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 대하여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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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일들을 하나씩 잃어 가는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말이다. (8페이지)

 

이 소설을 읽기 전에는, 일방적으로 엄마가 바라보는 딸에 대한 내용이 아닐까 추측했다. 내 딸을 이야기하는 엄마의 시선으로 더 가깝고 애틋한 느낌이 이 소설을 가득 채웠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그런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다가오는 느낌은 한없이 따뜻한 애틋함과는 거리가 있다. 딸이 아니라, 여자의 삶을 말하는 느낌이 더 큰 소설이다. 하지만 '여자 이야기'라고만 하기에는 뭔가 더 많이 얹어진 이야기이기도 하다. 세상 속 여자의 삶이 적나라하게 비치는 소설이다. 동성애자 딸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엄마는 자기가 배워온 대로, 살아왔던 대로 딸이 따라와 주기를 바라지만, 어디 자식이 내 맘대로 되는 존재였던가. 무엇보다, 삶의 방식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엄마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 소설이 풀어갈, 결국 다다를 곳이 어디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화자인 '나'는 노인 요양보호사로 요양원에서 일한다. 어느 날, 딸이 부탁한 돈을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영부영 딸과 딸의 파트너와의 동거가 시작된다. 자기가 사는 집으로 들어온 딸과 딸의 파트너가 못마땅하지만, 몇 달 치의 생활비를 미리 받은 상태라 함부로 대할 수도 없다. 여유 있는 삶이 아니었던 '나'는 미리 받은 월세 겸 생활비로 위층을 수리하는 데 다 썼다. 하지만 이 이상한 동거가 단지 딸에게 내줄 돈이 없다는 이유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서로 이해 못 하는 상대의 마음을 가끔은 받아들이기도 하고 가끔은 싸우기도 하면서 이들의 동거는 계속된다.

 

엄마는 바란다. 자신의 부족한 삶에 빗대어 내 딸이 나처럼 살지 않기를, 조금은 부유하고 여유 있게 살기를, 혼자가 아니라 남편과 아이들을 가진 평범하고 보편적인 삶을 만들어가기를, 사랑 하나에 목숨 거는 게 아니라 평온한 일상을 만들기를.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보통 '정상'이라고 부르는 삶을 만들어야 할 텐데, 딸의 동성애는 그런 의미로 엄마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이다. 자기 일을 신경 쓰고 사는 것도 힘들고 팍팍한데 다른 이의 삶을 위해 같이 나서서 싸우는 것도 맘에 들지 않는다. 고요하고 안전하게 사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오지랖 부리지 말고 자신만을 위한 선택으로 살아가기를 바라지만 딸은 번번이 엄마의 그런 바람을 벗어난다.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겪는 불합리한 일 처리를 보면서, 을의 처지로 별다른 항의조차 못 하는 자신의 인생이 비루해서, 딸은 자신과 다른 생활을 영위하기 바라는 엄마였다. 그런데 딸이 동성애자로 살면서 겪는 불합리한 일들을 보며 엄마의 불안과 불만은 커진다. 내 딸이, 내 자식이 왜...

 

단순하게 생각하면 딸을 걱정하는 엄마의 한숨과 욕심처럼 보이는 이 소설은, 속내를 들여다볼수록 커다란 그림이 다시 그려진다. 요양보호사인 엄마가 돌보는 '젠'은 아이들의 입양과 후원으로 평생을 바친 여자다. 훌륭하다고 칭송받고 존경받았던 여자의 현재는 치매 걸린 노인,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외로움뿐이다.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을 바쳐 봉사의 삶을 걸었던 젠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요양원의 방 하나를 차지하고 누워 지내는, 먹을 것을 탐내는 치매 노인으로 남았을 뿐이다. 젠을 돌보면서 엄마는 당신 딸의 인생을 겹쳐봤을지도 모른다. 내 딸이,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지 못하고,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동성의 애인과 평생 살아갈지도 모르는데. 누군가 가족이라고 할 사람도 없고 힘이 되어주지도 못하는 노년의 삶을 맞이할 거로 생각하면, 딸의 현재를 인정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던 거다. 그러니까 엄마가 걸어온 보통이고 정상이라 여기는 여자의 삶은 남편과 아이가 존재하는, 누군가 의지가 되고 돌봐줄 나중이 그려지는 거였다. 불합리함을 위해 싸우며 온몸에 멍이 들고 다치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보호 아래 든든한 일상을 누리는 것. 그런 인생을 위해서는 동성애가 아니라 이성애로 만들어진 가족이 필요하다는 것.

 

엄마가 겪어온 인생에서 서글펐던, 중심에서 밀려나고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들 그대로 목격했는데, 딸이 그 대상이 되어가려는 걸 막을 수는 없을까, 하는 고민과 걱정. 엄마의 바람을 모르는 건 아닐 테지만, 딸이 가고자 하는 세상은 또 다른 곳이었으니... 그렇게 이해의 선을 넘지 못하고 싸움의 연속인 일상에서 찾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여성의 삶이 이렇게 흘러간다는 것을 사실적으로 드러내면서도, 그렇게 계속 흘러가도록 둘 수 없는 대책을 위해 온몸으로 말하려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세상에 스미지 못하고 소수자의 삶을 이어가려는 딸을 어떻게 해서든 구해내고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딸의 외침을 이해하고 싶기도 한 엄마의 마음과 시선을 그대로 담은 소설이다. 그 시선을 따라가면서 변하는 건 오히려 엄마였다. 딸의 선택과 행동에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의문 '왜?'를 찾아가는 길. 세상의 부조리를 드러내면서 그 안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삶의 현실적인 장면들을 그대로 고발한다. 이해가 아닌 다름을 인정하면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세상의 많은 일을 엄마가 확인한다. '내 딸이 이런 세상을, 이런 마음으로 부딪히며 살아가고 있었구나' 하는 이해의 언저리쯤 닿았을까? 사실 이해라는 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단어일지도, 타인의 이해가 어디까지 가능한지 재어볼 필요가 없는 일은 아니었을까. 각자의 시선에서 보는 세상은 너무도 다르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우리 사는 시간에 애타게 바라는 건 역시 그 이해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늘 그 시간이 닿으려 애쓰는 곳은 완전한 이해가 아니라, 가장 가까이 닿을 수 있는 지점일 것이다. 내가 하는 최선의 이해가 상대에게 닿는 지점. 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엄마가, 딸이, 딸의 파트너가, 젠이 가 닿을 수 있는 곳. 그곳이 삶의 최선이었을 테지.

