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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를 견디는 법 ㅣ 현대시 시인선 119
오명선 지음 / 한국문연 / 2012년 9월
평점 :
얼마 전, 누군가가 나랑 어울릴 것 같다면서 작은 소설을 한 권 보내줬다. 오명선의 시집과 같은 제목의 소설이었다. 바닥까지 내려간 인생을 겪는 남자와 여자가, 우연히 같이 머물게 된 공간에서 만들어가는 이야기였다. 결말은 두 사람 모두 바닥치고 일어서기로 해피엔딩. 꼭 두 사람이 연결되지 않아도 좋은 마무리였을 거다. 서로 잡은 손이 끊어지고 각자의 길을 가더라도, 아닌 걸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자꾸 다른 쪽을 보게 되는 시선이 좋았다. 그동안 자기가 봐왔던 게 버려야 할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이 필요했던 것. 두 사람 모두에게.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서서히 진행되고 있던 그때. 그 소설의 3분의 1쯤 읽었을 때 궁금해지던 게, 각 챕터의 소제목으로 쓰인 글귀였다. 어떤 마음을 드러내는 한 줄인 것 같기도 했고, 하고 싶은 많은 말을 단 한 문장으로 축약한 것 같기도 했다. 소설을 읽다 말고 뒷부분 작가의 말을 펼치고 나서 알았다. 오명선의 시를 소설 각 장의 제목으로 인용한 것. 그때부터, 그 소설보다 이 시집이 더 궁금해진 거다. 쓸데없는 호기심이 생긴 건지 어떤 건지. 시 한 편이 아니라 시인이 이 시집에 담아놓은 시들을 보고 싶어져 그 소설을 읽다 말고 이 시집을 주문했다.
막상 이 시집을 펼쳐 드니, 내가 예상했던 마음과 비슷하기도 했고, 의외의 마음을 들을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나는 시도 잘 모르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는 재주도 없는데, 한 사람의 일기 같은 마음이 시로 들려오는 듯해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내 눈에 들어온 시 구절의 쓸쓸함이 그대로 나에게까지 묻어오는 듯했다. 시에서 드러나는 그 마음은 대개 아파지는 것들인데, 그 아픔을 어떻게 공감해야 할지 몰라서, 직접 그 상황이 아니고서야 다 알 수 없어서 뭐라 말하면 누가 될까 싶은 위로 같은 마음이었다. 한쪽 눈의 시력을 잃고 생긴 슬픔과 고통이 묻어나는 이 구절 같은...
오른쪽 눈의 실명
20년 무탈한 내 기록들의 항의에도 나의 내일은 부적합 판정
당신은 우리의 입맛에 맞지 않습니다
다섯 개 보험회사가 단번에 나를 뱉어버렸다
남은 왼쪽 눈마저 캄캄한 벼랑으로 굴렀다
(「당신은 약관에 맞지 않습니다」 중에서)
한쪽 눈의 시력을 잃은 채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통일 텐데, 그 때문에 실수하며 아이를 다치게 한 것도 슬픔이 되고, 보험회사에마저 거부당한 육체가 아무 쓸모 없는 것처럼 여겨졌던 건 아닐까. 아, 이 몸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나... 한순간 절망으로 추락한 것처럼 보여 순간 앞이 캄캄해졌다. 두 눈을 멀쩡히 뜨고도 못 보고 못 느끼고 살아가는 게 많을 텐데, 한쪽 눈으로라도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그대로 꺾어버리는 세상의 태도에 암울해졌다. 전에 어디선가 들은 얘기로는 장기 기증한 사람은 보험 가입이 안 된다던데,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좋은 일을 하고도 안위를 위해 접근한 보험마저 거부당하는 게 현실이었는데, 시인의 말을 듣고 보니 실명으로도 거부당하는 게 똑같은 것 같아서, 어떤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세상을 살아가야 할지 막막해지는 기분까지 끌고 온다. 내일을 준비하겠다는 것조차, 남아있는, 아직 살아있는 육체에 힘을 실어주려는 것도 안 된다고 하니, 무슨 기대로 오늘을 버틸 수 있을까...
