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로니아공화국
김대현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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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어떤 설문에서인가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어떤 나라를 꿈꾸는가?' 아니, '어떤 대통령이었으면 좋겠는가?'였던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그 질문을 받고 별것 아닌 것처럼 들렸던 한 문장을 꽤 오래 생각하고 답했다는 것뿐. 지금 생각해보면 두 질문은 다르지만 닮았다. 어쩌면 하나로 엮어진 질문일 수밖에 없는, 하나로 답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의미이지 않을까 싶다. 내가 꿈꾸는 나라와 내가 바라는 대통령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나라를 이런 대통령이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그럼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해보자면, 현재 우리 삶을 아프게 하는 일들을 사라지게 할 국가의 손길이 가장 먼저 생각날 것이다. 빈부 격차나 실업률, 미세먼지 대책, 최저임금이나 법정근로시간 등. 요즘 지겹게 뉴스에서 보는 아픈 일들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이 문제를 해결해줄 나라와 리더를 원하는 거 아닐까? 하지만 그 답은 너무 어려웠나 보다. 지금까지 몇십 년이 흐르도록 해결되지 않는 문제이면서도 앞으로도 그리 쉽게 해결될 것 같지가 않으니까 말이다. 나의 이런 비관적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런 나라와 대통령을 찾기 어렵다면 만들면 되지 않으냐고, 그 말을 실행에 옮긴 사람이 여기 있다.

 

 

아로니아 공화국. 초대 대통령, 재선 대통령 김강현. 재밌게 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영원히 행복할 것이라고 여기며 만든 나라. 주인 없는 지역을 접수하고 거대한 프로젝트 성공시키듯 아로니아 공화국을 만든다. 하늘을 보고 살아야 한다면서 높은 건물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건물의 최대 높이는 5층. (인구가 많지 않으니 가능한 일?) 공기를 오염시키는 자동차도 없다. 걸어서 다니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 된다. (나라가 넓지 않으니 가능한 일?) 아주 탄탄한 국방 시스템으로 군대가 필요 없으니 군 면제 특혜 비리 같은 것도 없다. 공부하라고 스트레스 주는 사람도 없다. 오직 신나게 잘 노는 방법을 가르친다.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한다. 노동을 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기업이 소득을 배분한다. 아이의 탄생은 국가 전체의 축제이며, '영원히 행복할 의무'를 부여받는다.

 

나는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아로니아는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고 시민의 존엄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한다. 시민은 늘 항상 언제나 국가권력보다 무겁고 소중하며 우선돼야 한다. 오로지 이것만이 아로니아가 존재하는 이유다.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허투루 여기는 국가는 국가로서 자격이 없다. 시민의 존엄과 자유와 행복을 나 몰라라 하는 국가는 국가로서 존재 이유가 없다. 자격이 없고 존재 이유가 없는 국가는 반드시 사라져야 마땅하다. 잘라서 말한다. 아로니아 시민은 곧 아로니아 국가 그 자체다. (151~152페이지)

 

듣고 있자니 살짝 어이가 없기도 하다. 이런 나라가 있을 수가 없잖아. 그러니 이런 말장난 같은 거 그만두고 오늘의 현실을 제대로 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우리가 바라던 나라가 바로 이런 나라 아니었을까? 균등한 분배가 이루어지고, 상하를 나누는 학습이 아닌 공부, 치열한 경쟁에서 이뤄내야 할 부유함이 아니라 보통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고 싶은 것. 누구나 바라지만 함부로 이뤄지지 못할 일이기에 상상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이렇게 간단하게(?) 이뤄놓은 이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김강현과 그의 일당들은 해냈다. 이상향의 나라를 상상 속에서 머물게 놔두지 않고 현실로 옮겨왔다. 이제 아로니아 공화국의 국민들은 재밌게 잘 놀면서 행복해지기만 하면 된다. 그게 아로니아 공화국 국민의 의무다.

 

