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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숨결
임다윗 지음 / 샘솟는기쁨 / 2024년 11월
평점 :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너무도 감사한 선물을, 그게 소중하고 감사한 줄 모르고 살아가는 수가 많습니다. 저자 충만한교회 임다윗 목사님께서는 예컨대 p68 같은 곳에서, 매일매일 주어지는 "오늘"이야말로 가장 (누군가에게든) 고마워해야 할 선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꼭지에서 인용되는 일화는 천주교 신부 구엔 반 투안에 대한 것인데, 그는 (책에 나오듯이) 1975년부터 무려 13년 간을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입니다. 1975년이면 베트남이 최종적으로 공산화되던 해이며, 남베트남의 기득권과 얽혀 있던 로마 가톨릭 세력에 대해 공산당은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습니다. 사실 진짜 기득권은 이미 이때로부터 20년 전 디엔비엔푸 전투 패배 후 식민 본국 프랑스 등으로 대거 철수했으므로 끝내 남았던 사제라면 순전히 종교적 동기였을 가능성이 큽니다만 그런저런 사정을 당국이 다 살폈을 리 없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이 신부는 "나는 내가 언젠가는 풀려가겠거니 하는 헛된 희망고문을 내게 하지 않겠다"라고 처음부터 마음먹었다고 합니다. 진정한 성직자다운 마음가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현재의 상태가 아무리 부유하고 안온해도 참으로 한심한 현실인식, 어리석음에 머물러 있는 경우를 간혹 보는데, 반대로 이 사람은 감옥이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올바른 마음가짐을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언젠가는 풀려나겠거니 하며 현재의 고달픔을 부정하려 드는 게 보통 사람들이 갖는 도피성 마인드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제 생각에) 두 가지 점에서 특히 해롭습니다. 첫째 나를 감금시킨 가해자들에게 노예 상태로 스스로를 종속시킵니다. 이 자들은 나에게 부당한 피해를 끼친 자들이고 투쟁을 해야 할 대상인데, 오히려 굽히고 들어가니 이보다 더 어리석은 판단과 행동이 또 없습니다. 둘째 그랬거나 말았거나 하루하루는 무엇을 하든 내게 주어진 소중한 자원인데, 그저 풀려날 날만 기다리며 허송세월한다면 대체 누가 가장 손해이겠습니까? 여건이 허락한다면 그 안에서 공부를 하든 뭘 하든 나를 위해 생산적인 일에 몰두해야 합니다. 저 베트남 감옥처럼 상황이 열악하다면, 하다못해 마음수양이라도 해야 합니다("하다못해"가 아니라, 사실은 이게 가장 본질적인 가치를 지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싯다르타도 그보다 훨씬 나쁜 조건에서 깨달음을 이룬 예가 있습니다. 또 예수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헛되이한 자에게 가장 가혹한 심판이 내려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달란트는 불공평하게 각자에 부여되었지만 시간만은 누구에게나 고르게 주어집니다.
p83에는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예가 나옵니다. 푸시킨은 자신의 아내와 염문이 있었던 단테스라는 장교에게 결투를 신청했고, 주위에서 모두 만류했는데도 결투를 강행했으며 결국 실력이 훨씬 좋았던 상대에 의해 죽었습니다. 저자 임다윗 목사께서는 이 사례를 들어, 푸시킨이 아직 서른여덟이라는 한창 나이에 공연히 자존심, 만용을 부리다가 목숨을 잃었다며,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공연히 스트레스를 받거나 돌이킬 수 없는 손해를 입지 말고, 참된 자존감을 키울 것을 권하십니다.
저는 평소에 임다윗 목사님의 좋은 설교를 굿티비 같은 케이블 기독교 채널을 통해 휴일에 자주 시청하며, 또 지금 이 대목 말씀에 대해서도 동의합니다. 저 조르주 단테스라는 이름은 러시아식이 아니라서 이상하다고 느끼는 독자도 있을 텐데, 실제로 이 사람은 러시아에 파견근무차 체류하던 프랑스 귀족 출신 무관이었습니다. 푸시킨의 죽음은 단순 치정 스캔들이 아니라 궁정 암투상도 복잡하게 얽힌 음모가 개재했을 가능성이 높고, 푸시킨 본인은 이를 묵살하고 넘어갔어야 현명한 선택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본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때로는 용감하게 목숨을 걸어야 할 때도 있고, 푸시킨은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생각도 됩니다. 만약 저 같으면 푸시킨처럼, 목숨을 내어놓고 저 강한 상대방과 한번 붙어 볼 생각입니다. 비겁자로 처신했다는 자괴감으로 평생을 괴로워하기보다는 그게 나으며, 다윗도 골리앗을 때려잡은 소명 완수 하나로 기어이 열두 지파의 왕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세상에는 요나처럼 도망다니는 삶이 있고, 최후의 만찬 때의 그리스도처럼 주어진 소명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삶이 따로 있습니다. 또 이게 단순한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한판 승부를 걺으로써 내 주변의 많은 이들이 유무형의 이익을 보기도 합니다. 어둠 속으로 도피하면 당장 생물학적으로야 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게 전부이겠습니까?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삶(p182)은 성도들과 자주 소통(p210)하고 진심으로 주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는 생활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독선에 빠지지 말고 교회에 자주 나와 은혜를 입는 게 바람직한 신도의 선택입니다. 사람은 그 누구도 섬이 아니며, 혼자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섬기는 자의 리더십(p230)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 궁극의 가르침임을 또한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