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커스 나이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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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는다는 건 육체가 늙고 죽음과 가까워진다는 것과 같다. 서글퍼지기도 하면서 도무지 늙어가는 것의 즐거움을 찾을 수 없다고 투정도 부리게 되지만, 찾아보면 나이 듦의 장점이 있다. 세월을 흘러보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그러하다. 어떤 일이 일어났던 그때 말고, 시간이 흘러야만 알게 되고 확인하게 되는 일들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시간이 흘러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서커스 나이트』는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나서야 만나는 치유에 관한 이야기다. 느리고 더디게 가면 도태되고 낙오된다고 믿는 세상에서, 느리게 천천히 보내는 시간에서 만나는 상처 회복의 순간을 차분하게 들려준다.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 매력 있는 작품이다.

 

사야카에게는 희한한 능력이 있다. 사이코메트리. 어떤 사물을 만지면 그 사물과 관련한 이야기를 떠올린다. 누군가의 땀 냄새가 밴 티셔츠 한 장을 만지면 그 옷 주인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가능하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편지 한 통이 배달된다. 편지의 발신인은 오래전 헤어진 남자 이치로. 현재 사야카의 삶을 보면 이치로의 편지는 뜬금없는 일이다. 사야카는 아이가 있고, 아래층에는 시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남편은 없지만 한 가정의 유부녀인 것이다. 이치로의 편지는 뜻밖이었지만, 편지의 내용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사야카가 사는 집 마당에 소중한 무언가가 묻혀 있으니 찾으러 가도 되겠냐는 내용. 물론 이치로는 그 집에 사야카가 사는 줄 모르고 보낸 편지다.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 오래전 헤어진 남자친구가 살던 집에 내가 살고 있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특이한 인연에 소설이 어디로 흘러갈지 몰라서 계속 읽게 되는데, 요시모토 바나나의 담백한 문장이 어김없이 담담하게 읽게 한다. 조금 특이한 가족 구성원의 등장부터 그러하다.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시한부 남자에게 받은 청혼, 죽기 전에 자기 아이를 낳아달라며 말하는 남자나 그 제안에 응한 여자나 닮았다. 일찍 부모를 잃은 사야카에게 그렇게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아무 조건 없이 사야카를 받아준 시부모님, 죽는 그 날까지 사야카를 아끼고 사랑해주었던 남편,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한 아이. 그리고 이치로의 편지에서 확인한, 마당의 히비스커스 나무 밑에 묻힌 작은 뼛조각을 발견한 사야카는 그 뼛조각의 이야기를 읽는다. 그렇게 오래전 시간과 조우한다. 뭉개져서 굽어버린 그녀의 엄지손가락, 마당의 나무 밑에 묻힌 것은 왜 이치로와 연관이 있는 것인지, 그녀의 지나간 시간이 하고 싶은 말을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천천히 듣게 된다.

 

사야카의 지나간 이야기가 현재와 교차하면서 하나씩 들려온다. 지나간 시간의 중심에는 이치로와 연관된 일들이 있는데, 그때 그 시간이 그렇게 흩어져버릴 수밖에 없었던 건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걸 그때는 왜 몰랐을까. 조금 더 너그럽게 이해하고 융통성 있게 흘려보내도 될 일들이 그때는 왜 참지 못하고 도망쳤을까? 이치로는 왜 사야카를 좀 더 찾아가지 않았는지... 아니다. 아무리 고민해도, 아무리 말해도,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고, 도망치는 게 방법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고 여기며 자기 안위를 살폈을 것이다. 누구라도 마찬가지였겠지. 사야카가 겁쟁이여서가 아니라, 이치로가 사야카를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치로의 어머니가 죄책감을 느껴서가 아니라...

 

심각해질 거 없어, 모든 건 지나가니까 즐겨, 하는 메시지 때문이었을까.

실제로 기분이 좀 편해졌다.

이치로의 방에 있을 때 고향에 돌아온 것 같았던 그 기분. 겨우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조금은 미안해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변해 간다.

아무리 불러도 사토루는 돌아오지 않고, 미치루는 성장해 간다.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무리 없을 일만 하고 싶다.

