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이 흘렀다.

세상은 변했다.

이제는 시골 어디에도 친구들끼리 주머니를 털어 갈 색싯집 하나 없다.

달이 환한 마찻길도 사라진 지 오래다.

그리고 앞으로 또 30년이 흐르면?

마찻길이라는 말을 잊어버렸듯이 그때 가서 우리는 장터라는 말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장터의 모습을 기억해 내기 위해 이 사진집을 열심히 뒤적거리게 될지도 모른다. (258페이지)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오늘 팔아야 할 물건을 싼 보자기를 버스에 싣고 오르느라 애쓰는 사람의 뒷모습 혹은 앞모습 말이다. 자기 몸보다 큰 짐을 버스에 올리느라 힘들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한 사람분의 차비를 내고 사람이 타야 할 자리에 자기 짐으로 영역을 차지하느라 운전기사의 눈치를 보면서 버스에 오르는 표정이 더 기억난다. 우리 집은 시내와 시골의 중간쯤(시내 쪽에 조금 더 가깝게)에 있다. 나갈 때는 시골에서 나오는 버스를, 들어갈 때는 시골로 가는 버스를 타야만 했다. 그러니 이런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게 된다. 아침에 나갈 때는 엄청나게 컸던 보따리가 오후에 들어갈 때는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들고 나간 물건을 다 팔았다는 거겠지. 아니면 들고 나간 물건을 팔았던 돈으로 다른 것을 사 오느라 다시 양손이 무거워지거나. 사람 사는 생생한 모습을 그대로 목격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시내 반대 방향의, 우리 집 너머의 어디쯤을 가본 적도 거의 없다. 버스의 종점 이름이 쓰여 있어도 그게 어딘지 잘 모른다. 어렸을 적에는 내려야 할 곳을 지나친다는 게 두려움이었고, 지금은 그저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이니 나오는 사람 들어가는 사람이 있겠지 하는 정도일 뿐이다. 가끔 보는 20세기의 흔적들 같은 느낌으로...

 

그런 내게도 그곳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궁금해질 때가 장날이다. 집 앞 시장 상가에는 평소에도 문을 열고 장사하는 곳이 대부분이지만, 이곳에는 아직도 유명한 5일 장이 있다. 엄마는 지금도 고추나 마늘을 살 때면, 약초를 살 때도 그 재래시장에 간다. 요즘은 재래시장이라는 말이 더 익숙하지만, 저자의 말마따나 그곳은 장터다. 참 정겹게 들린다. 사람과 사람이 모이는 곳, 세상 온갖 물건이 펼쳐져 있는 곳, 시골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이 유일하게 즐기는 외출이 아닐까 싶은 곳. 백화점과 대형 마트가 익숙하고, 24시간 문을 연 편의점에서 시간 구애받지 않고 필요한 물건 대부분을 구매할 수 있는 오늘을 떠올리면, 장터의 풍경은 상상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저자가 보여주는 사진이 아니었다면, 시인들의 기억 속 시간을 불러오는 게 아니었다면 공감은커녕 어디 별나라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시골에 살아서 불편한 게 많다고 투덜거릴 때가 많았는데, 막상 이런 공감이 가능하다는 것에는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백화점이나 마트가 장터의 업그레이드 버전일 텐데 말이다. 하지만 다르다. 같은 맥락으로 흐르고 있는 매매의 장소일 테지만, 분명 그 안을 들여다보면 전혀 같지 않다. 보이지 않는 것이 채워지는 곳, 그곳이 장터다. 요즘의 편리한 구매 방식이 절대 채워줄 수 없는 것이 그곳에 있다.

 

시골의 오일장은 그 지역의 정치 경제 문화가 발생하고 생성되어 완성되는 곳이었다.

각 마을에서 수공업으로 만들어진 모든 물건들이 상품이 되어 팔려 나갔다.

