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니어스 게임 2 - 속임수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69
레오폴도 가우트 지음, 박우정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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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틴 시절의 로망 혹은 동경의 대상은 천재소년(소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젊은 나이에 큰 돈을 벌 수 있는 직종은 스포츠스타 같은 것도 있겠으나, 이런 사람들은 잘 가꿔진 리그 안에서만 성취를 거둘 수 있고, 험한 세상 속에서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스스로의 지혜로 해결해 가는 뛰어남, 탁월함 같은 건 역시 머리가 좋아야만 가능하겠습니다.

원판은 시리즈 제목이 그냥 "지니어스"이며, "게임"은 1편에 붙은 부제입니다. 그런데 어차피 (설정 속의) 지니어스 게임에서 이 모든 난장판의 단초가 마련된 데다, 이 소설 전편에서 세 명의 주인공들은 일종의 게임을 하는 중이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2편의 부제는 한국어판에서는 "속임수"라 붙었고 원판에서는 "The Con"입니다. 3편도 이미 미국에는 나와 있는데 "The Revolution"입니다.

시리즈이므로 당연히 1편부터 읽어야 옳겠으나 저도 그랬고 꼭 1편을 읽어야 2편이 이해되는 건 아닙니다. 이 2편에 1편 내용이 꽤 많이 요약되었고 인물들 각각의 성격은 2편만으로도 충분히 파악됩니다. 2편부터 읽게 된 독자들은 소설의 형식, 시점이 좀 낯설 수 있는데 세 명의 주인공 이름을 번갈아 가며 챕터 제목으로 붙였고 그 챕터 안에서는 1인칭 "나"가 제목의 이름과 같습니다. 즉 챕터 제목이 "렉스"이면 이 챕터에서 "나"는 렉스입니다. 제목이 "툰데"면 "나"는 그 안에서는 내내 툰데를 가리킵니다. 어차피 진행은 1인칭으로 가야 하겠고 세 사람의 비중이 서로 같아지려면 이렇게 해야 했겠습니다.

1편에서 세 명의 틴에이저들은 누명을 쓰고 세계의 공권력에 쫓겨 다녔나 봅니다. 1편을 안 읽은 저로서는 왜 "카이"라는 제목의 챕터에서 "내"가 "페인티드 울프"인지 몰랐는데, 화장을 하고 선글라스를 낀 일종의 부캐가 페인티드 울프이고 본명은 카이 장입니다. 여성 청소년이고 중국계인 걸로 나옵니다. 렉스가 얘를 은근히 좋아하고 라이벌이 될 만한 인물, 예를 들어 나이젤(p30) 같은 키 크고 멀쑥한 젊은 남성이 나오면 렉스가 긴장합니다. 저는 이런 사정을 소설 1/4 정도까지 읽은 후에야 자체 정리, 이해할 수 있었는데 책 뒷날개를 나중에서야 보니 이런 설명이 다 잘 요약되어 있더군요(ㅠ).

렉스와 툰데는 내내 그녀를 "울프"라고 부르다가 소설 중반 "카이 장"이라는 정체가 드러난 후부터는 본명대로 "카이"라고 부릅니다. 이것 관련, p186에 "페인티드 울프를 받아들인다는 건 카이를 지운다는 의미가 아니라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으로 진화한다는 뜻"이라는 카이의 말이 나옵니다. 이 장르가 영 어덜트 판타지이니만큼 이런 게 독자의 성숙을 간접 촉구하는 의도가 있겠습니다.
 
이 2권에서는 일단 빌런인 키란에게 (1권에서) 크게 당했다고 하는 세 주인공이 설욕을 해야 하는데, 키란은 "웬만한 국가 하나를 운용할 만한" 엄청난 힘을 가진 자라서 이 세 주인공이 상대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입니다. 다만 키란은 세 주인공이 어떤 힘든 과업(스포일러이므로 설명 생략)을 완수하러 저 먼 나이지리아(툰데의 고향)까지 가서 분투하는 동안 그들을 찾아와서는 엉뚱한 제안을 하며 렉스를 지구 반대편으로 데려갑니다. 거기서 렉스는 참으로 오랜만에 형(예전의 어설픈 모습이 싹 가신)과 반갑게 조우하게 됩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맞죠.

렉스가 키란에게 설득당해 멀리 인도 콜카타의 실험실로 와 올리비아 등을 만날 때 올리비아가 렉스에게 다섯번째 실험실을 가리켜 "마이단"이라고 부른다고 알려줍니다. p219 각주에는 마이단이란 단어 뜻이 "페르시아어로 광장"이라 나옵니다. 음... 인도에서 왜 페르시아어 단어를 쓸까요? 북서부 인도는 역사적으로 이슬람 전투 종족이 많이 침투해 들어왔었고 이들이 페르시아 문화를 숭상한 까닭이 있어서입니다. 바부르가 세운 마지막 통일 왕조 무굴 제국도 궁정에서 페르시아 시스템을 널리 채용했고 이들은 인도 전통 문화를 몹시 경멸했습니다. 아마 2014년 우크라이나 시민혁명 당시 유로마이단이라는 말도 귀에 익을 텐데 이 역시 어원이 같습니다.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그 주변에 문화적 영향을 널리 끼쳤음도 확인 가능합니다.

이 책은 이처럼 한국의 어린 독자들이 문화적 맥락을 어려워하지 않게 세세한 배려를 베푼 게 또 큰 장점입니다. p155에는 중국의 민속춤 "앙가(秧歌)"라는 게 잠시 언급되는데 이게 한국식 한자음으로 일일이 고쳐 놓은 거라서 제가 읽으면서 놀랐습니다. 영어 원 텍스트에는 yangge라고 중국어 발음(당연하죠)으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한자는 당연히 없고). 보통 번역서에서는 이렇게까지 성의를 베풀지 않는 걸 감안하면 정말정말 마음에 드는 태도입니다.

p210에서 키란은 여튼 약속을 지키죠? 우리나라에도 디지털 장의사라는 게 있지만 키란도 세 주인공에게 어떤 반대급부를 제공해야 하므로 전과(누명이지만)로 얼룩진 그들의 과거를 싹 지워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스포) "페인티드 울프는 죽었다. 페인티드 울프 만세!"는 "The king is dead! Long live the king!"의 패러디입니다.

p236에서 툰데는 자신(들)의 과거, 이메일이나 기타 웹의 소소한 기록 포함 모든 게 지워진 줄 비로소 확인하고서도 그리 서운해하지 않습니다. 물론 자유를 찾은 기쁨이 압도적으로 더 커서이겠지만, 툰데의 다음 말은 우리 모두가 새겨들을 만합니다. "친구들, 이런 것들은 덧없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어른들도 쓸데없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상실에 미련을 갖곤 하지 않습니까?

소설은 세 주인공이 전지구적 음모를 분쇄하러 고군분투하는 내용이니만큼 스케일이 큽니다. 나이지리아의 자연 풍광 같은 게 아주 세밀히 묘사되는 건 아니지만 예를 들어 p248의 바오밥나무 같은 건 <어린왕자>에도 나오던 거라 반갑죠.

이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게, 정작 가까운 미래에 첨단 기술로 등장하는 건 공간이동 수단이나 광선검(...) 같은 게 아니라 이처럼 발전된 네트워크입니다. 망의 원리를 이해 못하면 세 주인공 같은 놀라운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또 세 사람 중 한 사람은 아날로그식 기계 수리, 설계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한 사람은 코딩의 천재입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기계 수리에 취미를 들이라고 권하기는 좀 그렇지만, 코딩은 이제 미래 사회에서 어떤 직업에 종사하건 필수 소양이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네트워크, 데이터베이스 아키텍처도 이 판타지 소설 안에서 일상용어처럼 언급되는데 어른 독자들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대목입니다. 뭐 잘 몰라도 소설 즐겨 가며 읽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지만 말입니다.

