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 모시기>라는 프로그램이 있더라. (개인적으로 정말 마음에 드는 프로그램은 아니다만...) 아들을 둔 어머니들이 나와서 같이 출연한 여성 중에 며느리 삼고 싶은 사람에게 호감을 보인다. 물론 젊은 여성들도 같이 상대를 관찰한다. 말, 행동, 분위기로 어머니들을 파악한다. 같이 지내면서 어떤 어머니가 시어머니로 괜찮을지 보는 거다. 물론 이건 예능 프로그램이다. 출연자들의 평소 있는 그대로의 성격이 보일 수도 있고, 조금 더 오버해서 나타내는 제스처나 말투가 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처음부터 정해진 역할 분담이 있었다. 처음부터 본 건 아니고 지나가다 눈에 들어와서 30분 정도 보고 있는데, 어머니들이 계속 눈에 거슬리더라. 아무래도 내가 아직은 시어머니가 될 나이가 아니어서 그런 건지, 자주 엄마한테 시어머니 노릇 하지 말라고 잔소리를 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누구에게나 자기 자식이 예쁘지 않으랴. 최고가 아닐 수가 있나. 그런데 그 어머니들 한 가지 간과하는 게 있더라. 오로지 자기 위주다. 자기 아들만 최고다. 자기 사업을 물려받는 게 무슨 문제가 되냐고 반문한다. 자기 아들과 결혼할 사람은 며느리인데, 며느리를 한 인간으로 인정하거나 자기와 평등하게 살아간 사람임을 생각조차 안 하는 듯하다. (시어머니들의 입장에서 봐도 마찬가지일 거다. 내 아들 소중한데 며느리 될 사람(가상이지만)의 성품을 보고 싶은 건 당연한 거 아니겠나) 그 프로그램에서 젊은 여성들은 탈락시킬 시어머니를 고른다. 누가 탈락했는지는 모르겠다. 나도 거기까지만 보고 말았으니까. 그런데 젊은 여성들이 탈락시킬 시어머니를 고르는 의논을 하는데, 잠깐씩 언급되는 시어머니 한 명이 있었다. 그 프로그램을 30분 정도 보면서 엄마와 계속 얘기했다. 0번 시어머니가 떨어지겠군. (뭐, 아닐 수도 있지만...) 그 시어머니의 탈락이 유력해 보였다.
그러다가 곰곰 생각해보니, 그 시어머니가 탈락하든 말든, 누가 최종적으로 남아 있든 말든. 몇 시간 혹은 며칠, 그만큼의 시간만 본 사람에게 생기는 호감과 비호감이 무서워졌다. 그러면서 그런 게, 그 짧은 시간에 내가 보는 상대의 면면들이 상대와의 관계를 유지하거나 끊어내는 이유와 근거가 된다는 생각을 했다. 오랜 시간 함께해도 이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면 멀어지게 되는 거고, 불과 1시간 전에 만난 사람도 ‘이 사람은 이런 면이 좋구나.’ 싶은 순간 앞으로 이어갈 관계를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인연을 맺고 끊고 하는 게,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작고, 더 사소한 이유에서 시작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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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유지하는 건 사소하지만 어떤 한 가지 때문일 것이다. 당신을 내 옆에 두거나 당신을 내 옆에서 밀어내게 하는 사소한 한 가지. 마스다 미리는 자신의 만화에서 '음식점에서 무조건 종업원에게 반말하는' 애인을 보며 이 남자랑 계속하는 게 옳은가를 고민하는 여자를 보여주는데, 황정은은 멀쩡한 남자가 쓴 요강을 아내가 비워주는 것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 이 남자에 대해 고민하는 나나를 보여준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면, 아무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가려고 해도 자꾸 그게 눈에 걸린다면, 돌아서야 하지 않을까. 내가 눈 딱 감고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나나는, 요강에 대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모세를 받아들일 수 없다. 나도 그런 모세를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그런' 모세를 결국 받아들이지 않는 나나를 응원한다. (잘 지내나요 238~239페이지)
그렇다. 어떤 관계였든,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게 되는 건 정말이지 사소한 한 가지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만나고 헤어지는 이유가 여러 가지라면, 그 사소한 한 가지가 큰 이유가 될 수도 있다. 사람이 만나면서 쌓인 시간 때문에 마음을 전하는 깊이가 생기기 마련인데, 사실 어느 정도 알 것 같은 분위기라는 게 있다. 이 정도 봤으면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나와 맞는지 아닌지 정도는 그리 오랜 시간을 함께하지 않아도 결정이 나는 경우가 많다. '음식점에서 종업원에게 반말하는' 애인의 말투를 확인하는데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거다.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는 일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도 가능한 일이니까. 황정은의 소설에서, 요강을 아내가 비워주는 게 당연하다는 남자의 태도를 고민하는 나나도 마음이 바로 정해지지 않았을까. 돌아서야 하는 이유는, 남자의 아내가 요강을 비우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던 그 순간 확실해진 거다. 나에게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남자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한 목소리를 듣는 느낌이었으니까.