짚으로 만든 망태나 짚신에서부터, 산에서 난 나물들과 강에서 잡힌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산품들이 모여들었다.

농촌 마을의 모든 것들이 상품이 되어 세상으로 나갔던 것이다.

그것은 건강한 경제적 활동이었다. (122페이지)

 

갈담장(현재의 강진장)은 이 근방 사람들의 세상을 향한 출구였다.

갈담장에는 모든 것들이 다 있었다.

외부로부터의 정보가 모두 갈담장을 통해 동네마다 퍼져 갔다.

혼담이 오고가고, 무르익어 가는 곳도 그곳이었으며,

농사의 모든 정보가 모이는 곳도 그곳이었다.

정치에 대한 모든 정보도 그곳에서 밝혀지고 여론이 조성되었다.

갈담장은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모든 것들이 총체적으로 들끓는 장소였다. (79페이지)

 

장터를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은 장터 사진가, 두 명의 시인. 이들이 하나가 되어 들려주는 장터는 그 시간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그리움이다. 엄마나 아빠 손을 잡고 나들이 가듯 따라가던 곳, 별다른 고명도 없이 멸치 육수로 끓여낸 잔치 국수 한 그릇의 기가 막히는 맛, 장사는 뒷전이고 끼리끼리 모여 화투판을 벌이기도 하는, 5일에 한 번씩 열리는 잔칫날 같다. 그러니까. 지금과는 다른 환경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었다는, 하나의 역사로 보면 이해가 될까? 놀이공원에 가고,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뷔페에서 여러 종류의 음식을 맛보고, 여건만 되면 국내든 해외든 다닐 수 있는, 문자나 전화 한 통에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린 요즘이 되기 전에 있었던 삶의 방식이었다고 받아들이면 될 것 같기도 하다. 장날에 장터에나 가야 얼굴 보는 사람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소식들을 들으며 눈물과 웃음을 나누고, 장터 한쪽 구석에 삼삼오오 모여 윷놀이라도 즐기는 게 유일한 놀이이고 외출이었던 시절을 보게 되는 거였다. 그 시절의 장날, 장터는 사람들에게 온 세상을 모아놓은 곳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세상을 사진가와 시인의 이야기로 새삼 다시 보게 된다.

 

 

 

그런 장터의 풍경이 이제는 사라져간다는 게 매우 아쉽다. 무형문화재처럼 장터도 하나의 역사와 기록으로 남길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 명맥을 이어갈 환경을 만든다는 게 쉬울 리도 없고 말이다. 누군가의 생계가 달린 문제이니 그냥 유지만 한다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고... 그 옛날 우리에게 소통하고 교류하는 장소였던,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사고팔고 하던 그곳은 이제 생기를 잃고 시들어간다. 엄마 아빠의 놀이터 같은 곳이었을 그곳은 이제 추억으로만 머물려고 한다. 그런 아쉬움을 채워주려는 듯 작가는 장터의 사진으로 그 시간을 공유한다. 그 시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표정에 생기를 넣어 우리에게 전달한다. 그들이 그 시간 속에서 주고받았던 온기를 작가의 진심으로 채운다. 그들 각각의 사연이 이야기되어 들려온다. 장터의 바닥에 둘러앉아 점심을 먹는 사람들, 소박한 국밥집에서 데이트(?)하는 듯한 노부부, 뻥튀기 계를 잠시 쉬면서 담배 한 대 물고 있는 아저씨, 늘어놓은 옷들 사이에서 물건을 고르는 아주머니...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흔적 그대로였다. 우리 엄마가 물건을 사러 가서 보인 행동일 것이고, 아버지가 사람들을 만나서 교류하던 순간이었을 테지. 할아버지 손을 잡고 가서 먹었던 1000원짜리 장터 짜장면의 맛이었다.

