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하고 게으르게
문소영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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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 방 하나를 그려봤다. 방안의 한 면에는 책장에 책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고, 다른 한 면에는 많은 영화의 DVD가 진열되어 있다. 나머지 한 면에는 그림과 영화와 공연 포스터가 차지하고 있는 방이 될 거다. 그 방 안에 들어가면 심심할 시간이 없겠지. 책 한 권 꺼내 읽다가, 그 책의 한 문장에 꽂혀 연상되는 영화 한 편을 꺼내 보고, 영화의 한 장면에서 떠오르는 그림을 보기도 하는 어떤 시간. 생각하는 많은 일과 누군가와 함께 얘기하고 싶은 온갖 주제가 그 방안에서 터져 나올 것만 같다. 누군가의 이야기에 불합리한 상황을 문제 삼고, 친구의 고민에 같이 고민하게 되는 공감의 순간을 떠올리고, 역사의 한순간을 그려낸 화가의 일생을 생각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쉽게 바뀌지 않는 일들에 여전히 한 손을 얹어놓고 애쓰는 다짐들을 굳건히 하게 되는 공간. 아마도 그 방은 현실과 상상 그 사이에서 삶의 모든 것을 생각하게 되는 공간일 것 같다. 저자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 방을 계속 그리게 된다.

 

사실 미술과 디자인 같은 분야에 많은 이력을 가진 저자의 이름에서 이런 책을 만날 줄은 몰랐다. 그림에는 워낙 문외한이라, 아무리 조금씩 알아가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누군가가 전문적인 지식으로 풀어놓은 글을 읽는다는 게 아직 힘들다. 저자가 들려주는 대부분의 이야기가 그런 쪽은 아닐까 싶어서, 끝까지 이 책을 읽을 수나 있을까 걱정부터 했다. 기우였다. 조금 과장해서 말해도 된다면, 요즘 이렇게 재미있게 읽은 책 드물었다. 배달된 작은 상자 하나를 열었더니 온갖 것이 튀어나오는데, 그렇게 튀어나오는 게 끝이 없다. 이야기가 다양해서 지루할 틈이 없었다는 말이다. 현실에서 마주하는, 세상을 보는 많은 시선을 다양하게 들려준다. 상상 조금 보태서 세상을 향한 새로운 시선을 만드는 것도 즐거웠다. 스스로 게으른 사람이라고 칭하면서, 저자가 보는 많은 것이 게으름과는 거리가 멀더라. 정말 게으른 사람은 이렇게 많은 책, 영화, 그림 등을 접하지도 못할뿐더러, 그렇게 바라보는 많은 것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꺼낼 수조차 없으리라.

 

게으르게, 불편하게, 엉뚱하게, 자유롭게, 광대하게, 행복하게. 총 6개의 챕터로 나뉜 이야기들에 저자가 바라보는 예술 작품, 작가들, 주변 사람, 작가의 경험이 녹아들어 있다. 처음에는 늦게 꽃핀 대가들의 소개에서 대기만성 위대한 인물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그런 인물들이 있으니 우리도 언젠가 '늦게 꽃핀' 무언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에 웃으면서도 골똘히 생각하게 되더라. 뭐랄까. 무엇이든 꾸준히 하다 보면 어떤 결과를 마주하게 되기도 하는 순간이 오지 않는가. 미쳐야 미친다고, 바라던 일을 계속하다가 다다른 어떤 목적지가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기대가 생기는 이상한 심리가 발동한다. 물론 저자도 자신의 게으름을 미워하지 않고 '늦게 꽃핀' 이들을 생각하면서 앞으로의 인생에서 뭐가 더 채워질지 상상하고 있지 않을까? 그저 늦게 이름을 알린 예술가와 작품들의 이름 정도로만 알고 있던 대상에서 다른 시선을 읽게 된다는 게 이런 재미구나 싶다. '그래, 이런 사람들도 있었는데, 혹시 나도?' 하는 인간의 묘한 심리 말이다. ^^ 허무맹랑한 시도와 도전이 아니라, 간절히 바라는 것들을 떠올리며 계속 나아가고 싶은 이들에게 이보다 더한 응원과 위로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읽다가 더 마음에 들었던 건, 우리가 오해하는 작품의 해석을 다시 해주는 부분이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 나는 이 시의 완전체를 몰랐다. 그저 유명한 구절 몇 부분만 기억하는 정도다. 나도 저자의 지적처럼 이 시의 흐름을 오해했던 거다. '가지 않은 길'이 다른 사람이 가지 않은 길을 내가 가야 한다고 '으쌰으쌰'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내가 가지 않은 길이었던 거다. 타인과 비교하면서, 그들이 가지 않을 길을 내가 가서 정복하는 성공의 과정이나 목적지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 시는 타인의 시선 따위 상관없이, 오직 자기 자신과의 문제였다. 갈라진 두 길 앞에서 우리는 오직 한길로만 갈 수 있으며, 내가 가지 않은 길은 언제나 궁금하고 미련이 남기 마련이라는. 그러니 우리가 어떤 길로 가더라도, 가지 않은 다른 길에 대해 아쉬움은 항상 품고 살아간다는 말 아닐까 싶다. 타인과 연결하여 비교 대상이 되는 게 아니라, 그냥 나 자신만 바라보고 원하는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저자는 조지 이네스의 그림 <몬트클레어, 11월>을 시와 함께 떠올린다. 마치 숲속의 두 갈래 길에 서서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망설이는 듯하다고.

