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잘 모르시죠?...... 노무현입니다.

 

 

엄마가 손수건을 들고 가야 한다고 그랬는데,

정말 그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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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2017-05-26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손수건 준비하고 봤어요. 가슴이 먹먹해요.

구단씨 2017-05-29 15:53   좋아요 1 | URL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첫 장면에서부터 울컥하더라고요... ㅠㅠ
 

 

김훈의 남한산성 특별판이 나왔더라.

 

 

 

 

 

 

 

가격도 상당하지만, 그 안에 담긴 그림이 더 궁금하다.

사실 김훈 작품을 완독한 건 몇 편 안 된다.

가장 최근에 읽은 <공터에서>도 어렵기만 하더라고.

그래서 이번 특별판이 나왔다는 소식에도 출간 소식만 접했지

구매해야겠다는 생각까지는 안 했는데... (나는 아직 남한산성도 읽지 않은 독자다.)

이번 기회에 예쁜 책으로 <남한산성>을 읽어볼까 심각하게 고민 중...

 

 

황석영의 신간 소식도 들린다.

황석영 역시 나에게는 쉽게 읽히는 작가는 아니다만,

신간이 나오면 왠지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는 해...

 

 

 

 

 

 

 

 

 

 

 

 

읽어보겠다고 다짐만 하다가 매번 기회를 놓쳐버린 <시녀이야기>

방영 전에 다시 읽어보겠다고 또 한 번 다짐하는데 눈에 들어온 특별판이다.

아, 역시 타이밍도 잘 맞춰 나오는구나.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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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장미 2017-06-01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녀이야기....너무 궁금해졌어요.ㅎ
구단님도 아직 안보셨다니...물어보질 못하겠네요.
특별판은 늘 이쁨이 넘치는군요. 쳇.

구단씨 2017-06-02 09:03   좋아요 0 | URL
결국은 샀어요.
이제 읽는 일만 남았네요. ^^
글고 책도 예뻐요~

2017-06-07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좋아하시고 역사좋아하시면 남한산성은 부담없이 읽을수있어요 저는 몇번 읽을때마다 넘슬퍼서 눈물이 줄줄 났습니다
 
죽은 올빼미 농장 (특별판) 작가정신 소설향 19
백민석 지음 / 작가정신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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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잘못 배달된 편지로 시작된 소설은 미스터리한 분위기였다. 배달된 주소는 맞으나, 수신인은 달랐다. 화자인 ‘나’는 그 편지 속 장소에 찾아가기로 한다.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나 배달된 편지를 읽고 그 편지의 발송지를 찾아가지 않는다는 게 이상할 정도로 끌림이 있었다. 어디서, 왜, 누가 보낸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을 테지. 이 소설을 읽는 나도 그랬다. 그 시작을 찾아보지 않고서는 답답함이 계속될 것 같았다. ‘나’는 ‘인형’과 함께 편지 속 동생이 ‘죽은 올빼미 농장’이라고 이름 붙인 곳으로 간다. 하지만 그곳에 가서 더 혼란스러울 뿐이다. 주소가 맞는지도 알 수 없고, 그 장소가 맞는다고 알려준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소설은 ‘나’가 잘못 배달된 편지를 근거로 그 주소를 찾아가고, 그곳에 무엇이 있었을까 고민하는 시간에 현재 그의 모습을 같이 보여준다. ‘나’는 작사가다. 계약된 글을 써야 하고, 가끔 친구인 ‘민’을 만나 이야기를 하고 밤을 함께 보낸다. 동료로 보이는 작곡가 ‘손자’의 투정도 받아줘야 했고, 사무실에 나가 일정관리도 해야 했다. 꽉 막힌 듯한 일상을 보내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소설 속 문장으로 표현되는 그의 분위기를 상상하면 그것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그에게는 너무 자연스럽다. 답답할 정도로 보이는 좁은 그의 행동반경,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모르게 대화를 주고받는 ‘인형’, 여고생 신인가수의 집에 초대받고서도, 그 아이의 불법적인 행동을 보고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약한 어른의 모습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추측하게 된다. 자기 자신의 너머를 잘 보지 않는, 볼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 같다. 좁은 아파트 한 채가 그의 세상 전부로 보일 정도다.

