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와 철학자들 - 덕질로 이해하는 서양 현대 철학 자음과모음 청소년인문 20
차민주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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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덕업일치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열정을 바쳐 몰두(이른바 덕질)하는 주제를 이용해서 생업의 영위까지 가능해지는 걸 가리킵니다. 아마도 예전의 쟁쟁한 철학자분들은, 알고보면 이 덕업일치를 실현한 이들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윤보미라는 가수를 모르는데 이 책을 읽고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이분에 대해서는 여러 재미있는 별명들이 붙는데, 저자는 그 별명들(이름들 자체)을 시니피앙, 이러이러한 가수라는 "뜻"을 시니피에라고 설명합니다. 드 소쉬르가 이런 체계를 창시할 때에는 훨씬 어려운 설명이었지만, 저자의 이런 설명을 듣고 나니 확 쉬워지는 듯합니다. 아직도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이 헷갈리는 분들은 "에"와 "의"가 우리말에서 왔다갔다 하기도 하는 발음이니, 뜻 의(意)를 시니피"에"와 연결지어 외우시면 될 것 같습니다.

라캉은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니피앙이 시니피에를 지배한다고까지 주장(p17)했습니다. 사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도 유명론과 실재론의 대립이 언급되죠. 스콜라 학파의 시대에까지 그 연원이 거슬러올라가는 아주 오래된 논쟁입니다. 저자는 일본 애니 <너의 이름은.>을 예시하며 "이름은 존재를 정의한다(p19)"고도 합니다. 한국의 대표적 명시 김춘수의 <꽃>도 생각이 나는 대목입니다.

p23에는 역시 천재 언어학자였던 소쉬르의 또하나의 개념체계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파롤과 랑그인데, 랑그는 그 사회의 규범 언어이며 파롤은 개인의 구체적인 언어입니다. 저자는 "사람들은 내 언어(파롤)을 랑그로 이해하고 들어줄 사람들을 찾아 모이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향우회, 동호회 등이 생기는 거고 말이죠. 이렇게 설명을 들으니 진짜 한 번에 이해가 되는 듯합니다. 알랭 들롱과 달리다 두 사람이 아주 예전에 부른 샹송 "빠호레 빠호레("paroles paroles")"를 연상하면 더 이해가 잘 될 것 같습니다.

찰스 샌더스는 아이콘, 심벌, 인덱스로 기호를 구분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OO의 아이콘" 같은 말을 흔히 쓸 때, 알든 모르든 은연중에 이분의 개념정의에 바탕을 두고 그런 말을 해 온 셈입니다. "즉시 해석이 가능하면 아이콘, 잠시 생각해서 유추 가능하면 인덱스, 학습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면 심벌(p29)" 이는 저자의 요약 설명인데 이 역시 딱 듣고 바로 이해가 가능한, 쉽고 명쾌한 규정이죠.

p35에는 중간쉼터라고 해서 "기호학의 변증법적 계단"이라는 일러스트가 있습니다. 한 층위 한 층위를 올라가면서 드 소쉬르, 퍼스, 롤랑 바르트, 야콥슨 등이 놓이는데, 이렇게 간단하게 언어학의 한 중요한 구도가 이해되게 만든 건 처음 봤습니다. 진짜 이 한 페이지만으로도 책의 멋짐이 증명됩니다. 야콥슨에 대한 설명을 잠시 옮겨 적으면요... "그는 커뮤니케이션 상황에 따라 뜻을 다르게 해석한다고 보았는데 예컨대 야구장에서 '마!'는 경고의 뜻이다." 혹시 저자분이 롯데 자이언츠 팬이실까요?