 

조지 이네스 / 몬트클레어, 11월 (1893)

 

우리의 인생도 이런 망설임과 선택의 연속일 것이다. 그리고 어느 길을 택하든, 가지 않은 길은 그 미지로 인한 신비와 아쉬움을 황홀한 안개처럼 두르고 저 멀리에 있을 것이다. (51페이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오해)

 

'내가 가진 것들'이 있다고 해서 '내가 갖지 못한 것들'에 대해 그저 입을 다무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자 혼자 안심하고 돌아다닐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비유럽계 인종들이 인종차별 받지 않고 돌아다닐 세계를 만들기 위해, 나는 내 불편함을 말해야 한다. 비록 그 변화가 산을 숟가락으로 떠서 옮기는 일 같더라도……. (59페이지, 프로불편러가 될 수밖에)

 

명절에 대한 기원을 듣고 심하게 놀랐다. 지금까지 알던 명절은 가족이 모여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는 날이라고 알았다. 열심히 명절 음식 만들고 먹으면서 연휴를 보내고, 귀경길에는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와야 하는 날. 그러니 명절이 재미있고 즐거울 수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저자를 통해 듣게 된 명절의 기원은 차례 음식 준비하면서 보내는 오늘날의 명절과 달랐다. 기록에 따르면, 사월 초파일에는 연등 행사로 볼거리가 풍성했고, 구경꾼들이 온 거리를 채우는 광경이었다고 한다. 추석도 본래는 축제일이었다고, 닭 잡고 술 빚어 온 동네가 취하고 배부르게 먹는 날이었지, 조상의 제사상 차리는 게 주된 행사가 아니었다고. 차례상도 몇 가지 음식이 올리고 간소했다고 한다. 다 함께 먹고 놀고 즐기는 날이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거한 차례 음식 만드느라고 허리 한번 펴지 못하는 날이 되었을까? 명절의 의미가 어떻게 왜 변했는지까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의 모습대로 명절이 계속된다면 아마 '다 함께 먹고 놀고 즐기는' 순간은 절대 오지 않을 것 같다.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누군가는 편하게 먹고 놀고 쉬는 날이 된다면, 언젠가는 파국에 이를 것이다. (차 파국을 불러와~) 거기에 안부를 묻는다면서 계속되는 말과 또 한 번 타인의 시선에 공격당한다면, 더는 명절의 의미는 사라질 것 같다.

 

안중식 / 평생도 과거 급제 부분 (조선 후기)

 

