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괜찮아지고 있습니다 - 시골책방에서 보내는 위로의 편지들
임후남 지음 / 생각을담는집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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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후미진 주택가라 해도, 없으면 하다못해 작은 문방구 하나 정도는 반드시 동네에서 서점 노릇을 했었습니다. 지금은 번화가에 나가도 번듯한 서점 하나 찾기가 힘듭니다. 얼마 전에는 반디앤루니스가 드디어 문을 닫아서(일부 매장 제외) 많은 이들이 우울해기도 했죠. 이런 판에 도시에서 시골(비교적)로 이사하여 작은 책방 하나를 내신 작가님의 생각, 느낌은 어떤 것인지 누구든 궁금해할 만합니다.

서점도 서점이지만 도시 생활을 접고 구태여 먼 곳으로 이사헸다는 건 특별한 심경의 변화가 있지 않으셨을지... 제목도 "나는 이제 괜찮아지고 있습니다"입니다. 책 표지에 친필로 써 주신 "OOO님, 우리 함께 괜찮아져요"라는 문구를 읽으며, 독자인 나는 어땠으며 지금 어떤가, 안 괜찮은데 혹 모르고 있진 않은가, 이런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런 세상, 정신적으로 어지럽고 물리적으로 심히 오염된 이런 시대를 살며 오롯이 "괜찮은" 분이 그리 많지 않겠다는 생각이 맞지 않을지요.

"요즘 지내는 게 어떠신지요.
마음은 어떠신지요.
생활이 낭만이 아니어도 저는 낭만적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후략)"

p47에는 저런 말이 나오고 그 페이지 앞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사정이 나옵니다. 이사 후 큰 비가 오고 4층 벽이 사라지고 옆집 창고로 내려앉아 2차 피해까지 낳았다는 겁니다. "1층 바닥엔 황토 더미가 가득하고"... 누가 시골 생활이 낭만 가득하다고 하겠습니까. 이런 일을 겪으면 금전적, 물리적 피해는 둘째 치고 정신적 충격이 참 클 듯합니다. 게다가 친구분에게는 누군가가 표절을 해서 큰 상처를 주고... 저자는 여기서 "품위"를 말합니다. 서로가 자신을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고 살면 모두가 상처로부터 조금은 안전해질 텐데...

"사진으로 보는 건 눈으로 보는 것만큼 아름답지 않습니다(p71)" 반대로 눈으로 보는 것보다 사진이 훨씬 아름다울 수도 있는데 이는 찍는 분이 기술이 좋아서겠죠. 저자는 "순간의 느낌"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눈으로 보는 게 훨씬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분명한 것은 안개는 걷힌다는 것이지요. 살면서 안개 속에 갇혔다 싶을 때에는 헤매지 말고 안으로 들어와 나의 일과 마주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p74)." 상처가 정말 크고 방향 감각마저 잃어버릴 때에는 내 일로 복귀하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긴 하더군요. 꼭 그럴 때는 (아예 너무 상처가 커서 아직도 제 정신이 안 돌아왔을 때를 제외하면) 집중도 잘 되긴 했습니다.

"집 앞에 너른 땅이 있습니다. 원래는 논이었던 곳이 농사를 짓지 않자 버드나무가 자랐습니다. 땅주인이 바뀐 뒤 나무를 모두 베어냈는데 여름이 되자 망초꽃이 가득 피어났습니다.(p100)"

이 다음에는 오후에 이웃분이 누드베키아를 들고 찾아오셨다는 말이 나옵니다. 망초꽃이나 누드베키아 모두 독자인 저한테는 낯선 꽃인데 인터넷에 검색을 해 보니 둘 다 화사하기보다는 수수한, 그러나 자태가 확실한 꽃이더군요(제 느낌으로는). Rudbeckia는 400년 전 어느 과학자의 이름을 따 그리 불린다고 합니다. 여튼 앞으로는 저 꽃이 루드베키아구나, 혹시 눈에 띄기라도 하면 반가울 것 같습니다. 그 배경에 바람이 선선히 불어 주면 더욱 더.

작가님의 전작이 <시골책방입니다>인데 어느날 손님이 한 권을 계산하고 나가다가 다른 손님이 마침 들어와 "이 책 강력 추천이에요!"라고 하는 말에 나가다 마시고 한 권을 더 샀다고 합니다. 저는 이 장면도 (상상해 보면) 재미있지만 그 다음 상황, 작가님이 그 막 들어오던 손님에게 "몸 둘 바를 몰라 연신 고마워하는" 모습이 더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구체적인 건 궁금하면 p110 이하에서 직접 확인하십시오)

사실 오랜 동안 안 만나고 지내면, 아니 불과 2~3년만 못 보더라도 나한테 이런저런 일들이 생기면 얼굴 잊는 건 한순간입니다. 사람은 당연히 그대로인데 장소만 확 바뀌어도, 또 도회(불과 본인도 몇 년 전까지 몸 담았던) 출신인 듯 세련된 복장과 분위기로 마주하면 이상하게 (이제)시골의 나는 좀 위축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게다가 그분은 그동안 외국까지 갔다와서 새로운 일까지 시작한 분이니... 여튼 통하는 사이끼리는 깻잎에 싸 먹는 삼겹살(p111)이 제격입니다. 그래서인지(?) 도심 어느 가게라도 깻잎은 꼭 같이 내 주죠. 그 맛 아니까....(?)

"하루를 사는 게 '살아낸다'는 것, 이런저런 일들이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p124)." p4의 프롤로그에도 "살아낸다"는 표현이 나왔었습니다. 나이가 들면 아픈 곳도 많아지고 사실 몸이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사람들, 품위 없는 사람들, 상처 주기 좋아하면서 정작 자기 상처는 못 견뎌하며 더 민폐를 끼치는 사람들, 이런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얻는 정신적 상처가 더 큰 것 같습니다. 몸이 아픈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살아낸다, 안 괜찮다" 이런 느낌을 우리에게 쉴새없이 안기는 건 바로 이런 관계의 상처, 아픔인 것 같습니다.

"너무 아파서 글을 쓸 수 없어요.(p158)" p124에는 너무 아파서 샤워할 힘도 없었다는 어떤 분의 말도 나왔습니다. 물론 뒤의 말은 위경련 관련이었고, 앞의 말은 책방에서 현재 글쓰기 수업을 하시는 저자에게 어느 수강생이 한 것입니다. 상처와 자기 연면에서 비롯한... "나이 들어서 배우는 일은 속도가 빠릅니다." 어찌 들으면 통념과는 상당히 다른데, "절실함이 크고, 그만큼 무르익었기 때문"이라고 하시네요. 그런데 나이 들었다고 다 그리 될 것 같지는 않으며, "절실함이 크고 그만큼 무르익는다"는 게 또 아무나 다 그렇지도 않을 듯합니다. 무르익지까지는 못해도 절실함 하나라도 키울 수 있다면 나이 들어서도 여전한 행복을 찾을 수 있을 듯합니다.

