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개
추정경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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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가 더는 스포츠가 아닌 게 되어버릴 때, 우리는 스포츠를 보면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요즘 소란스러운 체육계 성폭력 사태를 보면서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위해 운동을 계속해야 하는지, 스포츠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묻고 싶다. 자신을 이기려고 애쓰는 노력과 한계를 뛰어넘는 기적을 보는 즐거움에 관람하고 했던 게, 혹시 그들을 한계치로 몰아넣으면서 부담을 주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한편으로는 선수들을 양육하고 훈련하는데 같은 마음이 되지 않는 지도자들은 왜 존재해야 하는지 묻고 싶기도 했다. 당신들이 걸어왔던 길, 후배이자 동료가 되는 선수들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어디서나 스포츠 그 이상의 것들이 운동을 순수하게 보지 못하게 하는 듯하다.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테니스도 마찬가지였다.

 

테니스 소년 유망주 임석의 어느 날이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다. 많이 다친 건 아닌 듯한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기억이 끊긴 것뿐인데 사고의 가해자가 되었다. 무면허 운전에 동승자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 도대체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기억나는 게 없는데 석은 소년분류심사원에 들어간다. 모든 정황이 임석을 범인이라 가리킨다. 그래도 정의가 있다면 그의 결백을 밝혀주겠지. 뭔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석은 감별소 생활을 버틴다. 어른들의 구치소, 혹은 교도소의 축소판인 그곳은 어떤 곳인가? 모든 것이 감시되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 방 안에서도 힘의 지배구조가 있다. 방장이라 불리는 이의 꼽(부하)이 되어 시키는 모든 일을 한다. 숨이라도 쉴 시간은 면회뿐이다. 변호사를 만나면서도 사건은 해결되는 것 같지 않다. 증거가 하나도 발견되지 못하고, 오히려 석은 점점 더 미궁에 빠진 듯 시간이 멈췄다. 더는 테니스를 할 수 없는 것일까? 석이의 테니스 인생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투명하게 듣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감별소 그 방 어두운 구석의 석이 자리처럼, 이야기는 점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죗값이 돌아오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버린 것들, 치가 떨리게 미워했던 것들을 떨쳐 버렸는데 그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것만큼 억울한 인생은 싫었다. 떼어 버린 구성구가 노승모가 되어 돌아오는 악몽은 내가 바란 것이 아니다. (87페이지)

 

어쩌면 이 소설은 또 한 편의 스포츠계 폭로였다. 운동을 순수하게만 생각했는데, 역시 어느 분야든 돈이 없으면 안 되는가 싶기도 하다. 개인 운동에서 필요한 스폰서, 혹은 매니지먼트. 내가 운동을 잘하기 위해서는, 운동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운동 이외의 것을 도와주고 책임져줄 존재가 필요하다. 그건 돈이기도 하고 사람이기도 하다. 스폰서나 매니지먼트가 바로 그런 것을 해주는 존재들이다. 서로의 필요로 만난, 계약서로 묶인 관계다. 계약 사항에 맞게 서로가 지켜야 할 책임을 완수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 어린 스포츠 선수들의 피를 빨아먹는 지배자가 있다. 지배자는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자기 입맛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면 선수 한 명을 바닥에 버릴 수 있다. 아이의 무너진 꿈같은 건 상관없다. 자기 지갑을 불려주지 못할 거라면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마음으로 뭉개고 무너뜨린다.

 

테니스는 아버지의 것이었고 내 것이 아니었다. 라켓을 잡은 이후에도 이 사람처럼 늘 테니스를 혐오했다. 이기는 순간에도 기쁘지 않았고 무언가를 보여야 하는 순간조차 내가 없었다. 하지만 사고를 낸 건 우리가 아니었다. (383페이지)

 

여기에 어른들의 바람은 스포츠 유망주에 유명 스포츠 스타를 만들고 싶어 한다. 아이의 시합, 우승, 트로피, 상금. 유명 선수가 되어 받을 수 있는 여러 가지가 먼저 보인다. 코치에게는 훌륭한 선수를 키워낸 이력이, 부모에게는 아이의 뒷바라지를 했다는 희생이, 스폰서에게는 홍보를. 단지 그것뿐이었을까? 소설은 점점 내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들어가면서 그동안 듣지 못했던 또 다른 비밀을 풀어놓는다. 사건에 사건은 꼬리를 물고, 그들 각자의 욕심에 미처 말하지 않은 속내까지 드러난다.

 

이 소설의 매력은 중반부 이후에 나타난다. 임석이 감별소에 들어가서 그곳에서 적응하면서, 이대로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버티듯 시간을 보내고 있던 때를 건너가니 달라진다. 뭔가 자기가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분위기를 감지한다. 단순히 이 위기를 모면하고자 하는 대응이 아니라, 점점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그동안 부모의 투자가 아까워서 계속 테니스를 하고, 자기 재능인 것 같아서 테니스를 하던 기억은 지워버린다. 여기까지 오면서 자기 자리를 만들었던 게 오직 자기 자신은 아니었으며, 상대를 밟고 일어서기 위해 무슨 짓까지 했는지 복기한다. 어쩌면 잊고 싶었던 순간들이었을 것이다. 온전히 노력만으로, 투명한 경기로 우승을 차지했다고 자각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억이란 건 때로 원하지 않은 순간에 튀어나오기도 한다.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가 없게 진하게 새겨지기도 한다. 임석은 그런 순간을 받아들인다. 왜 지금 이런 상황이 자기 앞에 닥쳤는지 되새기는 것 같기도 하다. 마치, 다시는 이런 시행착오를 하지 않겠다는 듯이... 지금 임석의 변호사 임지선이 청소년 전담반처럼 이들의 변호에 애쓰는 모습이 남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의 밑바닥에 두 갈래 길이 있더라. (167페이지)

 

뭔가 순환하는 느낌이다. 어른들의 시간이 흘렀고, 비슷하게 아이들의 시간이 흐른다. 그 사이에 달라진 것들이 두 세대 사이에 끼어들기도 하겠지만, 근본적인 바탕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가진 자의 악의 없는 여유에, 가지지 못한 자의 숨죽인 분노, 그 사이에서 챙길 게 있는 또 다른 부류의 인간들까지. 저마다 검은 밤에 자신의 모습을 감춘 검은 개의 눈을 갖고 그 모든 순간을 본다. 가져야 할 것들을 좇아 계속 달린다. 소년과 어른, 우승자와 우승하지 못한 자 사이의 갈등과 대립. 하지만 각자의 앞의 있는 것을 좇느라 미처 보지 못한 것들에 불안해지는 인생. 잔인하게 되풀이되는 기억에 옭아매어 살아가고 싶지 않다면, 이제는 귀를 열고 들어봐야 할 때이다. 지금 이 인생이 누구의 것인지, 우리는 무엇을 좇아 살아가야 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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