간절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됐어, 그다음으로 넘어가, 하고 사토루가 말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278페이지)

 

이 지점에서 확인하게 되는 게 바로 시간의 힘인 것 같다. 그때는 잘 몰랐고 아니라고 믿었지만, 지금은 감당하게 되고 이해가 되는 순간이 되는 일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아마 그때는 아무리 애써도 나아지지도 좋아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상황을 담아낼 마음의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처음 겪는 상황에 당황해서일 수도 있다. 그 무엇이 그때를 어렵게 했든지 내 안의 자리가 있어야 그 많은 상황을 받아들이고 보듬을 수 있었을 텐데, 그때는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자리가 없어서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세월이 많이 흐르고, 이치로의 어머니가 마지막에 했던 말을 이치로가 실행에 옮기면서 사야카와 다시 만나게 된 건, 삶의 그런 이치가 작용했기 때문이리라. 그때 마무리하지 못했던 감정을 정리하고, 뒤늦은 오해를 풀고,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하게 되는 순간. 시간이라는 다리를 건너야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또 한 번 강조하는 것만 같다. 그렇게 모든 상처가 다 아물고 없었던 일로 되는 건 아니다. 적어도 자기가 감당하고 정도의 몫으로 이해를 불러온다는 것이다. 그게 우리가 성장하고 배워가는 시간의, 흐르는 세월이 담아낼 수 있는 장점이라고, 이제는 알 것 같다.

 

내가 이 나이가 되어 늙어가는 육체가 버겁고 슬프지만, 내가 살아온 시간이 쌓여 경험하고 배운 것들 때문에 또 지금을 살아가는 힘이 된다는 걸, 지금은 안다. 지나간 많은 시간 속에서 나도 사야카처럼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 있었을 것이고, 그게 그 순간의 답이라고 나 자신에게 당당하게 말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때는 어설프고 서툴러서 그래서인 줄 모르고 말이지. 그때와 지금을 연결하는 긴 시간은 저자의 말처럼 회복의 기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만 향한 시선에 미치도록 달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때는 거기서 머물러야만 치유되는 상처들이었을 거라고. 그 시간을 견디고 나니 현재의 시간이 또 다른 회복을 불러왔다. 사야카가 작은 뼛조각에서 읽은 간절한 마음을 듣고 용기 내어 연락하고 다시 마주하며 지나간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다. 시간. 과거와 현재가 이어져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그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힘을 서서히 깨닫는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주어진 시간을 묵묵히 살아왔더니,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하면서 지내왔더니, 어느 순간 보니까 상처와 아픔은 회복되어 있기도 하더라는 말을 이렇게 해도 괜찮지 않을까?

 

평범한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그 배경이나 캐릭터는 그다지 평범하지 않았다. 사야카와 이치로가 연결된 히비스커스가 심어진 집, 남편도 없는 집에서 시부모와 함께 하는 일상, 초자연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발리, 발리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야카 성장의 시간, 손길이 닿으면 사물의 이야기를 읽는 능력. 어쩌면 자연이 삶 곳곳에서 묻어 있으면서 인간의 일상을 주관하는 것 같기도 하다. 특히 발리의 풍광을 묘사하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자연이 늘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묘한 분위기 속의 일상에서 특별한 사람들의 정이 또 평범하게 보이는 건 무슨 조화인지. 결국은 그렇게 돌고 돌아서 우리 삶의 평범함을 다시 비춘다. ^^ 아마 그건 요시모토 바나나가 가진 특이한 능력 때문인 것 같다. 낯설고 어색하게도 보이는 분위기로 소설을 읽게 하면서도, 독자가 우리 삶과 닮은 평범함을 찾아내게 하는, 우리가 살면서 겪는 많은 문제와 생각을 꺼내어 공유하게 한다는 것을.