다른 사람과 같이 있는데도, 같은 상황을 마주하고 있는데도 다른 생각을 한다. 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내가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사람들이라면 암담하다. 특히 가족이라면 더더욱. 서로를 보는 눈에 신뢰는 사라지고 거부감이 생긴다. 어떻게 하면 이 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할까 싶어서,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내 의견대로 끌고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는 상대가 가족이 되는 순간 매우 아프다. 안 그랬으면 좋겠다는, 그런 상황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계속 생길 거다. 왜 하나의 마음이 되지 못할까, 하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지만 그럴수록 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가족 사이에 생겨난 그 감정의 골은 남과 생긴 골과 다른 깊이로 새겨진다. 그만큼 상처가 커지는 거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치료가 되면 좋으련만, 내 경험상 그런 시간은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가지는 않더라. 상당히 오랜 시간, 이 관계의 골이 얕아지기를 바라면서 보낼 것 같다.
공감이라는 게, 이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거듭 확인하는 요즘이었는데, 이 책 속의 이 문장에서 한참 시선이 멈췄다. 다양한 주인공, 다양한 주제로 많은 이야기가 책으로 나오지만, 현실과 완전히 일치하는 순간은 아니다. 그래서 답을 얻고 싶어서 그 책을 펼치기도 하고, 답이 없는 걸 알기에 그저 공감이라도 하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읽기도 한다. 어느 쪽으로든, 그 순간에는 그 책이 필요하다는 것처럼... 로맨스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대개 그런 소설이 해피엔딩으로 훈훈하게 마무리되는 것처럼 현실 속 많은 문제가 해결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지 못해서 현실인가 싶으면서도, 마냥 바라는 마음을 버리지는 못하겠다. 잘되겠지, 잘되어야지, 그래서 마음이 좀 편안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들을 놓지 못하겠다고.
사실은, 이 책을 웃고 싶어서 펼쳐 들었다. 책이 새끼를 치는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저자의 전작에서 받았던 어떤 느낌 때문에 이번 책에서도 그때 내가 느꼈던 유쾌함을 기대했다. 웃기면 그냥 웃으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책과 더불어 일상이 유쾌함과 재미로 가득했던 전작을 기억해서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 글의 깊이가 또 가벼운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 책은 전작과 같은 발랄함에 무거움이 더해졌다. 마냥 웃기만 할 수는 없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수록된 도서 목록 때문에 그 분위기가 어느 정도 연상되기도 하면서, 저자의 독서가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한눈에 보인다. 그 안에서도 여전히 놓지 않는 위로와 사랑들, 울고 싶으면 울어도 되는 편안함과 아픈 순간들에도 찾아올 행복을 기대하게 한다. 이런 마음이 저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게, 괜히 내 편 한 명 더 생긴 것만 같다. 책 속 한 문장에서 파생한 일상의 기억들과 생각들이 이렇게 풀어져 나올 수 있어서 좋다.
처음에 인용했던 문장에서 느꼈듯이, 유독 그 '관계'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던 글이다. 어떤 책이 등장하는지는 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을 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사는 우리가 겪는 여러 가지 태도와 감정에 시선이 간다. 고백하지 못한 순간을 후회하는 데서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오랜 짝사랑. 나는 고백했는데 차이니까 감당이 안 되던데... ^^ 그런데 막상 고백하지 않고서는 안 될 마음이었기에 후회는 없다. 다만, 거절로 돌아온 답에서는 잠깐 주눅이 들었었지. 그렇게 짝사랑은 끝났지만 후련했다. 아닌 건 아닌 것으로 마침표를 찍고 나니, 감당할 수 없던 마음은 개운해지고, 더는 내 것이 아닌 상대에 미련조차 두지 않을 마음을 얻었으니 말이다.