1권부터 먼저 찾아 읽어 보고 이후 국내에 번역 출간될 3권을 기다려야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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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 닭다리 탐정 - 비밀 짜장 소스 도난 사건 명탐정 닭다리 탐정 1
정인아 지음, 정예림 그림 / 모든북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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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닭다리 탐정이며, "박 조수"가 항상 그를 따라다닙니다. 이름이 괜히 닭다리 탐정이 아니라서 변신을 할 때에는 "완전한 닭의 모습"으로 가능하다고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닭다리 탐정도 특이하지만 박 조수가 더 놀라웠는데 p3의 등장 인물 소개를 보면 "스마트 황금 젓가락"를 귀에 꽂고 다닌다고 합니다. 그림을 보면 귓구멍에 꽂는 게 아니라(그랬다간 크게 다칠 수 있어서 위험하죠), 귀 뒤에 꽂아 놓고 다닌다는 뜻 같습니다.

이 황금젓가락 기능이 예사롭지 않아서 중간쯤의 p23을 보면 이 젓가락을 빙그르르(큰따옴표가 쳐진 걸로 봐서 다르게 돌리면 안 되고 반드시 "빙그르르" 돌려야 하는 것 같습니다) 돌리면, 그 근방의 모습이 360도 입체 촬영된 후 홀로그램으로 저장된다고 합니다. 놀라운 건 냉장고를 찍으면 그 속까지 다 보인다고 하는데 투시 기능도 있나 봅니다. 이걸 박 조수 혼자서 개발한 건 아니고 닭다리 탐정과 함께 개발했다고 나오는데 박 조수의 본업은 "요리 과학자"입니다. 참 다재다능한 캐릭터 같습니다.

박 조수는 특히 닭강정 요리를 잘 만든다고 하는데 닭 요리에 관한 한 모든 걸 다 좋아하는 닭다리 탐정이 절대 이 박 조수를 곁에서 멀리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이 사람에 비하면 렉스 스타우트가 만든 니어로(=네로) 울프의 컴패니언 아치 굿윈은 아무 쓸모도 없는 조수죠. 농담따먹기 말고는 특별한 재주가 전혀 없으니 말입니다. 울프가 그렇게나 음식을 좋아하는데...

p7에는 실제로 닭강정 만드는 방법이 그림과 함께 나옵니다. 이뿐만 아니라 p19에는 닭다리 튀김 만드는 방법이 나오는데 진짜 레시피입니다. 사건이 다 해결된 후인 p77에는 금먹방 셰프의 짜장면 만드는 방법이 나오는데 이거는 레시피까지는 아니고 그림만 참 맛있게 보이는 정도입니다. 이 책은 스토리도 재미있지만 그림이 너무 선명하고 예쁘게 그려져 있어서 그냥 그림만 봐도 재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p77의 내용은 레시피가 아닌데도 레시피 같은 착각을 안기게 그림이 잘 그려졌습니다.

"아니 어떻게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만 듣고도 누구인지를 알 수 있나? 나도 분명 보았는데 어떻게 자네만 알고 나는 모를 수 있지?" "왓슨, 그것은 본다고 되는 게 아니네. 관찰을 해야지. 아주 기초적인(elementary) 것이야." 명탐정 중 가장 유명한 셜록 홈즈와 왓슨이 나누곤 했던 유명한 대화입니다. 이 책의 닭다리 탐정은 셜록 홈즈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가졌기에, 계단 올라오는 소리만 듣고도 키와 몸무게를 정확히 맞힐 뿐 아니라 앞치마 펄럭이는 소리까지 듣고 그 주인공이 "금먹방 셰프"임을 정확히 추론(p9)해 냅니다. "관찰"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p73에서 닭다리 탐정이 다시 강조합니다.

금먹방 셰프는 요리 대회 출전을 준비 중이었는데 비밀리에 만들어 온 짜장 소스가 도난을 당했습니다. 이거만 있으면 1등은 따놓은 당상인데, 이번 기회를 놓치면 10년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금 셰프로서는 매우 난감한 처지가 됩니다. 사람들은 짜장 소스를 훔쳐 자신의 요리에 쓰고선 우승을 노리는 자의 소행이라고 추측합니다.

<태조 왕건>에도 아버지에게 불만을 품은 아들이 큰일을 저지르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금셰프는 평소에 자신의 아들인 "금주방"이 자신에게 불만이 많았다고 말합니다. 닭다리 탐정도 일단 그를 의심하여 꼬치꼬치 캐묻지만 "이런 놀라는 표정이 연기일 리가 없다!"며 용의선상에서 제외합니다. 닭다리 탐정도 형식적인 알리바이나 범행 동기만 따지는 게 아니라 사람의 표정, 기색을 따진다는 소리입니다.

사실 저는 예전에 크리스티 여사의 <목사관 살인>을 읽고 그 결말을 봤을 때, 그 사람이 범인이라면 어떻게 그처럼 대단한 연기를 통해 주위를 감쪽같이 속일 수 있었을까? 이게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현실에서는 수상한 기색, 당황하는 태도 같은 게 (법적인 증거로서 효력은 없어도) 더 큰 단서가 되겠으며, 닭다리 탐정이 이런 점을 중시하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외 용의자는 보조 요리사, 장요기(금셰프의 고향 후배), 넘버투(금셰프 식당의 주방장이며 요리 대회 우승자) 등입니다. 뒤의 두 사람들은 행방이 묘연합니다.

범인은 p49 이하에서 밝혀지는데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이 의외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용의자가 세 명밖에 없고 그나마 한 명은 조기에 제외되었는데(이런 장르에서 초기에 명탐정이 확신을 갖고 제외하면, 그 사람은 아무리 수상쩍어도 결국은 범인이 아닌 걸로 드러나죠), 어떻게 의외가 될 수 있느냐? 뭐 여튼 의외는 의외입니다.

범인만 밝힌다고 다가 아니라 어떻게 범행을 저질렀는지까지도 다 해명을 해야 합니다. 원래 고전 추리물은 범인만 오리무중이 아니라 범행방법도 미스테리입니다(밀실 살인이라든가). 현실적으로 이는 수사당국이 형사재판에서 전과정을 입증해야 하기 때문에 그저 장르문학의 관습이 아니죠. 닭다리 탐정은 여기서 범행 방법도 다 해명을 해 냅니다. 그리고 p73에서 "관찰을 하세요 관찰을!"을 외치는 거죠.

수수께끼 세 개가 나오고(해답은 바로 뒤 페이지에 나옴), 미로찾기 가 pp.34~35, pp.58~59 두 군데에 나옵니다. 미로찾기의 해답은 책 맨뒤에 몰아서 제시됩니다. pp.34~35의 미로찾기에 보면 "하늘색 티셔츠를 입고 노랑색 모자에 햄버거를 먹는 아이를 찾아 보세요"라는 말이 있는데 이거는 미로찾기에의 힌트가 아니고 별개 문제로 봐야겠습니다. 그 아이는 p35의 하단에 있는데 아이가 서 있는 지점은 사방이 막혀 있어서 닭다리 탐정의 자동차가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pp.90~91에 다른그림찾기가 나옵니다. 난이도가 좀 높아서 신경 쓰고 찾아야 하겠으며 닭다리 탐정 이야기가 너무 좋았던 어린이 독자에게는 큰 선물입니다.