 

사람은 저마다 많은 사람들과 이어져 있고, 그 사이를 오가며 조금씩 바퀴를 돌린다. 그것도 자연의 섭리의 일부다. (408페이지)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순간을 들려준 것 같다. 버릴 수 없고 잊을 수 없는 시간으로 존재하는, 하지만 이제는 어둡지 않게 만들어야 현재를 거쳐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다리가 되는 기회. 한 걸음 한 걸음, 때로는 웅크리고 때로는 기지개를 활짝 켜면서, 아픈 기억이라도 꺼내야 한다면 꺼내어 보면서, 나아가는 걸음들을 이렇게 듣는다. 누군가에게는 지금이 상처를 만드는 시간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지금이 회복의 시간일 수도 있다. 저마다 지금 시간이 만드는 의미가 다르겠지만, 언젠가는 그 회복이라는 것을 마주할 거라고, 세월이 조금 흘러야 가능한 일이라면 조금 기다려도 괜찮지 않으냐고 말하고 싶다. 지나고 보니 조금은 알겠더라, 하는 말을 굳이 여기서 한 번 더 적용해본다. 지금은 그 시간을 조금은 더 지켜보자고 말이다. 빈틈없이 뭔가가 꽉 들어차 빽빽했던 마음에 곧 공간이 생길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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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로니아공화국
김대현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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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어떤 설문에서인가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어떤 나라를 꿈꾸는가?' 아니, '어떤 대통령이었으면 좋겠는가?'였던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그 질문을 받고 별것 아닌 것처럼 들렸던 한 문장을 꽤 오래 생각하고 답했다는 것뿐. 지금 생각해보면 두 질문은 다르지만 닮았다. 어쩌면 하나로 엮어진 질문일 수밖에 없는, 하나로 답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의미이지 않을까 싶다. 내가 꿈꾸는 나라와 내가 바라는 대통령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나라를 이런 대통령이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그럼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해보자면, 현재 우리 삶을 아프게 하는 일들을 사라지게 할 국가의 손길이 가장 먼저 생각날 것이다. 빈부 격차나 실업률, 미세먼지 대책, 최저임금이나 법정근로시간 등. 요즘 지겹게 뉴스에서 보는 아픈 일들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이 문제를 해결해줄 나라와 리더를 원하는 거 아닐까? 하지만 그 답은 너무 어려웠나 보다. 지금까지 몇십 년이 흐르도록 해결되지 않는 문제이면서도 앞으로도 그리 쉽게 해결될 것 같지가 않으니까 말이다. 나의 이런 비관적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런 나라와 대통령을 찾기 어렵다면 만들면 되지 않으냐고, 그 말을 실행에 옮긴 사람이 여기 있다.

 

 

아로니아 공화국. 초대 대통령, 재선 대통령 김강현. 재밌게 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영원히 행복할 것이라고 여기며 만든 나라. 주인 없는 지역을 접수하고 거대한 프로젝트 성공시키듯 아로니아 공화국을 만든다. 하늘을 보고 살아야 한다면서 높은 건물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건물의 최대 높이는 5층. (인구가 많지 않으니 가능한 일?) 공기를 오염시키는 자동차도 없다. 걸어서 다니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 된다. (나라가 넓지 않으니 가능한 일?) 아주 탄탄한 국방 시스템으로 군대가 필요 없으니 군 면제 특혜 비리 같은 것도 없다. 공부하라고 스트레스 주는 사람도 없다. 오직 신나게 잘 노는 방법을 가르친다.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한다. 노동을 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기업이 소득을 배분한다. 아이의 탄생은 국가 전체의 축제이며, '영원히 행복할 의무'를 부여받는다.

 

나는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아로니아는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고 시민의 존엄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한다. 시민은 늘 항상 언제나 국가권력보다 무겁고 소중하며 우선돼야 한다. 오로지 이것만이 아로니아가 존재하는 이유다.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허투루 여기는 국가는 국가로서 자격이 없다. 시민의 존엄과 자유와 행복을 나 몰라라 하는 국가는 국가로서 존재 이유가 없다. 자격이 없고 존재 이유가 없는 국가는 반드시 사라져야 마땅하다. 잘라서 말한다. 아로니아 시민은 곧 아로니아 국가 그 자체다. (151~152페이지)

 

듣고 있자니 살짝 어이가 없기도 하다. 이런 나라가 있을 수가 없잖아. 그러니 이런 말장난 같은 거 그만두고 오늘의 현실을 제대로 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우리가 바라던 나라가 바로 이런 나라 아니었을까? 균등한 분배가 이루어지고, 상하를 나누는 학습이 아닌 공부, 치열한 경쟁에서 이뤄내야 할 부유함이 아니라 보통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고 싶은 것. 누구나 바라지만 함부로 이뤄지지 못할 일이기에 상상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이렇게 간단하게(?) 이뤄놓은 이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김강현과 그의 일당들은 해냈다. 이상향의 나라를 상상 속에서 머물게 놔두지 않고 현실로 옮겨왔다. 이제 아로니아 공화국의 국민들은 재밌게 잘 놀면서 행복해지기만 하면 된다. 그게 아로니아 공화국 국민의 의무다.