"존재- 존재자- 초월 존재"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설명입니다. 존재자는 이기적이지만 초월 존재는 변증법적 발전을 거쳐 "이타적"이 됩니다.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부캐"와는 다르다(p39)고 합니다. 초월도 세 가지가 있는데 출산, 양육 같은 조건 없는 사랑이 첫째요,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한 선행 같은 것이 둘째이며, 덕질과 같은 헌신(아무 보상이 없을 것임을 앎)이 세번째라고 합니다. 내 가수가 음원 랭킹에서 1위를 하는 것이 그 예라고 하네요. 첫째는 본능이고 둘째는 먼 거리에 있을망정 보상이 의식되는 거고 셋째는 그야말로 아무 대가가 없음을 행위 주체가 아는 것입니다. 존재자는 코나투스(뜻은 p41에 나옵니다. 철학용어이죠)를 갖고 있는데 초월은 이 코나투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goods는 영어권에서야 원래 다른 뜻이지만 일본에서 "굿즈"로 쓰기 시작하면서 전혀 별개의 뜻(우리가 지금 아는 그 뜻)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원본의 대리, 심벌, 인덱스" 같은 용어를 이 굿즈에 적용하여 설명합니다. 읽으면서 아 과연 그렇겠다 싶었습니다. "본질은 실존에 앞서지만, 오직 인간만이 예외라서 스스로 본질을 정의한다. 오직 인간의 실존만이 (인간의) 본질에 앞서게 된다. " 여기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마르크시즘과 결정적으로 갈라서게 되죠. 방탄의 "리플렉션"이라는 노래에서 "자유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는 가사는, 실존주의의 "자유라는 형벌"을 촌철살인으로 지적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꼭 사회적 성공이 아니라더도 자신이 머리 속에 그린 그림대로 살아내는 선택이 가능한데 이것을 기투(企投. Entwurf)라고 합니다(p51). "세상에 던질 나의 모습에 대한 설계"라고 저자는 말하는데, 저 독일어 명사 Entwurf가 동사 entwerfen("그리다"), ent(비분리전철 중 하나)+werfen("던지다")에서 왔기 때문에 과연 정확한 번역입니다. 영어에서는 그저 design이라고 번역하지만 이래서는 "던지다"의 뉘앙스까지를 담기가 곤란하죠.

예전에 동방신기의 "오 정반합"이라는 노래가 있었죠^^ 당시에 저도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저자는 "무려 헤겔의 개념을 주제로 하고 있다(p57)"고 하십니다. 무려 말입니다. 저자는 후라이드(프라이드), 양념, 그리고 반반의 관계를 정반합에 비유(p58)합니다. 한국의 자랑스러운 메뉴인 짬짜면도 예시로 등판해 줘야 할 것 같습니다.

저자는 이미 <BTS를 철학하다>라는 저서를 낸 적 있는데 "케이팝은 정이면서도 스스로 반을 찾아내 매력을 극대화시켜 합을 만드는 프로세스를 반복해 왔다(p59)"고도 합니다. 약간은 ㅎㅎ 꿈보다 해몽이란 느낌도 듭니다만 여튼 케이팝이 장르로서 세계적으로 이만큼이나 성공한 걸 보면 타당한 분석 아닐까 싶네요. "어제의 나에 머무름을 지양(止揚)하는 과정이 변증법이다(p62)." 와, 말씀을 너무 잘하시는 것 같습니다. 레알.

앞 p42에서 세번째 단계의 초월이 대가(對價) 없이 이뤄지는 것이라고 했는데, p69에서 저자는 덕질을 자본론적 관점(마르크스주의 중)에서 분석합니다. 덕후의 노동은 "지불되지 않은 노동"이지만 덕후는 "이미 대상에게서 과지불받은 행복을 돌려 주기 위해 노동과 재능을 기부한다"고 합니다. 정말 기가 막힌 설명이네요. 유튜브에서도 슈퍼챗(아프리카라면 별풍선)을 유저들이 쏘지만 저는 이게 사업모델로서 과연 타당성이 있겠는지 처음에 의심했습니다. 컨텐츠를 보고 행복을 얻어도 (그 대가를) 안 쏘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책의 저 한 문장으로 다 설명이 되네요. 그래서 구글의 유튜브는 말할것도 없고 아프리카TV의 주가도 (생각보다) 잘나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 자본(계급의 기초)을 추구하지 않고 다른 대상(덕질 대상)의 계급 상승에 이바지(재능과 노동의 무상 기부)하는 행동은, 자본의 관점에서는 우습게 보일 수밖에 없으며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덕후들이 무시당하는 이유이다.(p70)" 우와, 할 말을 잃었습니다. "덕질은 범사회적인 교환가치는 없어도 사용가치인 행복지수는 (그 덕후 본인에게는) 다른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이 높다." 교환가치와 사용가치의 갈등 관계는 일찍이 애덤 스미스 때부터(아니 그 이전부터) 치열한 논쟁거리였는데 이게 여기서 다시 등장하네요.

