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520
이제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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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보는 말과 돌아보는 말 사이에서

밀리는 마음과 밀어내는 마음 사이에서

(9페이지, 「남겨진 것 이후에」)

 

이상하게, 시가 주는 어떤 느낌들이 있다. 그냥 문장으로만 바라보기에는 감정이 더 많이 실린 것 같은 구절들, 그렇다고 그 감정을 다 드러내지도 않은 것 같아서 더 끌어당기는 문장이 되어버리고야 마는. 결국 누군가의 목소리로 대신하여 다가오는 듯한 말들이 되어 남는다. 살포시 내려앉듯 가슴에 내려앉아 자리하는 말. 어쩌면 그 말들은 우리 인생을 채우는 거의 모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번 시집이 들려주려는 것이 그러한 듯하다. 반복되기도 하는, 겹겹의 소리가 되어 전달되는 마음들은 언제 들어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때로는 닿지 못해 공중에 부유하는 말이 되기도 하는 걸 알지만, 그렇다고 꺼내지 못한 말이 되어 남기기도 싫은. 같은 단어 같은 문장인데도 어제와 오늘 다가오는 게 다르고, 때로는 선명하게 때로는 희미하게 남아 감정을 다독이기도 하는 말. 타인에게 가 닿지 못하는 말들은 나에게서 나가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기도 한다. 혼자서 하는 말, 나에게 하는 말이 되어 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이라고 하는 문장의 의미는, 어느 순간 흘러내린 마음을 표현하려 애쓰는 것 같다. 온갖 감정을 다 담아둘 수 없는 마음을 조금씩 열어두어 흘러내리게 하려는 간절한 발버둥 같은 거 말이다.

 

한낮은 태양의 눈으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있었던 것이 있었던 곳에는 있었던 것이 있었던 것처럼 있었다. 사라진 것의 자리를 메우는 것 같지만 빛은 공백을 환기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마음의 짐이 있는 사람이라면 과거의 자리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익숙한 자리에서 위안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라진 것은 흔적을 남긴다. 사라진 흔적조차 흔적을 남긴다. 어제의 자리에서 어제의 사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타인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기분이 듭니다. (42페이지, 「있었던 것이 있었던 곳에는 있었던 것이 있었던 것처럼 있었고」)

 

이해하기 전에 느껴진다는 말을 아는지... 소리가 되어 나오는 말보다 먼저 도달하는 감정을 읽는다는 것 아닐까? '아' 하고 시작되는 말이 마침표까지 다 오기 전에 이미 다 알 것 같은 말의 의미들. 단어나 문장이 채우지 못한 빈자리에 둥지를 틀고 있는 게 소리가 되지 못한 말들인 것 같다. 어떻게 그 빈자리의 말들이 먼저 도달하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알 수 없는 순간들이 계속되면서 알게 되는 모순의 순간이 있다. 그 사람의 말을 이미 다 들은 것처럼, 문장 사이의 말들을 이미 다 알아버린 것처럼. 그건 상대의 목소리일 수도 있고 내가 묻어둔 목소리일 수도 있다. 시인의 문장을 듣다 보면, 그 목소리가 무엇이든, 누구의 것이든 문장 사이의 많은 말을 알아채고 그 말들은 우리 안에 남게 된다. 왜 소리가 아닌 것들이 먼저, 깊게 다가와 버리는 걸까.

 

이제니의 세 번째 시집. 시인의 지난 시집을 언제 읽었는지 기억이 가물거릴 무렵 이렇게 다시 만났다. 마치 어제 다 하지 못한 말을 오늘에서야 듣는 것 같기도 하다. 어제의 일기를 오늘 쓰는 것처럼, 어제 다 들여다보지 못한 마음의 흔적들을 오늘 더 추가한 것 같은 거. 그건 웃음일 수도 있고, 어제 흘리지 못한 눈물일 수도 있다. 웃음이든 눈물이든, 그건 하거나 하지 못한 말이 되어버린다. 때로는 고백이 되어 다시 시작하는 힘을 내게 하기도 하면서 미처 다하지 못한 어제로, 오늘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제와 같은 오늘을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 되기도 한다. 분명한 선을 그어 구분을 짓는 게 아니라, 수학의 교집합처럼 어제와 오늘이 희미하게 겹쳐 있어 연결된 것만 같다. 시인이 찍은 문장의 마침표는 쉼표처럼, 다음 문장으로 이어지는 표현의 계속됨이었다.

 

너는 여러 겹을 가진 인칭 속으로 숨는다. 여러 겹의 목소리는 여러 겹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너는 어떤 주어 속에 숨는다. 너는 어떤 술어 속에 숨긴다. 숨기기 쉬운 방식으로 서술되는 것. 서술되는 양식 그대로 변모되는 것. 변모되는 형식 그대로 변주되는 것. 목소리는 전진한다. 목소리는 굴절된다. 내면에서 내면으로. 국면에서 국면으로. 나는 지금 임의의 선분을 사이에 두고 나에게 말을 거는 연습을 하고 있다. 하나의 선분 너머로 이쪽과 저쪽이 생겨났으므로. 각각의 자리에 의자를 하나씩 놓아둔다. 고통이 있는 자리에 마음이 있다고 말해도 됩니까. (122페이지, 「발화 연습 문장―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결국, 시가 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된다.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말을 '시'라는 문장으로 대신하는, 때로는 자기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의 읊조림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시인이 '시'라는 문장으로 전하려 하는 것도 그와 같을 것이라 믿는다. 하려는 말을 대신하면서, 마침표를 찍었으되 마침표가 아닌 의미로 다가가게 하는, 혹여나 우리 안에 남아 쌓이는 불안의 흔적들을 지우는 노력이 되는 존재. 그렇게 힘을 가진 문장은 목소리는 우리를 다시 움직이게 하는, 그리하여 우리의 오늘을 다시 시작하게 하는 문장이 된다.

 

 

(중략)

사람 하나가 하늘 저쪽 구름 모임을 보고 있었다.

뜰채를 들고 서 있었는데 왠지 좀 쓸쓸해 보였다.

 

구름 너머 쓸쓸한 뜰채 구름 너무 쓸쓸한 뜰채

 

뜰채 구름은 형이상학적 솜털로 뒤덮여 있었다.

외로운 비행접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흐느끼는 비단류 흐느끼는 비단류

비단길도 아닌 비단의 흐름도 아닌

(최대한 흐느끼는 비단류처럼 발음할 것.)

 

흐느끼는 것은 내가 아닌데

내가 흐느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속으로 속으로 모두 조금씩 울고 있는 것 같았다.

(148~149페이지, 「발화 연습 문장 - 모두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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