 

지금 자기가 사는 곳, 그곳을 벗어난 장소와 사람에 대해 굳이 들여다볼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 어디로든 돌아갈 곳이 없고, 우리가 고향이라 부르며 회귀의 본능을 일으키는 곳도 없을 것 같은 그다. 그러면서도 항상 느끼는 공허감의 근원을 둘러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아니, 그 근원을 찾고 싶으나 찾을 수 없던 거였을까? 알 수 없다. 그 자신도 모르게 부유하듯 자기가 있는 현재의 자리에서 사는 방법만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살면서 느끼는 어느 순간의 기쁨도 있을 테지만, 그렇게 살면서 찾아드는 감정의 고통이 더 클 것 같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이 그런 느낌이다. 작곡하는 ‘손자’는 동성 애인을 따라 현재의 삶을 정한다. ‘인형’은 현재를 잘 지내지 못하는 인물에게 적나라한 조언을 하면서 현재의 책임을 회피하며 정리할 방법을 부추긴다.

 

아무리 생각해도 돌아가는 방법을, 현재의 불완전함을 변화시킬 방법을 알 수 없다, 는 생각이 들게 하는 소설이다. 끝까지 모를까? 아니면, 언젠가는 알게 될까. 소설은 내내 그 불안함을 놓지 않게 한다. 처음부터 나오는, 그는 잊은 자장가를 자꾸 기억해내려 애쓰면서도 잘 떠오르지 않는데, 읽는 동안 그게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가 그 자장가를 끝까지 기억해내지 못한다면, 그의 남은 오늘과 내일은 어떻게 흘러갈까. 그러다가 소설이 진행되면서 잊힌 자장가는 그 소절을 늘려간다. 한 줄씩, 한 단락씩. 그가 편지의 주소지로 찾아가 무언가를 더 찾으려 하면서 결국 들샘을 파내기까지 했을 때, ‘손자’가 발에 줄을 묶고 베란다를 향해 달렸을 때, 자장가의 남은 부분을 적어냈으면서도 그게 끝인지 알 수 없었을 때까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소설은 분위기를 바꾼다. ‘민’이 재개발로 허물어져 가는 아파트의 빈 곳을 보며 죽어가는 아파트라고 말할 때는 매번 어느 시간을 반복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태어나고 이별(죽음)하고, 다시 태어나고 이별하고. 낡은 아파트가 철거되고 새 아파트가 올라가듯, 우리는 계속 나아가듯 성장하지 못한 채로 나이라는 시간만 먹어가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다가 들샘의 바닥을 파헤쳐 어깨너머의 인형 목소리를 던져 넣었을 때 어쩌면 돌아갈 방법을 찾은 건 아니었을까 하는 희망을 엿본다. 현실의 팍팍함도, 나아가지 못하는 마음의 유아성도 사라지게 할 어떤 시작점의 순간을 볼 기회가 이제는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고 맘에 따라선 변형도 시킬 수 있는 실체인 이 빈 땅은, 정작 무엇도 가르쳐주고 있지 않았다. 먼 길을 온 내게 정작 가르쳐주고 있는 건,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다라는 사실뿐이었다. 지금 보고 있는 것 외의 다른 것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사실뿐이었다. 빈 땅 외의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177페이지)

 

시간은 흘렀으나, 외모는 변했으나(늙었으나), 마음은 성장하지 못한 어른들의 소외감을 느꼈다. 아껴주지 못하고 진정으로 보듬어주지 못하는 자세를 가진 우리의 모습만 확인한 것 같다. 많은 것을 보고 살면서 모든 순간 잘 건너갈 방법을 배우는 것 같지만, 정작 우리 안에 자리한 서늘함과 위태로움을 모른 채로 세상을 산다고 착각하며 지내온 건 건 아닐까 하고. 살아가는 시간만큼 어디론가 가는 듯한 인생이지만, 정작 그 자리에서 매번 반복하기만 하는 걸음은 아니었을까 하는 순간들을 떠올린다. 그때마다 찾아오는 상실감을 우리 안에서 나갈 줄 모르고 쌓여가면서 그 크기를 키워갔을 거라고. 그렇게 절망하면서 읽어 가는데 조금씩 찾아오는 듯한 어떤 느낌. 그가 자장가의 구절을 하나씩 떠올릴 때마다 높아지는 기대는 인형을 들샘에 수장했을 때 정점을 찍는다. 퇴화하지 않고 진화하는 내면을 마주할 우리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게 한다. 현실에 적응할 수 있는, 결핍의 양을 줄여가는 내면의 성장을 불러올 것을... 여전히 미성숙하고 현실의 많은 부분에 힘들게 적응하는 모습이 남아있을 테지만, 현재를 사는 법을 보여준 것 같다. 농장이 있던 빈터, 사라진 들샘. 현재의 그곳 모습이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빈 땅에 채울 수 있는 것도, 그릴 수 있는 것도, 많다.