하드커버판입니다. 혹시 책날개(하드커버니까 책날개가 없지만)나 뒤표지에 시리즈 다른 권 소개가 있을까 싶어서 봤는데 이 책이 닭다리 탐정의 첫번째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 꼭! 후편이 계속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최근 읽은 어린이책 중 개인적으로 최고였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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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의 눈 - 비즈니스 아이디어를 포착하는 관찰의 기술
양은우 지음 / 와이즈맵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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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은 객관적으로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보는 사람의 눈, 안목, 통찰력은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사람은 멀쩡한 외관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있는 모습 그대로만 간신히 관찰하며, 어떤 사람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줄 압니다. 남들이 채 보지 못한 거대한 트렌드의 조짐이 꿈틀대는 걸 이른 시기에 포착한 사람은 큰 돈을 벌거나 성공하며, 다른 이들은 그러지 못해 현상 유지도 버거워하곤 합니다. 그래서 성공하고 싶은 사람은 "매의 눈"을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사냥꾼이 되어 먹이를 사냥할 것인가, 아니면 그런 사냥꾼들에게 먹잇감이 될 것인가? 책표지와 프롤로그에 나오는 말입니다. 누구나 이 치열한 경쟁의 장(場)에서 승자가 되고 싶어하지만, 그럴 자격과 역량을 갖춘 이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영 앤 리치", 온갖 신산과 풍파를 다 겪고 늦은 나이에 간신히 일정 부(富)를 거머쥔 분들도 분명 존경스럽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창의와 과감함으로 한순간에 일약 거대한 성취를 손에 넣고 싶어합니다. 사냥꾼은 그저 시력만 뛰어난 게 아니라, 이른바 "킬러 인스팅트", 히딩크 감독이 이야기한 것처럼 죽여할 정확한 시각을 포착하여 일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결행하는 그 단호함과 민첩성도 갖춰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거대한 트렌드를 알아보는 심안(心眼)과 인사이트를 장착해야 하는데 이 책에서는 저자가 연구한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독자가 배울 수 있게끔 돕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에 살던 제니 돈(p29)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가정주부였ㄷ다고 합니다. 남편과의 금슬이 얼마나 좋았는지 슬하에 일곱 몀의 자녀가 있었다고 하네요. "물가가 가장 싼 곳"을 찾아 미주리주 해밀턴으로 이주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그녀는 "딸이 구해다 준 재봉틀 하나"로 일약 유튜브 스타가 됩니다. 원래 이분이 살던 곳은 샌루이스 오비스포(캘리포니아 중에서도 남쪽으로 한참 가야 있죠)이며, 여기서 저 중부 미주리까지 갔으니 거리가 무려 2900km나 됩니다. 서울~부산 거리가 400km 정도임을 생각해 보면... 이분이 1957년생이라고 하니 우리 기준으로는 거의 할머니입니다. 해밀턴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가 미국에는 꽤 많은데 이분의 회사라고 해도 되는 "미주리 스타 퀼트" 덕분에 현재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해밀턴 시"가 되었습니다. 평범한 가정 주부 하나가 도시 하나를 새로 만들어 세운 셈입니다.

책에는 자포스의 창업자 토니 셰이도 잠시 언급(p35)됩니다. 이름난 신발 메이커만 해도 두 손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데, 아무 힘도 없던 개인이 이런 레드오션에서 뭘 할 수 있을까, 누구나 이렇게 생각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보란듯이 엄청난 성공을 해냈고, 특히 "링크익스체인지"의 거액 매각은 이후 IT 스타트업 개척자들의 롤모델 사례가 되었습니다. 나이 오십이 채 되지 않았는데 안타깝게도 자택 화재로 입은 화상 때문에 몇 달 전 타계하고 말았습니다. Hsieh(셰이)라는 성씨 표기에서도 알 수 있듯 이분은 대만계 미국인입니다. 대만식 영자 표기에서는 권설음 sh를 저렇게 쓰죠.

책에서는 저 토니 셰이의 예와 함께 한국의 배민 창업자 김봉진씨의 이름도 거론합니다. 여튼,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세상에 없던 걸 만들어낸 게 아니라(그건 너무 힘들죠), 감춰져 있던 걸 찾아낸 것"이라고 합니다. 너무도 평범하고 흔해서 남들은 다 예사로 보고 지나친 걸, 그들은 쉬이 보아 넘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에 약간의 아이디어만 더하면, 누구나 기획자가 될 수 있고 사업가가 될 수 있다(p38)."

어떤 사람은 "최신식 쥐덫"처럼, 아무리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가미되더라도 전혀 상품성이 증가하지 않는 분야를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미 산업혁명 시절부터 지금의 형태였던 "우산" 같은 흔해빠진 상품을 개량해서 뭐하나 하는 생각을 누구나 또 할 겁니다. 그런데, 이런 고정관념을 보기 좋게 깨뜨리고, 비대칭 우산을 만든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우산을 쓰고 가다 보면 그저 머리만 안 젖어도 다행이지, 세차게 비가 내리거나 하면 결국 옷은 쫄닥 버리기가 십상입니다. 비대칭 우산은 한쪽 면을 길게 만들어서 바람의 방향이나 사용자 습관에 따라 특별히 더 젖는 곳을 방어하는 게 기본 아이디어입니다.

어떤 우산은 면을 발수 소재로 만들어서, 밖에서 몇 번 털기만 하면 뽀송뽀송해집니다. 사실 방수도 아니고 발수 소재라면 원가가 좀 비싸긴 할 건데 여기서 비용 절감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여튼 밖에서 우산을 탈탈 털고 실내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란 그저 흔한 풍경인데, 여기서까지도 아이디어를 내는 게 참 대단합니다. 혹 상품으로 바로 히트는 못 쳐도, 고급 브랜드 판촉물에다 적용하면 호응이 좋을 듯합니다.

스포츠에서 오랜 세월 동안 선수들에게 "이럴 땐 이런 기술을 써야 한다"며 통용되어 온 기법은 아마 어린 유망주들에게 철칙으로 통용될 겁니다. 코치가 이리 가르치면 아무 대답 말고 시키는 대로 할 뿐이죠. 그러나 책에서는 그간의 상식과 전면 배치되는 새로운 기법을 시도한 개척자들의 멋진 예를 듭니다. 수영선수 아돌프 키에퍼의 "발로 터치하는 턴", 육상선수 딕 포스베리의 "배면뛰기" 등이 그것입니다.

남들의 생각과 반대로 가서 유명해진 투자자로는 강방천 회장이 있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 직전 그는 아파트 값 등 국내자산에 거품이 너무 꼈다고 보고 반대로 달러에 투자했는데, 외환위기가 터지자 엄청난 돈을 벌었습니다. 외환위기 후에는 "여튼 한국이 망하고 자본주의가 소멸하지 않는 한 증권업은 계속 갈 것"이라 확신하고 증권회사 주식에 대거 투자했는데 이 역시 보기 좋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강방천의 투자에 다분히 운이 따랐음(p54)을 지적하면서도, 예리한 관찰 습관이 있었기에 적시에 말을 갈아타는 순발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평가합니다.

산업의 향방과 흥망성쇠는 다양한 파동과 효과를 내기 때문에 사이클이 한 번 파도를 치면 한 분야 한 섹터에서만 돈이 도는 게 아닙니다. 돈 버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해서, 중국에서 크게 산업이 일어나면 아 중국 기업(혹은 중국에 생산 기지를 둔 기업)에다 투자를 해야 되는가 보다 하겠지만 어떤 사람은 낯선 법제 낯선 풍조의 땅에다 돈을 묻는 걸 달갑지 않아 할 겁니다. 중국에서 아무리 물건을 많이 만들어도 이를 다른 나라에 팔려면 배로 옮겨야 합니다. 항공 운송은 수송량도 제한될 뿐더러 운임이 비쌉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선박 해운에 집중 투자했는데 이게 대박을 쳤습니다. 사실 불과 한 달 전에도 해운 선박 관련 종목(주식)이 갑자기 급등해서 돈 번 분들이 많습니다.