 

소박하다면 소박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넉넉하지 못한 시절의 흔적 같다. 부족한 게 더 많은 시절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사는 게 여유롭지 못하지만, 지금과는 비교도 못 할 정도의 생활환경이 아니었을까. 그런데도 부족함보다는 다른 것을 더 느끼면서 살아간 시절이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채워진 것들로 만족하고 웃으면서 지냈을 시절. 작가의 말처럼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많은 것이 우리를 채우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힘들다고, 외롭다고 말한다고 한다. 추위를 막아줄 집과 뜨뜻한 보일러 온기가 있고, 삼시 세끼 밥을 먹고 한겨울에도 싱싱한 채소를 먹을 수 있는, 구멍이 난 양말을 기워 신지 않아도 되는 세상인데 힘들고 외롭다고, 심지어 죽고 싶다고까지 한다고. 아침을 서울에서 먹고 점심을 일본에서 저녁을 중국에서 먹을 수 있는 세상인데도 외롭다고 말한다고... 작가는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이렇게 전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힘들고 외로운 이유는

신이 도시를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163페이지)

어쩌면, 작가의 말처럼 우리가 외로운 이유는 도시의 삭막함 때문이 아닐까? 바로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게 현관문 꼭꼭 닫고 사는 세상. 도시는 인간에게 육체적인 편리함을 주는 공간으로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인간의 마음까지는 다독여주지 못한 공간으로 남아있는 건 아닐까 하고. 오래전 우리 마음을 풍요롭게 했던 시골의, 장날의 그 모습처럼 사람 사는 냄새가 북적거리던 세상이 사라져서 그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장터의 매매 형태가 00 상회라는 작은 구멍가게로, 00 상회가 슈퍼로, 슈퍼가 대형할인마트나 백화점으로 변화하면서 도시가 장터를 빼앗아가서, 흥정이 사라진 자리에 정찰제의 거래가 채워지는... 장날만 되면 보이던 세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그 시간을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괜히 뭉클해지기도 하고, 내 기억 속 희미한 흔적을 선명하게 다시 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사진가의 사진과 시인들이 들려주는 문장은 하나의 영상처럼 흐른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화려하고 예쁜 배우들이 출연하는 게 아닌, 손끝의 굳은살이 더 먼저 보이는 장터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어 흑백의 사진으로 기록되었다. 물건을 파는 사람 사는 사람, 국수 국물 한 국자 더 떠주며 마음도 덤으로 얹어주는 온기가 그대로 보인다. 이들의 모습이 내 기억에도 어렴풋이 남을 걸 보면 내 나이가 참 많구나 하는 서글픈 생각도 들지만, 이 책에 담긴 사진과 시인의 경험담이 낯설지 않게 들리는 걸 보면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박물관이나 역사관의 어디쯤에서 마주했다면, 설명해주는 몇 줄의 문장으로만 기억할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우리네 살아온 시간의 한 부분을 그렇게 들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 순간의 생생한 온도까지는 들을 수 없었을 것 같다. 다행인 건 사진가의 사진에 얹어진 시인의 이야기가 그 온도를 전하면서, 우리에게 건너오는 그 시간의 기록이 완전해졌다는 거다. 사진가가 포착한 순간에 시인의 추억이 보태어져 장날의 기록이 완벽해진다. 이제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건너와서 또 하나의 기록과 그리움으로 남는다.

 

이 사진들에서는 누가 뭐라고 하든 개의치 않는 모습들,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삶 그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모습들이 발견된다. 작가는 사진을 위한 이미지를 채집하거나 포획하려 한다기보다는, 삶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찰의 시선은 차갑고 냉정한 것이 아니라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리라. (289페이지)

 

'옛것'과 '지금 것'은 항상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유리창의 안과 밖처럼 '옛것'과 '지금 것'의 이분법적 분할은 있을 수 없고 또한 그래서도 안 될 일이다. '옛것'의 따스한 온기와 '지금 것'의 현재성이 함께할 때 우리의 삶은 더욱 풍요롭고 아름다울 수 있지 않겠는가. (318페이지, 사진가 이흥재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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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2-01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설연휴동안 늘 평온하고 복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

