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아는 언제나 검은 옷을 입는다
파올로 코녜티 지음, 최정윤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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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전반 승전국답지 않게 사회가 불경기와 좌절에 빠졌을 때 가장 먼저 파시즘이 발호하고 현실의 권력까지 거머쥔 나라가 이탈리아였습니다. 유럽 사회가 앓기 시작한 새로운 병을 그 나름 격렬하게 먼저 앓고 먼저 "괴상한" 처방을 내놓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처방은 당연히 잘못된 것이었고, 이를 세계에 처음으로 증명하다시피하며 온갖 망신도 당하고 사회가 큰 홍역을 치러 냈지만 여튼 이탈리아는 남들보다 앞서(?)갔습니다. 한 세기 가까이 시간이 지난 지금은 직접 민주주의를 일부나마 실험 중인데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모를 일입니다.

이 연작 소설의 주인공인 소피아는 1978년생입니다. 이탈리아는 따지고 보면 1871년 통일된 이래(아니 어쩌면 그 이전에도) 단 한 번도 정치적으로 안정된 시절을 못 이뤄낸 나라일 텐데, 소피아가 태어나고 성장한 시기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그러합니다. 뭔가 어디서건 불안하고 다툼이 잦으며 좌건 우건 참 열정적으로 자신의 소신을 피력합니다. 소피아는 나이 열여섯에 자살을 기도하는데 성향이 너무도 다른 두 부모 사이에서 격심한 정신적 방황을 겪어서였습니다. 마치 소피아는, 장년기를 지났으면서도 여전히 정서와 진로와 정체감이 흔들리는 이탈리아를 의인화한 듯도 보입니다.

"난 엄마와 똑같았어. 그리고 난 엄마와 같은 여자가 되는 걸 배우고 있었어.(p31)" 여자에게 있어 그 어머니는 언제나 롤모델이며 경원의 대상이며 불길한 앞날이고 발목 잡는 운명이며 원수 같은 친구입니다. 이탈리아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였지만 의외로 그 나라 사람들은 해외 진출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그들이 반도라는 터전 밖으로 활발히 나간 건 고대 로마 시절이 유일하지 싶습니다.

소피아는 또래 남자애들과 함께 해적 놀이에 빠지기도 하는데 이는 보편적인 이탈리아 어린이들의 정서라기보다 그 무렵 유행했던 영화의 소재가 해적이라서 그런 듯합니다. 이탈리아인들은 미국 대중 문화와 긴밀히 교류하며 자국 영화사보다는 미국 헐리웃 영화사에 더 큰 족적을 남기기도 했는데, 서부극 장르에서는 스파게티 웨스턴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만들었으며 해적 장르에서도 테렌스 힐(이름은 이렇지만 이탈리아인입니다) 주연의 이름난 흥행작들이 있습니다. 꼬마 이름이 오스카라서 더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고모 마르타는 거의 밀라노를 떠나 본 적이 없는 토박이입니다. 올케(즉 소피아의 엄마)인 로사나처럼 격정적이기도 하며, 소피아가 태어나기 전부터 소피아 같은 불안정한 아이의 삶을 자신이 미리 살기라도 하듯(독자의 눈에는 그리도 보입니다), 이런저런 방황을 합니다. 이미 죽음이 예견되지만 자유를 향해 필사의 도주극을 벌이는 <대탈주>의 스티브 매퀸(p86)처럼 마르타는 자신의 일상 루틴에 흠뻑 젖어 무아지경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유난히도 이 작품들에는 마치 주세페 토르나토레의 <시네마천국>처럼 맥락에 따라 갖가지 미국 상업 영화들이 자주 언급되며 아득한 추억을 환기합니다.

"무정부 상태가 언제 올까" 19세기 독일이나 프랑스, 혹은 멀리 러시아에서는 공산주의가 진보진영의 주류로 자리했지만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는 무정부주의도 큰 세를 얻었습니다. p166에서 크로포트킨 책이 언급되는 것도 아마 그런 맥락일 것입니다. 반면 1960년대 후반 프랑스(마르타가 마치 유학생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한)에서는 온갖 사상의 혼동 속에 치기어린 마오이즘이 일각에서 한때 큰 호응을 얻기도 했죠(영화 <몽상가들>에 나오듯).  이 부근에서 서사는 마치 2인칭 시점처럼 펼쳐집니다. 때로는 누가 지금 누구의 삶을 언제 살고 있는지도 서로 헷갈기도 합니다. 이들에게 무정부는절대 자유이며 일체의 억압이 제거된 정직한 이상향입니다.

미스터 바탈리아는 이탈리아계 미국인 3세(p255)입니다. 이탈리야계 이민자들은 미국 현대사에서 갖가지 역사적 사건에 휘말리며 다양한 족적을 남겼기에 애증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소피아는 거의 내내 밀라노에서 성장하지만 그녀와 그 친구들, 친지들은 한쪽 시선이 항상 미국을 향해 있습니다. 어느 정도는 미국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고, 그러면서도 격렬히, 열정적으로 이탈리아이고 싶어하는 모순된 감정이 이 연작들 중 소피아를 통해 잘 드러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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