 

이 애들이 삶 한가운데에 있다. 환상도 꿈도 아닌 단단한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다. 내가 그런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이 애들은 무시무시하고 혹독한 삶 한가운데에 살아 있다. 그곳에 서서 이 애들이 무엇을 보는지, 보려고 하는지, 보게 될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밥알은 좀처럼 삼켜지지 않고 나는 울컥거리며 치솟는 뜨거운 것들을 계속 삼킨다. (149~150페이지)

 

노년에 다다른 여자의 삶은 어떨까, 하는 걱정과 고민이 그대로 드러난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왔어도, 세상을 위해 애쓴다고 살아왔어도 우리를 기다리는 노년은 소설에서 보여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딸의 태도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닌데, 읽을수록 엄마의 시선이 눈에 들어온다. 세상 좀 살아본 여자의 한숨 섞인 목소리는 현실이었으니... 페이지를 넘길수록 세상이 혐오하고 배제했던 딸의 인생을 엄마가 품어주는 게 눈에 보인다. 타인에게 거부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엄마가 보듬고 배려해주는 시간으로 거듭난다. 엄마라는 존재가 그런 것일까. 소설의 제목과는 다르게, 결국 엄마를 바라보는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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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몬태나 특급열차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처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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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담긴 짧은 글들이 재밌다. 뭔가 비꼬는 것 같기도 하고, 별것 아닌 일상의 한 부분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한마디로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데, 이상하게 그의 하루하루는 뭔가 자잘하고 말할 게 많은 이야기가 가득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어쩌면 소박한 그의 시간이 이렇게 이야기가 되고 누군가에게 흥미로움과 웃음을 만드는지 궁금해진다. 물론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게 아니라,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저자에 관한 궁금증이 더 커졌다는 거다.

 

저자가 1970~1978년까지 보낸 시간의 기록이다. 미국 몬태나와 일본 도쿄에 머물던 그의 시간에 많은 에피소드를 남겼다. 미국과 일본에 머물던 그의 시간은 그리 밝은 분위기로 전달되지 않는다. 하지만 삶의 민낯을 보는 느낌은 오히려 그의 문장들이 더 가깝게 와 닿게 한다. 인간이 느끼는 감정을 때로는 상황에 맞게 포장해야 할 때도 있고, 침묵해야 할 때도 있는데,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있는 그대로 말해도 되는 순간들을 목격한 것만 같다. 이런 기분, 이런 쓸쓸함을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편안함 같은 거 말이다. 왜 굳이 두 도시(실제로는 두 도시의 이야기만은 아니지만)의 시간일까 싶었다. 그는 미국이 자유주의 정신을 잃었다고 하면서 일본에서의 문화적 차이를 말한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도 변함없는 건 인간관계에서 보는 여러 가지 감정들과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 나이 들어가는 슬픔을 언급한다. 그러다가 결국 우리는 죽음을 맞이하겠지.

 

때로는 우리가 그곳에 존재할 수 없는 날도 있는 법이다.

눈을 뜨기도 전에 사라지는 날. (99페이지, 우리가 눈을 뜨기도 전에 사라지다)

 

살아가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생의 화두를 그만의 분위기로 이끌어 가는 이야기가 소박하면서도 즐겁다. 다양한 소재가 일상을 꽉꽉 채운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의 생각들을 쏟아내는 걸 멈추지 않는다. 그가 새로운 세계로 맞이하고자 떠났던 일본은, 그의 생각만큼 삶을 채워주지는 못한다. 낯선 외국 생활이 그의 상실과 갈망을 해소해줄 거로 믿고 떠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겪은 이국에서의 삶은 그를 더 공허하게 했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또 인간관계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수도 없이 만나는 인연들 사이에서 내 곁에 영원히 머무는 이는 없다. 가장 먼저 맺은 인연인 가족도 언젠가는 이별하지 않는가.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그렇게 영원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매 순간 또 다른 인연을 맺을 준비를 하고 또 맺어간다. 그러면서 또 잃어가고 얕아지는 것처럼 스치는 인연에 공허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 책에서 풀어내는 그 관계의 흐름도 비슷하다. 저자는 우연히 술집에서 만난 여자와 다시 만날 약속을 하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연극 무대에서 본 노인 분장의 배우 얼굴에서 노년의 쓸쓸함을 느낀다.

 

수록된 131편의 글에서 풍기는 서늘함이 오히려 저자를 애틋하게 바라보게 한다. 누구나 비슷하게 갖는 감정 앞에서 한 번쯤은 이렇게 속 시원하게 털어놓고 싶은 순간 있지 않을까. 누가 대꾸하지 않아도 좋으니, 하고 싶은 말 거르지 않고 한번 다 꺼내놓고 싶은 마음이 폭발할 때. 아마도 저자는 그런 작은 순간들의 소소한 기록들이 이 책 하나로 뭉쳐 거대한 감정을 쏟아낸 건지도 모르겠다.