 

작가정신에서 ‘소설향 시리즈’ 특별판으로 내놓았다. 이번에 출간된 다섯 권 모두 궁금했지만, 백민석의 <죽은 올빼미 농장>과 정영문의 <하품>이 가장 궁금했다. 어쩌다 <죽은 올빼미 농장>을 먼저 읽게 되었는데, 시리즈를 한 권씩 다 만나고 싶어진다. 짧고 매력적인 소설들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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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폭에 담긴 붉은 그리움
지연희 지음 / 봄출판사(봄미디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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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 TV 뉴스만 보고 다른 것을 거의 안 봐서 몰랐는데, 주말에 배우 박민영이 나와서 하는 말을 듣고 새로운 드라마가 시작하는 걸 알았다. 제목이 <7일의 왕비>라고 하던데... 7일? 왕비? 게다가 사극? 감이 오더라. 어떤 소재로 만든 드라마인지 느낌이 왔다. 그러면서 머릿속에 자꾸 물음표가 떠다니는데, 나, 이런 소설 얼마 전에 읽은 것 같은데? 뭐였지? 소설 제목을 한참 떠올리면서 드디어 찾아냈다. 지연희의 『치마폭에 담긴 붉은 그리움』이었다. 로맨스소설 좋아하는데도 시대물은 취향에 안 맞아서 잘 못 읽고 있다가, 이 소설 읽고 나서 종종 이런 시대물도 즐길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이와 같은 소재로 드라마가 나온다니 더 궁금해져서 소설을 다시 찾아봤다. (얼핏 살펴보니 드라마는 소설과, 혹은 역사적 사실과 많이 다르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들긴 하다만...)

 

임금의 동생으로 대군이라 불리는 역은 유유자적 한가하게 보일 정도로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었다. 권력 싸움에 관심도 없었다. 왕이 되고자 하는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그저 자기가 품은 첫정을 나눈 아내와 백년해로하는 게 유일한 바람인 남자다.

역의 아내 여의는 천방지축이라 불릴 정도로 밝은 성정이다. 아무리 봐도 지고지순한 현모양처의 이미지는 아니다. 바깥바람이 그립고 여기 저기 둘러보면서 살고 싶으면서도, 지아비의 사랑만으로도 하루하루가 행복한 여인이다. 부부인이라 불리는 대군의 아내로서는 불합격일지 몰라도, 역의 아내로는 충분했다. 역의 마음에 들어온, 죽을 때까지 사랑하고 싶은 유일한 여인이었으니까.

 

소설은 처음부터 부부였던 두 사람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역과 여의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사이다. '아니, 그 시대에 얼굴 한 번 안 보고 혼인하였을 터인데, 이런 분위기가 가능한가?' 싶은 순간에, 역이 아는 어린 여의의 모습이 이야기가 흐르는 중간에 한 번씩 드러난다. 궁 안의 소년이 만났던 어린 소녀, 어차피 왕권과 상관없는 자리이니 이 소녀에게 건넨 손을 붙잡는 것도 괜찮겠지. 그렇게 소년과 소녀는 혼인을 하고 부부가 된다. 물론 여기서 여의는 역의 그런 마음과 과거를 모른다. 그냥 현재의 자기 남편을 아끼고 사랑할 뿐이다. 소박한 일상을 즐기는 여느 부부를 보는 듯했다. 시대가 다를 뿐이지, 오늘날 우리가 바라는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잖아. 여염집 아낙의 평범하고 행복한 하루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역은 여의에게 교과서적인 아내상은 바라지 않는다. 완전하게는 아니겠지만 여의가 숨통 열어놓고 활발하게 지내길 바랐다. 그런 둘의 모습이 그동안 그 시대의 여인들에게 강요되었던 분위기가 아니어서 소설이기에 가능한 캐릭터겠지 싶으면서도 나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만들어가는 사랑이 보고 싶었던 거지, 여의의 행동이나 생각을 문제 삼을 이유는 없으니까. 마치 처음부터 마치 그들 사이의 어떤 방해도 없을 것이라고, 그러니 그들의 집 담 밖의 일들 따위 아무렇지도 않다고, 관심도 없는 일에 시선을 둘 여력이 없다고, 오직 둘만 바라보면서 살이게도 아까운 시간이었던 거다. 어린 소년과 소녀가 우연처럼 만났던 그 잠시의 순간, 손바닥 위의 꽃잎이 날릴 때 바랐던 소원이 이루어져 행복한 남자가 계속 웃을 수 있기를, 읽는 내내 나도 바라게 된다.