어느 정도 살아왔고, 또 살아온 만큼 비슷하게 남은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니까, 아직 세상을 다 안다고는 못 하지만 또 모른다고도 할 수 없는 어떤 시기. 사람의 평균 수명을 놓고 볼 때 그 절반쯤 살아왔다고 생각되는 때의 감정과 생각, 경험들을 풀어놓는다. 언젠가부터 아기가 태어났다는 소식보다 누군가의 죽음 소식을 듣게 되는 일이 많아짐을 느끼곤 했는데, 시인은 그 장면을 이렇게 말한다.
금방 떠난 자리에
또 다른 촉촉한 이별들이 와서 앉았다가
서둘러 근조화환의 환한 배웅을 받으며
문을 밀고 나간다
잠깐 다녀가는 이별들은 손수건을 준비하지 않는다
(「짧은 조문」 중에서)
바쁜 일정 처리하듯 누군가를 애도하는 풍경이 그려진다. 그 안에 나도 있다. 그런 적이 있다. 가서 얼굴은 비쳐야겠는데 그 자리는 불편하고, 시간은 많지 않고, 그래도 안 갈 수는 없고... 그래서 인사하고 얼른 일어나는 자리로 만들어버린 기억. 그나마 사람들이 많으면 상주가 바쁠 것 같다는 핑계라도 생겨서 다행이라는 마음마저 있었는데, 이 시 구절을 보니 이별의 의식을 너무 가볍게만 생각한 듯해서 미안해진다. 손수건까지는 준비하지 않더라도, 떠난 사람에게 전하는 안녕과 남은 사람에게 전하는 진심이 느껴질 수 있는 마음(그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으로 그곳을 향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우리도 언젠가 그 이별의 대상이 될 수 있으니, 누군가 나에게 진정으로 말하는 안녕의 인사를 받고 싶지 않을 텐가...
여러 시가 실려 있지만, 내가 이 시집을 펼치고자 했던 이유는 바로 이 시 때문이다.
오후를 견디는 법
몇 겹으로 접혀
낡은 소파에 누웠다
며칠 현관문이 ‘외출 중’을 붙잡고 서 있는 동안
나는 세상에서 방전되었다
익숙한 풍경이 커튼처럼 걸리고
빛이 차단된 몸에서 수많은 눈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간다
화창한 오후는 그림자를 둘둘 담요처럼 감는다
뱉지 못한 문장 뒤틀린 서술들
나는 오래전 어둠에 길들여진 어긋난 문법,
나를 필사하는 오후의 손가락이 한 뼘 길어졌다 흐린 지문으로 나를 한 술 떠먹는다
적막의 두께로
낡은 하루가 완성되었다
가끔 손을 넣어 가라앉은 나를 휘저어 본다
(「오후를 견디는 법」)
괜히 쓸쓸해지는 기분에 이 말을 하는 누군가의 표정도 그려보고 그랬다. 하루를 보내며 무심코 떠올리는 어떤 날의 오후가 아니라, 견디듯 버티는 오후를 어떤 마음으로 보내고 있을까 싶은 마음에.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에 부유하는 먼지가 보이는 장면을 그리는 나른함이 오후의 풍경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먼지가 아닌 마음이 부유하는 상태를 보는 때가 많아졌다. 마음도, 시간도, 생각도, 그저 떠돌기만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 붙잡아서 어디에 고정하고 싶은데 안 될 때, 결국 그 끝에서 마주하는 쓸쓸함이 보기 싫어지는. 어느 구절을 펼쳐도 세상 살아가는 모양새가 씁쓸해지게 말하는 시인의 솔직함에, 고요히 내려앉을 밤을 기다리고 있다. 햇빛이 사라지고 어두워지면 부유하는 마음도 보이지 않겠지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