"선천적으로 시각적 지각 능력에서의 작은 수준의 편차가 지능을 높이는 비계(scaffold)로 작용하고 일생에 걸쳐 주의를 집중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p65)." 저자가 이 문장을 통해 지적하고자 하는 건, 그만큼 일상에서 두 눈 크게 뜨고 관찰만 잘해도, 대한민국에서 큰 돈이 오가는 강남 번화가만 신경 써서 구경해도 의외로 배우는 바가 많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예사로워 보이는 현상 속에, 의외로 큰 돈을 벌 수 있는 단서가 꼼꼼히 숨어 있다는 뜻입니다. 또 저자는, 천재들의 경우 시상(thalamus)의 효율이 다소 떨어진다고 재인용(p65)을 통해 말합니다. 시상의 효율이 떨어지면 필터링 기능이 약해져서 두뇌로 과하게 많은 정보가 전달되는데, 이것 때문에 약간의 신경 쇠약 증세마저 보일 수 있고, 이것의 결과 혹은 부작용 때문에 남이 산출 못하는 기발한 성과물이 나온다고 합니다. 고흐, 뭉크 등이 그 좋은 예라고 하네요. 여튼 요지는 "관찰만 잘해도 IQ가 향상된다"입니다. 두 눈 크게 뜨고!


아무리 상상이 기발해도 그 기초는 현실 속에 이미 존재하고 목격되던 기존의 모습이나 원리 등입니다.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창의력의 산물 같은 건 없다는 뜻이죠. 희한하고 신기한 시각 효과로 대중의 찬사를 받았던 짐 캐머론의 <아바타>에 나오는 기괴한 형상들도, 사실 그 요소를 하나하나 뜯어보면 다 우리가 익히 주변에서 봐 오던 것들입니다. 그래서 스티브 잡스는 "혁신은 연결에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잡스는 일류 엔지니어도 아니었고 아이폰에는 타사들이 개발한 특허가 매우 많이 들어갑니다. 이걸 연결연결해서 엄청난 마진을 쓸어담는 건 애플이죠. 그저 연결을 잘해서 말입니다. 반면 삼성은 마진폭이 적어서 점유율로 승부를 힘들게 봐야 합니다.

구글의 웨이브는 브라우저, 소셜미디어 등 모든 걸 통합한 플랫폼으로 처음에 엄청난 기대를 모았습니다. 그러나 사전에 준비가 충분치 못했는지 "피드가 꼬이면서(p86)" 고장난 신호등처럼 혼란이 빚어져 유저가 결국은 다 떠났다고 합니다. 분명 웨이브는 많은 편의 기능을 추구했고 기술적으로는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 사용자들이 당장 원하는 니즈"를 외면하고 개발자 시야 중심으로 프로세스가 이뤄졌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지금 개편 후 네이버 카페, 블로그의 글쓰는 보드를 보면 참 기가 막히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유저의 편의를 철저히 무시하고 온갖 불편한 요소는 다 끼워넣었을까요? 한번 길을 잃으면 무조건 나갔다 들어오거나 새로고침을 해야 합니다. 마침 책에는 복사 붙여넣기 기능의 유래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성공은 이처럼, 개발자 발명가의 자기 만족이 아니라 사용자의 니즈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불편을 잘 캐치하고 이를 해소, 극복할 방법을 만들어내는 게 성공의 요체인데 어떤 앱은 불편함만 모아 놓고 성공했다고 합니다. 맛집 소개는 인터넷에 너무 많아서 뭐가 진짜 맛집인지 가려낼 수가 없으니 별 쓸모가 없는데, "닛픽"은 반대로 맛없는 식당 정보 공유 앱으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물론 블랙컨슈머 진상질이 목적이 아니라, "좋지 않은 점의 개선"이 유저들의 목적이었으며 이뿐 아니라 일상의 불편이 이런 의견 공유로 개선된다면 뜻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주 예전에 어떤 발명가는 지우개를 연필 끝에 끼운 초 간단 아이디어만으로 돈을 벌었다고도 하죠. 2015년 삼성전자는 액티브워시라는 신상 세탁기를 내면서 내부에 곡선형 빨래판(애벌빨래용)을 빌트인하여(p102) 호응을 크게 얻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간단한 아이디어가 돈이 되나 싶지만, 이게 다 소비자의 편리를 거대 제조사가 배려한다는 분명한 증거 중 하나지요.

미국에서 패스트푸드가 큰 성공을 거두고 여세를 몰아 해외로까지 진출하는 건 그만큼 그 나라의 소비자들이 "빠르고 편한 식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프랑스처럼 품위 있고 풍취 있는 식사가 인생의 중요 목표이기까지 한 나라에서라면 제한된 성공밖에 거두지 못하겠죠. 이처럼, 책에서는 소비자의 성향을 정확히 분석하고 시장 파악을 제대로 한 후에야 성공이 가능하다고 말하며, 그 근원은 역시 "매의 눈, 사냥꾼의 시야"입니다.

한때 이미 성숙기 내지 정체기에 접어들었다고 판단된 산업이 있습니다. 그러나 꺼진 불도 다시 본다고, 새로운 거대 트렌드를 맞아 엉뚱하게도 "회춘"하는 산업군이 있기 마련입니다. 책 p129에서는  그 예로 편의점을 드는데, 편의점은 이미 1990년대 중반에 서울 거리 곳곳에 들어섰고 너무 치열한 경쟁 때문에 레드오션으로 꼽혔으나, 이제 티케팅 대행, 간이식당, 택배허브 노릇을 겸하며 다시 주목 받습니다. 

wealth management라고 은행이나 증권회사에 보면 간판에 써 붙여 놓은 곳이 많습니다. 강남이나 분당 등 중산층 거주 지역에 이런 지점이 많죠. 이런 서비스를 좀 엉뚱하지만 온라인 소매점인 미 아마존이나 중국의 알리바바가 이제 시도한다고 합니다. 충성심 높은 구독 고객이 원스톱으로 한 군데에서 모든 니즈를 해결하려니 이제 이런 현상까지 등장하는 거죠.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이면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힘을 통찰력이라고 한다(p139)." "센스메이킹은, 문화를 분석해 맥락을 파악하고 그 맥락의 인과관계로 인간행동패턴을 찾아내 매출을 올리는 전략개발이다(p141)." 세상은 본래 "주류"라는 것이 압도적인 힘을 갖고 운용하기 때문에 "원래 하던 방식" 외에 다른 길을 찾아 개척하는 건 너무도 힘듭니다. 책 p152에는 세일즈포스닷컴이 어떻게 시장의 강자로 군림하게 되었는지가 나오는데, 예전에는 이른바 셰어웨어라고 해서 시한을 정해두고 일정 기간 써 보게 한 다음 마음에 들면 구매를 통해 락을 푸는 방법을 소프트웨어 업체에서 썼었습니다. 클라우드를 통해 어디서건 그저 서비스 제공 방식으로 유저를 끌어들이는 방식을 이 회사가 처음 도입한 겁니다. 저도 MS 오피스를 학생 때 20만원 주고 샀었는데, 지금은 이런 방식이 굉장히 낯설 겁니다.

사람의 뇌는 본래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에만 향하게 되어 있어, 설령 고릴라가 앞을 지나가도 목격 못 할 수 있다고 하죠. 책에서는 컬러배스효과, 칵테일파티효과 등을 소개하며 우리가 일상에서 얼마나 많은 걸 놓치고 지나가는지를 상기시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제 시야만 좀 달리 잡고 주의만 집중하면 그동안 못 보던 고릴라를 캐치할 수 있다는 거죠. p203에는 그저 상하반전만 했을 뿐인데 완전히 다른 형상이 보이는 주세페 아르침볼도의 흥미로운 그림이 나옵니다. "의도적으로 (여태 낯익은 걸) 낯설게 보는 것"을 데자뷰 아닌 뷰자데라고 부른다는데, 로버트 서튼 교수의 창안이라고 합니다. 우리말로는 (기시감이 아닌) "신시감"으로 번역한다네요. p209에는 지붕이 땅으로, 바닥은 하늘로 향한 신기한 집이 나옵니다.