소설 속 주인공에게 이입되어 같이 울고 웃는 일. 그건 소설을 읽어본 사람만이 아는 감정이다. 소설 속 이야기에 공감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저자는 그런 느낌을 너무 잘 아는 사람 같다.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이지만...) 클레어(『가든 스펠스』)가 얼마나 힘들지 느끼면서 같이 화내고 슬퍼한다. 이런 감정, 이런 표현. 공감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말들. 그 말을 참 편하게 한다. 바로 옆에서 조잘조잘 말하는 것처럼 들리잖아. 마치 수다를 떠는 것처럼, '맞아 맞아' 하면서 옆자리 사람의 팔을 툭툭 치며 말하는 것처럼, '이건 좀 그렇지 않아?'라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챌 사이인 것처럼... 그러니 이 상황을 두고 마음껏 욕하고, 화내고, 울고, 웃어도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은 안도감이 생긴다. 나, 좀 이래도 괜찮지? 하면서, 동의를 구하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일이라도 되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건네는 말 한마디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졌는지 다 아는 것처럼.
최근에는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저자가 고르고 읽은 책으로 알 수 있다. 세상이 전하는 뉴스에서도 그렇지만, 우리는 안다. 그동안 말로 꺼내지 못한 위기가 얼마나 많았는지, 드러내지 못한 당당함이 얼마나 많이 숨어있었는지를. 여전히 그 생각과 표현이 충분하지 못하고, 용기 내지 못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항상 드러내야 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오래전 기억까지 꺼내면서 여성이기에 받은 차별과 성추행을 언급하며, 여성이기에 겪는 많은 문제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같이 풀어가야 할 문제임을 시사한다. 저자가 읽은 책 중에서 내가 읽다가 만 책도 있던데, 그러다 기억에서 잊힌 제목인데, 생각난 김에 완독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한 권의 책으로 세상이, 사회가, 여성의 인권이 얼마나 바뀌겠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 한 권의 책으로 인식의 변화가 하나씩 쌓인다면 변화의 길은 멀지 않은 거, 아니겠나?
사람은 누군가에게 닿기 위해 일상을 버텨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해럴드가 퀴니에게 닿기 위해 그녀가 살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걷듯이, 우리는 언젠가 돌아올지도 모르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누군가를 향해 걷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 모든 행위가 삶의 연속성을 유지하도록 해주는 게 아닐까. 해럴드가 올 거라는 믿음으로 퀴니가 기다리듯이, 퀴니에게 가기 위해 걷고 있는 해럴드를 모린이 기다리고. (잘 지내나요 191페이지)
지금 내가 기다리는 사람은 없지만, 기다림의 의미는 안다. 그건 그 사람을 그만큼 아끼고 또 아낀다는 말과 같다. 그 '아낌'의 단어를 꺼낼 수 있는 관계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대와 나 사이에 쌓이는 것들 때문에 만들어지는, 어쩌면 기적 같은 일이다. 그래서 우리 사는 모든 순간에 진심으로 대해야 한다는 무게를 느낀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가족이든 누구든. 서로에게 무엇으로든, 그렇게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래서 매번 책 속의 문장에서, 어느 소설 속의 주인공에게서, 이해하기 어려운 설정이 배경이 되더라도 읽게 되는 경우가 많다. 지금 내가 겪어가는 여러 관계, 이해와 해결, 공감을 위해서라면 앞으로도 읽기를 멈추고 싶지는 않다. 여전히 게으른 독자이지만, 특히 요즘에는 책을 거의 안 읽고 지내는 시간이 많지만, 이렇게 책 속의 문장 하나 때문에 되찾아오는 감정이 있다면, 더디더라도 책을 계속 읽고 지내고 싶은 마음을 놓고 싶지 않다.
점점 말이 줄고, 그러다 보니 표현하는 방법도 잘 모르겠고,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나도 모르게 검열하는 순간이 많아졌다. 그런데도 가슴속 하고 싶은 말이 줄지는 않는다. 목소리로 얘기할 수 없다면, 이렇게 말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을, 저자 때문에 많이 했다. 글에서, 단어에서 문장에서 누군가를 읽는 일이 생각보다 괜찮더라. 조심스럽게, 누군가에게 안부를 묻고 싶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