구단씨 2019-02-07 23:38   좋아요 1 | URL
설 연휴 잘 지내셨나요? ^^
월요일 같은 목요일이었습니다.
하루만 더 지나면 맞이할 주말을 생각하면서
유쾌하게 지내세요~ ^^

재는재로 2019-02-02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좋은 시간 보내세요

구단씨 2019-02-07 23:39   좋아요 0 | URL
건강은 좀 어떠신지요?
일교차 심하면서도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은 요즘입니다.
감기까지 오면 더 힘드실 텐데, 몸조심 하셔요.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520
이제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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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보는 말과 돌아보는 말 사이에서

밀리는 마음과 밀어내는 마음 사이에서

(9페이지, 「남겨진 것 이후에」)

 

이상하게, 시가 주는 어떤 느낌들이 있다. 그냥 문장으로만 바라보기에는 감정이 더 많이 실린 것 같은 구절들, 그렇다고 그 감정을 다 드러내지도 않은 것 같아서 더 끌어당기는 문장이 되어버리고야 마는. 결국 누군가의 목소리로 대신하여 다가오는 듯한 말들이 되어 남는다. 살포시 내려앉듯 가슴에 내려앉아 자리하는 말. 어쩌면 그 말들은 우리 인생을 채우는 거의 모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번 시집이 들려주려는 것이 그러한 듯하다. 반복되기도 하는, 겹겹의 소리가 되어 전달되는 마음들은 언제 들어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때로는 닿지 못해 공중에 부유하는 말이 되기도 하는 걸 알지만, 그렇다고 꺼내지 못한 말이 되어 남기기도 싫은. 같은 단어 같은 문장인데도 어제와 오늘 다가오는 게 다르고, 때로는 선명하게 때로는 희미하게 남아 감정을 다독이기도 하는 말. 타인에게 가 닿지 못하는 말들은 나에게서 나가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기도 한다. 혼자서 하는 말, 나에게 하는 말이 되어 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이라고 하는 문장의 의미는, 어느 순간 흘러내린 마음을 표현하려 애쓰는 것 같다. 온갖 감정을 다 담아둘 수 없는 마음을 조금씩 열어두어 흘러내리게 하려는 간절한 발버둥 같은 거 말이다.

 

한낮은 태양의 눈으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있었던 것이 있었던 곳에는 있었던 것이 있었던 것처럼 있었다. 사라진 것의 자리를 메우는 것 같지만 빛은 공백을 환기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마음의 짐이 있는 사람이라면 과거의 자리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익숙한 자리에서 위안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라진 것은 흔적을 남긴다. 사라진 흔적조차 흔적을 남긴다. 어제의 자리에서 어제의 사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타인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기분이 듭니다. (42페이지, 「있었던 것이 있었던 곳에는 있었던 것이 있었던 것처럼 있었고」)

 

이해하기 전에 느껴진다는 말을 아는지... 소리가 되어 나오는 말보다 먼저 도달하는 감정을 읽는다는 것 아닐까? '아' 하고 시작되는 말이 마침표까지 다 오기 전에 이미 다 알 것 같은 말의 의미들. 단어나 문장이 채우지 못한 빈자리에 둥지를 틀고 있는 게 소리가 되지 못한 말들인 것 같다. 어떻게 그 빈자리의 말들이 먼저 도달하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알 수 없는 순간들이 계속되면서 알게 되는 모순의 순간이 있다. 그 사람의 말을 이미 다 들은 것처럼, 문장 사이의 말들을 이미 다 알아버린 것처럼. 그건 상대의 목소리일 수도 있고 내가 묻어둔 목소리일 수도 있다. 시인의 문장을 듣다 보면, 그 목소리가 무엇이든, 누구의 것이든 문장 사이의 많은 말을 알아채고 그 말들은 우리 안에 남게 된다. 왜 소리가 아닌 것들이 먼저, 깊게 다가와 버리는 걸까.