"난 글씨 쓸 줄 몰라. 좀 이따 글씨 잘 쓰는 사람 올 테니 그 사람더러 쓰라고 하면 돼(p178)." "그런데 여기 사람이 와요? 솔직히 말해 보셔." "어르신들도 오셨잖아요." 사실 어르신들이 목소리는 원래 더 큽니다. 그렇게 목소리를 키우시면 아직 기력이 정정하다는 걸 증명하시는 셈 치는 건데(모르긴 해도요)... 아닌 줄은 서로 다 알면서 모르는 척 해드리는 거죠. "공기 좋지, 책 있지, 커피 있지." 그렇죠. 커피도 있어야 할 듯합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 갈잎만 빼고 딴 것들은 두루 먹는 편이 송충이에게도 좋지 않겠습니까. 참고로 이 시골책방은 여러 행사가 열리고 유명인들도 많이 찾아옵니다(p226, p249 등).

"그냥 너 자신으로 살라고, 모자란 것은 모자란 대로 잘하는 것은 잘하는 대로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p243)." 이 문장은 엄마, 자녀에 관한 한 모든 것을 아는 엄마 이야기 끝에 나온 것입니다. 엄마는 결국 자녀를 (성인으로서) 떠나보내야 하고 자신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와는 사실 거리두기가 필요하다는 말이 오래 남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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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모두의 적 - 해적 한 명이 바꿔놓은 세계사의 결정적 장면
스티븐 존슨 지음, 강주헌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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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처럼 책이 술술 넘어가는데 읽으면서 이게 소설이 아닌 실제 역사라는 점을 깜빡 잊을 정도였습니다.

한국 영화 중에도 "공공의 적" 같은 제목을 단 작품이 있고 미국에서도 조니 뎁 주연의 <퍼블릭 에너미>가 있었습니다만 대체로 이런 별명이 붙은 가상의, 혹은 실존했던 인물 중에는 이름난 범죄자가 많습니다. "인류 모두의 적"이란 말은 저자만의 규정이 아니라 당시 실제로 이 책의 주인공에 붙여졌던 명칭인데 당시의 문어 국제어였던 라틴어로 "호스티스 후마니 제네리스"였습니다. 호스티스는 유흥업소 접객원이 아니라 "적(敵)"이란 뜻이며 영단어의 hostile이 저 라틴어에 어원을 둡니다. p248에서 저자는 현대판 "인류 모두의 적"으로 오사마 빈 라덴의 예를 듭니다.

육상의 세계는 제도적 권력을 휘두르는 이들이 장악하고 있으니, 제도에 순응할 생각은 적고 야심은 큰 이들이 진출할 곳은 (보는 눈이 없는) 바다뿐입니다. 신체적 능력도 뛰어나고 머리도 잘 돌아가는 걸물들이 바다에서 노략질로 큰 부와 세력을 쌓은, 이른바 해적들의 예는 역사상 무수히 많고 그 중에는 드레이크(이 책에서는 p78에 잠시 지나간 역사 한 대목으로 언급)처럼 마침내 제도권에 한 발을 담그는 데 성공한 자도 있습니다.

영국은 본디 해상 강국의 역사가 길어서 제도권의 해군도 강했지만 그곳 출신 해적들의 발호도 무척 극성스러웠습니다. 이 책은 "17세기에 가장 악명 높았던 해적왕이자, 최초로 전세계적 수배령이 내려진 인물로도 유명한(앞 책날개 中)" 헨리 에브리의 일생을 다뤘습니다.

저자는 "헨리 에브리의 삶이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었다면, 영국의 인도 아대륙 점령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p61)"고 합니다. 와우! 역사에 물론 if는 없다고들 하며(이 책 p242에서도 저자가 자기 입으로 이 비슷한 말을 합니다. 또 p278에서는 "대체역사는 픽션과 구분되지 않는다"고도 하네요), 인도 점령은 근 백 오십 년에 걸쳐 이뤄진 점진적 사건이며 수많은 요인과 우연이 개입한 결과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악명 높았던 어느 해적의 행적이 이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많은 이들이 쉽사리 떠올리기 힘들지 않겠나 싶습니다. 엄청 재밌어집니다.

잉글랜드는 본래 숨막힐 정도로 수직적인 위계가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어떤 소년이 런던의 빈민가에서 태어났다면 아마 평균적인 수명도 못 채우고 끝까지 비참하게 살다가 생을 마무리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도 않았던 것이, 이 나라에는 바다라는 숨통, 출구, 계급 이동의 사다리가 있었습니다. 마치 천 수백 년전의 로마처럼, 하층민들은 군 입대를 통해 분수에 없던 부를 축적하거나 사회적 인정을 얻을 수 있었죠. 물론 대단히 위험한 일인지라 운 나쁘면 목숨을 잃기도 하고 혹은 크게 다치기도 했습니다.

헨리 에브리는 런던이 아니라 데번셔 출신이지만 여튼 그 과정은 비슷했습니다. 지금도 미국 일부 주에서는 부랑자, 노숙자, 구걸 등을 경찰력으로 단속하는데 에브리가 입대한 과정도 그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추측하는 입장도 있다고 저자는 전합니다(즉 프레스 갱의 "등쌀"에 못이겨서일 수 있다는 거죠). "당시 입대한 초보 수병의 경우 20파운드 미만의 빚이라면 채권자들로부터 보호도 받았다(p26)"라는 구절이 있는데 물론 채권자가 독촉하는 걸 시스템이 보호했다는 뜻입니다.

총명한 생존자 타입인 헨리 에브리는 혹독했던 영국 수병 복무에서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성공적인 군인으로서 어느 정도 입지를 마련했었던 걸로 보입니다. 적자 생존이라는 건 이런 예를 두고 하는 말이죠. "훤칠한 키에 우람한 체구, 잿빛 눈동자의 30대 후반" 당시의 그를 묘사한 기록입니다. 스페인 난파선 인양을 위한 원정에 일등 항해사로 참여한 그는, 아마 자신도 분명히는 몰랐을 어떤 사건을 계기로 일약 잉글랜드 전체, 아니 세계가 주목한 거물이 됩니다. 물론 범죄자로서 말입니다.

선상 반란은 역사상 유명하고 충격적인 사건들이 엄청 많지만 이 찰스 2세호의 사건도 흥미로운 구석이 꽤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이 선상 반란에 특별한 역사적 의미가 담길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p118)"는 게 중론이었겠죠. 투자자나 선원들이 험한 항해에 구태여 몸 담는 이유는 이로부터 큰 이익을 기대해서입니다.

그러나 출항 후 스페인 난파선 인양으로부터 많은 이익을 바라던 전망이 나날이 어두워졌고 임금 체불의 문제가 심각했으며 심지어 선원들이 노예로 팔릴 것 같다는 소문도 돌았습니다. 선장은 자제력과 건강을 동시에 잃어 갔으며 일등 항해사 중 한 명이었던 헨리 에브리는 말단 선원들과 다른 항해사들을 포섭 또는 협박하여 선상 반란을 성공시킵니다. 거사 당일 이미 대세가 기울었던 걸로 봐서 평소에 그가 주변에 각인시킨 리더십이 탁월했던 듯합니다. 그 리더십이 바람직한 방향이었건 아니었건 간에 말입니다.