"사냥꾼은 오직 성과로 말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오직 성과로 말할 수 있을 만큼 유능해질 수 있을까요? 분석의 첫걸음은 "의문"입니다. 당연한 걸 당연하게만 보지 말고, 왜 저렇지 않고 이러면 안 되는지 의문을 가지라고 합니다. 이로부터 새로운 걸 유추할 수 있고, 또 부끄러워하지 말고 모방을 통해 창조를 시도하라고 주문합니다. 책에서는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과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을 비교합니다. 사실 이때 피카소는 엄청 욕을 먹었습니다.

대가의 그림에는 의외로 숨겨져 있는 이스터에그가 많습니다. 책에서는 밀레의 <톱질하는 벌목인부들>을 제시하며 그림 하나에 숨겨진 의미와 암시가 얼마나 많은지를 설명합니다. 요즘은 추세가 바뀌어 상상을 자극하는 추상화가 아니라 극사실화가 다시 유행하는데 이때 관찰력이 여간 뛰어나지 않으면 보는 이로 하여금 극사실성에 감탄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어렵게 배운 것은 오래 머리에 남는다." 매타인지를 적극 활용하면 그간 보이지 않던 내 사고의 허점도 눈에 띌 뿐 아니라 정보의 기억 자체도 오래갑니다(존 플라벨. p281). "주의 모드"가 아닌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하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기발한 각성도 가능합니다.

우리가 매의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면 그간 전혀 눈에 띄지 않던 "무수히 많은 기회"가 우리 곁을 스쳐지나감을 알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을 비롯 평범한 사람의 힘으로는 감히 상상도 못할 듯한 최첨단 기술의 산물도, 알고보면 지극히 일상적인 관찰과 상식적인 사고에서 느닷 탄생할 수 있다는 걸 확인 가능합니다. "관찰만 잘해도 IQ가 향상된다. 나아가, 큰 돈을 벌고 성공할 수 있다!" 눈 크게 뜨고 기억합시다. 위에 쓴 대로 책에는 여러 사진, 명화 등이 많이 실렸는데 도판뿐 아니라 텍스트도 독자가 읽기 편하게 아주 깨끗하고 선명하게, 좀 이례적이라 할 만큼 잘 인쇄되었습니다. 책을 실제 읽어 본 입장에서 이 점 꼭 강조하고 싶네요.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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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은이 소통하는 법 - 일에 관한 열 가지 생각
강주은 지음 / 열린책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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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날개를 보면 강주은씨는 "아주 젊은 나이에" 한국에서 당대 최고 배우였던 분과 결혼한 걸로 나옵니다. 일반인들 눈에는 그후 남편분이 여러 불운을 겪으며 커리어가 적잖게 손상된 터라 부인분이 참 힘드시겠다 생각을 한 게 솔직한 느낌이었습니다. TV에는 유명배우의 부인 자격으로 자주 출연하는가 보다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어보면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부인, 아니 강주은씨 본인 역시 분명한 자기 생각을 가지고 당차게 자신의 삶을 일궈나가는 분이었고, 그간 어려움이 적지 않았는데 여러 시련을 딛고 멋진 인생을 개척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pp.8~9(국문), 그리고 pp.10~11(영문)에는 저자가 쓴 머리말이 나옵니다. 저자(여기서는 인터뷰이)는 영문 머리말을 먼저 쓰고 이를 다시 한국말로 옮겼을까요? 본문은 담백하고 진솔한 그녀의 인터뷰 형식 글이 이어 실려 있습니다만, 유독 이 짧은 머리말은 약간 어렵게 느껴졌는데 그것도 재미있었습니다. 저자의 진지함과 성실함이 드러나는 것도 같아서요. 보통 책들은 머리말이 쉽고 본문이 어려운데 이 책은 반대입니다. 또 여기 나온 "일관성"이라든가 "일할 때의 나 또한 나의 모습"이란 말은, 같은 출판사에서 낸 첫번째 인터뷰 책을 염두에 두고 한 표현 같습니다. 인터뷰어는 열린책들 에디터 김미정씨라고 합니다.

첫 책을 내고(2017) 난 후의 변화, 느낌에 대해 그녀는 "인생의 폭이 넓어졌다"고 말합니다. 독자가 된 이들이 말을 걸어 오는데 책이 아니었으면 소통이 이뤄지지 않았을 분들이고 시청자나 팬 외에 새로 "독자들"을 만나게 된 소감인 것 같습니다. 이분들과 소통하면서 "나만 이상한 남편과 사는 게 아니구나" 같은 느낌도 받았다고 하는데 물론 농담으로 하는 말이겠습니다.

강주은씨의 경력에 대해 저처럼 잘 모르는 독자를 위해 이 독후감에다 p31에 나오는 사항을 좀 적자면 서울외국인학교에서 13년 동안 대외협력이사와 부총감을 역임했으며, 홈쇼핑 "굿라이프"에서 메인 호스트로 현재 4년째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이를 두고 인터뷰어는 "소통 전문가"라고 요약합니다. 김미정씨 표현대로 "전혀 다른 직종"인데, 이를 "소통"이라는 키워드로 한데 묶어낼 수 있다는 게 조금 놀라웠고 동의도 하게 되었습니다.

"소통"은 다양성에 대한 인정, 남의 생각이 나와 전혀 다를 수 있고 그게 보통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고 들어가야 한다는 점을 강주은(이하 경칭 생략)은 먼저 거론합니다. 소통은 확실히 다양한 경험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봐야 능숙해질 텐데, 강주은은 어렸을 때(17세) 여러 아르바이트를 했으며 그 중에는 고급 패밀리 레스토랑 웨이트리스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분이 캐나다에서 나고 자랐음도 다시 상기해야겠습니다. 손님들 중에는 별의별 유형이 다 있고, 복잡    한 주문을 여튼 접수하여 주방으로 가면 인도 출신 요리사들이 "그 미친 사람(손님) 또 왔군!"이라고도 했다고 합니다. 낙천적이고 유쾌한 어린 강주은도 크게 따라 웃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식당 운영자는 그리스인이었다고 하니 참 다국적스런 체험이었겠습니다.

요즘 바이든 정부의 미국에서도 최저임금 관련 팁 문화가 없어질 수 있다는 말도 나오지만 여튼 북미는 팁 문화의 발달이 참 독특한 전통입니다. 어린 강주은은 일도 싹싹하게 잘했을 것 같고 팁도 넉넉하게 받는 편이었다고 하네요. 그런가 하면 손님 중에는 아무리 좋은 서빙을 받고서도 팁 없이, 혹은 7센트 정도만 남기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영화 <맨 인 블랙 3>에서 K가 팁을 깜빡 잊자 우주의 혜성이 이를 응징하러 지구에 날아오던 장면이 잠깐 생각나기도 했습니다(팁을 주고 나자 방위 시스템이 잘 작동하여 바로 파괴).

그녀는 실패에도 매력을 많이 느낀다고 합니다. 말이 쉽지 실패를 통해 시행착오의 표본을 모으고 교본으로 삼는다는 건 자계서에나 나오는 교훈일 뿐 우리 같은 일반인이 실천하기가 참 힘들죠. 적어도 강주은은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다"는 분명한 팩트에 기대어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사람인 듯합니다. 우리는 간단한 저 말조차도 실패의 순간 바로 떠올리기 힘듭니다. 자책을 넘어 자신의 내면에 건설적이지 못한 깊은 상처까지 남길 필요는 전혀 없는데도 말입니다.

아버지도 한국인이고 자신도 한국인인데 카투사로 군대를 간다면 쉽게 가는 거라고 다들 여길 것 아니냐. 방송에도 자주 나와서 시청자도 친숙한 그 아드님이 저런 말(p74)을 했다고 합니다. 동두천 카투사 나와서 무슨 대단한 고생이나 한 양, 경우에 따라 (실제로는 아주 변변찮은) 영어 실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삼던 제 주변 누구하고 참 비교되는 대목입니다. 대체로, 인간 못된 건, 근거 없는 허세는 허세대로, 피해의식은 피해의식대로 정신에 고이 간직하는 경향이 있죠. 아들분의 군 복무 이슈로 인한 마음고생은 책 중후반 p196 이하에 나옵니다.