 

이런 나라가 있다니! 아니, 이런 나라가 있다면 누구라도 먼저 가고 싶지 않을까? 적어도 지금 이 땅에서 겪는 불행한 삶과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감 안고 찾아가고 싶을 것이다.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요소를 조목조목 따져가며 그 해결책을 마련하거나, 그 불행과 반대되는 정책으로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는데 놓치고 싶지 않다. 그곳으로 가면, 내가 아로니아 공화국 국민으로 속한다면 정말 행복해질 것만 같다. 그렇다고 믿었다. 아로니아 공화국 국민도, 아로니아 공화국을 만든 김강현 대통령과 개국공신들도. 처음에는 그들이 바라는 이상향에 맞는 나라로 갖춰지고 있음에 너도나도 행복했다. 신난다. 그들이 그리고 꿈꾸던 나라가 이렇게 이뤄지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 있자니 이 무슨 신성한 일이던가. 하지만 그 꿈같은 일은 오래가지 않는다. 그들이 바라던 세상은 '인간의 존엄과 자유와 행복'이었다. 그 바람이 이뤄지는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몇 년 동안 그들이 그리는 세상을 차곡차곡 만들어가면서 확인하게 된 건 '인간의 존엄과 자유와 행복'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강현의 아내 강수영이 현 정권의 야당에 가입하고 차기 대통령이 되어 이루고자 하는 건 그들이 이룬 국가의 소멸이었다. 아니라고 하지만, 기존의 국가들이 국민을 불행하게 했던 요소들을 배제하고 끌어가는 게 아로니아 공화국이라고 하지만, 그 안에서 점점 피어오르는 건 국가의 본성이었다. 인간의 존엄과 자유와 행복을 양립할 수 없게 하는 국가 운영 시스템이 그러했다. 관리와 통제, 규율과 제재, 그 이상의 여러 가지가 국가와 국민이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없게 했다.

 

소설은 김강현의 과거와 대통령 퇴임을 앞둔 일흔의 현재를 교차로 보여주는데, 그의 과거가 서술되는 장면에서 대한민국 현대사를 그대로 드러낸다. 특히 김강현이 대학에 가고 사법고시를 합격하고 검사가 되고 또 검사를 그만두게 되는 과정이 암울한 대한민국의 민낯을 고스란히 비춘다. 부정부패와 부조리, 학연 지연으로 공정하지 못한 판결의 순간들, 세상이 미쳐 날뛴다고 생각할 정도로 무엇 하나 인간의 행복과 연결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 대한민국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 시스템에서 수혜의 대상이었던 김강현이 뒤늦게 깨달은 것이 국가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 그런 국가를 떠나는 게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인데, 이 타이밍에 끼어 들어온 무리로 김강현은 아로니아 공화국의 건립을 실행에 옮기게 된 거다. 그렇게 새로 세우는 나라에 얼마나 기대가 컸을까? 정말 잘 놀기만 하면 되는 나라라고 생각했겠지? 이 소설을 읽는 나 역시 그럴 거라고 믿었고 기대했다. 소설에서나 가능한, 상상 속에서나 이루어질 일을 그려내는 순간의 희열 같은 것을 느꼈으니까. 하지만 '국가가 국가로 존재하는 데 필요한 요소들은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온전하게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강수영이 김강현에게 설명하는 장면을 볼 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랬다. 김강현이 이룬 국가는 점점 우리 사는 현실의 국가와 닮아갔다. 그때 강수영이 제시하면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공약 또한 기가 막힌다. '공동생산, 공동분배, 공동행복'이었다. 공산당이 없는 공산주의식 인간공동체를 꿈꾸는 것이었다. 이것 역시 온전하게 이뤄질 수 있을까?