 

이런 부부가 있을까? 그 어떤 것도 가로막을 수 없고, 오직 자기 배우자만이 유일한 존재이며, 그 무엇으로도 둘 사이의 신뢰를 무너뜨릴 수 없다고 믿는 사이. 마음속 간절한 바람과는 다른 선택을 해야만 하는 일들이 살면서 얼마나 많이 다가올 텐가. 그런 것도 아무런 의미 없다고,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으니 오직 당신만이 내 옆에 있으면 된다고 여기는 삶. 아름다웠다. 역과 여의의 모습은 어느 부부에게나 이상향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연회에 참석해도 화려함을 자랑하는 기녀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마음만 먹으면 두는 여러 명의 첩도 역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 오직 여의뿐이다. 할 말 다하면서도 수줍어하고, 마음속 바라는 것을 이야기하면서도 위험한 줄 몰라 가슴을 철렁하게 하지만,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인을 어찌 눈에 담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평생 당신만을 보며 살겠다고 다짐하는 역의 시선이 너무 당연해 보여서 이상할 게 없을 정도였다. 자칫 권력에 욕심낼 것도 같은 위치였으나, 그에게는 여의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다는 게 그대로 보였으니, 이런 멋진 남자의 사랑이 끝까지 멈추지 않기를 바라면서 읽게 되는데...

 

그들의 사랑은 마냥 행복해 보여서 좋았는데, 어떤 악역도 보이지 않아서 힐링 드라마 같았는데, 잔잔한 물결이 이는 것처럼 흐르는 이야기로 보여서 안심했는데, 이상하게 불안했다. 뭔가 폭풍 전야의 고요처럼 느껴졌다. 이대로 흐르면 그냥 해피엔딩의 행복한 결말일 텐데, 뭔가 자꾸 숨어있는 채로 자기 역할을 소화할 때를 기다리는 게 아닌가 싶어 가슴이 두근거렸던 거다. 페이지를 넘기면서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들에게 혹시 무슨 일이 닥치지 않을까, 어디선가 복병처럼 튀어나온 일이 이들의 사랑을 훼방 놓을까 싶어서 긴장하면서 읽게 된다.

 

읽는 내내, 그렇게 이상했던 부분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아, 이들의 사랑은 끝난 건가? 하는 슬픔이 밀려온다. 본인들은 아니라고 해도 기어코 그사이에 비집고 들어오는 것들이 있다. 믿음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믿음이 사라지게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 때문에 결국 밀어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해야만 하는 상황. 알 것 같다. 시대가, 신분이, 자리가 그렇게 만든다. 백성들은 불안했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은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폐위된 어머니의 복수라도 하듯 피바람이 멈출 날이 없었다. 이대로 두고 볼 수 없던 사람들이 나라의 안위를 위해 반정을 꿈꿨다. 위기에서 나라와 백성을 구해줄 현명한 왕을 바란다고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들이 잡을 정권에 세워둘, 반정의 명분을 합당하게 해줄 왕이 필요했던 거다. 역은 그 역할에 안성맞춤처럼 존재했다. 역이 원하지 않아도, 권력의 욕심이 없어도 그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들과 의견을 같이하던지, 반정을 알았으니 죽음을 택하던지. 사실 역에게는 그 무엇도 의미 없다. 그들의 말에 따라도, 따르지 않더라도, 오직 여의의 존재만이 그를 있게 하는 것이므로. 여의만 옆에 함께 한다면 그 어떤 자리라도 개의치 않으리. 그가 선택하는 기준은 오직 여의와 함께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역과 여의는 어떻게 되었을까. 둘이 함께 나란히 손잡고 궁으로 들어가 정권의 우두머리가 되었을까? 아니면 그들과 뜻을 함께하지 않겠다며 죽음을 택했을까?