보통 도적떼들의 무리는 가장 독재적이고 폐쇄적인 상명하복관계가 지배합니다. 미국의 이탈리안 마피아 등도 예외가 아니죠. 정말로 특이한 건, 헨리 에브리가 선상 반란 후에 일종의 미니 헌법을 만들고, 자신의 무리들에 대해 일종의 민주주의 시스템을 적용하여 가장 탈권위적인 의사 결정 구조를 이어나갔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 점으로부터 곧바로 해당 인물의 도덕성이나 탁월함이 증명되는 건 당연히 아니며 해적이 무고한 이들에게 저지른 악행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조직의 효율성 추구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은 듯 보이는 그의 선택에 어떤 상황적, 심리적 배경이 있었는지에 더 관심이 쏠리는 거죠. 책 말미인 p345에 인용되는 찰스 존슨 같은 연구자는 리베르탈리아라는 해적 민주 국가, 지상 낙원의 존재를 주장하며, 이것이 이후 유럽 계몽 사상가들에까지 영향을 끼쳤다는 놀라운 결론마저 제시합니다.

앞서 1부 3장(p50 이하)에는 영국과 한참 떨어진 무굴 제국의 역사 몇 대목이 잠시 소개됩니다. 갑자기 이 이야기가 나오나 하겠으나 헨리 에브리가 저 멀리 인도 아대륙과 엮이는 대목이 있어서입니다. 묘하게도 아우랑제브의 즉위 연도와 헨리 에브리의 탄생년이 서로 같다고 합니다.

1840년대의 아편 전쟁도 사실 영국의 對淸 무역 적자 때문에 발생한 것처럼, 이때로부터 200여년 전 자한기르(타지마할을 지은 샤 자한의 부황)가 다스리던 무굴 제국도 은화를 먹는 블랙홀과 같았습니다. 기본적으로 타 세계보다 경제력이 우월했고, 자급자족이 가능한 거대한 생태계와의 무역에서 서유럽이 이길 가망이 없었죠. 상인들은 원래 독재자와 결탁하기를 좋아하며 자한기르의 시대에는 윌리엄 호킨스가 아대륙 황제의 특별한 호의를 얻어 영국 동인도 회사를 크게 성장시켰습니다. 대외무역 기득권자였던 포르투갈 상인들이 강력 반발했으나 이미 국세가 기울던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었죠.

자한기르, 샤 자한을 이어 아우랑제브가 제위에 올랐는데 이때 동인도회사는 저 야심만만한 군주와 더욱 관계를 다져 독점 무역의 이익을 제고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습니다. 여기에, 동인도회사를 둘러싸고 잉글랜드 내부의 계급 갈등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국왕과 일부 귀족은 동인도회사를 강화하려 했으나 하원은 반대했고 스캔들이 커지자 주가는 폭락했습니다.

한편 선상 반란 후 서아프리카 앞바다의 케이프베르데에 체류하던 에브리는 아프리카 대륙 반바퀴를 빙 돌아 마다가스카르를 거쳐 인도양으로 진입할 생각을 품었습니다. 마치 한니발이나 나폴레옹 등이 험난한 알프스를 넘어 모두의 예상을 깨고 원정을 성공시켜 정복자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모험은 그저 배짱 좋고 체력만 월등하다고 가능한 게 아니라 도중에 전혀 예상 못 하던 난관이 나타났을 때 어떻게 지혜를 발휘하여 이를 돌파하느냐 같은 순발력과 임기응변 대처력이 중요한 겁니다. 예를 들면 좀벌레나 따깨비 등이 선체를 위협할 때 에브리는 뭘 배운 바도 없는 사람이 기지를 발휘하여 기술적 해결책을 마련했습니다. 리더가 이처럼 능력이 있으니 나중에는 덴마크 사략선 패거리마저 "될성부른" 해적 항해에 동참하여 무리가 제법 커지기까지 합니다.

20세기 말 현지 정정 불안을 틈타 "아프리카의 뿔" 소말리아 인근에 해적이 출현했고 한참 후에는 우리 선박들도 피해를 봤죠.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해적이 나올 수 있느냐고들 했지만 책 p176에는 그곳이 예나 지금이나 최적의 사냥터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곳에서 헨리 에브리도 전환점 하나를 마련했습니다. 칭기즈칸이나 티무르는 잔혹한 무력 행사로 상대(다른 유목 부족들)를 복속시켰으나 헨리 에브리는 무슨 수완이었는지 협상을 통해 아덴 만에서 자신보다 훨씬 경력(?)이 오래된 해적들을 제 휘하로 끌여들였습니다. 앞서 선상 반란 때도 그는 가급적이면 피 안 흘리는 작전을 구상했다고 하니, "Blood is a big expense"라는 영화 <대부>의 명대사가 생각도 나네요.

저자는 에브리를 평가하기를 일단 "탁월한 지도력을 갖추었으며" "기존 규칙을 깡그리 무시하기보다는 (자신이 주도하여) 새 행동 규칙을 빨리 마련하고자 하는 편"이었으며 "유동적인 민주 체제의 선장"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인도양에 진입하여 미리 동인도회사에 경고하기를 가급적이면 충돌을 피하자는 메시지를 보냈는데 이는 주적에 집중하고 강한 무력을 지닌 상대를 회유하려는 의도도 있겠으나 여튼 그의 사고가 합리성에 의해 지배됨을 보여 주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반면 티무르 같은 이는 광기의 사내였죠.

이미 선상 반란을 통해 범죄자, 수배자가 된 그였으나 가급적이면 이후 항해에서 "영국의 법"은 어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게 재미있습니다. 앞선 선상 반란은 임금 체불, 선원 인신 매매 시도에 대응한 일종의 정당방위로 (혹시나 영국 법정에 서면) 항변할 생각(p239)이었던 듯도 합니다.

헨리 에브리가 타깃으로 삼은 건 "무슬림 보물선"이었습니다. 무굴제국 역시 외부에서 침입해 온 무슬림 세력이 왕조 개창자였습니다. 상선뿐 아니라 훨씬 역사가 오래된 대상(카라반)도 누구 못지않은 무장 집단이었으므로 어설픈 해적질은 오히려 나 좀 죽여달라는 자폭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앞서 에브리에 자진 투항한 토마스 튜 같은 해적은 전투(에브리는 모르고 불참)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튜를 죽인 "보물선"은 얼마 후 에브리에게 포획당합니다.

에브리는 그에 만족하지 않고 오래 전부터 점찍어 둔 건스웨이 호를 마침내 대파하여 막대한 부를 거머쥡니다. 건스웨이는 이름이 서유럽에 그리 알려졌을 뿐 아우랑제브 황제가 직접 관할하는 배수량 1500톤의 엄청나게 큰 상선이었으며 정식 명칭은 "간지-이-사와이"였습니다.

아무튼 이런 일이 생기자 아우랑제브는 대체 동인도회사에 독점권을 줄 이유가 무엇인지 회의할 법도 했으며(p231에 "이는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신성 모독"이란 말이 나옵니다. 아우랑제브는 처음에 동인도회사와 영국 해적들을 구별할 필요를 못 느꼈다고도 합니다), 한편으로 영국 본토에서는 특히 토착 양모 기업들이 인도산 수입품과 경쟁해야 했으므로 (주가 조작 스캔들을 떠나서도) 이 동인도회사를 좋게 볼 이유가 없었습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국내외에서 모두 위협을 맞은 셈이었이며 따라서 저 헨리 에브리라는 해적을 반드시 절멸(p241:16)해야만 했습니다.