 

지금까지 지구상에 없던 나라. 누구나 꿈꾸던 나라. 하지만 우리가 사는 모든 국가의 모습이 그대로 비춰준 결말. 마지막에 강수영이 제시한 국가도 역시 완전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렇다) 그녀가 이룰 나라의 시스템 역시 과부하가 걸릴 수 있고, 그 시스템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아질 수도 있다. 그녀가 김강현의 아로니아 당에 맞서 그린머슬아로니아 당에 입당하고 자기 생각에 목소리를 높인 것처럼 말이다. 새로운 대통령이 된 강수영이 아로니아 공화국을 어떻게 이끌어갈지 다 듣지 못했기에 섣불리 강수영 정권의 성공과 실패를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김강현에서 강수영으로 바통 터치된 정치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듣다 보면 한 가지 결론을 얻게 된다. 자신이 속한 국가에서 문제를 먼저 찾을 게 아니라, 그 국가의 시스템 안에서 내가 어떤 자세로 살아가는지 먼저 점검해야 할 문제였다. 나라가 싫어서 떠나고, 나라가 싫어서 새로 만들어도 변하는 건 없었으니까.

 

시종일관 웃음과 기가 막힌 상상으로 독자를 시선을 놓치지 않는 소설이다. 그만큼 우리의 간절함을 담은 이야기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김강현의 성장 과정은 특히나 재밌다. 꼴통이 첫사랑에 빠져 개과천선하여 성공한 남자로 거듭나는 게 기적을 보는 것 같았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와 배경이 흥미롭기도 하다. 그들이 모여 풀어내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웃음이 끊이지 않지만, 소설은 결코 가볍게 흐르지 않는다. 분노와 아픔, 감동과 추억이 새겨진 우리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행복 하고자 국가의 탄생을 이뤄냈고, 그 행복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 국가의 소멸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행복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바라는 행복은 어디서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 그 행복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에 맞서 어떤 대안을 만들어서 행복에 이르러야 하는지 계속 묻는다. 그 대안이 국가를 세우는 것만은 아닐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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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65세 이상 어르신, 기초 연금 수급 대상자에게
휴대폰 요금 11000원 할인된다.
물론 그냥 앉아있으면 해주는 게 아니라
신청해야만 해준다.
어제 신청하려고 했더니 오늘부터 시행되는 거라 오늘부터 신청해야 한다고 해서
아침 9시 되자마자 고객센터 통화해서 신청했다.
해당 번호 가입자의 자녀라고 신분 밝히고
몇 가지 개인정보 조회한 후 바로 처리해주더라.

엄마가 가입한 통신사는 skt인데
고객센터 통화로 신청할 경우 바로 확인해서 해주고,
영업점에 가서 신청할 경우 본인이 신분증 가지고 방문.
가족이 대신 방문하더라도 가입자 신분증 가지고 방문해야 한다고 한다.

엄마는 통화만 하는지라 저렴한 요금제 사용하려고 해도 없더라.
최소 요금 3만원 정도 나오는 거 사용하는데
거기서 11000원 할인이면 어디여...
(통신비 너무 비쌈...ㅠㅠ)

이번달 안으로 신청하면 다음달 청구 요금부터 적용된다고 한다.
이런 건 굳이 신청 안해도 해당되는 조건이면 알아서 다 해주면 안 되남?
어르신들이 고객센터 통화 얼마나 할 줄 안다고...

http://m.news.naver.com/read.nhn?sid1=105&oid=421&aid=0003478108&mode=LS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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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는 말은 차마 못했어도 슬로북 Slow Book 3
함정임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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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건네는 위로가 힘을 가지려면 빠질 수 없는 요건이 있다. 공감. 슬픔과 기쁨을 느끼면서 사는 우리지만, 그 감정이 다가오는 정도는 제각각이다. 그래서 건네 오는 말이 어떤 무게를 담고 있는지, 어느 타이밍에 다가오는지에 따라 위로가 되기도 하고 귀찮음이 되기도 한다. 지금 작가가 건네는 말은 위로가 될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삶을 오롯이 듣는 것 같기도 하고, 우리가 살면서 겪는 많은 혼란과 슬픔을 공유하는 것 같기도 해서 말이다. 거기에 소설과 문학의 이야기가 있다. 문학 작품 속 장소와 작가를 향한 애정, 저자가 작가로 살아가는 모습의 순간순간이 그대로 문장으로 옮겨와 있다. 그 문장들 구석구석에 담긴 진심과 숨겨진 위로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함정임. 소설보다는 에세이로 많이 만났던 작가다. 조금은 가볍게 읽어보고자 펼쳐 든 그녀의 책은 가볍지 않았다. 일상을 풀어내는 것 같지만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었고, 여행지에서의 풍광을 보여주고 싶은 것 같지만 사실 나에게 다가온 느낌은 굵직한 삶의 무게였다. 쉽지 않은 글쓰기, 자라는 아이를 바라보는 마음, 지구촌 곳곳에 닿은 발걸음이 새겨준 인생의 말들. 이번 책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무게감은 더한 것만 같다. 묵묵히 걸어온 길에서 쌓이고 쌓인 말들은 더 많아진 것만 같다. 하지만 차마 꺼내지 못하는 말을 안고 가는 기분.