 

계속 슬픈 생각을 하던 차에 읽었기 때문인지, 마냥 고요하게 흐르던 이야기 속에서 내내 슬픔을 느꼈다. 계속 긴장하며 읽었다. 어디선가 기다렸다가 튀어나올 슬픔의 한 조각이 그림 전체를 채울 것 같아서 불안했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선택을 한 두 사람이다. 그 선택의 결과가 서글펐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 순간의 마음이 읽힌다. 현실에서도 그러할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런 선택의 강요가 존재할 터였다. 그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모두가 아프기 마련이다. 누구라도 덜 슬프게, 덜 아프게 하는 선택을 해야 할 터였다.

 

연연불망이라 했다. 연(戀)연(緣)불망(不忘). 잊을 수 없는 그리움, 끝나지 않은 인연. 역과 여의의 사랑이 해피엔딩인지 새드엔딩인지, 읽는 순간에 따라 매번 다르게 다가올 것 같다. 그래서 여운이 더 짙어질 지도... 마지막에 뒤돌아서서 가던 여의의 발걸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역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내내 궁금해하고 있다.

“단언하건대, 제비꽃이 으뜸이었소. 모란도 난초도 곱기는 하나 제비꽃에 비할 수는 없었다오.”

 

실제 역사 속 인물인 중종과 단경왕후를 배경으로 가져왔다고 하지만, 많이 다른 듯하다. 연산군의 폭정을 반대하던 사람들이 진성대군을 왕으로 이끌면서 기록된 중종반정. 진성대군이 이끌고 원해서 이뤄낸 정권이 아니었기에, 정권을 바꾸겠다는 세력에 끌려온 그가 왕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을 것이다. 허수아비 임금이었을지도 모르지. 그런 그가 아내라고 지킬 수 있었을까? 7일 만에 쫓겨난 중전으로 기록된 단경왕후는 연산군의 정비였던 폐비 신씨의 조카였으니, 새로운 정권의 세력들은 단경왕후 역시 폐비가 되어야 한다고 외쳤겠지. 그걸 거부할 힘이 중종에게 있었을까. 그렇게 7일 만에 궁에서 나온 단경왕후는 인왕산 아래의 사직골 옛 거처에서 지냈다고 한다. (검색해서 찾아보니) 부인을 잊을 수 없던 중종은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 기슭을 바라보고 했는데, 이 말을 들은 단경왕후는 자기가 입던 붉은 치마를 경회루가 보이는 바위에 올려두었다고. 그 바위를 치마바위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마도 그에게 '나는 잘 지낸다...'는 말을 그렇게 표시한 거 아니었을까. 이 소설은 중종반정이 이뤄지기까지의 시간을 그렸는데, 내내 긴장되는 반정의 준비라기보다는 역과 여의 두 사람에 초점이 맞춰졌다. 소설 속에서 그는 한없는 사랑을 바라는 남자로 그려졌고, 그녀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실제 중종은 이미 잡은 왕권을 놓고 싶지 않았던 인물이라던데, 아내를 버리고 끝까지 돌아보지 않을 만큼 냉정한 사람이었다고 하던데 정말일까? 아마도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게 중종에게도 적용된 게 아니었을까, 하는 궁금증도 생기고... 그래서 소설 속 역의 모습이 더 애틋하고 아프게 보인다. 아내를 버리고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 냉정하고 권력 욕심을 부린 사람이 아니라, 한 여자를 향한 사랑밖에 몰랐던 나약하고 여린 사람으로 비춰져서 그가 왕위에 오르고 보낸 몇 십 년의 세월이 죽은 상태였을 거라고.

 

