들이었으니까.


나는 두 사람이 조심스럽게 서로에게 다가가면서 보여주는 연애의 풋풋함에 설렜는데, 거기에 이 소설이 보여주는 성장의 힘에 더 눈길이 갔다. 하루하루의 기록에 몰입하고 내일 기억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하는 히노에게 미래는 없어 보였다. 당연하다. 내일이면 기억에 없을 오늘을 사는 것도 벅찬 일인데, 감히 오늘보다 먼 시간을 계획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그런 히노에게 도루는 제안한다. 히노가 잘하고 좋아하는 그림을 계속 그리기를. 어차피 내일이면 오늘 그린 것도 모를 텐데 뭐하러 시간 낭비를 하는가 싶겠지만, 인간의 기억이란 상실되면서도 몸이 기억하는 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히노가 하루하루 쌓아갔던, 그리는 시간이 나중에 어떤 기적을 일으키는지 알게 되었을 때.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눈물이 날 뻔했다. 누군가 나의 불가능을, 좌절을, 불행을 걱정하고 나아지게 하고 있다는 걸 알면 얼마나 힘이 될까 싶었다. 나 혼자 일어서지 못하고 자꾸 그 자리에 서성거리면서, 불안을 느끼는 것보다 안주하는 것을 택할 때, 의견을 내주고 같이 고민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거. 정말 행복하지 않아?


숫자가 딱 떨어지는 계산이 아니라, 오직 서로를 봐주는 이런 이야기가 오랜만에 가슴을 설레게 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나아가게 하고, 마음껏 내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 관계가 있다는 게 행복할 것 같다. 매일 내 머릿속 기억이 지워져서 슬퍼도, 가슴이 아는 일이 되어버렸다. 내가 기억하지 못해도 같이 사랑을 했던 한 사람이 기억하면 되는 일. 우리는 같이 사랑했고, 같은 시간을 통과했으며,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으니, 그거면 됐다. 정말 소중하고 간절한 것이 새겨진 기분이다. 이쯤 되면 소설의 결말도 궁금할 테다. 이런 사랑이 어떤 결말을 맞이했을지 확인해야 했다. 마지막의 반전을 확인하고 나면 또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글쎄, 이게 해피엔딩일까 새드엔딩일까. 사랑하는 시간은 행복했으며, 하루하루 쌓여가는 모든 시간에 그들은 성장했으니, 머리가 기억하는 것보다 가슴에 남아버린 것을 소중히 아는 이가 되었는데 말이다.


어떤 슬픔도 사람은 언젠가 잊어버린다. 상처는 언제까지고 아픈 것은 아니다. (362페이지)


모두 언젠가는 잃을 것들이다. 없어질 것들이다.

그래도…… 온갖 것이 변해간다 해도. 인생을 삶으로써 과거가, 아름다운 것이 흐릿해진다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분명히 있다.

마음이 그리는 세계는 언제까지고 빛바래지 않는다. (374페이지)


담백하고 페이지가 잘 넘어간다. 묘사되는 풍경이 너무 예뻐서 봄날의 푸릇한 장면을 상상하며 읽기도 했다. 얼핏 어떤 장면에서는 두근거리기도 한다.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하며, 같이 고민하는 순간들을 경험했다. 어쩌면 우리가 이미 오래전에 지나왔을 순간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별일 없는 오늘에 안도하며 기대 없는 내일을 다시 바라보기도 하는. 도루의 다정함에 사랑을 다시 보고 싶고, 히노의 노력에 인생의 달리기를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다. 잔잔했지만 그 어느 날보다 뜨거웠던 오늘, 어느 여름밤을 식히는 이야기로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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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7-30 0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하루만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런 사람 처음 본 건 아니지만... 다른 데서도 하루만 기억하는 사람 봤어요 그런데도 아주 다 잊은 건 아니기도 하더군요 혼자가 아니고 곁에 누군가 있어서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야기가 그렇게 좋게만 흘러가지 않는 듯하네요 그것보다 두 사람이 그리고 둘레 사람과 지내는 이야기를 보는 게 더 낫겠습니다


희선

구단씨 2021-08-03 00:50   좋아요 1 | URL
예전에 봤던 영화 메멘토가 생각나기도 하네요.
이런 상황에서 혼자였다면 견딜 수 없는 날들 아닐까요?
이 소설 읽고 그런 생각했어요. 님 말씀처럼, 곁에 있는 누군가가 이 불행도, 위기도 잘 건너갈 수 있도록 돕고 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