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에서 자유로워지려면 - 성경에서 찾다! 원치 않는 습관에서 벗어나는 법
마이클 그럽스 지음, 박찬영 옮김 / 샘솟는기쁨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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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은 우리의 심신을 병들게 합니다. 몸도 축나지만 그 과정에서 마음에 드는 병이 더 큰일입니다. 중독을 통해 우리를 유혹하고 망가뜨리는 건 우리 주변에 무척 많습니다. 술, 담배, 도박, 다양한 형태의 성(性) 습관, TV, 모바일 서핑... 중독은 필요 이상으로 이런 것들에 의존하게 되는 건데, 의존을 넘어 나중에는 노예가 되는 게 문제입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건전한 심성과 선택, 의지를 통해 인생을 개척하고 일상을 살아갑니다. 중독은 이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니 인간을 이처럼 타락시키고 비참하게 몰아넣는 것도 또 없을 것입니다.

특히 종교에서는 절제와 금욕을 가르칩니다. 금욕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이 역시 정신에 나쁜 영향을 주고 사회에 적응할 수 없게 됩니다만 좋지 못한 욕구를 적정 선에서 다스리게 하는 데에는 종교만큼 바람직한 길이 있기 힘듭니다. 어떤 고등 종교라도 금욕과 절제를 가르치곤 하며 특히 한국의 기독교는 대개 금주 금연을 강하게 권하는 편이죠.

책 추천사를 쓴 분들 중 한 분인 이재기 목사님은 한국 사회의 위기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알코올 중독, 게임 중독, 스마트폰 중독... 그 어느 때보다도 중독의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며 이는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다.(p12)" 오히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종교인들이야말로 중독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이웃의 모범과 선도자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 마이클 그럽스는 침례교 목사님이며 현재 캔사스 소재의 신학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님이기도 합니다. 특히 국가와 사회의 장래를 책임진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직분도 겸하시기에 이 실천적인 과제에 대해 더욱 큰 관심을 기울였을 만합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느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화이니라.(p25)" 로마서 8장의 인용입니다. 사람이 육신과 그 욕구에 집착하면 남는 건 허탈함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강렬하게 특정 욕구를 떠올리고 마침내 실현한다고 해도, 과연 욕구의 충족 후 뿌듯한 느낌이 듭니까? 오히려 회한과 허탈함, 자괴감이 엄습할 것입니다.

이 육(肉)이라는 것은 언젠가는 한 줌의 흙과 재로 화할 뿐입니다. 그러나 영(靈)은 이와는 달리 영원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가 2천 년 전 이 땅에 와서 가르치신바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육의 유한성과 무상성"을 전제로 삼은 교의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을 본받는다면서 육의 욕구에 굴복한다면 대체 성도가 된 의의가 무엇이겠습니까.

책에서는 한 장(章)이 끝날 때마다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벌거벗은 몸이 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이때 벌거벗은 몸이란 내면까지 완전히 들여다보인다(p33)는 뜻이라고 합니다. 아마 태초의 아담과 이브 역시 처음으로 이를 각성하고 한없는 부끄러움에 휩싸였을 듯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발가벗은 줄도 모르고 따라서 부끄러움도 모릅니다. 우리는 절대자, 신, 내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존재를 의식함으로써 비로소 도덕적 부끄러움이란 걸 체험할 수 있습니다. 동양에서도 하늘이 알고 땅이 알며 당신과 내가 안다는 이른바 사지(四知)의 고사를 들어 부끄러움을 깨우치는 예가 있었죠.

"이 죄악된 본성은 갈망한다!(p48)" 이 문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 중 하나는, 갈망이라는 게 죄악된 본성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너도 갈망하고 나도 갈망하며 죄악된 본성도 갈망하곤 한다는 느슨한 뜻이 아니라, 갈망한다(crave)는 자체가 죄악의 속성이라는 거죠. 우리가 무엇인가에 중독되어 갈망한다면? 우리의 본성은 그 순간 죄악과 동의어가 됩니다. 가뜩이나 아담과 이브의 원죄를 안고 태어난 우리들인데 말입니다.

교활하게도 갈망은 우리 개개인의 특성에 맞추어 침투해 들어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성 중독, 어떤 이는 알코올 중독, 게임 중독 하는 식으로 다양하게 중독의 현상을 나타냅니다. 허나 그 다채로운 현상의 내면, 중핵에는 똑같은 죄악이라는 녀석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거죠. 뒤집어쓴 탈은 제각각이나 그 사지의 끈은 죄악이 쥐고 우리를 꼭두각시처럼 조종합니다. 나쁜 충동과 중독은 마치 우리 자신의 일부인양 친밀하게 기만하고 밀착하지만 이는 우리가 아니라 죄악의 지시요 명령입니다. 속으면 안 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p58)." 로마서 7장의 인용입니다. 저자는 우리 마음 속에 선과 악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유한하고 죄 많은 육신을 따른다면 그 사람의 마음 속에서 선이 이길 가능성은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어떠어떠한 충동에 굴복하곤 합니다.

"고생을 했으니 술 한 잔 정도야." 혹은 그보다 더한 것도 있죠. 그런데 이런 육의 충동은 나 자신의 정직하고 바람직한 요청이 아닙니다. 다이어트를 생각해 보십시오. "고생했으니 오늘만 한 상 차려 놓고 폭식하자." 이런 속삭임에 넘어가면 아름다운 몸으로 가는 길은 또 한 걸음 멀어지고 건강 역시 나쁜 쪽으로 한 걸음 더 기웁니다. 이게 과연 자신을 위하는 요구이겠습니까, 아니면 악마가 가면을 쓰고 파멸로 이끄는 유혹이겠습니까? 죄악의 달콤한 손놀림도 이와 같습니다.

여기서 탐욕이라 번역되는 용어는 원어로 (책에 나와 있듯이) insatiability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문자 그대로 충족이 안 되는, 만족을 모르는, 이런 의미죠.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가 않는 겁니다. 육신의 욕구를 따르면 이렇게 됩니다. 중독자의 행태가 어떠합니까? 아무리 술을 마셔도 만족을 모르고 계속 마십니다. 성(性) 중독은 어떻습니까? 횟수도 제한이 없고 상대를 아무리 바꿔도 계속 새로운 상대를 찾습니다. 계속 그(녀)에게 말초적 쾌락을 공급해 줘야 할까요? 아니면 자신이 중독임을 일깨우고, 죄악에 물든 상태임을 깨우쳐 이 사슬을 끊도록 해야 할까요?

이 책의 원제는 <Broken Chains>입니다. 우리가 죄악과 중독의 사슬을 단칼에 끊지 않는 이상 영원히 육신의 감옥에서 헤어날 길은 없습니다. 이 책은 출구(Way Out)를 제시합니다. "첫째 일단 죄를 인정하고 생각을 바꿔야 한다. 둘째 새롭기만 해서는 안되고 마음의 일대 변화가 필요하다. 셋째 앞에서 말했듯 완전한 공개가 필요하다." 내가 뭘 숨기고 있으면 이미 죄악으로 복귀할 공간을 마련한다는 뜻이니 이는 중독과의 절연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이죠. 이게 바로 재발과 다시 시작(fits and starts. p131)를 막는 길입니다. 트리거를 제거하고, 사소한 나쁜 습관(habit)이 습관화(habituation)하여 죄악의 본거지가 내 마음에 요새를 구축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기도하고 성찰하며, 밑도 끝도 없는 구덩이를 사악한 욕구 대신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채울 수 있게 하라, 이것이 이 책의 결론입니다. 은총과 은혜는 아무리 받고 채워도 지나지치 않으니 말이죠.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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