이런 나라가 있다니! 아니, 이런 나라가 있다면 누구라도 먼저 가고 싶지 않을까? 적어도 지금 이 땅에서 겪는 불행한 삶과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감 안고 찾아가고 싶을 것이다.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요소를 조목조목 따져가며 그 해결책을 마련하거나, 그 불행과 반대되는 정책으로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는데 놓치고 싶지 않다. 그곳으로 가면, 내가 아로니아 공화국 국민으로 속한다면 정말 행복해질 것만 같다. 그렇다고 믿었다. 아로니아 공화국 국민도, 아로니아 공화국을 만든 김강현 대통령과 개국공신들도. 처음에는 그들이 바라는 이상향에 맞는 나라로 갖춰지고 있음에 너도나도 행복했다. 신난다. 그들이 그리고 꿈꾸던 나라가 이렇게 이뤄지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 있자니 이 무슨 신성한 일이던가. 하지만 그 꿈같은 일은 오래가지 않는다. 그들이 바라던 세상은 '인간의 존엄과 자유와 행복'이었다. 그 바람이 이뤄지는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몇 년 동안 그들이 그리는 세상을 차곡차곡 만들어가면서 확인하게 된 건 '인간의 존엄과 자유와 행복'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강현의 아내 강수영이 현 정권의 야당에 가입하고 차기 대통령이 되어 이루고자 하는 건 그들이 이룬 국가의 소멸이었다. 아니라고 하지만, 기존의 국가들이 국민을 불행하게 했던 요소들을 배제하고 끌어가는 게 아로니아 공화국이라고 하지만, 그 안에서 점점 피어오르는 건 국가의 본성이었다. 인간의 존엄과 자유와 행복을 양립할 수 없게 하는 국가 운영 시스템이 그러했다. 관리와 통제, 규율과 제재, 그 이상의 여러 가지가 국가와 국민이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없게 했다.

 

소설은 김강현의 과거와 대통령 퇴임을 앞둔 일흔의 현재를 교차로 보여주는데, 그의 과거가 서술되는 장면에서 대한민국 현대사를 그대로 드러낸다. 특히 김강현이 대학에 가고 사법고시를 합격하고 검사가 되고 또 검사를 그만두게 되는 과정이 암울한 대한민국의 민낯을 고스란히 비춘다. 부정부패와 부조리, 학연 지연으로 공정하지 못한 판결의 순간들, 세상이 미쳐 날뛴다고 생각할 정도로 무엇 하나 인간의 행복과 연결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 대한민국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 시스템에서 수혜의 대상이었던 김강현이 뒤늦게 깨달은 것이 국가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 그런 국가를 떠나는 게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인데, 이 타이밍에 끼어 들어온 무리로 김강현은 아로니아 공화국의 건립을 실행에 옮기게 된 거다. 그렇게 새로 세우는 나라에 얼마나 기대가 컸을까? 정말 잘 놀기만 하면 되는 나라라고 생각했겠지? 이 소설을 읽는 나 역시 그럴 거라고 믿었고 기대했다. 소설에서나 가능한, 상상 속에서나 이루어질 일을 그려내는 순간의 희열 같은 것을 느꼈으니까. 하지만 '국가가 국가로 존재하는 데 필요한 요소들은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온전하게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강수영이 김강현에게 설명하는 장면을 볼 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랬다. 김강현이 이룬 국가는 점점 우리 사는 현실의 국가와 닮아갔다. 그때 강수영이 제시하면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공약 또한 기가 막힌다. '공동생산, 공동분배, 공동행복'이었다. 공산당이 없는 공산주의식 인간공동체를 꿈꾸는 것이었다. 이것 역시 온전하게 이뤄질 수 있을까?

 

지금까지 지구상에 없던 나라. 누구나 꿈꾸던 나라. 하지만 우리가 사는 모든 국가의 모습이 그대로 비춰준 결말. 마지막에 강수영이 제시한 국가도 역시 완전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렇다) 그녀가 이룰 나라의 시스템 역시 과부하가 걸릴 수 있고, 그 시스템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아질 수도 있다. 그녀가 김강현의 아로니아 당에 맞서 그린머슬아로니아 당에 입당하고 자기 생각에 목소리를 높인 것처럼 말이다. 새로운 대통령이 된 강수영이 아로니아 공화국을 어떻게 이끌어갈지 다 듣지 못했기에 섣불리 강수영 정권의 성공과 실패를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김강현에서 강수영으로 바통 터치된 정치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듣다 보면 한 가지 결론을 얻게 된다. 자신이 속한 국가에서 문제를 먼저 찾을 게 아니라, 그 국가의 시스템 안에서 내가 어떤 자세로 살아가는지 먼저 점검해야 할 문제였다. 나라가 싫어서 떠나고, 나라가 싫어서 새로 만들어도 변하는 건 없었으니까.

 

시종일관 웃음과 기가 막힌 상상으로 독자를 시선을 놓치지 않는 소설이다. 그만큼 우리의 간절함을 담은 이야기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김강현의 성장 과정은 특히나 재밌다. 꼴통이 첫사랑에 빠져 개과천선하여 성공한 남자로 거듭나는 게 기적을 보는 것 같았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와 배경이 흥미롭기도 하다. 그들이 모여 풀어내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웃음이 끊이지 않지만, 소설은 결코 가볍게 흐르지 않는다. 분노와 아픔, 감동과 추억이 새겨진 우리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행복 하고자 국가의 탄생을 이뤄냈고, 그 행복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 국가의 소멸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행복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바라는 행복은 어디서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 그 행복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에 맞서 어떤 대안을 만들어서 행복에 이르러야 하는지 계속 묻는다. 그 대안이 국가를 세우는 것만은 아닐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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