소설의 처음부분에서는 그저 어느 시대의 이야기이겠거니 했는데, 마지막을 향해갈수록 암시하는 내용에 어렵지 않게 그 시대를 연상할 수 있다. 중간에 등장하는 정암 역시 마찬가지여서, 그 시대의 이야기를 다시 찾아보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중종과 단경왕후의 최후만큼은 드라마나 소설의 모티브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계속 들더라. 반정으로 이룬 왕권, 7일 만에 폐위된 왕비, 전해지는 치마바위 이야기에 '7일'이라는 시간은 많은 이야기를 그려낼 수 있는 소재가 될 것 같다. 이번에 드라마 <7일의 왕비>도 그런 의미로 궁금하긴 하다. 애절하고, 아프고, 슬프고, 동시에 많은 이야기를 품은 채로 여러 갈래의 길을 열어주는 듯해서 말이다. 그런데 드라마 소개 부분을 잠깐 봤는데, 연산군과 중종과 채경(중종의 아내)을 거의 삼각관계 분위기인 것처럼 보이던데... 그게 맞나? 어차피 드라마이니, 소설을 읽는 것처럼 보면 그만일지도 모르지만, 기록된 역사에서 많이 벗어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소심한 바람이 있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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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 모시기>라는 프로그램이 있더라. (개인적으로 정말 마음에 드는 프로그램은 아니다만...) 아들을 둔 어머니들이 나와서 같이 출연한 여성 중에 며느리 삼고 싶은 사람에게 호감을 보인다. 물론 젊은 여성들도 같이 상대를 관찰한다. 말, 행동, 분위기로 어머니들을 파악한다. 같이 지내면서 어떤 어머니가 시어머니로 괜찮을지 보는 거다. 물론 이건 예능 프로그램이다. 출연자들의 평소 있는 그대로의 성격이 보일 수도 있고, 조금 더 오버해서 나타내는 제스처나 말투가 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처음부터 정해진 역할 분담이 있었다. 처음부터 본 건 아니고 지나가다 눈에 들어와서 30분 정도 보고 있는데, 어머니들이 계속 눈에 거슬리더라. 아무래도 내가 아직은 시어머니가 될 나이가 아니어서 그런 건지, 자주 엄마한테 시어머니 노릇 하지 말라고 잔소리를 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누구에게나 자기 자식이 예쁘지 않으랴. 최고가 아닐 수가 있나. 그런데 그 어머니들 한 가지 간과하는 게 있더라. 오로지 자기 위주다. 자기 아들만 최고다. 자기 사업을 물려받는 게 무슨 문제가 되냐고 반문한다. 자기 아들과 결혼할 사람은 며느리인데, 며느리를 한 인간으로 인정하거나 자기와 평등하게 살아간 사람임을 생각조차 안 하는 듯하다. (시어머니들의 입장에서 봐도 마찬가지일 거다. 내 아들 소중한데 며느리 될 사람(가상이지만)의 성품을 보고 싶은 건 당연한 거 아니겠나) 그 프로그램에서 젊은 여성들은 탈락시킬 시어머니를 고른다. 누가 탈락했는지는 모르겠다. 나도 거기까지만 보고 말았으니까. 그런데 젊은 여성들이 탈락시킬 시어머니를 고르는 의논을 하는데, 잠깐씩 언급되는 시어머니 한 명이 있었다. 그 프로그램을 30분 정도 보면서 엄마와 계속 얘기했다. 0번 시어머니가 떨어지겠군. (뭐, 아닐 수도 있지만...) 그 시어머니의 탈락이 유력해 보였다.

 

그러다가 곰곰 생각해보니, 그 시어머니가 탈락하든 말든, 누가 최종적으로 남아 있든 말든. 몇 시간 혹은 며칠, 그만큼의 시간만 본 사람에게 생기는 호감과 비호감이 무서워졌다. 그러면서 그런 게, 그 짧은 시간에 내가 보는 상대의 면면들이 상대와의 관계를 유지하거나 끊어내는 이유와 근거가 된다는 생각을 했다. 오랜 시간 함께해도 이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면 멀어지게 되는 거고, 불과 1시간 전에 만난 사람도 ‘이 사람은 이런 면이 좋구나.’ 싶은 순간 앞으로 이어갈 관계를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인연을 맺고 끊고 하는 게,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작고, 더 사소한 이유에서 시작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사람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유지하는 건 사소하지만 어떤 한 가지 때문일 것이다. 당신을 내 옆에 두거나 당신을 내 옆에서 밀어내게 하는 사소한 한 가지. 마스다 미리는 자신의 만화에서 '음식점에서 무조건 종업원에게 반말하는' 애인을 보며 이 남자랑 계속하는 게 옳은가를 고민하는 여자를 보여주는데, 황정은은 멀쩡한 남자가 쓴 요강을 아내가 비워주는 것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 이 남자에 대해 고민하는 나나를 보여준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면, 아무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가려고 해도 자꾸 그게 눈에 걸린다면, 돌아서야 하지 않을까. 내가 눈 딱 감고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나나는, 요강에 대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모세를 받아들일 수 없다. 나도 그런 모세를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그런' 모세를 결국 받아들이지 않는 나나를 응원한다. (잘 지내나요 238~239페이지)

 