사람에 따라 꼭 고생을 하지 않아도 철이 일찍 드는(p81) 유형이 있던데 책 읽으면서 이분이 그런 케이스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참고로 저 평가("철이 일찍 듦")는 인터뷰어의 말입니다. 그런데 "첳이 든다"는 것의 정의가 뭘까요? 그냥 세상사 고생스러운 걸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다소 비관적인 세계관을 갖게 된다? 남을 비교적 잘 도와 주게 된다? "독립된 정신 자세, (내면의) 단단한 나"를 갖게 되는 것 아닌지, 이 인터뷰에 나온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그리도 생각됩니다.

"상대방이 나에 대해 뭐라고 생각하든 실은 상관이 없어요(p93)." 이게 무슨 뜻이냐면, 내가 나에게 만족스러운 사람이 일단 된 이상, 누가 자신을 깎아내린다, 혹은 심지어 "바보 취급"을 한다 해도, "단단한 자아"가 나를 긍정 평가해 주는 이상 신경 쓸 게 없다는 뜻입니다. 누구든 간에 한국 같이 스트레스가 많은 대인관계가 이뤄지는 사회에서는 이런 평판 이슈 때문에 신경 안 쓰고 살기가 정말 어려운데, 이 대목을 읽으면서 참 달관의 경지에 도달하셨구나 싶었습니다. 아니 그리고, 일단 이처럼 흔들림 없는 단계에 딱 들어서면, 주위의 나쁜 평판(모함, 악평, 험담 등)도 수그러듭니다. 그런 사람을 저도 실제 주위에서 본 적 있습니다. 희한하게 그런 분들은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도 서로 닮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면서 강주은은 "어떻게 보면 (내가) 뻔뻔하죠"라고 덧붙입니다. 이런 최소한의 자기 성찰이 또 따로 작동하기 때문에 정말로 뻔뻔하고 공감 불능이 되는 걸 막아 줍니다. 사실 자기 주제를 전혀 돌보지 않고 남 욕하는 악질들이야말로 정말 뻔뻔한 건데(=그런 욕을 들어야 마땅한 건데), 그런 뻔뻔한 자들의 뻔뻔한 짓에 개의치 않는 사람(피해자)이 오히려 "내가 지금 뻔뻔한 게 아닌가" 하고 걱정을 한다는 게 정말로 기가 차죠.

한국에서 진짜 남 탓 안 하고 자기 일 열심인 워킹맘들이야말로 어찌 보면 불쌍하고 어찌보면 사람이 아니라 석가모니 부처님 보살님들입니다. 아니 자기 일에 열중하기도 바쁘고(조금만 늦어도 집에 가서 애나 보지 뭐하러 회사에서 자리 하나를 차지하냐고 타박), 일을 잘하면 잘하는 대로 여자가 별스럽다며 잘난척한다며 또 흉을 보고 욕을 합니다. 남자가 일에 열중이면 감히 접근 못 하고 존중을 받습니다만 여자가 일을 하면 뭔 급한 것도 아닌 걸 갖고 구태여 찾아와서 귀찮게 합니다. 이런 일이 남이면 또 모르겠는데 가장 자신을 잘 알아줘야 할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주은씨 남편분도 "내가 만든 미니어처 어때?"라며 한창 바쁜 타임에 사진을 보내 오는데 강주은씨는 오히려 (속으로 엄청 짜증이 나겠지만도) 일부러 더 맞장구를 쳐 준다고 합니다. 그 심정이 이해가 갑니다. 이게 간단해 보여도 예사 경지가 아닙니다.

서울외국인학교에서 "대외협력이사"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 직책인지 궁금해하는 독자도 많을 것 같습니다. p134에 나오는데 우리 생각, 또 에디터분(인터뷰어)의 생각과는 좀 다른 듯도 보입니다. 그러나 홍보물의 체계적인 제작, 졸업생 소식의 알림 등은 역시 그런 업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파티 기획, 기부 권유 등은 역시 이런 일은 강주은씨 같은 인사가 아니면 힘들겠구나 싶었습니다. 생각이 그에 미치고 나서, 아, 말하자면 영업이다, 또는 홍보다, 이런 게, 결국은 다 소통의 문제, 혹은 "진정성 있는" 소통 문제구나 하고 결론이 나더군요. 사실 요즘은 기계적이고 노련한, 가면을 쓰고 세련되게 진행하는 소통이 얼마나 또 넘쳐나는 세상입니까.

강주은에 의하면, "팀장의 역할은 팀원의 장점을 잘 알고 칭찬해 주는 것"이 중요한 하나입니다. 이 역시 마지못해 하는 칭찬, 혹은 아첨 같은 게 아니라(팀원한테 아부할 일은 많지 않겠지만) 기회를 주고 (강주은 자신이 진정으로 그의 장점으로 생각했던 부분에 대해) 알려 주고 전체를 튜닝하는 것이라고 하네요.

사실 조직에서 일을 하다 보면 민원처리가 가장 골치 아픈 부분입니다. 강주은은 "한국 사람은 각자의 특별한 장점, 이야기, 재능이 많다"고 합니다. 이야기가 많다는 건 그냥 말이 많다는 건지, 재능이 많다는 건 실제로는 재능도 없으면서 그렇다고 착각들을 많이 한다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순수한 분 말을 의도적으로 곡해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런 경향이 있죠). 강주은은 17세 때에도 미친 손님을 레스토랑에서 서빙한 적 있지만, 외국인학교 재직 중에도 "어떤 미친 할아버지"를 상대한 적 있다고 회고합니다.

사실 그렇게 보였을 뿐 그는 오히려 이 조직에 공로가 많았던 퇴직자였습니다. 한국인이라면 많이 이상하게 보지는 않았을 겁니다. 워낙 진또배기 악질 진상이 많아서도 있고(그런 것들에 비하면 저분은 선녀), 정당한 요구나 의사표시인데도 이상하게 표현하는 사람이 많아서이기도 한데 북미에서 살다 온 분이 이런 걸 보면 "미쳤다"고밖에 생각이 안 될 겁니다. 이런 건 (좀 부끄럽긴 하나) 아직은 문화 차이입니다. 물론 앞으로는 다 극복이 되어야 할 부분이겠지요.

"남편은 산에, 아이들은 어리고, 부모님은 캐나다에 계시고...(p166)" 보통 시청자들은 그녀가 대학생 시절 미인대회에 입상한 경력 때문에 그저 평탄한 길을 무난히 힘 안 들이고 걸어온 사람으로 여기지만 아리랑TV에서 프로그램 진행을 할 때의 회고를 보면 그런 것과는 거리가 꽤 멀었네요. 남편분이 유명 배우(그 이상이었지만)라서 방송일에 조언을 받거나 인맥을 얻을 수 있겠다 같은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던... 그야말로 모멸과 실망, 고난의 연속 같았습니다.

아들의 군 복무에 대한 큰 논란도 사실 그녀에게 큰 잘못이 없건만 일단 터지고 보니 아들 본인이나 강주은씨나 패닉이었습니다. 스스로를 "패닉 초보"라고 말하는데, 이때 남편분한테 탁월한 조언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실대로 가능한 한 빨리 말하는 게 가장 좋아." 강주은씨는 여기서 남편의 "리스크 매니지먼트 기술"을 극구 칭찬합니다. 언론을 잘 아는 최고의 전문가라고 말입니다. 사실 우리 시청자들도 그 예전 사연을 어느 정도 알기에 이게 웃음이 나오면서도 한편으로 안쓰럽고 씁쓸해지는 대목입니다.