저자는 필립 스턴의 말을 인용하며, 우리가 중학교 교과서에서 배워서 알듯 1757년에 클라이브가 프랑스와 한판 붙은 플라시 전투에서 이긴 후 동인도회사가 이른바 "자주권"을 획득했다기보다, 그보다 60여년 앞선 지금 이 시점(혹은 그보다 이전)에 이미 반(半) 국가처럼 행동했다고 합니다. 여튼 이제 동인도회사는 회사 존립을 걸고 해적을 찾아 약탈물을 회수하며 범죄자를 심판하고 재발을 방지할 숙명을 지게 되었습니다.

한편 건스웨이를 털어먹고 크게 한몫을 챙긴 에브리는 신대륙(아직은 영국의 식민지였던)까지 가서 일부 현금화를 하고 대담하게도 아일랜드까지 와서 나머지 일을 마쳤다고 합니다. 책에서는 이를 두고 "가장 험난한 신혼여행(p283)"이라 말하는데 건스웨이의 전리품 중에는 아우랑제브의 손녀도 있었고 평소 궁중의 풍습에 불만이 적지 않았던 그녀를 에브리가 신부로 맞이했기 때문입니다(이에 대해서는 p345 이하에서 저자가 전혀 다른 가정, 예를 들면해적들에 의한 윤간이나 이후 病死 등 다른 전개들도 제시합니다). 에브리의 부하들도 큰 부를 바탕으로 신대륙 나소에서 현지의 여인들과 맺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저자는 이를 두고 해당 지역의 인구 분포에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고까지 합니다.

에브리의 이야기는 영국 본토에 시가, 이야기 등의 형식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p138, p292 등에 자세히 나옵니다. 이런 낭만적 과장과 윤색은 대중 사이에서 에브리의 인기를 비정상적으로 높였으며, 이를 우려한 영국 정부는 해적행위를 해사(범죄)법정에서 관습법법정으로 관할 이전하는 법개정을 단행합니다. 일단 해적들 중 일부(에브리는 붙잡히지 않았지만)는 해적행위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다시 선상반란으로 기소되어 결국 처형됩니다. 이 법정다툼은 약간의 상상력을 가미하여 제30장에 재미있게 묘사되며 저 앞 p91의 "다섯 명의 선원은 해적 처형장에서 교수형이 처해지며 참혹한 운명을 맞이했다"는 기술은 사실 그 죄목이 선상반란이었던 거죠. 제31장(p327 이하)에 처형 관련 서술이 자세히 나옵니다.

아무튼 이 사건을 계기로 특히 18세기에 해적 이야기는 문예, 연극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제가 되었으며 동인도 회사는 "새로이 얻은 권한을 바탕으로 결국 인도 아대륙을 지배하게 되었다(p339)"고 합니다. p61에서 처음 독자에게 던진 규정이 여기서 그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는 거죠.

큰 재산을 챙긴 헨리 에브리는 끝내 종적이 묘연해졌으나 영국 정부도 죄목을 바꿨을망정 해적들을 처단하여 국제 사회에 반(反) 해적 스탠스를 명확히하여 이미지를 개선했고 동인도회사는 저자의 규정대로 그 세력을 더 키웠으니 손녀(와 재화)를 뺏긴 아우랑제브만 제외하고 모두가 승자가 된 셈입니다. 책에는 호메로스부터 페르낭 브로델까지 다양한 전거가 인용되는 등 학문적 바탕도 충실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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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속 성 심리 - 에덴에서 예수 시대까지
조누가 지음 / 샘솟는기쁨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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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에서 읽은 말인데 몇몇 기독교 신학생들이 신학교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며 성경 안에 너무 성적인 이야기들이 많아서 "성경(聖經)이 아니라 성(性)경인가?" 같은 농담을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물론 조심스럽게 꺼내도 꺼내야 할 농담이며 경전에 대한 쉬운 폄훼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고 해도 성경 속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당혹스러운 서술에 심경이 복잡해지는 것도 사실이겠습니다. 이 책은 그런 분들이 읽으면 아주 좋을 책입니다. 저자는 <라하트 하헤렙> 등 1980년대에 많은 베스트셀러를 펴낸 소설가 趙星基 선생입니다.

성경 특히 구약에는 수백 년 단위의 수명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기록되어 독자의 놀라움을 부릅니다. 물론 연 단위의 길이가 현재와는 다를 수도 있고 문면대로의 해석을 삼갈 필요도 있겠지만 여튼 장수의 정도에 대해 경이감이 일단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죠. 책에서는 p32에서 "싸네"가 현재로 환산하면 석 달이나 한 달의 기간일 수도 있다고 하니 예컨대 팔백 사십 살이면 70 혹은 210세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저자는 차라리 "현대의 환경 오염이 성생활 수명 단축을 불렀고 그런 까닭에 구약의 기록이 독자들의 부러움을 산다"며 오히려 현대인의 자성과 경각심을 촉구하는 쪽으로 해석합니다. 즉, 술담배를 줄이고 자연식을 하며 긍정적인 마음을 품고 살면 고대인처럼 자연이 베푼 기쁨을 더 오래 누릴 수 있다고 하시니 이 또한 귀 기울여 들을 말입니다.

"성에 대해 용감히 할 말을 하는 사람의 심리에도 성적 수치심은 깔려 있다(p26)" 이는 미셸 푸코의 저작 중 두 구절을 두고 저자가 내린 평가입니다. 저자는 과거 문제적 회고록으로 화제를 부른 여배우 서갑숙과 고 마광수 교수에 대해서도 비슷한 평가를 합니다. 고 마광수 교수는 趙星基 선생과 공교롭게도 나이가 같습니다. 고과연 선악과를 맛 보고 수치심을 처음 알게 되었다는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저자는 "창조주와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려는 인간의 노력"에 더 중점을 둡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고 추방당한 후 에덴의 동편 놋 땅에 거주하며 아내와 동침했다고 하는데 최초의 인간에게서 1대 혈통만 내려온 가인에게 어떻게 동기간이 아닌 아내가 있을 수 있을까요? 근친혼의 의심이 자연히 들 수밖에 없고 이 부분 역시 독자의 마음을 어지럽게 합니다. 아담과 이브의 행위가 신에 대한 배덕이었으니 그 죄과로 우리는 모두 근친혼이라는 악행으로부터 태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해석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어둡게 만들지만 성경을 하나의 비유로 보고 그 핵심의 메시지만 취하자는 체안도 가능합니다.

왜 인류는 구태여 성기를 가리는 쪽으로 의복 풍습을 만들었을까요? 프랑스는 근세에 이르기까지도 귀족, 부르주아지 여성들이 가슴을 상당히 노출하는 패션이 있었고 여러 문명에서 신체의 다른 부분은 비교적 자유롭게 드러내는데도 말입니다. 사회학자 엘리아스는 수치심이 아니라 반대로 신성의 상징이 성기에 깃든다고 여겼기에 원시 인류가 이를 가렸다고 주장했으나 이에 반대하는 주장이 더 많습니다. 이는 구약에 나오는, 만취하여 성기를 노출하고 잠들었던 노아가 이를 가려 주지 않은 두 아들 함과 야벳을 저주했다는 이야기의 해석에서 저자가 끌어낸 논의와 관계 있습니다.