 

앞서 출간된 저자의 작품들을 완독하지 못해서, 그의 작품이 꽤 어렵다는 생각만 했다. 왜 이렇게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을까, 이 이름을 한 권쯤 완독하고 싶은데 언제쯤 가능할까 싶어서 항상 궁금했던 작가였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오히려 읽다가 만 그의 작품들을 읽을 마음이 생겼다. 소설과 에세이의 중간쯤으로 보이는 이 책의 짧은 이야기들이 그의 생각이나 하고 싶은 말을 더 가깝게 들리게 한다. 아마 읽다가 만 그 순간보다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그가 하고 싶은 더 많은 말을 담은 것만 같은 그의 장편을 제대로 읽어볼 용기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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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행 기차를 타려고 여행 가방을 꾸리는데 하루가 꼬박 걸렸다. 이걸 넣었다가 저걸 뺐다가. 필요한 건 또 왜 이렇게 많은지, 줄이고 줄여도 캐리어 하나가 꽉 찼다. 여름이라 옷도 가벼울 것이고, 겨우 열흘인 데다가 동생네 집에 가는 것이라 따로 숙박에 필요한 게 필요 없는 데도 이랬다. 사실 예전에 비하면 그래도 돌아다니는 편이지만, 어딘가로 떠나기 위해 여러 가지 준비하고 계획하고 돌아다니는 게 귀찮아서 웬만해서는 여행이란 단어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여름에는 더더욱 그랬다. 그런데 점점 그 귀차니즘을 떨치게 하는 감정이 생겼다. 이제야 어딜 좀 돌아다닐 시간이 생긴 엄마와 조금씩 서로에게 다가가고 싶은 가족의 마음이, 같이 어딘가로 갈 계획을 세우고 얼굴 보고 만나는 일을 많아지게 한다. 몸은 귀찮고 힘들지만, 함께하는 시간과 어딘가로 향하는 마음은 귀찮음과는 다른 뭔가가 꽉 채워지게 한다.

 

아마 이 자매에게도 비슷한 마음이 세계여행을 즐기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현재의 여기서 뭔가를 더 하고 싶은 마음, 항상 갈증이 나듯 마음 한구석에 자리한 세계여행이라는 꿈, 더 넓은 세계의 여러 곳을 가슴에 담아두고 싶은 바람 같은 거 말이다. 그래서 스물다섯, 서른 살의 자매는 떠났다. 24개국 52개의 도시를 누비는 모습이 활자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걷고, 보고, 느끼는 그대로 사진과 문장에 담겼다.

 

역시, 하고 싶던 일을 한다는 건 너무너무 행복한 일이다. 여행을 할수록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체크해가고, 그만큼 새로운 리스트가 생겨난다. 세계로 한발씩 나아갈수록 더 큰 세계로 나아가고 싶은 내가 보였다. 우리는 그렇게 계속 여행을 해야 하는 이유들을 만들고 있었다. (85페이지, 프라하)

 

여행이란 혼자 하는 것도 힘들지만, 마음 맞는 이와 함께하는 건 더욱더 어렵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함께 살지 말라는 말과 비슷하게 들렸다. 더군다나 집 떠나면 마주치게 될 온갖 일들이 몸과 마음을 피곤하게 할 텐데, 일행에게 항상 좋은 모습만 보여줄 수는 없다. 불평과 불만이 쌓이고, 일정의 변경에 일행의 눈치도 봐야 한다. 내 맘대로 결정하고 수정하는 일이 쉽지 않다. 이 자매의 여행도 다르지 않았다. 같이 준비하고 같이 떠나는 것까지는 좋았다. 세계를 누비는 상상에 많이 설레며 여행 준비를 했을 것이다. 첫 챕터로 넣은 '떠나기로 하다'를 읽다 보면 그 설렘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떠나기로 마음먹고, 한국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고,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이 머릿속에서 그려진다. 읽으면서 같이 두근거렸다. '아, 역시 여행은 떠나기 전이 가장 행복해!' 하면서. ^^ 이 자매의 여행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 행복은 조금씩 사그라진다. 낯선 곳을 향하는 마음의 불안과 계획대로 되지 않은 순간들의 당황과 일정을 수정하면서 계속 나아가는 일이 가능할까 싶은 염려 때문에 무슨 추리소설을 읽는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결국 자매의 계획대로 계속 나아가며 도착한 여러 나라와 도시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그런 불안과 걱정쯤은 넣어두어도 좋을 것 같다. 일단 부딪히면 어떻게든 가능해지는구나 싶은 이상한 긍정 마인드가 생기니까 말이다.

 

 

자매의 여행을 지켜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라. 세계여행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누군가는 한 번쯤 꾸어보는 꿈이지만, 노트에 한 번쯤 적어보기도 하지만, 거기서 머무는 경우가 많다. 머릿속과 적어놓은 노트 밖으로 쉽게 튀어나오기 어렵다. 그래서 부러웠다. 막상 기회가 주어지거나 멍석을 깔아주어도 선뜻 그 여행길에 오르기를 주저하게 되겠지만, 스스로 마음먹고 준비하면서 세상에 부딪히는 이 여행의 모든 것이 혹시 꿈은 아닐까 싶어서 계속 들여다보게 된다. 그만큼 이들의 여행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질투였을까? '이거 실화냐?' 싶은 느낌말이다. 아마 조금 더 격하게 부러웠다면, 부러움이 아니라 질투라는 감정이 피어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여행하면서 그 긴 여정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그걸 가능하다고 보여준 자매의 모습도 눈에 담고 싶었다. 낯선 곳에서 부딪히면서 다시 감정 추스르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게 감정적으로 쉽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여행이 주는 성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배려와 양보가 생기는 모습이 괜히 엄마 미소가 지어졌다. 아마 이 경험을 함께하면서 자매는 더 돈독해졌으리라.

 

그리고 대부분 사람이 언젠가 이루고 싶은 바람으로만 넣어둔 계획을 실행했다는 게, 책의 뒷부분에 적어놓은 이들의 여행 경비를 보면서도 부러웠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마음만 먹으면 가능한 계획이고 금액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금액을 넘어서서 시간이라는 제약도 이 여행을 불가능한 버킷리스트로 머물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200일이 넘는 기간이라는 시간과 이들이 사용한 금액은 웬만해서는 쉽게 계획할 수 있는 금액은 아니다. 각자가 모아둔 돈으로 여행길에 나섰겠지만, 현실 속의 우리는 이 금액으로 다른 일을 더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이 자매가 그 기간에 걸은 여러 나라와 도시들이 건네준 많은 경험은 가장 부러운 일이 아닐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고, 오직 머릿속에 저장해둔 사람만이 꺼내어 사용할 수 있는 그 경험, 자기만의 인생에 뭔가 굉장하고 단단한 주춧돌이 다져진 느낌.