그렇다. 어떤 관계였든,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게 되는 건 정말이지 사소한 한 가지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만나고 헤어지는 이유가 여러 가지라면, 그 사소한 한 가지가 큰 이유가 될 수도 있다. 사람이 만나면서 쌓인 시간 때문에 마음을 전하는 깊이가 생기기 마련인데, 사실 어느 정도 알 것 같은 분위기라는 게 있다. 이 정도 봤으면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나와 맞는지 아닌지 정도는 그리 오랜 시간을 함께하지 않아도 결정이 나는 경우가 많다. '음식점에서 종업원에게 반말하는' 애인의 말투를 확인하는데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거다.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는 일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도 가능한 일이니까. 황정은의 소설에서, 요강을 아내가 비워주는 게 당연하다는 남자의 태도를 고민하는 나나도 마음이 바로 정해지지 않았을까. 돌아서야 하는 이유는, 남자의 아내가 요강을 비우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던 그 순간 확실해진 거다. 나에게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남자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한 목소리를 듣는 느낌이었으니까.

 

다른 사람과 같이 있는데도, 같은 상황을 마주하고 있는데도 다른 생각을 한다. 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내가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사람들이라면 암담하다. 특히 가족이라면 더더욱. 서로를 보는 눈에 신뢰는 사라지고 거부감이 생긴다. 어떻게 하면 이 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할까 싶어서,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내 의견대로 끌고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는 상대가 가족이 되는 순간 매우 아프다. 안 그랬으면 좋겠다는, 그런 상황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계속 생길 거다. 왜 하나의 마음이 되지 못할까, 하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지만 그럴수록 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가족 사이에 생겨난 그 감정의 골은 남과 생긴 골과 다른 깊이로 새겨진다. 그만큼 상처가 커지는 거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치료가 되면 좋으련만, 내 경험상 그런 시간은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가지는 않더라. 상당히 오랜 시간, 이 관계의 골이 얕아지기를 바라면서 보낼 것 같다.

 

공감이라는 게, 이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거듭 확인하는 요즘이었는데, 이 책 속의 이 문장에서 한참 시선이 멈췄다. 다양한 주인공, 다양한 주제로 많은 이야기가 책으로 나오지만, 현실과 완전히 일치하는 순간은 아니다. 그래서 답을 얻고 싶어서 그 책을 펼치기도 하고, 답이 없는 걸 알기에 그저 공감이라도 하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읽기도 한다. 어느 쪽으로든, 그 순간에는 그 책이 필요하다는 것처럼... 로맨스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대개 그런 소설이 해피엔딩으로 훈훈하게 마무리되는 것처럼 현실 속 많은 문제가 해결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지 못해서 현실인가 싶으면서도, 마냥 바라는 마음을 버리지는 못하겠다. 잘되겠지, 잘되어야지, 그래서 마음이 좀 편안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들을 놓지 못하겠다고.

 

사실은, 이 책을 웃고 싶어서 펼쳐 들었다. 책이 새끼를 치는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저자의 전작에서 받았던 어떤 느낌 때문에 이번 책에서도 그때 내가 느꼈던 유쾌함을 기대했다. 웃기면 그냥 웃으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책과 더불어 일상이 유쾌함과 재미로 가득했던 전작을 기억해서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 글의 깊이가 또 가벼운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 책은 전작과 같은 발랄함에 무거움이 더해졌다. 마냥 웃기만 할 수는 없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수록된 도서 목록 때문에 그 분위기가 어느 정도 연상되기도 하면서, 저자의 독서가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한눈에 보인다. 그 안에서도 여전히 놓지 않는 위로와 사랑들, 울고 싶으면 울어도 되는 편안함과 아픈 순간들에도 찾아올 행복을 기대하게 한다. 이런 마음이 저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게, 괜히 내 편 한 명 더 생긴 것만 같다. 책 속 한 문장에서 파생한 일상의 기억들과 생각들이 이렇게 풀어져 나올 수 있어서 좋다.

 

처음에 인용했던 문장에서 느꼈듯이, 유독 그 '관계'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던 글이다. 어떤 책이 등장하는지는 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을 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사는 우리가 겪는 여러 가지 태도와 감정에 시선이 간다. 고백하지 못한 순간을 후회하는 데서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오랜 짝사랑. 나는 고백했는데 차이니까 감당이 안 되던데... ^^ 그런데 막상 고백하지 않고서는 안 될 마음이었기에 후회는 없다. 다만, 거절로 돌아온 답에서는 잠깐 주눅이 들었었지. 그렇게 짝사랑은 끝났지만 후련했다. 아닌 건 아닌 것으로 마침표를 찍고 나니, 감당할 수 없던 마음은 개운해지고, 더는 내 것이 아닌 상대에 미련조차 두지 않을 마음을 얻었으니 말이다.