매슈 아널드는 필리스티니즘, 즉 "심미적으로는 조악하고 인지구조에서는 반지성주의와 단선적 사고(p75)"를 경계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초 이래 이미 여기서 파생한 대중문화는 주류로 자리잡았고 엄청난 부를 창출하는 상황입니다. "기자분보다 사진을 더 잘 찍으시는 것 같아요 - 우리는 애정을 갖고 찍으니까요(p78)." 저자는 이른바 홈마들이 인물 사진에 있어 탁월한 감각을 갖는다고 하는데 "좋아하고 원해서 하는 일이기도 하고, 자신의 스타가 어느 순간에 가장 빛나는지를 경험으로 알기 때문(p78)"이라고 합니다. "좋아해서 하는 것은 잘된다(p83)." 빈센트 반 고흐의 말입니다.

"오타쿠의 감성은 흔히 '벅차오른다'고 표현된다(p92)" 이때 벅차오른다는 감정은 학습된 관성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오토마티즘(의식의 흐름 같은 것), 데페이즈망(낯설게하기), 초현실주의 기법 등이 덕후들이 즐겨 쓰는 표현수단이라고도 합니다. "내 상상력이 우스워질 만큼 그렇게 넌 아름다워(p95)." AB6IX의 "초현실"에 나오는 가사 중 일부입니다.

"푼크툼(꽂힘)과 덕통사고(덕질 계기)는 wish와 관련되어 있다(p103)" wish는 hope나 want와 달리 먼 미래에의 불확실한 소망이며 그래서 영어의 가정법은 wish와 흔히 결합합니다. wish가 앞에 나오면 그게 적어도 지금의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입니다. 저도 저의 10대를 되돌이켜 보면 분명 덕통사고가 있었고 그때 이후와 이전이 완전히 다른 취향, 영혼, 욕구로 바뀌었던 걸 기억합니다. "푼크툼을 찔린 관객은 웅크린 야수로 변한다(p104)." 롤랑 바르트의 말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단일하게 규정될 수 없는 다양체(p110)"라고 한 건 들뢰즈이며 그는 모든 것을 일종의 기계 모듈로 보았습니다. 모듈은 분리와 재결합이 가능한데 통접(connexion)이 있고 이접(disjoinction)이 있다고 합니다. 또 확고하고도 개념적인 체계는 수목(tree)적이며, 유연하고 이념적인 체계를 리좀(rhizome)적이라고 불렀습니다(p111). 이게 중요한 이유는, 리좀적 체계 하에서만이 다양한 이종적 요소가 결합과 분리를 반복할 수 있음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즉 콜라보가 가능한 거죠. 저자는 "리좀적인 것은 고정 폴더가 없다(p113)"고 합니다.

덕질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이를 두고 저자는 라캉의 개념을 빌려 "고통을 즐기는 쾌락"이란 의미로 "주이상스(jouissance)"와 관계 있다고 합니다(p153). 거의 라캉만 그런 뜻으로 쓰죠. 왜 덕질이 이것과 관계 있냐면 덕후가 노리는 게 대개는 확률이 낮아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낮은 확률에 비례하여 쾌감도 커지는 게 역설적입니다. 금지와 장애물이 있어서 욕망이 더 커진다는 게 저자의 말(p154)입니다. 영원히 도달 못하는 쾌락은 잉여 주이상스라고 합니다. 과잉 그 자체가 목표라서입니다(p155). "강아지 꼬리용 샤넬 모자"는 실제 사용 가치가 거의 0이지만 가격은 또 엄청나게 비싼데 바로 이런 것, 즉 달성되지 못하는 욕망을 즐기는 게 잉여 주이상스라는 거죠. 그렇다고 해도 잉여 주이상스는 삶을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해 주고 힘든 삶을 지탱해 준다고 합니다. "덕후는 계를 못탄다(덕계못)"도 이것과 관련이 있죠(p167).