야곱의 딸 디나는 세겜에게 성폭행을 당하며 야곱은 이를 복수하리라 마음 먹습니다. 세겜의 부친은 야곱의 딸을 좋게 보고 아예 통혼하여 이 고장에 함께 살자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딸이 성폭행당한 굴욕을 참을 수 없어 세겜 족의 남자들을 속인 후 포경 수술의 고통에 신음하는 그들을 모두 죽여 버립니다. 이 이야기는 어렸을 때 대부분 포경 수술을 하는 한국의 남자들에게 당혹감을 안겨 주는 게 틀림 없죠. 성범죄의 응보를 당연히 받았을 뿐이라고 넘기기에도 뭔가 개운치 않습니다.

p77에는 20세기 초반 문제적 작가인 아나이스 닌의 충격적인 주장이 인용되기도 합니다(닌은 헨리 밀러 <북회귀선>에서의 바로 그 여성입니다). 저자는 문제의 저 성범죄가 당대의 종족 보존 관습이나 청혼 등 성적인 면을 떠나 한 인격에 대한 파괴였으며 이런 성격 규정이 오히려 시대를 앞선 면마저 있다고 합니다. 우리도 이 정도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듯하네요.

오나니즘이라는 말은 구약에서 오난의 행위가 정죄된 데서 유래했는데 사실 그 오난의 행위는 오늘날 우리가 이 단어를 통해 지칭하는 그 행위와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또 오난이 죄를 받은 이유는 종족 번식의 의무(당시 기준)를 게을리한 데 있을 뿐 중근세의 터부와도 전혀 무관하죠. 아마도 이런 이름이 한때 붙었던 건(요즘은 잘 안 쓰니까) 그 특정 행위 자체를 단죄하기 위한 의도가 컸겠습니다. 오히려 오난은 근친혼을 회피했으니 현대의 윤리로는 칭찬 받아 마땅합니다. 저자는 상대의 몸을 번식이 아닌 쾌락의 도구로 이용한 데에 오난의 죄가 있고 이 때문에 그 행위에 대해 오나니즘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것이라 주장합니다.

부나비는 죽을 줄 알면서도 불 속에 뛰어듭니다. 엠페도클레스도 사원소설을 입증하기 위해 자진해서 분화구로 뛰어들었다고 합니다(p95). 이로부터 가스통 바슐라르는 "엠페도클레스 컴플렉스"라는 개념을 만들었는데 여성의 유혹 앞에 의연했던 요셉의 미덕을 강조하기 위해 저자는 이 논의를 끌어냅니다. 이 대목은 현대의 젊은 남성들이 읽으면 좋을 듯합니다. 이와 반대로 처신한 사람은 무수히 많지만 대표적인 게 p111 이하에 나오는 삼손입니다.

다윗은 군주였으나 부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탐해 위험한 전장으로보내 그를 죽이고 아내를 취합니다. 예언자 나단이 우화를 통해 다윗이 스스로 그 잘못을 깨닫게 하는데 여기서 저자는 가상의 부자에 대해 다윗이 그토록 화를 낸 건 일종의 투사(projection)이라고 주장합니다.

암논은 배다른 여동생을 범한 파렴치범인데 정작 지탄받아야 할 건 근친상간 자체보다 일을 끝내고 나서 다말에 대한 혐오감이 일어 그녀를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못된 짓은 못된 짓이고 그 심리가 참 묘합니다. 한때는 그렇게도 원했으면서 말입니다. 당시 풍습으로 이런 경우는 성경 본문에도 다말의 말 중에 나오지만 법제적으로 수습될 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여자를 버렸다는 게 암논의 진짜 죄악상입니다. 다말의 친오빠인 압살롬은 이 일로 절치부심하며 몇 년 후에 복수하게 되는데 제 생각에는 암놈의 행동은 압살롬과의 관계까지 함께 고려해야 이해될 듯합니다. 압살롬은 이때 크게 정신적 상처를 입은 바 있었는지 이후 부친과 그토록 갈등하게 된 한 이유가 되었겠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열왕기 상에 연로한 다윗을 위해 "인간 난로"가 된 여인 아비삭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저자는 전순옥의 저서(개발독재 시대 여공들의 참상을 다룸), 시인 고정희가 읊은 "분단의 아픔"까지 이 맥락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는 판단력이 좀 부족한 사람이었는지 아도니야가 저 아비삭을 요구하자 대신 아들에게 청을 넣습니다. 솔로몬은 영민하여 그 의도를 대번에 눈치채고 격분하여 "어머니, 아예 그를 위해 왕권도 청하지 그러십니까?"라고 쏘아붙이고는 아도니야를 죽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아가>에서 솔로몬이 연모한 여성이 바로 이 아비삭이라는 가정 하에 (정적일 뿐 아니라) 일종의 연적으로까지 아도니야를 규정했다고 추측합니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이지적인 솔로몬이 유독 이 대목에서 격노한 걸 두고 하는 말입니다.

"상징은 비유처럼 옆(para)에 던지는 게 아니라 함께(sym) 던지는(bol) 것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비유보다 깊은 편이다(p172)." 성경에 등장하는 성적 표현은 문자 그대로 새기기보다 비유, 상징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더 바람직할 수도 있겠습니다. 신앙과 관련하여 여러 성적인 면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이들은 이런 책을 읽어 보거나 나이 지긋한 목사님을 찾아 진지한 상담의 시간을 갖는 것도 좋겠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머리 위에 새가 날아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으나 그 새가 머리 위에 둥지를 짓지 않게는 할 수 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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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에서 자유로워지려면 - 성경에서 찾다! 원치 않는 습관에서 벗어나는 법
마이클 그럽스 지음, 박찬영 옮김 / 샘솟는기쁨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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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은 우리의 심신을 병들게 합니다. 몸도 축나지만 그 과정에서 마음에 드는 병이 더 큰일입니다. 중독을 통해 우리를 유혹하고 망가뜨리는 건 우리 주변에 무척 많습니다. 술, 담배, 도박, 다양한 형태의 성(性) 습관, TV, 모바일 서핑... 중독은 필요 이상으로 이런 것들에 의존하게 되는 건데, 의존을 넘어 나중에는 노예가 되는 게 문제입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건전한 심성과 선택, 의지를 통해 인생을 개척하고 일상을 살아갑니다. 중독은 이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니 인간을 이처럼 타락시키고 비참하게 몰아넣는 것도 또 없을 것입니다.

특히 종교에서는 절제와 금욕을 가르칩니다. 금욕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이 역시 정신에 나쁜 영향을 주고 사회에 적응할 수 없게 됩니다만 좋지 못한 욕구를 적정 선에서 다스리게 하는 데에는 종교만큼 바람직한 길이 있기 힘듭니다. 어떤 고등 종교라도 금욕과 절제를 가르치곤 하며 특히 한국의 기독교는 대개 금주 금연을 강하게 권하는 편이죠.