 

 

이러한 경험이 쌓이고 쌓여 위기를 극복하는 나만의 노하우가 생긴다. 예를 들면, 길을 헤매지 않기 위해 교통수단과 티켓 사는 방식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다음 나라로 출발하는 것, 구글 지도를 이용하여 버스 시간을 체크하고 빠르게 이동하는 것. 이렇게 미리 준비하면 길에서 보내는 시간을 단축하고 체력 소모도 줄일 수 있다. 그럼에도 여행에는 언제나 변수가 따르기 마련이라 순조롭지만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경험을 통해 나 자신이 더 단단해질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163페이지, 취리히)

 

세계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녀야 알찬 여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종종거리며 돌아다니지 않고 하루를 몽땅 쉬는 데 쓰거나 특별한 일정 없이 시장 안을 어슬렁거리며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나도 모르는 새 그 나라에 스며들듯 느리게 여행하는 법을 알아가고 있었다. 바쁘게만 살아온 나에게는 큰 변화이지만, 난 이 변화가 아주 마음에 든다. (281페이지, 쿠스코)

 

여행지에서의 첫날이 아니라, 처음 여행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과정부터 들려준다. 왜 이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어떤 준비와 계획으로 이 여행을 더 완벽하게 해냈는지 알 수 있는 시작이었다. 러시아를 시작으로 동유럽, 영국, 미국, 남아메리카, 아시아 등 자매가 다닌 곳곳에서 마주친 세상의 모습은 앞으로 이 자매가 살아갈 세상의 많은 일에 엄청난 힘이 될 것 같다. 여행이 왜 필요한지 우리가 왜 세상의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살아가야 하는지 증명하는 것처럼, 자매가 누빈 세계의 풍광들이 설렘으로 다가온다. 여행을 떠나기 전의 설렘과는 다른 크기의 두근거림이었다. 어떤 사진들은 마치 그려놓은 것처럼, 너무 아름다워서 현실적이지 않을 정도였다. 세상에 이렇게 상상하지 못한 곳이, 아직 보지 못한 아름다운 곳이 너무 많구나 싶어서 슬퍼지기도 했다. 어쩌면 많은 사람이 이 슬픔을 없애려고 세상의 곳곳을 찾아다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책 속에 담긴 사진을 보면서 여행의 이유와 필요성을 하나 더 찾았다. 특히 저자의 취미인 카페 투어는 여행의 목적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는데, 가는 곳곳마다 카페의 분위기와 커피는 아마 저자의 또 다른 보물 1호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여행 준비부터 여행을 떠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까지 거의 400여 일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방문한 나라와 도시에서 실수하기 쉬운 여행 팁과 조금 더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는 여행 루트, 교통과 비용까지 해서 마지막 장에 잘 정리해두었다. 나도 처음 듣는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었는데, 언젠가 그 나라로 떠나지 않더라도 그 나라의 특징을 이해하는 내용이 될 것 같다.

 

 

넓은 세상으로 당차게 나아가는, 하지만 돌아오는 여행의 끝에는 자기만의 세상을 하나 만들었을 이야기다. 부러움마저 즐거워지는 여행기다.

 

문득 이 감사함을 느끼고 싶어서 여행을 택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대단한 무언가를 이뤄야만 만족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행을 떠나온 지금은 이렇게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사람들의 웃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꽉 찬다. 이렇게 변해가는 내 모습이 좋다. (139페이지, 차브타트)

 

세계여행이 끝나고 현실로 돌아오자 나를 둘러싼 외부적인 요인은 여전했다. 바뀐 건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나의 인생이 얼마나 행복해졌느냐' 하는 내부적인 요인을 생각해본다면 굉장한 변화가 있다. 엄마가 요리해주시는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따뜻하고 깨끗한 침대에서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음에 감사하다. 사소한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나 자신으로 변화된 것이다. (417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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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변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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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 보면 내 심장이 뛰어...”

어느 드라마나 영화, 혹은 소설에서 흔히 보이던 로맨스였다. 누군가의 심장을 이식받은 여자(남자)가 어느 이성을 보고 갑자기 심장이 뛴다는 설정. 알고 보니 그 이성은 이식받은 심장의 원래 주인과 상당한 인연을 맺고 있었다는 것. 사실 그런 설정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보면서도, 어쩌면 과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한다고 해도, 살아가면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인간이라는 게 참 신비한 존재이기도 하니까. 누군가의 심장이 내 몸 안으로 들어와 그 사람이 살아있을 때와 같은 감각을 느끼고 성향을 지니는 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성립되기도 할 것 같다. 하지만 그게 심장이었을 때 이야기다. 하트 모양을 닮았다는 심장이 사랑을 바탕으로 일어나는 일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우리 머릿속의 뇌를 이식해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까? 누군가와 마주쳤을 때 어디선가 본 것 같고, 기억이 날 것 같은 이상한 느낌말이다.

 

청년 나루세는 어느 날 부동산에 갔다가 강도에게 총을 맞는다. 사경을 헤매다 깨어난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그는 자기가 살아있음에 놀라워한다. 머리에 총을 맞고 살아난 사람이 과연 있을까? 알고 보니 그는 의료진에 의해 뇌의 일부분을 이식받았다. 공여자가 누구인지 알 수는 없다. 그가 총상으로 잃은 뇌의 일부분을 공여자의 뇌에서 꺼내와 이식받은 것만 안다. 사경을 헤매다 살아났고, 잃어버린 뇌의 일부분도 채워졌다. 그는 사고가 나기 전의 상태와 똑같아졌다. 이제 몸을 추스르고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면 된다.