나이가 80이 넘은 대기업 사모님인데 이제서야 대중교통을 타고 서울 구석구석을 누비며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분이 강주은씨 지인 중에 있다고 합니다(p227). 물론 그런데요... 이런 분들이 새로 눈을 떴다고 말할 때에는 그저 감정적인 부분, 혹은 인생의 내밀한 통찰일 수도 있지만 그를 넘어 비즈니스 관련 현실적인 개안일 수도 있습니다. 전에는 예사로 보아 넘기던 게 이제는 어떤 아이디어와 연관된다면 말입니다.

이상하게도 자신의 일에 거의 확신, 성취, 이런 게 일정 부분을 넘어서고 나서 고르는 차가 "포르쉐"인 경우가 꽤 있던데 그냥 우연일 수도 있겠으나 p242에서 강주은씨도 그 얘기를 합니다. 해당 브랜드가 벤츠처럼 너무 속물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랜저처럼 별 느낌 없는 낡은 업그레이드 같지도 않고, 뭔가 자기만의 뿌듯한, 그러면서도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이룰 만한 성취를 상징할 수 있어서인 듯합니다.

앞에서 실패에 대해 특별한 자세를 갖고 임하는 강주은씨의 소신이 언급되었는데 p272 이하에서 특히 그녀는 "기다리는 자세"를 강조합니다. 영어는 "톤이나 단어 사용하는 방법이나 표현, 분위기를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으나(p299)" 한국어로는 어떻게 말할지 전혀 기준이 안 잡히더라고도 고백합니다. "허벌나게"라는 말을 썼다가 주변에서 다 웃던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영어도 점잖은 자리에서 갑자기 중북부 북유럽식 억양, 어휘라든가 남부 사투리를 (그쪽 배경 없는 외국인이) 구사한다면 매우 우스울 것입니다. <엄마가 뭐길래>는 지인인 황신혜씨가 추천(p310)해서 출연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역시 셀럽들이라서 일반인 눈으로는 매우 생소하거나, 역시 저들은 다른 세상 사람들이다 싶은 얘기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 일부는 여전한 문화 배경 차이에 기인한 것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사람 사는 모습은 근본적으로는 다른 게 없습니다. 셀럽이라 해도 오해와 의사 충돌 때문에 트러블을 겪는 건 같고, 이런 데서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하면 결국 일을 이어가지 못합니다. 하나의 일을 오래하는 사람은 다 각자의 비결이 있기 마련이고, 그녀의 진솔한 고백에서 배우는 바가 많았습니다. 사진이 많이 실려서 마치 인터뷰 장면을 직접 보는 느낌(인터뷰 하는 사진들은 물론 아니지만)도 좀 듭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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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균형 - 이해의 충돌을 조율하는 균형적 합의 최승필 법 시리즈
최승필 지음 / 헤이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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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만인에게 공평하다" 그래서 현대 사회는 "법치주의", 즉 특정 개인의 자의에 의한 통치가 아닌 rule of law, "법에 의한 통치"를 헌법 원리 중 하나, 국가 운용의 핵심으로 꼽습니다. 정의의 여신 디케는 그래서 양팔 저울을 든 채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 <런어웨이 주리>를 보면, 어느 배심원이 "정의는 눈멀었지 않습니까?"라고 냉소적으로 말합니다. 선입견을 배제하고 공정을 추구하기 위해 눈을 가린 것이, 어느새 기계적 맹목, 혹은 실체적 진실을 외면한 채 형식논리만 절대시하는 관료주의로 타락함을 비판한 대사입니다.

이 책 표지에는 "왜 사람마다 법을 다르게 해석하고 적용하는가?"라는 질문이 적혀 있습니다. 법에 문외한인 일반인들이 자신의 기대를 투영하여 "이래야한다, 저래야한다"를 천차만별로 "주장"하는 건 그렇다쳐도, 법조경력이 오래된 법률 전문가들마저 의견이 갈리는 건 의아스럽기도 하고 걱정스럽거나 심지어 황당하기도 합니다. 다원주의 국가에서 다양한 의견이 나오는 건 오히려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법이 지나치게 "귀에 걸면..." 식이 되어서는 권위와 안정성을 해칠 우려가 있습니다.

LH사태의 본질은 "이해상충(p66)"인데 말하자면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긴 격으로, 다루는 업무의 성질, 혹은 내부 사정의 지득 가능성으로 인해 담당자가 관련 법률행위, 사실행위로부터 자진하여 손을 뗄 필요가 있을 때 거론됩니다. 민법상의 일반원칙 중에도 자기대리, 상호대리 등에 가해지는 제한이 있죠. 책에서는 특히 미국에서 강행법규, 처벌 위주로 이런 이해상충을 규율하는 연혁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이른바 "강도귀족"과 의회의원 등의 결탁이 문제였는데 이때 큰 돈을 번 강도귀족(robber barron)으로는 밴더빌트, JP모건 등이 있죠. 앤드류 카네기도 이런 범주에 들 뻔했으나 대신 그는 광범위하고 파격적인 사회환원으로 훌륭한 명성을 얻었습니다.

"Nemo debet esse judex in propia causa." 어느 누구도 자기 사건의 재판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의 라틴어 법언(法諺)이며, 이 책 p69에 나옵니다. 재미있는 건 "전관예우" 못지 않게 요즘은 "후관예우"도 문제가 된다고 합니다. 로펌에 몸 담던 변호사가 판사로 임관될 시, 이후 자신의 구 직장이 담당한 사건에서 그에 우호적으로 재판하기 쉽다는 뜻이라고 하네요. 여튼 책에서는 p72 등에서 "한번 신뢰를 상실하면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 해도 이를 실행할 채널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이 이슈는 책 저 뒤 p250 이하에서 다시 자세히 논의됩니다.

논란이 일 만한 기소, 구형, 판결이 이뤄질 때마다 포털의 댓글란에 잘 달리곤 하는 말이 있습니다. "AI 판사를 도입해야 한다." 책에서는 그러나 AI 역시 알고리즘에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인풋 데이터 자체가 오염되었을 수 있습니다(p89). 법률 전문가들이 즐겨 하는 말 중에 "규범적 판단"이라는 게 있는데 아무리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내어 놓은 소견이라 해도 이를 필터링 없이 기계적으로 판결 안에 수용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저자는 재치있게, 저런 알고리즘 만능주의를 가리켜 "알고리-이즘(ism)"으로 비판합니다. 원래 알고리즘은 철자를 algorithm이라 쓰죠. 이 역시 사람이 설계할 뿐인데 그에 대한 맹신이나 신격화가 이뤄져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나아가 편향된 알고리즘이 아무도 통제할 수 없는 독재를 저지른다면 이를 알고크라시(p91)라 부를 수 있겠다고 말합니다.

퍼스널 모빌리티의 중요성이 날이 갈수록 커짐에 따라 킥보드를 강남 한복판에서도 용인하게 되었죠. 배달 문화의 확산에 따라 사방에서 바이크가 출몰하는 판에 여기가 동남아냐는 탄식과 우려도 나옵니다. 이를 어떻게 규제해야 할지, 혹은 반대로 어떻게 적절히 장려하여 개인의 편의를 배려하고 생산활동을 촉진할지는 참으로 어려운 과제입니다. 2008년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p100)도 본래 취지는 좋았던 것이라서 1990년대 빌 클린턴 시대에 "탈규제" 열풍 와중에 그 단초가 마련된 것입니다. 규제를 없애다 보니 이런 대형 사고가 터졌는데 그렇다고 마냥 규제 일변도로 복귀하자면 그 폐해는 충분히 짐작가능하니 참으로 큰 딜레마입니다.