책 추천사를 쓴 분들 중 한 분인 이재기 목사님은 한국 사회의 위기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알코올 중독, 게임 중독, 스마트폰 중독... 그 어느 때보다도 중독의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며 이는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다.(p12)" 오히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종교인들이야말로 중독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이웃의 모범과 선도자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 마이클 그럽스는 침례교 목사님이며 현재 캔사스 소재의 신학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님이기도 합니다. 특히 국가와 사회의 장래를 책임진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직분도 겸하시기에 이 실천적인 과제에 대해 더욱 큰 관심을 기울였을 만합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느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화이니라.(p25)" 로마서 8장의 인용입니다. 사람이 육신과 그 욕구에 집착하면 남는 건 허탈함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강렬하게 특정 욕구를 떠올리고 마침내 실현한다고 해도, 과연 욕구의 충족 후 뿌듯한 느낌이 듭니까? 오히려 회한과 허탈함, 자괴감이 엄습할 것입니다.

이 육(肉)이라는 것은 언젠가는 한 줌의 흙과 재로 화할 뿐입니다. 그러나 영(靈)은 이와는 달리 영원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가 2천 년 전 이 땅에 와서 가르치신바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육의 유한성과 무상성"을 전제로 삼은 교의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을 본받는다면서 육의 욕구에 굴복한다면 대체 성도가 된 의의가 무엇이겠습니까.

책에서는 한 장(章)이 끝날 때마다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벌거벗은 몸이 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이때 벌거벗은 몸이란 내면까지 완전히 들여다보인다(p33)는 뜻이라고 합니다. 아마 태초의 아담과 이브 역시 처음으로 이를 각성하고 한없는 부끄러움에 휩싸였을 듯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발가벗은 줄도 모르고 따라서 부끄러움도 모릅니다. 우리는 절대자, 신, 내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존재를 의식함으로써 비로소 도덕적 부끄러움이란 걸 체험할 수 있습니다. 동양에서도 하늘이 알고 땅이 알며 당신과 내가 안다는 이른바 사지(四知)의 고사를 들어 부끄러움을 깨우치는 예가 있었죠.

"이 죄악된 본성은 갈망한다!(p48)" 이 문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 중 하나는, 갈망이라는 게 죄악된 본성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너도 갈망하고 나도 갈망하며 죄악된 본성도 갈망하곤 한다는 느슨한 뜻이 아니라, 갈망한다(crave)는 자체가 죄악의 속성이라는 거죠. 우리가 무엇인가에 중독되어 갈망한다면? 우리의 본성은 그 순간 죄악과 동의어가 됩니다. 가뜩이나 아담과 이브의 원죄를 안고 태어난 우리들인데 말입니다.

교활하게도 갈망은 우리 개개인의 특성에 맞추어 침투해 들어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성 중독, 어떤 이는 알코올 중독, 게임 중독 하는 식으로 다양하게 중독의 현상을 나타냅니다. 허나 그 다채로운 현상의 내면, 중핵에는 똑같은 죄악이라는 녀석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거죠. 뒤집어쓴 탈은 제각각이나 그 사지의 끈은 죄악이 쥐고 우리를 꼭두각시처럼 조종합니다. 나쁜 충동과 중독은 마치 우리 자신의 일부인양 친밀하게 기만하고 밀착하지만 이는 우리가 아니라 죄악의 지시요 명령입니다. 속으면 안 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p58)." 로마서 7장의 인용입니다. 저자는 우리 마음 속에 선과 악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유한하고 죄 많은 육신을 따른다면 그 사람의 마음 속에서 선이 이길 가능성은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어떠어떠한 충동에 굴복하곤 합니다.

"고생을 했으니 술 한 잔 정도야." 혹은 그보다 더한 것도 있죠. 그런데 이런 육의 충동은 나 자신의 정직하고 바람직한 요청이 아닙니다. 다이어트를 생각해 보십시오. "고생했으니 오늘만 한 상 차려 놓고 폭식하자." 이런 속삭임에 넘어가면 아름다운 몸으로 가는 길은 또 한 걸음 멀어지고 건강 역시 나쁜 쪽으로 한 걸음 더 기웁니다. 이게 과연 자신을 위하는 요구이겠습니까, 아니면 악마가 가면을 쓰고 파멸로 이끄는 유혹이겠습니까? 죄악의 달콤한 손놀림도 이와 같습니다.

여기서 탐욕이라 번역되는 용어는 원어로 (책에 나와 있듯이) insatiability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문자 그대로 충족이 안 되는, 만족을 모르는, 이런 의미죠.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가 않는 겁니다. 육신의 욕구를 따르면 이렇게 됩니다. 중독자의 행태가 어떠합니까? 아무리 술을 마셔도 만족을 모르고 계속 마십니다. 성(性) 중독은 어떻습니까? 횟수도 제한이 없고 상대를 아무리 바꿔도 계속 새로운 상대를 찾습니다. 계속 그(녀)에게 말초적 쾌락을 공급해 줘야 할까요? 아니면 자신이 중독임을 일깨우고, 죄악에 물든 상태임을 깨우쳐 이 사슬을 끊도록 해야 할까요?

이 책의 원제는 <Broken Chains>입니다. 우리가 죄악과 중독의 사슬을 단칼에 끊지 않는 이상 영원히 육신의 감옥에서 헤어날 길은 없습니다. 이 책은 출구(Way Out)를 제시합니다. "첫째 일단 죄를 인정하고 생각을 바꿔야 한다. 둘째 새롭기만 해서는 안되고 마음의 일대 변화가 필요하다. 셋째 앞에서 말했듯 완전한 공개가 필요하다." 내가 뭘 숨기고 있으면 이미 죄악으로 복귀할 공간을 마련한다는 뜻이니 이는 중독과의 절연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이죠. 이게 바로 재발과 다시 시작(fits and starts. p131)를 막는 길입니다. 트리거를 제거하고, 사소한 나쁜 습관(habit)이 습관화(habituation)하여 죄악의 본거지가 내 마음에 요새를 구축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기도하고 성찰하며, 밑도 끝도 없는 구덩이를 사악한 욕구 대신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채울 수 있게 하라, 이것이 이 책의 결론입니다. 은총과 은혜는 아무리 받고 채워도 지나지치 않으니 말이죠.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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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후와 철학자들 - 덕질로 이해하는 서양 현대 철학 자음과모음 청소년인문 20
차민주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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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덕업일치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열정을 바쳐 몰두(이른바 덕질)하는 주제를 이용해서 생업의 영위까지 가능해지는 걸 가리킵니다. 아마도 예전의 쟁쟁한 철학자분들은, 알고보면 이 덕업일치를 실현한 이들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윤보미라는 가수를 모르는데 이 책을 읽고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이분에 대해서는 여러 재미있는 별명들이 붙는데, 저자는 그 별명들(이름들 자체)을 시니피앙, 이러이러한 가수라는 "뜻"을 시니피에라고 설명합니다. 드 소쉬르가 이런 체계를 창시할 때에는 훨씬 어려운 설명이었지만, 저자의 이런 설명을 듣고 나니 확 쉬워지는 듯합니다. 아직도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이 헷갈리는 분들은 "에"와 "의"가 우리말에서 왔다갔다 하기도 하는 발음이니, 뜻 의(意)를 시니피"에"와 연결지어 외우시면 될 것 같습니다.