 

생각해본 적이 없다. 뇌를 이식한다? 신체의 다른 부분도 아니고 뇌가 이식 가능한 대상이었던가? 의료나 과학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어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뇌는 인간의 심장보다 더 어려운 존재라고 생각했다. 작은 시경 하나도 건드리는 게 어려워서 웬만한 뇌수술은 피해 가는 진단이 내려지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런 뇌의 일부분을 이식받은 환자는 어떻게 될까? 나루세의 몸은 전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조금씩 그의 감정적인 부분이 변화한다. 좋아하던 그림은 점점 멀리한다. 연인 메구미의 품에서도 안정되지 못한다. 소심하다고 할 정도로 차분했던 그의 성격은 점점 하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폭력적으로 된다. 그리고 천재적인 음감을 나타낸다. 피아노 근처에도 가본 적 없던 그가 피아노의 조율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음감에 뛰어나다.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는 일에도 주저하지 않고 말한다. 타인과의 융화가 아니라, 자기 자신만의 기준으로 세상과 사람을 보면서 자꾸만 어긋난다. 자꾸만 과거의 자기 모습을 잃어가는 나루세는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하루하루 변하는 자기 모습을 기록한다. 오늘은 어제와 얼마나 달라졌는지, 내일 다시 이 일기를 보면 또 무엇이 달라져 있을지 두렵다.

 

이상하다. 수술 이후로 전에 없던 성향이 나타나는 자기 몸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 없을 거다.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가 어려워지기까지 하니, 이건 사회에 해를 끼치는 괴물을 격리하거나 사살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런 변화를 누구보다 자기가 더 잘 알게 되니 두려움을 점점 커질 수밖에.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뇌의 이식은 앞으로의 인생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칠까? 이대로 변하는 것을 받아들여도 괜찮은 걸까?

 

소설의 중간에 등장하는 기록들은 이 소설을 더 궁금해하고 빠져들게 한다. 아직 다 드러나지 못한 기록의 실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파헤쳐보고 싶어진다. 그만큼 페이지가 빨리 넘어가서 결말에 다다르기도 한다. 작가의 인터뷰에서 이 소설의 플롯이 거의 15분 만에 완성되었다는 걸 듣고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읽히는 이유가 이해되기도 했다. 그만큼 작가 자신도 15분 만에 완성된 플롯에 푹 빠져서 미친 듯이 소설을 완성했으리라는 예상 때문이다. 그러면서 평소에도 가끔 궁금했던 그 질문을 떠올린다.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심장일까, 뇌일까. 감정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일에는 심장이 주관하겠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일에는 뇌가 주관하는 일일 텐데, 인간의 일상과 세상이 어떻게 그 둘 중의 하나로만 판단하면서 나아갈 수 있겠는가. 그래서 가슴과 뇌는 하나인 것처럼 세트로 묶여 인간사를 주관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이 소설에서 마주하는 나루세의 변화는 인간이 추구하는 완벽함이 어디까지 가능한지 묻고 싶게 만들기도 한다. 인간의 부족한 부분, 결여된 부분을 채워 넣는 일이 필요한 일인지, 그렇게 채워 넣고 만족할 수 있는지를. 인간이 살면서 한 번쯤 마주치는 죽음이란 순간을 받아들이는 건 어떤 결정에 의해서일까 계속 묻게 된다. 정말로 뇌 이식이 가능해진다면, 나는 나의 뇌가 온전하지 못할 때 이식을 선택할 수 있을까? 타인의 뇌가 일부분이라도 내 안으로 들어온다면, 그때부터 살아가는 나는 진짜 나일까 아닐까? 나루세에게 이식된 뇌는 극히 적은 부분이었다. 총상으로 소실된 뇌의 한 부분을 이식한 것뿐인데, 수술 이후의 나루세는 점점 원래의 자기 모습을 잃어간다. 이식된 뇌의 주인에게 지배당한다. 그럼 나루세는 이제 나루세가 아닌 게 되는 건가?

 

"당신은 몰라. 뇌를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고 지껄이는 당신은 말이야. 뇌는 특별한 거야. 당신이 상상이나 할 수 있어? 오늘의 나와 어제의 내가 달라. 내일 눈을 뜨면 거기 있는 건 오늘의 내가 아니지. 먼 과거의 추억은 전혀 다른 사람 것이 되고 말지. 그렇게밖에 느껴지지 않아. 오랜 시간을 들여 남겨온 것들이 모두 사라져버려. 그게 어떤 건지 아나? 가르쳐줄까? 그건……" 나는 도겐의 코 바로 앞에 검지를 들이댔다. "그건 죽음이야. 살이 있다는 건 그저 숨이나 쉬고 심장이 뛰는 게 아니야. 뇌파가 나온다고 살아 있는 게 아니라고. 산다는 건 발자국을 남기는 거지. 뒤에 남은 발자국을 보며 저건 분명히 내가 낸 거라고 알 수 있어야 살아 있는 거야. 하지만 지금 나는 예전에 남긴 발자국을 봐도 내 것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 이십 년 이상 살아온 나루세 준이치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고." (270페이지)

 

범인을 찾아야 하는 추리 소설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마주하는 인간의 모습과 변화, 도덕과 윤리적인 문제와 상충하는 의료의 연구는 어디서 그 중심을 잡아야 하는지 고민하게 한다. 사소한 부분의 더하기 빼기로 이루어진 일의 결과는 절대 사소하지 않았다. 한 사람의 인생을 쥐고 흔들며, 나아가 세상의 선과 악을 논하는 사고의 존재로 남게 되었다. 내가 나로 살아가는데 무엇이 우선되어야 하는지 묻게 하는 소설이다. 신체의 부족한 부분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하는지, 그 부족한 부분을 타인의 것으로라도 채워 넣어서 원래의 모습으로 만들어 살아가야 하는지. 그렇게 만들어진 나는, 나일까 아닐까.