"환상은 잠재적 현실이며, 그래서 virtual은 잠재성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p174)" "환상을 기술하면 서사가 되고 환상을 표현하면 예술이 된다(p175)". 왜냐하면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으며 무의식은 우리가 모르는 또 하나의 우리이고, 미지의 초능력"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프로이트나 융과 달리 아들러는 무의식과 의식을 그리 선명히 대립시키지 않았다고 하죠.

실재계에는 이미 버려진 소망(오브제 쁘띠 아)가 있는데 이게 우리 무의식에 그대로 남아 상징계에 균열이 생기는 순간 나타나서 뜻하지 않게 무엇인가를 이루는(혹은 저지르는) 동인이 되기도 한다고 라캉은 말했습니다(p130). 저자는 "어릴 때 배우다 만 피아노나 마이클 조던의 부친이 아들에게 바라던 야구선수"등을 예로 듭니다. 그래서 라캉은 무의식을 두고 타자(autre)의 담론(p102)이라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하늘에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은 뛰는구나" 이는 워즈워스의 시 중 한 행인데 저자는 이를 두고 무지개가 워즈워스에게 설렘을 부르는 매개체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기억이다(p203)." 이는 워즈워스의 말입니다. 저자는 영화 <아비정전>을 예로 들며 장국영과 장만옥이 집중한 그 매 초 매 분이 일상의 순간과는 완전히 다른 이미지 기억 속의 시간과 감정이라고 합니다. 베르그송은 바닥에 현재의 내가 사는 지면이 있고, 거꾸로 선 원뿔이 과거(의 레이어)와 같으며 그 아슬아슬한 한 접점에서 과거와 현재가 만날 뿐이라고 합니다(p205). 이 역시 후설이 말한 "현상(p119)"과 통하며, 필터라고 할 수 있는 노에시스가 만든 노에마(pp.119~120)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저자는 현재의 아이돌이라고 할 때 이 뜻은 플라톤적 의미(p208)보다는 에피쿠로스 학파가 말한 에이돌라(p210)에 가깝다고도 합니다. 그들에 의해 창조된 예술품이나 퍼포먼스 외에도, 그 사람이 가진 매력의 파동까지 이미지인 상으로 전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작품이나 공연뿐 아니라 평소 사는 모습, 일상까지 아름다워야 하고, 그래서 소속사는 좋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애쓰며 이 때문에 포털 연예 뉴스 댓글란이 없어졌겠지요. 이런 심상(연예인에 대해서라면 어떤 환상 같은 것)이 깨지는 걸 유행어로 쿠크라고들 한다는데 모 과자처럼 이런 환상이 순식간에 쉽게 깨지곤 한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보들리야르가 말한 시뮬라크르(p216)입니다. "애인이 있어도 관계 없으니 제발 공개하지 말아달라." 1996년 카디건즈가 부른 노래 <러브 풀>이 생각나죠(디카프리오 주연 바즈 루어만 감독 <로미오+줄리엣>의 삽입곡).

덕후 현상 하나로 이렇게 많은 철학 토픽이 굴비 꿰듯 주루루 설명될 줄은 몰랐습니다. 이 독후감에는 핵심 주제어 중심으로 요약하다 보니 어려운 용어가 많이 쓰였지만 책은 실제로 펴 보면 엄청 쉽고 재미있게 진행됩니다. 참, 혼자 보기 아까운 유익하고 재미있는 책이네요. 이게 가능하다니.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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