라캉은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니피앙이 시니피에를 지배한다고까지 주장(p17)했습니다. 사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도 유명론과 실재론의 대립이 언급되죠. 스콜라 학파의 시대에까지 그 연원이 거슬러올라가는 아주 오래된 논쟁입니다. 저자는 일본 애니 <너의 이름은.>을 예시하며 "이름은 존재를 정의한다(p19)"고도 합니다. 한국의 대표적 명시 김춘수의 <꽃>도 생각이 나는 대목입니다.

p23에는 역시 천재 언어학자였던 소쉬르의 또하나의 개념체계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파롤과 랑그인데, 랑그는 그 사회의 규범 언어이며 파롤은 개인의 구체적인 언어입니다. 저자는 "사람들은 내 언어(파롤)을 랑그로 이해하고 들어줄 사람들을 찾아 모이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향우회, 동호회 등이 생기는 거고 말이죠. 이렇게 설명을 들으니 진짜 한 번에 이해가 되는 듯합니다. 알랭 들롱과 달리다 두 사람이 아주 예전에 부른 샹송 "빠호레 빠호레("paroles paroles")"를 연상하면 더 이해가 잘 될 것 같습니다.

찰스 샌더스는 아이콘, 심벌, 인덱스로 기호를 구분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OO의 아이콘" 같은 말을 흔히 쓸 때, 알든 모르든 은연중에 이분의 개념정의에 바탕을 두고 그런 말을 해 온 셈입니다. "즉시 해석이 가능하면 아이콘, 잠시 생각해서 유추 가능하면 인덱스, 학습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면 심벌(p29)" 이는 저자의 요약 설명인데 이 역시 딱 듣고 바로 이해가 가능한, 쉽고 명쾌한 규정이죠.

p35에는 중간쉼터라고 해서 "기호학의 변증법적 계단"이라는 일러스트가 있습니다. 한 층위 한 층위를 올라가면서 드 소쉬르, 퍼스, 롤랑 바르트, 야콥슨 등이 놓이는데, 이렇게 간단하게 언어학의 한 중요한 구도가 이해되게 만든 건 처음 봤습니다. 진짜 이 한 페이지만으로도 책의 멋짐이 증명됩니다. 야콥슨에 대한 설명을 잠시 옮겨 적으면요... "그는 커뮤니케이션 상황에 따라 뜻을 다르게 해석한다고 보았는데 예컨대 야구장에서 '마!'는 경고의 뜻이다." 혹시 저자분이 롯데 자이언츠 팬이실까요?

"존재- 존재자- 초월 존재"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설명입니다. 존재자는 이기적이지만 초월 존재는 변증법적 발전을 거쳐 "이타적"이 됩니다.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부캐"와는 다르다(p39)고 합니다. 초월도 세 가지가 있는데 출산, 양육 같은 조건 없는 사랑이 첫째요,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한 선행 같은 것이 둘째이며, 덕질과 같은 헌신(아무 보상이 없을 것임을 앎)이 세번째라고 합니다. 내 가수가 음원 랭킹에서 1위를 하는 것이 그 예라고 하네요. 첫째는 본능이고 둘째는 먼 거리에 있을망정 보상이 의식되는 거고 셋째는 그야말로 아무 대가가 없음을 행위 주체가 아는 것입니다. 존재자는 코나투스(뜻은 p41에 나옵니다. 철학용어이죠)를 갖고 있는데 초월은 이 코나투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goods는 영어권에서야 원래 다른 뜻이지만 일본에서 "굿즈"로 쓰기 시작하면서 전혀 별개의 뜻(우리가 지금 아는 그 뜻)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원본의 대리, 심벌, 인덱스" 같은 용어를 이 굿즈에 적용하여 설명합니다. 읽으면서 아 과연 그렇겠다 싶었습니다. "본질은 실존에 앞서지만, 오직 인간만이 예외라서 스스로 본질을 정의한다. 오직 인간의 실존만이 (인간의) 본질에 앞서게 된다. " 여기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마르크시즘과 결정적으로 갈라서게 되죠. 방탄의 "리플렉션"이라는 노래에서 "자유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는 가사는, 실존주의의 "자유라는 형벌"을 촌철살인으로 지적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꼭 사회적 성공이 아니라더도 자신이 머리 속에 그린 그림대로 살아내는 선택이 가능한데 이것을 기투(企投. Entwurf)라고 합니다(p51). "세상에 던질 나의 모습에 대한 설계"라고 저자는 말하는데, 저 독일어 명사 Entwurf가 동사 entwerfen("그리다"), ent(비분리전철 중 하나)+werfen("던지다")에서 왔기 때문에 과연 정확한 번역입니다. 영어에서는 그저 design이라고 번역하지만 이래서는 "던지다"의 뉘앙스까지를 담기가 곤란하죠.

예전에 동방신기의 "오 정반합"이라는 노래가 있었죠^^ 당시에 저도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저자는 "무려 헤겔의 개념을 주제로 하고 있다(p57)"고 하십니다. 무려 말입니다. 저자는 후라이드(프라이드), 양념, 그리고 반반의 관계를 정반합에 비유(p58)합니다. 한국의 자랑스러운 메뉴인 짬짜면도 예시로 등판해 줘야 할 것 같습니다.

저자는 이미 <BTS를 철학하다>라는 저서를 낸 적 있는데 "케이팝은 정이면서도 스스로 반을 찾아내 매력을 극대화시켜 합을 만드는 프로세스를 반복해 왔다(p59)"고도 합니다. 약간은 ㅎㅎ 꿈보다 해몽이란 느낌도 듭니다만 여튼 케이팝이 장르로서 세계적으로 이만큼이나 성공한 걸 보면 타당한 분석 아닐까 싶네요. "어제의 나에 머무름을 지양(止揚)하는 과정이 변증법이다(p62)." 와, 말씀을 너무 잘하시는 것 같습니다. 레알.

앞 p42에서 세번째 단계의 초월이 대가(對價) 없이 이뤄지는 것이라고 했는데, p69에서 저자는 덕질을 자본론적 관점(마르크스주의 중)에서 분석합니다. 덕후의 노동은 "지불되지 않은 노동"이지만 덕후는 "이미 대상에게서 과지불받은 행복을 돌려 주기 위해 노동과 재능을 기부한다"고 합니다. 정말 기가 막힌 설명이네요. 유튜브에서도 슈퍼챗(아프리카라면 별풍선)을 유저들이 쏘지만 저는 이게 사업모델로서 과연 타당성이 있겠는지 처음에 의심했습니다. 컨텐츠를 보고 행복을 얻어도 (그 대가를) 안 쏘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책의 저 한 문장으로 다 설명이 되네요. 그래서 구글의 유튜브는 말할것도 없고 아프리카TV의 주가도 (생각보다) 잘나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 자본(계급의 기초)을 추구하지 않고 다른 대상(덕질 대상)의 계급 상승에 이바지(재능과 노동의 무상 기부)하는 행동은, 자본의 관점에서는 우습게 보일 수밖에 없으며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덕후들이 무시당하는 이유이다.(p70)" 우와, 할 말을 잃었습니다. "덕질은 범사회적인 교환가치는 없어도 사용가치인 행복지수는 (그 덕후 본인에게는) 다른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이 높다." 교환가치와 사용가치의 갈등 관계는 일찍이 애덤 스미스 때부터(아니 그 이전부터) 치열한 논쟁거리였는데 이게 여기서 다시 등장하네요.