 

이제니의 세 번째 시집. 시인의 지난 시집을 언제 읽었는지 기억이 가물거릴 무렵 이렇게 다시 만났다. 마치 어제 다 하지 못한 말을 오늘에서야 듣는 것 같기도 하다. 어제의 일기를 오늘 쓰는 것처럼, 어제 다 들여다보지 못한 마음의 흔적들을 오늘 더 추가한 것 같은 거. 그건 웃음일 수도 있고, 어제 흘리지 못한 눈물일 수도 있다. 웃음이든 눈물이든, 그건 하거나 하지 못한 말이 되어버린다. 때로는 고백이 되어 다시 시작하는 힘을 내게 하기도 하면서 미처 다하지 못한 어제로, 오늘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제와 같은 오늘을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 되기도 한다. 분명한 선을 그어 구분을 짓는 게 아니라, 수학의 교집합처럼 어제와 오늘이 희미하게 겹쳐 있어 연결된 것만 같다. 시인이 찍은 문장의 마침표는 쉼표처럼, 다음 문장으로 이어지는 표현의 계속됨이었다.

 

너는 여러 겹을 가진 인칭 속으로 숨는다. 여러 겹의 목소리는 여러 겹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너는 어떤 주어 속에 숨는다. 너는 어떤 술어 속에 숨긴다. 숨기기 쉬운 방식으로 서술되는 것. 서술되는 양식 그대로 변모되는 것. 변모되는 형식 그대로 변주되는 것. 목소리는 전진한다. 목소리는 굴절된다. 내면에서 내면으로. 국면에서 국면으로. 나는 지금 임의의 선분을 사이에 두고 나에게 말을 거는 연습을 하고 있다. 하나의 선분 너머로 이쪽과 저쪽이 생겨났으므로. 각각의 자리에 의자를 하나씩 놓아둔다. 고통이 있는 자리에 마음이 있다고 말해도 됩니까. (122페이지, 「발화 연습 문장―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결국, 시가 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된다.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말을 '시'라는 문장으로 대신하는, 때로는 자기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의 읊조림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시인이 '시'라는 문장으로 전하려 하는 것도 그와 같을 것이라 믿는다. 하려는 말을 대신하면서, 마침표를 찍었으되 마침표가 아닌 의미로 다가가게 하는, 혹여나 우리 안에 남아 쌓이는 불안의 흔적들을 지우는 노력이 되는 존재. 그렇게 힘을 가진 문장은 목소리는 우리를 다시 움직이게 하는, 그리하여 우리의 오늘을 다시 시작하게 하는 문장이 된다.

 

 

(중략)

사람 하나가 하늘 저쪽 구름 모임을 보고 있었다.

뜰채를 들고 서 있었는데 왠지 좀 쓸쓸해 보였다.

 

구름 너머 쓸쓸한 뜰채 구름 너무 쓸쓸한 뜰채

 

뜰채 구름은 형이상학적 솜털로 뒤덮여 있었다.

외로운 비행접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흐느끼는 비단류 흐느끼는 비단류

비단길도 아닌 비단의 흐름도 아닌

(최대한 흐느끼는 비단류처럼 발음할 것.)

 

흐느끼는 것은 내가 아닌데

내가 흐느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속으로 속으로 모두 조금씩 울고 있는 것 같았다.