 

'언젠가부터, 괜찮냐고 묻는 것이 차마 꺼내기 어려운 일이 되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저자는 괜찮으냐고 묻지 않고, 썼다. 짧은 글들 속에서 계속 안부를 묻는다. 저자가 거처를 옮겼다는 부산의 곳곳부터 외국의 여행지에서의 인연들까지, 저자는 여행하면서 만난 온갖 것을 들려주고, 자기가 만난 책에서의 문장으로 말을 꺼내면서 계속 독자의 안부를 살핀다. 때로는 예술가의 삶을 위로하기도 하면서, 자주 독자를 자기가 많은 것을 느낀 그곳으로 인도한다. 저자가 만난 작가들의 세계, 특히 '보들레르와 랭보, 발레리, 말레르메의 시들, 라신, 베케트, 카뮈의 희곡들, 스탕달, 플로베르, 사르트르의 소설들, 바슐라르, 블랑쇼, 바르트의 비평들을 만나면서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가 보석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칼보다 강하며 죽음보다 영원하다는 것(117~118페이지)'을 깨달았다고 했다. (이름은 알고 있지만 내가 아직 읽어보지 못한 작품의 작가가 많은 건 유감이었다) 소설가가 만난 작가들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그대로 읽게 된다. 소설로 느낀 삶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결코 행복하기만 할 수 없는 현실의 감각을 일깨우기도 한다. 소설의 장면에서 만나는 장소를 여행하는 듯하기도 하고, 소설의 작가들이 살던 시간을 걷는 것 같기도 한 걸음에 독자를 동참시킨다. 그렇게 저자의 시선이 옮겨가는 곳을 볼 때마다, 저자의 여행 목적과 의미가 더 궁금해지곤 했다. 작가의 말들을 찾아서, 문학 속 문장의 감정을 떠올리며 찾아다니는 곳. 거기에서 저자가 추구하는,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문학의 깊이를 읽는다.

 

작가란 그저 이야기의 재미(오락)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사회의 맥락 속에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인 질문과 흘러가는 시간에 맞서는 예술의 의미를 소설을 통해 던지는 존재이다. 뭇사람들의 견딜 수 없는 슬픔과 어긋나고 응어리진 현실을 풀어주고 어루만져주는 존재가 작가이고, 소설이다. (78~79페이지)

 

이 책을 읽다 보면 소설과 문학에 관해 더 많이, 자꾸 생각하게 된다. 그건 아마도 저자가 전하는 소설과 문학, 소설가들에 관한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가로의 삶이 어떠한지 저자의 소설 쓰기는 어떤 일상을 만들어가고 있는지 말하고 싶은 것을 느끼곤 했다. 무언가 잔뜩 말하고 싶지만, 깊이 있는 문장들로 그 마음이 온전히 건네져 오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한 듯한 느낌도 이어진다. 그리고 문학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가 온전히 전해지기를 바라는 것도 느낀다. 이 부분을 말하는 저자의 목소리가 더 굵게 들려서일지도 모르겠다. 같은 시대, 같은 세상을 사는 우리와 공감하며 공유하고 싶은 것들을 소설이라는 매개로 연결되어 있고 싶은 간절함을 보게 된다. 차마 소리 내지 못하는 말들을 대신해 전하고 싶은 문장들. 결국은 '쓰기'의 순간만이 그 위로와 치유가 가장 힘을 낸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소설은 자기 안에 억눌린 자아에 귀를 기울이고, 숨을 터주는 것부터 출발한다. 차마 보여주기 부끄럽지만, 드러내놓고 나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진다. 마음이 자유로운 사람은 자신과 세상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소설 쓰기의 본질이 구원에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3페이지)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야기를 사랑하는 존재,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고 싶고, 듣고 싶은 호모 나랜스들이다. 리베카 솔닛이 『멀고도 가까운』에서 밝힌 대로, 이야기꾼의 재능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이야기의 힘은 쓰는 이든, 읽는 이든, 기본적으로 감정이입에서 나온다. (62페이지)