매슈 아널드는 필리스티니즘, 즉 "심미적으로는 조악하고 인지구조에서는 반지성주의와 단선적 사고(p75)"를 경계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초 이래 이미 여기서 파생한 대중문화는 주류로 자리잡았고 엄청난 부를 창출하는 상황입니다. "기자분보다 사진을 더 잘 찍으시는 것 같아요 - 우리는 애정을 갖고 찍으니까요(p78)." 저자는 이른바 홈마들이 인물 사진에 있어 탁월한 감각을 갖는다고 하는데 "좋아하고 원해서 하는 일이기도 하고, 자신의 스타가 어느 순간에 가장 빛나는지를 경험으로 알기 때문(p78)"이라고 합니다. "좋아해서 하는 것은 잘된다(p83)." 빈센트 반 고흐의 말입니다.

"오타쿠의 감성은 흔히 '벅차오른다'고 표현된다(p92)" 이때 벅차오른다는 감정은 학습된 관성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오토마티즘(의식의 흐름 같은 것), 데페이즈망(낯설게하기), 초현실주의 기법 등이 덕후들이 즐겨 쓰는 표현수단이라고도 합니다. "내 상상력이 우스워질 만큼 그렇게 넌 아름다워(p95)." AB6IX의 "초현실"에 나오는 가사 중 일부입니다.

"푼크툼(꽂힘)과 덕통사고(덕질 계기)는 wish와 관련되어 있다(p103)" wish는 hope나 want와 달리 먼 미래에의 불확실한 소망이며 그래서 영어의 가정법은 wish와 흔히 결합합니다. wish가 앞에 나오면 그게 적어도 지금의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입니다. 저도 저의 10대를 되돌이켜 보면 분명 덕통사고가 있었고 그때 이후와 이전이 완전히 다른 취향, 영혼, 욕구로 바뀌었던 걸 기억합니다. "푼크툼을 찔린 관객은 웅크린 야수로 변한다(p104)." 롤랑 바르트의 말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단일하게 규정될 수 없는 다양체(p110)"라고 한 건 들뢰즈이며 그는 모든 것을 일종의 기계 모듈로 보았습니다. 모듈은 분리와 재결합이 가능한데 통접(connexion)이 있고 이접(disjoinction)이 있다고 합니다. 또 확고하고도 개념적인 체계는 수목(tree)적이며, 유연하고 이념적인 체계를 리좀(rhizome)적이라고 불렀습니다(p111). 이게 중요한 이유는, 리좀적 체계 하에서만이 다양한 이종적 요소가 결합과 분리를 반복할 수 있음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즉 콜라보가 가능한 거죠. 저자는 "리좀적인 것은 고정 폴더가 없다(p113)"고 합니다.

덕질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이를 두고 저자는 라캉의 개념을 빌려 "고통을 즐기는 쾌락"이란 의미로 "주이상스(jouissance)"와 관계 있다고 합니다(p153). 거의 라캉만 그런 뜻으로 쓰죠. 왜 덕질이 이것과 관계 있냐면 덕후가 노리는 게 대개는 확률이 낮아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낮은 확률에 비례하여 쾌감도 커지는 게 역설적입니다. 금지와 장애물이 있어서 욕망이 더 커진다는 게 저자의 말(p154)입니다. 영원히 도달 못하는 쾌락은 잉여 주이상스라고 합니다. 과잉 그 자체가 목표라서입니다(p155). "강아지 꼬리용 샤넬 모자"는 실제 사용 가치가 거의 0이지만 가격은 또 엄청나게 비싼데 바로 이런 것, 즉 달성되지 못하는 욕망을 즐기는 게 잉여 주이상스라는 거죠. 그렇다고 해도 잉여 주이상스는 삶을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해 주고 힘든 삶을 지탱해 준다고 합니다. "덕후는 계를 못탄다(덕계못)"도 이것과 관련이 있죠(p167).

"환상은 잠재적 현실이며, 그래서 virtual은 잠재성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p174)" "환상을 기술하면 서사가 되고 환상을 표현하면 예술이 된다(p175)". 왜냐하면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으며 무의식은 우리가 모르는 또 하나의 우리이고, 미지의 초능력"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프로이트나 융과 달리 아들러는 무의식과 의식을 그리 선명히 대립시키지 않았다고 하죠.

실재계에는 이미 버려진 소망(오브제 쁘띠 아)가 있는데 이게 우리 무의식에 그대로 남아 상징계에 균열이 생기는 순간 나타나서 뜻하지 않게 무엇인가를 이루는(혹은 저지르는) 동인이 되기도 한다고 라캉은 말했습니다(p130). 저자는 "어릴 때 배우다 만 피아노나 마이클 조던의 부친이 아들에게 바라던 야구선수"등을 예로 듭니다. 그래서 라캉은 무의식을 두고 타자(autre)의 담론(p102)이라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하늘에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은 뛰는구나" 이는 워즈워스의 시 중 한 행인데 저자는 이를 두고 무지개가 워즈워스에게 설렘을 부르는 매개체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기억이다(p203)." 이는 워즈워스의 말입니다. 저자는 영화 <아비정전>을 예로 들며 장국영과 장만옥이 집중한 그 매 초 매 분이 일상의 순간과는 완전히 다른 이미지 기억 속의 시간과 감정이라고 합니다. 베르그송은 바닥에 현재의 내가 사는 지면이 있고, 거꾸로 선 원뿔이 과거(의 레이어)와 같으며 그 아슬아슬한 한 접점에서 과거와 현재가 만날 뿐이라고 합니다(p205). 이 역시 후설이 말한 "현상(p119)"과 통하며, 필터라고 할 수 있는 노에시스가 만든 노에마(pp.119~120)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저자는 현재의 아이돌이라고 할 때 이 뜻은 플라톤적 의미(p208)보다는 에피쿠로스 학파가 말한 에이돌라(p210)에 가깝다고도 합니다. 그들에 의해 창조된 예술품이나 퍼포먼스 외에도, 그 사람이 가진 매력의 파동까지 이미지인 상으로 전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작품이나 공연뿐 아니라 평소 사는 모습, 일상까지 아름다워야 하고, 그래서 소속사는 좋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애쓰며 이 때문에 포털 연예 뉴스 댓글란이 없어졌겠지요. 이런 심상(연예인에 대해서라면 어떤 환상 같은 것)이 깨지는 걸 유행어로 쿠크라고들 한다는데 모 과자처럼 이런 환상이 순식간에 쉽게 깨지곤 한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보들리야르가 말한 시뮬라크르(p216)입니다. "애인이 있어도 관계 없으니 제발 공개하지 말아달라." 1996년 카디건즈가 부른 노래 <러브 풀>이 생각나죠(디카프리오 주연 바즈 루어만 감독 <로미오+줄리엣>의 삽입곡).

덕후 현상 하나로 이렇게 많은 철학 토픽이 굴비 꿰듯 주루루 설명될 줄은 몰랐습니다. 이 독후감에는 핵심 주제어 중심으로 요약하다 보니 어려운 용어가 많이 쓰였지만 책은 실제로 펴 보면 엄청 쉽고 재미있게 진행됩니다. 참, 혼자 보기 아까운 유익하고 재미있는 책이네요. 이게 가능하다니.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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