한국에서는 정부가 처음에 가상화폐에 대해 마냥 무시, 혹은 범죄시하는 태도로 나가다가, 최근 참여자가 너무 늘어 이제 외면할 수 없는 대세로 바뀌자 "가상화폐가 아닌 가상자산이라면 정부는 적절한 보호, 혹은 규제를 실시해야 한다"는 쪽으로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책에서는 이에 대해 선제적으로 "입법"을 통해 대응하되, 그 정신과 취지에는 "혁신 비전"이 담겨야 한다는 취지로 말합니다(p111. 워딩은 이 서평 중 다소 변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자는 특히 첨단 기술의 발전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에 주목하여 가상화폐, 블록체인 등의 토픽에 대해 많은 분량을 할애해 다루고 있습니다. 페이스북은 최근 고유 가상화폐 "리브라"를 "디엠"으로 개편했는데 계정 소유자에게 바로 보내는 다이렉트 메시지의 약자가 아니고, 라틴어 diem이라고 합니다. 사실 주격은 dies인데 왜 페이스북에서 목적격 형태를 이름으로 삼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상화폐가 결국 제자리를 못잡는 이유로 1) 가치의 변동폭이 너무 크다 2) 중앙 정부 등 권위 있는 기관의 보증이 없다 등을 꼽는데 이는 이미 낡았거나 논파된 사항들입니다. 책에서도 이런 주장은 하지 않는 대신 가상화폐의 다른 기술적 난점을 분석하는 식으로 주장을 전개합니다. 예를 들어 핀란드에서 이미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가상 화폐 실험이 있었는데 이게 실패로 끝났다고 합니다(p138).

반면 중국에서는 개인 간 단말의 접촉만으로도 바로 이체가 가능해지는 등 다른 나라가 성공 못 한 여러 단계를 극복했다고 하는데 더 지켜볼 일입니다. 애초에 돈은 익명성을 추구하는 게 그 본성에 가까운데 중앙은행이 이를 훤히 들여다보는 식으로 관리한다면 과연 운용이 잘 될지 의문이죠. 민간 가상화폐(코인)가 이처럼 사람들 사이에 큰 매력을 갖는 이유는 은밀한 사용, 탈세 등 여러 솔깃한 유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처럼 원하는데, 독재도 아닌 민주국가에서 과연 "쓰지 마라!"는 호통과 규제 일변도로 대응이 가능하겠습니까. 가치변동이 심하다? 애초에 법정화폐 역시 인플레라는 숙명적 적수가 있기 때문에 가치 변동을 피할 수 없고 부동산, 미술품, 금, 주식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치 변동이 심한 게 문제라면 주식 투자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술과 법 사이의 대화가 가장 필요한 영역(p139)." 암호화폐에 대한 저자의 멋진 요약입니다.

입증책임(burden of proof)의 문제는 현대사회에서 뜨거운 감자입니다. 원래 주장의 참 거짓은 그 주장을 하는 사람이 증명을 해야 합니다. 이게 법치주의 사회, 혹은 소송법상의 대원칙이죠. 안 그러면 무책임한 개인의 선동 때문에 사회 전체가 비용을 치르거나 혼란에 빠집니다. 어찌보면 빌프레도 파레토 식의 차가운 공리주의인데, 문제는 이 원칙을 무한정 적용하면 의료사고, 환경오염 등의 피해에 힘 없는 다중 피해자가 속수무책으로 노출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피해가 예상되면 무조건 입법으로 대응을 해야 하나. 여기서 경제학자 스티글리츠의 명언이 인용(p171)되는데 "비행기 시각에 한 번도 늦은 적이 없다면, 당신은 공항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쓰는 사람이다."는 말이죠. 저 역시 그런 편인데 출발시각에 늦는 게 너무도 악몽 같은 일이라 그 걱정 때문에 보통 한 시간 정도는 먼저 가서 기다리는데 그게 그렇게 지루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알고보면 공연한 시간의 낭비입니다. 입법이란, 혹은 법적 규제란 엄청난 사회적 비용 지출을 수반하는 게 보통이죠.

감염병 역시 이번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새로운 중요성을 갖고 주목됩니다. 원래 감염병은 인구 밀집 지역에서 급속히 확산되는데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인더스 유역 등에서 초기 문명이 형성된 건 이들 지역이 감염병 확산에 상당히 불리한 기후 조건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p209)고 합니다. 감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CCTV의 확충, QR코드를 통한 동선 파악 등 개인정보, 사생활의 침해가 어느 정도는 용인되어야 하는데 두 가치의 형량조절을 어떻게 할지가 문제입니다.

법학의 본고장인 독일 답게 미세먼지 피해를 갖고도 국가에 소송을 거는 사례가 많다고 합니다. 미세먼지로 건강 피해를 주장하는 소송도 있고, 당국에서 교통 통제를 하자 이에 대해 반대하는 주민이 소송을 한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문제의 심각성에 "비례한(p231)"조치이냐 그렇지 않냐는 겁니다.


p246에서 "점유와 소유 사이의 긴장"이 잠시 언급됩니다. 독일 등에서는 게르만의 유목적 전통 때문에 점유가 중시되었고, 미국에서는 서부 개척 등의 역사적 경험 때문에 토지를 중심으로 소유권 제도가 세밀히 발달했다고 말합니다. 점유는 법률행위가 아니라 사실행위이며 하나의 현상인데도 법은 이를 제법 크게 보호합니다. 소유권 절대의 원칙이 있긴 하나 일정 단계까지 법은 이에 상당한 제한을 가하는데 점유는 그 중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하죠.

"양질전화"라는 말이 있는데 단순히 양에 불과한 것도 일정 양(量) 이 축적되고 어느 정도를 넘기면 질(質)적인 발전이 이뤄진다는 뜻입니다, 유물론 쪽에서 즐겨 사용하는 경향도 있는데 저자는 "적어도 법 쪽에서는 양질전화의 원칙이 그리 잘 통하는 것 같지 않다"고 합니다(p258). 법학에서 그리도 강조하는 "규범적"이란 말은, "결코 양으로 대체할 수 없는 질의 우위"라는 사고를 밑바탕에 깔고 있는 것입니다.

p275에는 재미있는 농담이 나오는데 "대법관님, 정의를 실현하세요!"에서 대법관도 justice고 정의도 justice인 데에 펀치라인이 있습니다(일반 법관은 그냥 judge이죠). 모든 기관이 어떤 독재적 권위에 굴하여 수직적으로만 기능한다면 이는 거버넌스의 붕괴나 같습니다. 반대로 모든 기관이 집단이기주의에 빠져 각개행진만 한다면 이는 질서의 파탄입니다. 한국의 경우 오랜 식민통치와 군부독재의 악몽 때문에 막연히 공권력에 대한 거부감과 피해의식을 갖는 수가 있는데 국가 기관에 대한 민주적 통제는 당연히 요구되는 사항이지만 그 선을 넘는 건 모두가 좋자고 만든 국가의 기능을 저해할 수 있습니다.

책 p334에서는 영화 <오리엔트 특급>의 예를 들며 과연 범죄자와 정의의 실현 사이를 칼로 두부 자르듯 명쾌하게 구분할 수 있을지를 두고 성찰을 요구합니다. 이 작품은 1970년대에 초호화 캐스팅으로 한 번 영상화되었고 2017년의 작품(셰익스피어 극 전문 배우 케네스 브래너, 또 조니 뎁 주연의)은 두번째 시도죠. 여튼 죽은 사람(피해자)는 극악무도한 인간이고 가해자는.... 사연을 알고 보면 누구나 이해할 만한 사람(스포일러)둘에 의한 중첩적 인과관계가 작용한(독일 형사법학의 핵심 토픽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란 말이 있습니다. 애초에 아무런 오류 없이 만인에게 공평무사히 적용, 해석되는 법은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완벽하지 못할 바에는 파괴하자!" 같은 무책임한 결론에 이르러서는 안 되고, 불완전한 것이라도 중지를 모아 고쳐 쓰고 타협하며 대화하는 지혜를 발휘할 필요, 또 그래야 할 의무가 있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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