 

소설 속 주인공에게 이입되어 같이 울고 웃는 일. 그건 소설을 읽어본 사람만이 아는 감정이다. 소설 속 이야기에 공감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저자는 그런 느낌을 너무 잘 아는 사람 같다.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이지만...) 클레어(『가든 스펠스』)가 얼마나 힘들지 느끼면서 같이 화내고 슬퍼한다. 이런 감정, 이런 표현. 공감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말들. 그 말을 참 편하게 한다. 바로 옆에서 조잘조잘 말하는 것처럼 들리잖아. 마치 수다를 떠는 것처럼, '맞아 맞아' 하면서 옆자리 사람의 팔을 툭툭 치며 말하는 것처럼, '이건 좀 그렇지 않아?'라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챌 사이인 것처럼... 그러니 이 상황을 두고 마음껏 욕하고, 화내고, 울고, 웃어도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은 안도감이 생긴다. 나, 좀 이래도 괜찮지? 하면서, 동의를 구하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일이라도 되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건네는 말 한마디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졌는지 다 아는 것처럼.

 

최근에는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저자가 고르고 읽은 책으로 알 수 있다. 세상이 전하는 뉴스에서도 그렇지만, 우리는 안다. 그동안 말로 꺼내지 못한 위기가 얼마나 많았는지, 드러내지 못한 당당함이 얼마나 많이 숨어있었는지를. 여전히 그 생각과 표현이 충분하지 못하고, 용기 내지 못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항상 드러내야 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오래전 기억까지 꺼내면서 여성이기에 받은 차별과 성추행을 언급하며, 여성이기에 겪는 많은 문제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같이 풀어가야 할 문제임을 시사한다. 저자가 읽은 책 중에서 내가 읽다가 만 책도 있던데, 그러다 기억에서 잊힌 제목인데, 생각난 김에 완독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한 권의 책으로 세상이, 사회가, 여성의 인권이 얼마나 바뀌겠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 한 권의 책으로 인식의 변화가 하나씩 쌓인다면 변화의 길은 멀지 않은 거, 아니겠나?

 

사람은 누군가에게 닿기 위해 일상을 버텨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해럴드가 퀴니에게 닿기 위해 그녀가 살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걷듯이, 우리는 언젠가 돌아올지도 모르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누군가를 향해 걷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 모든 행위가 삶의 연속성을 유지하도록 해주는 게 아닐까. 해럴드가 올 거라는 믿음으로 퀴니가 기다리듯이, 퀴니에게 가기 위해 걷고 있는 해럴드를 모린이 기다리고. (잘 지내나요 191페이지)

 

지금 내가 기다리는 사람은 없지만, 기다림의 의미는 안다. 그건 그 사람을 그만큼 아끼고 또 아낀다는 말과 같다. 그 '아낌'의 단어를 꺼낼 수 있는 관계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대와 나 사이에 쌓이는 것들 때문에 만들어지는, 어쩌면 기적 같은 일이다. 그래서 우리 사는 모든 순간에 진심으로 대해야 한다는 무게를 느낀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가족이든 누구든. 서로에게 무엇으로든, 그렇게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래서 매번 책 속의 문장에서, 어느 소설 속의 주인공에게서, 이해하기 어려운 설정이 배경이 되더라도 읽게 되는 경우가 많다. 지금 내가 겪어가는 여러 관계, 이해와 해결, 공감을 위해서라면 앞으로도 읽기를 멈추고 싶지는 않다. 여전히 게으른 독자이지만, 특히 요즘에는 책을 거의 안 읽고 지내는 시간이 많지만, 이렇게 책 속의 문장 하나 때문에 되찾아오는 감정이 있다면, 더디더라도 책을 계속 읽고 지내고 싶은 마음을 놓고 싶지 않다.

 

점점 말이 줄고, 그러다 보니 표현하는 방법도 잘 모르겠고,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나도 모르게 검열하는 순간이 많아졌다. 그런데도 가슴속 하고 싶은 말이 줄지는 않는다. 목소리로 얘기할 수 없다면, 이렇게 말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을, 저자 때문에 많이 했다. 글에서, 단어에서 문장에서 누군가를 읽는 일이 생각보다 괜찮더라. 조심스럽게, 누군가에게 안부를 묻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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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1 08: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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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1 15: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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