 

솔직히 지금이야 이런 설정이 그럴 수도 있는 일 중의 하나로 여길 수도 있지만, 작가가 이 작품을 거의 이십 년쯤 전에 썼다고 하니 아마 그때 이 소설을 마주했다면 굉장히 놀랍고 신선한 작품으로 기억할 것이다. (사실 출간 때 읽었는데 기억이 안 나서 잠깐 헤매기도 했음. ㅠㅠ) 다양한 소재와 시도로 언제나 독자에게 즐거움을 주는 작가로 기억될 것 같아서 이 작가의 작품을 계속 찾아서 읽게 된다. 요즘 나오는 작품들은 개정판이 많지만, 영화가 리메이크되면서 지금 세대가 몰랐던 이야기를 다시 전하는 것처럼 소설도 마찬가지일 거로 생각한다. 십 년을 훌쩍 넘어 다시 태어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이 요즘의 독자에게도 사랑받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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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하고 게으르게
문소영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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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 방 하나를 그려봤다. 방안의 한 면에는 책장에 책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고, 다른 한 면에는 많은 영화의 DVD가 진열되어 있다. 나머지 한 면에는 그림과 영화와 공연 포스터가 차지하고 있는 방이 될 거다. 그 방 안에 들어가면 심심할 시간이 없겠지. 책 한 권 꺼내 읽다가, 그 책의 한 문장에 꽂혀 연상되는 영화 한 편을 꺼내 보고, 영화의 한 장면에서 떠오르는 그림을 보기도 하는 어떤 시간. 생각하는 많은 일과 누군가와 함께 얘기하고 싶은 온갖 주제가 그 방안에서 터져 나올 것만 같다. 누군가의 이야기에 불합리한 상황을 문제 삼고, 친구의 고민에 같이 고민하게 되는 공감의 순간을 떠올리고, 역사의 한순간을 그려낸 화가의 일생을 생각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쉽게 바뀌지 않는 일들에 여전히 한 손을 얹어놓고 애쓰는 다짐들을 굳건히 하게 되는 공간. 아마도 그 방은 현실과 상상 그 사이에서 삶의 모든 것을 생각하게 되는 공간일 것 같다. 저자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 방을 계속 그리게 된다.

 

사실 미술과 디자인 같은 분야에 많은 이력을 가진 저자의 이름에서 이런 책을 만날 줄은 몰랐다. 그림에는 워낙 문외한이라, 아무리 조금씩 알아가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누군가가 전문적인 지식으로 풀어놓은 글을 읽는다는 게 아직 힘들다. 저자가 들려주는 대부분의 이야기가 그런 쪽은 아닐까 싶어서, 끝까지 이 책을 읽을 수나 있을까 걱정부터 했다. 기우였다. 조금 과장해서 말해도 된다면, 요즘 이렇게 재미있게 읽은 책 드물었다. 배달된 작은 상자 하나를 열었더니 온갖 것이 튀어나오는데, 그렇게 튀어나오는 게 끝이 없다. 이야기가 다양해서 지루할 틈이 없었다는 말이다. 현실에서 마주하는, 세상을 보는 많은 시선을 다양하게 들려준다. 상상 조금 보태서 세상을 향한 새로운 시선을 만드는 것도 즐거웠다. 스스로 게으른 사람이라고 칭하면서, 저자가 보는 많은 것이 게으름과는 거리가 멀더라. 정말 게으른 사람은 이렇게 많은 책, 영화, 그림 등을 접하지도 못할뿐더러, 그렇게 바라보는 많은 것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꺼낼 수조차 없으리라.

 

게으르게, 불편하게, 엉뚱하게, 자유롭게, 광대하게, 행복하게. 총 6개의 챕터로 나뉜 이야기들에 저자가 바라보는 예술 작품, 작가들, 주변 사람, 작가의 경험이 녹아들어 있다. 처음에는 늦게 꽃핀 대가들의 소개에서 대기만성 위대한 인물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그런 인물들이 있으니 우리도 언젠가 '늦게 꽃핀' 무언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에 웃으면서도 골똘히 생각하게 되더라. 뭐랄까. 무엇이든 꾸준히 하다 보면 어떤 결과를 마주하게 되기도 하는 순간이 오지 않는가. 미쳐야 미친다고, 바라던 일을 계속하다가 다다른 어떤 목적지가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기대가 생기는 이상한 심리가 발동한다. 물론 저자도 자신의 게으름을 미워하지 않고 '늦게 꽃핀' 이들을 생각하면서 앞으로의 인생에서 뭐가 더 채워질지 상상하고 있지 않을까? 그저 늦게 이름을 알린 예술가와 작품들의 이름 정도로만 알고 있던 대상에서 다른 시선을 읽게 된다는 게 이런 재미구나 싶다. '그래, 이런 사람들도 있었는데, 혹시 나도?' 하는 인간의 묘한 심리 말이다. ^^ 허무맹랑한 시도와 도전이 아니라, 간절히 바라는 것들을 떠올리며 계속 나아가고 싶은 이들에게 이보다 더한 응원과 위로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읽다가 더 마음에 들었던 건, 우리가 오해하는 작품의 해석을 다시 해주는 부분이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 나는 이 시의 완전체를 몰랐다. 그저 유명한 구절 몇 부분만 기억하는 정도다. 나도 저자의 지적처럼 이 시의 흐름을 오해했던 거다. '가지 않은 길'이 다른 사람이 가지 않은 길을 내가 가야 한다고 '으쌰으쌰'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내가 가지 않은 길이었던 거다. 타인과 비교하면서, 그들이 가지 않을 길을 내가 가서 정복하는 성공의 과정이나 목적지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 시는 타인의 시선 따위 상관없이, 오직 자기 자신과의 문제였다. 갈라진 두 길 앞에서 우리는 오직 한길로만 갈 수 있으며, 내가 가지 않은 길은 언제나 궁금하고 미련이 남기 마련이라는. 그러니 우리가 어떤 길로 가더라도, 가지 않은 다른 길에 대해 아쉬움은 항상 품고 살아간다는 말 아닐까 싶다. 타인과 연결하여 비교 대상이 되는 게 아니라, 그냥 나 자신만 바라보고 원하는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저자는 조지 이네스의 그림 <몬트클레어, 11월>을 시와 함께 떠올린다. 마치 숲속의 두 갈래 길에 서서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망설이는 듯하다고.