 

뭔가를 끼적이면서 맥락 없는 말이라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평소에 자기 검열을 하느라 참아온 말들 때문인지, 타인의 시선을 무시하고 살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괜찮지 않지만 괜찮다고 말하는 익숙한 순간들을 건너와야만 하는 일상을 버텨야 했기에, 괜찮은 척하며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싶지 않은 순간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 괜찮은 척도 하지 못해 차라리 말을 삼키곤 했던 순간들 때문이거나... 저자가 자기의 일상을 기록하며 책과 이어가는 삶을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건, 괜찮은 척도 하지 못하는 마음일 때 뭔가를 적어가는 시간으로 위로를 만들 수 있다는 방법을 들려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생각해보면 일상의 많은 순간에 뭔가를 쓰면서 지내기도 하니까 말이다. 휘갈겨 쓰던 메모지의 용도를 다해 버릴지라도 뭔가를 쓰는 일은 습관처럼 익숙하다. 조금 전까지도 나는 스테이플러로 찍어둔 이면지에 이 책의 문장 몇 개를 끼적이기도 했다. 그 문장의 어떤 단어 때문인지 어떤 느낌 때문인지 정확히 기억하진 못해도, 내 마음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는 문장이라고 생각해서였겠지. 문장에서 내 감정을 찾아내고, 그 감정을 공감하고 공유하는 일. 그게 문학을 만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생각하면, 저자가 말하는 소설의 의미와 닮았다.

 

소설은, 세간에서 쉽게 말하듯, 한갓 지어낸, 허황한 이야기가 아니다. 도스토옙스키와 발자크가 평생을 바친바, 소설은 인간을 이해하는 척도이자 진실을 향한 지난한 길이다. 19세기 소설에서나 등장할 법한 악령 들린 사람들이 연일 우리 앞에 불려 나오고 있다. 무소불위로 저지른 죄의 대가를 제대로 치르게 할 수 있을지 염려하며 두 눈 뜨고 지켜보는 것조차 고통이고 지옥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 상처 입은 마음을 보듬어 위로하고, 한 줌의 도덕이나마 소중히 지키며, 정상적인 삶을 회복하기 위한 연대를 구축할 때다. (248페이지)

 

처음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때, 그 책을 읽고 짧게나마 끼적이기 시작했을 때를 생각했다. '왜?'라는 물음으로 기억을 더듬어갔다. 나는 그때 왜 책을 읽기 시작했을까. 지치고 힘들었던 그 순간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에게도 할 수 없었다. 말을 할 수 없다면 그 말이 더 튀어나오지 않게 막을 방법이 필요했다. 그때였다, 하지 못할 말을 하지 않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했던 건. 그리고 이어졌던 끼적임. 그 책이 하는 말을 더 이어가고 싶어서 뭔가를 계속 적어갔다. 그렇게 말하는 방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더디고 느리지만,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글을 읽고, 하고 싶은 몇 마디를 말하는 게 아니고 쓰는 게 더 편하다. 저자는 '글쓰기의 역할이 위로의 숙명'이라고 말하지만, 그 숙명을 소설가인 자신이 안고 가는 것으로 느끼는 것 같지만, 독자인 나, 우리는 그들의 숙명으로 오늘도 위로를 찾는다. 숨통을 트여본다. 각자가 가진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내면서, 혹은 이렇게 풀어낸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위로의 옷으로 입혀지길 바라면서. 내가 이렇게 나를 보듬어주었듯이 누군가에게 가서 포근하게 안아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몇 글자, 계속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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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우 신간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공지영 신간. 해리.

 

 

 

 

 

 

 

 

유홍준 산사순례

 

 

 

 

 

 

 

 

아르망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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