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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 대하여 ㅣ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평점 :
즐거운 일들을 하나씩 잃어 가는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말이다. (8페이지)
이 소설을 읽기 전에는, 일방적으로 엄마가 바라보는 딸에 대한 내용이 아닐까 추측했다. 내 딸을 이야기하는 엄마의 시선으로 더 가깝고 애틋한 느낌이 이 소설을 가득 채웠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그런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다가오는 느낌은 한없이 따뜻한 애틋함과는 거리가 있다. 딸이 아니라, 여자의 삶을 말하는 느낌이 더 큰 소설이다. 하지만 '여자 이야기'라고만 하기에는 뭔가 더 많이 얹어진 이야기이기도 하다. 세상 속 여자의 삶이 적나라하게 비치는 소설이다. 동성애자 딸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엄마는 자기가 배워온 대로, 살아왔던 대로 딸이 따라와 주기를 바라지만, 어디 자식이 내 맘대로 되는 존재였던가. 무엇보다, 삶의 방식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엄마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 소설이 풀어갈, 결국 다다를 곳이 어디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화자인 '나'는 노인 요양보호사로 요양원에서 일한다. 어느 날, 딸이 부탁한 돈을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영부영 딸과 딸의 파트너와의 동거가 시작된다. 자기가 사는 집으로 들어온 딸과 딸의 파트너가 못마땅하지만, 몇 달 치의 생활비를 미리 받은 상태라 함부로 대할 수도 없다. 여유 있는 삶이 아니었던 '나'는 미리 받은 월세 겸 생활비로 위층을 수리하는 데 다 썼다. 하지만 이 이상한 동거가 단지 딸에게 내줄 돈이 없다는 이유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서로 이해 못 하는 상대의 마음을 가끔은 받아들이기도 하고 가끔은 싸우기도 하면서 이들의 동거는 계속된다.
엄마는 바란다. 자신의 부족한 삶에 빗대어 내 딸이 나처럼 살지 않기를, 조금은 부유하고 여유 있게 살기를, 혼자가 아니라 남편과 아이들을 가진 평범하고 보편적인 삶을 만들어가기를, 사랑 하나에 목숨 거는 게 아니라 평온한 일상을 만들기를.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보통 '정상'이라고 부르는 삶을 만들어야 할 텐데, 딸의 동성애는 그런 의미로 엄마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이다. 자기 일을 신경 쓰고 사는 것도 힘들고 팍팍한데 다른 이의 삶을 위해 같이 나서서 싸우는 것도 맘에 들지 않는다. 고요하고 안전하게 사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오지랖 부리지 말고 자신만을 위한 선택으로 살아가기를 바라지만 딸은 번번이 엄마의 그런 바람을 벗어난다.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겪는 불합리한 일 처리를 보면서, 을의 처지로 별다른 항의조차 못 하는 자신의 인생이 비루해서, 딸은 자신과 다른 생활을 영위하기 바라는 엄마였다. 그런데 딸이 동성애자로 살면서 겪는 불합리한 일들을 보며 엄마의 불안과 불만은 커진다. 내 딸이, 내 자식이 왜...
단순하게 생각하면 딸을 걱정하는 엄마의 한숨과 욕심처럼 보이는 이 소설은, 속내를 들여다볼수록 커다란 그림이 다시 그려진다. 요양보호사인 엄마가 돌보는 '젠'은 아이들의 입양과 후원으로 평생을 바친 여자다. 훌륭하다고 칭송받고 존경받았던 여자의 현재는 치매 걸린 노인,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외로움뿐이다.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을 바쳐 봉사의 삶을 걸었던 젠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요양원의 방 하나를 차지하고 누워 지내는, 먹을 것을 탐내는 치매 노인으로 남았을 뿐이다. 젠을 돌보면서 엄마는 당신 딸의 인생을 겹쳐봤을지도 모른다. 내 딸이,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지 못하고,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동성의 애인과 평생 살아갈지도 모르는데. 누군가 가족이라고 할 사람도 없고 힘이 되어주지도 못하는 노년의 삶을 맞이할 거로 생각하면, 딸의 현재를 인정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던 거다. 그러니까 엄마가 걸어온 보통이고 정상이라 여기는 여자의 삶은 남편과 아이가 존재하는, 누군가 의지가 되고 돌봐줄 나중이 그려지는 거였다. 불합리함을 위해 싸우며 온몸에 멍이 들고 다치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보호 아래 든든한 일상을 누리는 것. 그런 인생을 위해서는 동성애가 아니라 이성애로 만들어진 가족이 필요하다는 것.