(148~149페이지, 「발화 연습 문장 - 모두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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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개
추정경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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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가 더는 스포츠가 아닌 게 되어버릴 때, 우리는 스포츠를 보면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요즘 소란스러운 체육계 성폭력 사태를 보면서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위해 운동을 계속해야 하는지, 스포츠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묻고 싶다. 자신을 이기려고 애쓰는 노력과 한계를 뛰어넘는 기적을 보는 즐거움에 관람하고 했던 게, 혹시 그들을 한계치로 몰아넣으면서 부담을 주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한편으로는 선수들을 양육하고 훈련하는데 같은 마음이 되지 않는 지도자들은 왜 존재해야 하는지 묻고 싶기도 했다. 당신들이 걸어왔던 길, 후배이자 동료가 되는 선수들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어디서나 스포츠 그 이상의 것들이 운동을 순수하게 보지 못하게 하는 듯하다.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테니스도 마찬가지였다.

 

테니스 소년 유망주 임석의 어느 날이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다. 많이 다친 건 아닌 듯한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기억이 끊긴 것뿐인데 사고의 가해자가 되었다. 무면허 운전에 동승자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 도대체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기억나는 게 없는데 석은 소년분류심사원에 들어간다. 모든 정황이 임석을 범인이라 가리킨다. 그래도 정의가 있다면 그의 결백을 밝혀주겠지. 뭔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석은 감별소 생활을 버틴다. 어른들의 구치소, 혹은 교도소의 축소판인 그곳은 어떤 곳인가? 모든 것이 감시되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 방 안에서도 힘의 지배구조가 있다. 방장이라 불리는 이의 꼽(부하)이 되어 시키는 모든 일을 한다. 숨이라도 쉴 시간은 면회뿐이다. 변호사를 만나면서도 사건은 해결되는 것 같지 않다. 증거가 하나도 발견되지 못하고, 오히려 석은 점점 더 미궁에 빠진 듯 시간이 멈췄다. 더는 테니스를 할 수 없는 것일까? 석이의 테니스 인생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투명하게 듣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감별소 그 방 어두운 구석의 석이 자리처럼, 이야기는 점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죗값이 돌아오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버린 것들, 치가 떨리게 미워했던 것들을 떨쳐 버렸는데 그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것만큼 억울한 인생은 싫었다. 떼어 버린 구성구가 노승모가 되어 돌아오는 악몽은 내가 바란 것이 아니다. (87페이지)

 

어쩌면 이 소설은 또 한 편의 스포츠계 폭로였다. 운동을 순수하게만 생각했는데, 역시 어느 분야든 돈이 없으면 안 되는가 싶기도 하다. 개인 운동에서 필요한 스폰서, 혹은 매니지먼트. 내가 운동을 잘하기 위해서는, 운동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운동 이외의 것을 도와주고 책임져줄 존재가 필요하다. 그건 돈이기도 하고 사람이기도 하다. 스폰서나 매니지먼트가 바로 그런 것을 해주는 존재들이다. 서로의 필요로 만난, 계약서로 묶인 관계다. 계약 사항에 맞게 서로가 지켜야 할 책임을 완수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 어린 스포츠 선수들의 피를 빨아먹는 지배자가 있다. 지배자는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자기 입맛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면 선수 한 명을 바닥에 버릴 수 있다. 아이의 무너진 꿈같은 건 상관없다. 자기 지갑을 불려주지 못할 거라면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마음으로 뭉개고 무너뜨린다.

 

테니스는 아버지의 것이었고 내 것이 아니었다. 라켓을 잡은 이후에도 이 사람처럼 늘 테니스를 혐오했다. 이기는 순간에도 기쁘지 않았고 무언가를 보여야 하는 순간조차 내가 없었다. 하지만 사고를 낸 건 우리가 아니었다. (383페이지)

 

여기에 어른들의 바람은 스포츠 유망주에 유명 스포츠 스타를 만들고 싶어 한다. 아이의 시합, 우승, 트로피, 상금. 유명 선수가 되어 받을 수 있는 여러 가지가 먼저 보인다. 코치에게는 훌륭한 선수를 키워낸 이력이, 부모에게는 아이의 뒷바라지를 했다는 희생이, 스폰서에게는 홍보를. 단지 그것뿐이었을까? 소설은 점점 내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들어가면서 그동안 듣지 못했던 또 다른 비밀을 풀어놓는다. 사건에 사건은 꼬리를 물고, 그들 각자의 욕심에 미처 말하지 않은 속내까지 드러난다.