 

조지 이네스 / 몬트클레어, 11월 (1893)

 

우리의 인생도 이런 망설임과 선택의 연속일 것이다. 그리고 어느 길을 택하든, 가지 않은 길은 그 미지로 인한 신비와 아쉬움을 황홀한 안개처럼 두르고 저 멀리에 있을 것이다. (51페이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오해)

 

'내가 가진 것들'이 있다고 해서 '내가 갖지 못한 것들'에 대해 그저 입을 다무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자 혼자 안심하고 돌아다닐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비유럽계 인종들이 인종차별 받지 않고 돌아다닐 세계를 만들기 위해, 나는 내 불편함을 말해야 한다. 비록 그 변화가 산을 숟가락으로 떠서 옮기는 일 같더라도……. (59페이지, 프로불편러가 될 수밖에)

 

명절에 대한 기원을 듣고 심하게 놀랐다. 지금까지 알던 명절은 가족이 모여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는 날이라고 알았다. 열심히 명절 음식 만들고 먹으면서 연휴를 보내고, 귀경길에는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와야 하는 날. 그러니 명절이 재미있고 즐거울 수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저자를 통해 듣게 된 명절의 기원은 차례 음식 준비하면서 보내는 오늘날의 명절과 달랐다. 기록에 따르면, 사월 초파일에는 연등 행사로 볼거리가 풍성했고, 구경꾼들이 온 거리를 채우는 광경이었다고 한다. 추석도 본래는 축제일이었다고, 닭 잡고 술 빚어 온 동네가 취하고 배부르게 먹는 날이었지, 조상의 제사상 차리는 게 주된 행사가 아니었다고. 차례상도 몇 가지 음식이 올리고 간소했다고 한다. 다 함께 먹고 놀고 즐기는 날이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거한 차례 음식 만드느라고 허리 한번 펴지 못하는 날이 되었을까? 명절의 의미가 어떻게 왜 변했는지까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의 모습대로 명절이 계속된다면 아마 '다 함께 먹고 놀고 즐기는' 순간은 절대 오지 않을 것 같다.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누군가는 편하게 먹고 놀고 쉬는 날이 된다면, 언젠가는 파국에 이를 것이다. (차 파국을 불러와~) 거기에 안부를 묻는다면서 계속되는 말과 또 한 번 타인의 시선에 공격당한다면, 더는 명절의 의미는 사라질 것 같다.

 

안중식 / 평생도 과거 급제 부분 (조선 후기)

 

안중식의 그림 <평생도>와 김홍도의 <평생도>로 한국인의 비교 강박의 기원을 찾기도 한다. 몇 폭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것은 탄생부터 결혼, 과거 급제, 고관이 되어 행차, 회혼례로 이어지는 인간의 생애였다. 마치 성공한 삶은 이런 것이라고 증명이라도 하듯, 모든 인간의 삶과 성공이 이렇게 흘러가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생김새부터 태어나서 자라는 환경까지 제각각인데, 세상이 증명하고 판단하는 삶의 흐름은 왜 이렇게 한 가지로 통일되어야만 하는 걸까. 이렇게 살아가는 것만이 최상의 생애라는 거라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 불편하다. 그렇게 탄생한 '엄친아'라는 단어는 오랜 세월 우리 사회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지금도 디테일한 내용만 조금 첨가되고 변화되었을 뿐이지 여전히 우리 곁에서 비교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통해 어머니의 정의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나는 소설로 이 내용을 접했는데, 이들의 감정을 다 이해할 수 없어서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소시오패스 아들과 그 아들이 저지른 범죄의 결과를 책임져야 하는 부모의 처지를 생각했다. 그러면서 자꾸만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는 어때야만 하는지 묻게 된다. 그런데 저자는 아들보다는 엄마의 이야기로 이 영화를 해석한다. 엄마는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어떤 엄마가 가장 보편적이고 평균적인 모습인지 되묻는 것만 같다. 이제까지 우리가 상징하는 엄마는 어떤 모습이었던가? 자식에게 희생하고, 당신 인생보다 아내와 엄마의 역할이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순간 없었던가? 대개 그렇게 생각하는 엄마의 모습이 많았을 거다. 무조건 자식 뒤에서 자식의 수호신처럼 보호해야 하는 존재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엄마는 다르다. 원하지 않은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의 성장에 무관심하지 않다. 케빈이 죄를 저질렀을 때도 맹목적으로 아들 편을 들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아들의 죄에 관한 부모의 책임을 다한다. 케빈의 엄마는 감정이 없는 사람일까? 아니다. 그녀에게도 자식에 대한 개념이 있다. 단지 우리가 그동안 고정관념처럼 쌓아왔던, 자식에게 맹목적이고 희생이 우선시되었던 엄마의 모습이 아니었을 뿐이다. 조금은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엄마와 아들 사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태도였다. 이런 케빈의 엄마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저자도 이 부분에서 엄마의 존재와 의미에 대해 생각한 듯하다. 남자에게 엄마의 심장을 가져다 달라고 하는 여자 이야기('어머니의 심장이야기'가 싫다)를 들려주는 부분과 닮았다. 어머니를 살해하고 그 심장을 여자에게 갖다주려고 뛰면서 떨어진 어머니의 심장이 말한다. "얘야, 괜찮으냐. 다치지 않았니." 듣다 보면 억지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동을 뿜어냈다. 이런 엄마가 어디 있느냐며, 엄마는 죽어서까지 자식을 위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저자는 이 이야기 듣기 불편하다고 했다. 나도 그렇다. 내가 아무리 엄마를 사랑해도 나의 모든 것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엄마에게도 자식을 위해 양보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라는 게 있을 것이다. 그게 사람이다. 그게 인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는, 엄마이기 전에 한 인간일 뿐이다.