엄마가 겪어온 인생에서 서글펐던, 중심에서 밀려나고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들 그대로 목격했는데, 딸이 그 대상이 되어가려는 걸 막을 수는 없을까, 하는 고민과 걱정. 엄마의 바람을 모르는 건 아닐 테지만, 딸이 가고자 하는 세상은 또 다른 곳이었으니... 그렇게 이해의 선을 넘지 못하고 싸움의 연속인 일상에서 찾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여성의 삶이 이렇게 흘러간다는 것을 사실적으로 드러내면서도, 그렇게 계속 흘러가도록 둘 수 없는 대책을 위해 온몸으로 말하려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세상에 스미지 못하고 소수자의 삶을 이어가려는 딸을 어떻게 해서든 구해내고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딸의 외침을 이해하고 싶기도 한 엄마의 마음과 시선을 그대로 담은 소설이다. 그 시선을 따라가면서 변하는 건 오히려 엄마였다. 딸의 선택과 행동에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의문 '왜?'를 찾아가는 길. 세상의 부조리를 드러내면서 그 안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삶의 현실적인 장면들을 그대로 고발한다. 이해가 아닌 다름을 인정하면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세상의 많은 일을 엄마가 확인한다. '내 딸이 이런 세상을, 이런 마음으로 부딪히며 살아가고 있었구나' 하는 이해의 언저리쯤 닿았을까? 사실 이해라는 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단어일지도, 타인의 이해가 어디까지 가능한지 재어볼 필요가 없는 일은 아니었을까. 각자의 시선에서 보는 세상은 너무도 다르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우리 사는 시간에 애타게 바라는 건 역시 그 이해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늘 그 시간이 닿으려 애쓰는 곳은 완전한 이해가 아니라, 가장 가까이 닿을 수 있는 지점일 것이다. 내가 하는 최선의 이해가 상대에게 닿는 지점. 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엄마가, 딸이, 딸의 파트너가, 젠이 가 닿을 수 있는 곳. 그곳이 삶의 최선이었을 테지.
이 애들이 삶 한가운데에 있다. 환상도 꿈도 아닌 단단한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다. 내가 그런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이 애들은 무시무시하고 혹독한 삶 한가운데에 살아 있다. 그곳에 서서 이 애들이 무엇을 보는지, 보려고 하는지, 보게 될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밥알은 좀처럼 삼켜지지 않고 나는 울컥거리며 치솟는 뜨거운 것들을 계속 삼킨다. (149~150페이지)
노년에 다다른 여자의 삶은 어떨까, 하는 걱정과 고민이 그대로 드러난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왔어도, 세상을 위해 애쓴다고 살아왔어도 우리를 기다리는 노년은 소설에서 보여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딸의 태도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닌데, 읽을수록 엄마의 시선이 눈에 들어온다. 세상 좀 살아본 여자의 한숨 섞인 목소리는 현실이었으니... 페이지를 넘길수록 세상이 혐오하고 배제했던 딸의 인생을 엄마가 품어주는 게 눈에 보인다. 타인에게 거부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엄마가 보듬고 배려해주는 시간으로 거듭난다. 엄마라는 존재가 그런 것일까. 소설의 제목과는 다르게, 결국 엄마를 바라보는 이야기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