 

이 소설의 매력은 중반부 이후에 나타난다. 임석이 감별소에 들어가서 그곳에서 적응하면서, 이대로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버티듯 시간을 보내고 있던 때를 건너가니 달라진다. 뭔가 자기가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분위기를 감지한다. 단순히 이 위기를 모면하고자 하는 대응이 아니라, 점점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그동안 부모의 투자가 아까워서 계속 테니스를 하고, 자기 재능인 것 같아서 테니스를 하던 기억은 지워버린다. 여기까지 오면서 자기 자리를 만들었던 게 오직 자기 자신은 아니었으며, 상대를 밟고 일어서기 위해 무슨 짓까지 했는지 복기한다. 어쩌면 잊고 싶었던 순간들이었을 것이다. 온전히 노력만으로, 투명한 경기로 우승을 차지했다고 자각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억이란 건 때로 원하지 않은 순간에 튀어나오기도 한다.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가 없게 진하게 새겨지기도 한다. 임석은 그런 순간을 받아들인다. 왜 지금 이런 상황이 자기 앞에 닥쳤는지 되새기는 것 같기도 하다. 마치, 다시는 이런 시행착오를 하지 않겠다는 듯이... 지금 임석의 변호사 임지선이 청소년 전담반처럼 이들의 변호에 애쓰는 모습이 남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의 밑바닥에 두 갈래 길이 있더라. (167페이지)

 

뭔가 순환하는 느낌이다. 어른들의 시간이 흘렀고, 비슷하게 아이들의 시간이 흐른다. 그 사이에 달라진 것들이 두 세대 사이에 끼어들기도 하겠지만, 근본적인 바탕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가진 자의 악의 없는 여유에, 가지지 못한 자의 숨죽인 분노, 그 사이에서 챙길 게 있는 또 다른 부류의 인간들까지. 저마다 검은 밤에 자신의 모습을 감춘 검은 개의 눈을 갖고 그 모든 순간을 본다. 가져야 할 것들을 좇아 계속 달린다. 소년과 어른, 우승자와 우승하지 못한 자 사이의 갈등과 대립. 하지만 각자의 앞의 있는 것을 좇느라 미처 보지 못한 것들에 불안해지는 인생. 잔인하게 되풀이되는 기억에 옭아매어 살아가고 싶지 않다면, 이제는 귀를 열고 들어봐야 할 때이다. 지금 이 인생이 누구의 것인지, 우리는 무엇을 좇아 살아가야 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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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에 갇힌 자는 일어나지 못한다.

사랑은 바닥에 떨어진 그의 그림자에 눈동자를 그려주는 일이다.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눈동자를 말이다. 그래서 그가 떠난 자리에는 그의 눈동자만 남아 있다. 얼굴을 잃어버린 눈, 여전히, 그는 가장아름다운 눈동자로 바라본다. 먼 구름과 뒤척이는 바람과 석양에 기우는 나뭇잎을 …… 나는 다만, 오래 그와 눈 맞추고 있다. 나에게 그는 떠나버린 것이 아니다. 그의 얼굴이 지구가 되었을 뿐이다. 그의사랑이 중력이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리움에 갇힌 자는 좀처럼 일어나지 못한다. 쓰러진 채, 그의 얼굴을 다 쓰다듬을 수 없는 것을 슬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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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으로 오르는 계단

더운 숨이 터져나왔다. 
지난밤에는 울음 몇몇이 끝까지 오르지도 못하고 
낮은 곳으로 흘러내린 듯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것은 
우리의 환상인지도몰랐으나 
실제로 옥상 문을 열면 
창백한 하늘이 여기저기 매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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