안중식의 그림 <평생도>와 김홍도의 <평생도>로 한국인의 비교 강박의 기원을 찾기도 한다. 몇 폭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것은 탄생부터 결혼, 과거 급제, 고관이 되어 행차, 회혼례로 이어지는 인간의 생애였다. 마치 성공한 삶은 이런 것이라고 증명이라도 하듯, 모든 인간의 삶과 성공이 이렇게 흘러가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생김새부터 태어나서 자라는 환경까지 제각각인데, 세상이 증명하고 판단하는 삶의 흐름은 왜 이렇게 한 가지로 통일되어야만 하는 걸까. 이렇게 살아가는 것만이 최상의 생애라는 거라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 불편하다. 그렇게 탄생한 '엄친아'라는 단어는 오랜 세월 우리 사회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지금도 디테일한 내용만 조금 첨가되고 변화되었을 뿐이지 여전히 우리 곁에서 비교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통해 어머니의 정의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나는 소설로 이 내용을 접했는데, 이들의 감정을 다 이해할 수 없어서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소시오패스 아들과 그 아들이 저지른 범죄의 결과를 책임져야 하는 부모의 처지를 생각했다. 그러면서 자꾸만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는 어때야만 하는지 묻게 된다. 그런데 저자는 아들보다는 엄마의 이야기로 이 영화를 해석한다. 엄마는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어떤 엄마가 가장 보편적이고 평균적인 모습인지 되묻는 것만 같다. 이제까지 우리가 상징하는 엄마는 어떤 모습이었던가? 자식에게 희생하고, 당신 인생보다 아내와 엄마의 역할이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순간 없었던가? 대개 그렇게 생각하는 엄마의 모습이 많았을 거다. 무조건 자식 뒤에서 자식의 수호신처럼 보호해야 하는 존재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엄마는 다르다. 원하지 않은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의 성장에 무관심하지 않다. 케빈이 죄를 저질렀을 때도 맹목적으로 아들 편을 들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아들의 죄에 관한 부모의 책임을 다한다. 케빈의 엄마는 감정이 없는 사람일까? 아니다. 그녀에게도 자식에 대한 개념이 있다. 단지 우리가 그동안 고정관념처럼 쌓아왔던, 자식에게 맹목적이고 희생이 우선시되었던 엄마의 모습이 아니었을 뿐이다. 조금은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엄마와 아들 사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태도였다. 이런 케빈의 엄마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저자도 이 부분에서 엄마의 존재와 의미에 대해 생각한 듯하다. 남자에게 엄마의 심장을 가져다 달라고 하는 여자 이야기('어머니의 심장이야기'가 싫다)를 들려주는 부분과 닮았다. 어머니를 살해하고 그 심장을 여자에게 갖다주려고 뛰면서 떨어진 어머니의 심장이 말한다. "얘야, 괜찮으냐. 다치지 않았니." 듣다 보면 억지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동을 뿜어냈다. 이런 엄마가 어디 있느냐며, 엄마는 죽어서까지 자식을 위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저자는 이 이야기 듣기 불편하다고 했다. 나도 그렇다. 내가 아무리 엄마를 사랑해도 나의 모든 것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엄마에게도 자식을 위해 양보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라는 게 있을 것이다. 그게 사람이다. 그게 인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는, 엄마이기 전에 한 인간일 뿐이다.

 

엄마와 자식의 관계는 가장 원초적인 인간관계다. 설령 미래에 결혼제도가 사라진다 해도 존속될 것이다. 그래서 모성의 진화와 그에 대한 탐구는 계속되어야 한다. (117페이지, 새로운 어머니에 대하여)

 

저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제각각의 인생을 걸어온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어떤 결말로 도착할지 궁금해지곤 했다. 이렇게 누군가의 이야기만 들려주면서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전달하려는 걸까? 저자는 '광대하고 게으르게'라는 모순되게 들리는 삶의 자세로 어디에 도착하고 싶은 걸까? 차근차근 듣다 보면,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은 저자의 말은 우리가 일상에서 매일 마주하는 일들과 다르지 않았다. 한쪽에서 굶어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먹방의 인기는 무엇을 더 생각해야 하는지 묻기도 하고, 욕을 먹으면서까지 셀럽이 되어야만 하는 요즘 세상의 흐름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저출산의 문제를 다양한 시선으로 계산하는 이들이 범하는 오류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흥미롭게 들려준다. 사실 이 저출산 문제는 어느 한 사람의 문제로 시작된 것도 아니고, 누구 한 사람의 노력으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낮은 혼인율과 저출산의 문제는 개인의 선택이기도 하겠지만, 사회적 문제라는 게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거 아닐까. 결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개인의 만족이 미혼일 때보다 크다는 계산이 있어야 결혼과 출산이라는 인생 계획을 생각할 텐데, 가사와 육아 같은 돌봄 노동이 저평가되는 현실에 발생하는 문제도 심각하다. 저자의 말처럼 뼈있는 경제학 농담으로 저출산 문제의 심각성을 들여다보는 방법도 의미가 있다.