 

엄마와 자식의 관계는 가장 원초적인 인간관계다. 설령 미래에 결혼제도가 사라진다 해도 존속될 것이다. 그래서 모성의 진화와 그에 대한 탐구는 계속되어야 한다. (117페이지, 새로운 어머니에 대하여)

 

저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제각각의 인생을 걸어온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어떤 결말로 도착할지 궁금해지곤 했다. 이렇게 누군가의 이야기만 들려주면서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전달하려는 걸까? 저자는 '광대하고 게으르게'라는 모순되게 들리는 삶의 자세로 어디에 도착하고 싶은 걸까? 차근차근 듣다 보면,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은 저자의 말은 우리가 일상에서 매일 마주하는 일들과 다르지 않았다. 한쪽에서 굶어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먹방의 인기는 무엇을 더 생각해야 하는지 묻기도 하고, 욕을 먹으면서까지 셀럽이 되어야만 하는 요즘 세상의 흐름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저출산의 문제를 다양한 시선으로 계산하는 이들이 범하는 오류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흥미롭게 들려준다. 사실 이 저출산 문제는 어느 한 사람의 문제로 시작된 것도 아니고, 누구 한 사람의 노력으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낮은 혼인율과 저출산의 문제는 개인의 선택이기도 하겠지만, 사회적 문제라는 게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거 아닐까. 결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개인의 만족이 미혼일 때보다 크다는 계산이 있어야 결혼과 출산이라는 인생 계획을 생각할 텐데, 가사와 육아 같은 돌봄 노동이 저평가되는 현실에 발생하는 문제도 심각하다. 저자의 말처럼 뼈있는 경제학 농담으로 저출산 문제의 심각성을 들여다보는 방법도 의미가 있다.

 

사회적 차원에서의 자유와 선택의 공허함에 대한 문제, 자본이 없고 선택을 학습할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유가 주어져 있는데 왜 못해'라고 하는 문제는 사회 제도로 보완하고 해결해야 할 일이다. 『멋진 신세계』를 떠오르게 한 푸념을 했던 경제학 교수 친구는 그런 문제들을 연구한다. 그는 자유의 개인적, 사회적 피로를 잘 알고 있지만, 또한 여전히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있기에, 자유를 지키면서 자유의 피로를 줄일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나도 그렇다. 그러기 위해서 종종 우리는 '멈추어 집중'해야 한다. (192페이지, "뭐든지 될 수 있어"의 피로와 뜻밖의 위로)

 

인생, 삶이, 세상이, 참 아이러니하다. 노력하면 원하는 것만 취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더라는 걸 우리는 안다. 복과 화는 쌍둥이처럼 항상 같이 다니기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화를 피하고 복만 맞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인생에서 어느 순간 마주칠지도 모를 온갖 상황들을 부딪치면서 살아가야 한다. 불평등과 불이익을 마주하고 싸우기도 한다. 불편하다는 말을 소리 내어 해야 하는 순간도 많다. 피해 가지 말아야 한다는 걸 새삼 새기고 싶어지게 하는 저자의 이야기들에 공감하게 된다. 우리 살아가면서 타인과 세상을 질투하고 미워하기도 하지만, 사랑하고 아끼며 함께하고 싶은 순간이 더 많지 않을까? 영화 <코코>의 주인공들이 기억하는 시간은 삶의 의미였고 행복이었을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찾으며 유한의 시간에 행복을 누리라고 했다. 늘 거기 있을 거로 믿었던 소중한 사람이나 장소는 예기치 못한 시간에 사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더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싶은 게 아닐까 싶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영원하지 않기에, 괴로운 것보다 즐거워질 수 있는 것을 찾아다니는 시간이 필요하다. 저자가 보여준 다양한 시선들은 그 즐거움을 채울 수 있는 시간을 만든다.

 

경쟁은 스트레스를 낳는다. 그래서 '행복 경쟁'을 하다 보면 '왜 행복해야 하나?'라는 질문까지 나오게 된다. 물론 불행하고 싶은 사람은 없겠지만, 불행하지 않은 것 이상의 행복을 추구할 필요가 있을까? 무엇보다도, 대체 뭐가 행복일까? (245페이지, 행복도 경쟁해야 하나요)

 

예술과 영화, 문학 작품으로 이렇게 다양하게 쏟아낼 수 있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은데, '게으르다'는 저자는 어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을까? 게을러서는 절대 나오지 못할 내용에 독자로서 한껏 즐기는 시간이었다. 저자가 챕터별로 언급해준 모든 이야기를 여기에 옮기고 싶을 정도로, 이 책 안에서 다양하고 깊은 시선에 곁들인 유쾌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마지막에 배치한 행복에 관한 이야기들에서는, 저자가 게으름(?) 때문에 한껏 행복한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빠르게, 타인보다 먼저, 많이 갖는 인생을 만들어가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 들려서 좋았다. 천천히 가다 보니 어느 순간 도착해 있더라, 하는 완성 같은, 영화 <일일시호일>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아, 부럽네. 이렇게 다양한 것을 보면서 만들어가는 또 다른 시선들. 가끔은 부끄러운 감정을 드러내면서 챙피해 하고, 대가가 되겠다며 게으름을 집어넣고 싶기도 하는, 특히 예술 작품을 보면서 현실에 들여놓은 시각을 읽어내는 방식들이 눈에 들어온다. 평소 음식에서 편식하듯 예술이나 문학, 영화에도 여전히 편식하는 내가, 저자가 들려주는 방식의 행복을 찾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으로 느낀 어떤 감각들이 나를 깨우는 것 같아서, 저자처럼 게으르지만 광대한 시선을 만나보려고 애쓰고 싶다. 어떤 날 마주하는 일상의 모든 이야기를 한꺼번에 들은 것 같아서 배가 부르다. 게으름과 닮은 느림이 어쩌면 행복을 더 가깝게 부르는 손짓일지도. 천천히 가도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 없다. 자기 속도대로,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

 

"계속 끄적거리세요! 뭔가가 일어날 겁니다. (Keep scribbling! Something will happen.)" (20페이지, 늦게 꽃핀 대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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