 

사회적 차원에서의 자유와 선택의 공허함에 대한 문제, 자본이 없고 선택을 학습할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유가 주어져 있는데 왜 못해'라고 하는 문제는 사회 제도로 보완하고 해결해야 할 일이다. 『멋진 신세계』를 떠오르게 한 푸념을 했던 경제학 교수 친구는 그런 문제들을 연구한다. 그는 자유의 개인적, 사회적 피로를 잘 알고 있지만, 또한 여전히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있기에, 자유를 지키면서 자유의 피로를 줄일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나도 그렇다. 그러기 위해서 종종 우리는 '멈추어 집중'해야 한다. (192페이지, "뭐든지 될 수 있어"의 피로와 뜻밖의 위로)

 

인생, 삶이, 세상이, 참 아이러니하다. 노력하면 원하는 것만 취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더라는 걸 우리는 안다. 복과 화는 쌍둥이처럼 항상 같이 다니기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화를 피하고 복만 맞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인생에서 어느 순간 마주칠지도 모를 온갖 상황들을 부딪치면서 살아가야 한다. 불평등과 불이익을 마주하고 싸우기도 한다. 불편하다는 말을 소리 내어 해야 하는 순간도 많다. 피해 가지 말아야 한다는 걸 새삼 새기고 싶어지게 하는 저자의 이야기들에 공감하게 된다. 우리 살아가면서 타인과 세상을 질투하고 미워하기도 하지만, 사랑하고 아끼며 함께하고 싶은 순간이 더 많지 않을까? 영화 <코코>의 주인공들이 기억하는 시간은 삶의 의미였고 행복이었을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찾으며 유한의 시간에 행복을 누리라고 했다. 늘 거기 있을 거로 믿었던 소중한 사람이나 장소는 예기치 못한 시간에 사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더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싶은 게 아닐까 싶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영원하지 않기에, 괴로운 것보다 즐거워질 수 있는 것을 찾아다니는 시간이 필요하다. 저자가 보여준 다양한 시선들은 그 즐거움을 채울 수 있는 시간을 만든다.

 

경쟁은 스트레스를 낳는다. 그래서 '행복 경쟁'을 하다 보면 '왜 행복해야 하나?'라는 질문까지 나오게 된다. 물론 불행하고 싶은 사람은 없겠지만, 불행하지 않은 것 이상의 행복을 추구할 필요가 있을까? 무엇보다도, 대체 뭐가 행복일까? (245페이지, 행복도 경쟁해야 하나요)

 

예술과 영화, 문학 작품으로 이렇게 다양하게 쏟아낼 수 있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은데, '게으르다'는 저자는 어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을까? 게을러서는 절대 나오지 못할 내용에 독자로서 한껏 즐기는 시간이었다. 저자가 챕터별로 언급해준 모든 이야기를 여기에 옮기고 싶을 정도로, 이 책 안에서 다양하고 깊은 시선에 곁들인 유쾌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마지막에 배치한 행복에 관한 이야기들에서는, 저자가 게으름(?) 때문에 한껏 행복한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빠르게, 타인보다 먼저, 많이 갖는 인생을 만들어가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 들려서 좋았다. 천천히 가다 보니 어느 순간 도착해 있더라, 하는 완성 같은, 영화 <일일시호일>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아, 부럽네. 이렇게 다양한 것을 보면서 만들어가는 또 다른 시선들. 가끔은 부끄러운 감정을 드러내면서 챙피해 하고, 대가가 되겠다며 게으름을 집어넣고 싶기도 하는, 특히 예술 작품을 보면서 현실에 들여놓은 시각을 읽어내는 방식들이 눈에 들어온다. 평소 음식에서 편식하듯 예술이나 문학, 영화에도 여전히 편식하는 내가, 저자가 들려주는 방식의 행복을 찾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으로 느낀 어떤 감각들이 나를 깨우는 것 같아서, 저자처럼 게으르지만 광대한 시선을 만나보려고 애쓰고 싶다. 어떤 날 마주하는 일상의 모든 이야기를 한꺼번에 들은 것 같아서 배가 부르다. 게으름과 닮은 느림이 어쩌면 행복을 더 가깝게 부르는 손짓일지도. 천천히 가도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 없다. 자기 속도대로,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

 

"계속 끄적거리세요! 뭔가가 일어날 겁니다. (Keep scribbling! Something will happen.)" (20페이지, 늦게 꽃핀 대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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