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권 세트/개정판
휴머니스트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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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그 어떤 나라도 선진국도 문화국도 갖고 있지 못한 기록의 대장정 - 조선 왕조 실록.

꼼꼼하고 치밀한 사초부터 초초, 중초, 말초 등 3번여를 거쳐 비로소 완성되는 조선 왕조 실록.

한지로 되어 있고, 그 분량또한 엄청나게 많아 일반인은 감히 읽을 엄두도 내지 못할 뿐 아니라 역사 전공자 조차도 완간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 방대한 실록의 기록이 친근한 만화로 편찬이 되었다. 한 12~13년 전에.

박시백 작가는 외환위기 시절 우연히 사극을 보다가 자신이 아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 때부터 조선왕조 실록을 찾아보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것이 급기야 출판해주겠다는 회사도 없이 무작정 그림부터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하게 된 것이 만화 조선왕조실록이다.

 

1권 개국부터 20권 망국을 다루고 있는데, 그 사이 조선을 건국한 태조부터 마지막 임금 순종까지 실록에 나와있는 내용을 최대한 많이 최대한 요약하여 최대한 재미있게 다루고 있다. 학창시절 역사 시간에 배운 내용 중 별 다섯 개 쳐가며 중요하다고 외운 내용들이 만화로 배경과 시행과 결과 그리고 이후 파급효과까지 쉬운 만화로 한 눈에 볼 수 있게 그려놓았으니 조선왕조실록의 무게감에 주눅부터 드는 우리는 박시백 작가 덕에 편안히 소파에 기대어 그림을 감상하며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다루고 있는 내용 또한 그림으로 설명하는 것인데도 너무도 많은 분량을 다루고 있어 왠만한 줄글책 저리 가라 할 정도이니, 이거야말로 꿩먹고 알먹고, 도랑치고 가재잡고, 누이좋고 매부좋은 셈인 거다.

 

개국 초, 태종, 세종과 함께 할 때는 역사가 자랑스럽고 우리 민족이 자랑스러운 웃으면서 책장이 넘어가고, 선조, 인조 시절을 헤메일때는 가슴이 너무도 답답하여 한숨과 함께 하였다. 연산군이 마냥 폭군만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 개인의 경험이 통치를 함에 있어 아주 중요한 요소여서 개인적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왕들의 경험이 국운을 좌지 우지 할때 한편으로 동정이 일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왕. 이를 극복하여 백성을 잘 살게 해야한다.

 

책을 읽는 동안, 나의 시간은 조선 와종 500년을 헤메였으며 내가 그 시대를 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물론 조선 후기 및 망국 즈음에 가서는 너무도 복잡한 우리 역사와 세계사가 함께 엮이여 내용도 어렵고 설명이 많아 조선 초기 만큼의 설렘과 신남은 없었지만, 그 또한 우리의 역사, 놓치지 않으려고 용을 많이 썼다.

 

정말 너무도 큰 작업이고 위대한 결과물이다. 이런 기획을 혼자 하고 혼자 낳고 기른 박시백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더불어, 조선의 기틀은 바로 세워 나를 우쭐하게 해 준 우리 태종, 세종대왕님 너무 감사합니다.

책임지지 않는 국정 행태를 보여 지금의 대한민국 지도층과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선조, 인조 및 알량한 사대부 지식 양반층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는데,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되풀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소장하여 두고 두고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정말 좋은 책이다. 울트라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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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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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인 달과 현실 6펜스 사이에서 항상 갈등하고 흔들리는 현대인이 고민하는 바로 그 지점에 있는 책. 비록 주인공 스트릭랜드의 행동과 생각의 일부분에 공감가지는 않지만 전체적 맥락에서 본다면 하고 싶은 것과 해야만 하는 것 사이의 고뇌를 공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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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 청소년들아, 연암을 만나자 만남 1
박지원 지음, 리상호 옮김, 홍영우 그림 / 보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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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독서토론모임, 그 네 번째 도서 - 열하일기.

그것도 무려 청소년을 위한 한 권으로 줄인 열하일기.

독서모임에서 선정하여 읽는 경우가 아니라면 감히 읽을 엄두도 내지 못했을 열하일기.

고전 필독 도서 리스트에 늘 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열하일기.

완역하면 반 뼘 정도 두께의 분량의로 3권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열하일기.

그 열하일기를 비록 청소년을 위한 줄임본이긴 하지만 접하게 되었다.

 

연암은 1780년 6월 24일부터 시작하여 8월 9일까지 압록강을 출발하여 심양, 산해관을 거쳐 북경에 이르고 청황제 건륭제를 찾아 열하의 피서산장까지 여행을 하게 되는데, 그 기간동안 그가 요샛말로 하면 선진문물을 접하여 받은 신선한 문화적 충격을 받고 그 기억들을 기록화 하였다.

 

학창시절, 국사를 공부할 때, 18세기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실학파/경세치용/이용후생 등과 이용후생에 박지원/수레/열하일기를 기계적으로 외우고 시험치기에도 바빴다. 그러면서 정작 왜 연암이 이런 사상을 지니게 되었는지 그 배경과 이용후생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고, 왜 우리는 수레를 그렇게 외워야만 했는지 전혀 듣는 바가 없이 그저 일방적으로 외우기에 전념하였다.

 

하지만, 아~하~! 이용후생이구나, 아~하~! 청나라 기행을 계기로 연암은 실학 사상을 굳히게 되었구나. 이 여행이 그에게는 큰 충격이었어. 마치 70년대 대한민국 사람이 미국 하버드 유학가서 느낀 그런 류의 문화적 충격, 신세계였구나~!

 

하고 비로소 바보 돌 튀는 소리를 하는 나가 되었다. 뭐 그러면 어떠리, 죽을 때까지 원인과 모르고 그저 박지원/이용후생/실학이라고 되뇌이는 것 보다, 아제라도 아~하~!할 수 있으니 기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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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일기
정정화 지음 / 학민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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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정정화. 실로 낮선 이름이다. 학창 시절 교과서로 배운 독립운동이 거의 전부인 우리는 김구, 신채호,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김좌진, 홍범도 등이 이름이 낮익은 독립운동가들이다.

그러나 역사교과서에서 일일히 이름을 기재하지 못한 목숨을 바쳐 조국의 독립을 위한 이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정정화도 그 중 한 명이다. 더군다나 귀하디 귀한 여성 독립 운동가이다.

 

정정화는 1900년 충남의 어느 부유한 양반댁에서 태어나 10세때 동농 김가진의 3남 김의한과 결혼을 하여 여느 조선시대의 여염집 아낙처럼 평범한 시집살이를 하며 지냈다. 그러던 중 한일 강제 병합이 되어 시아버지인 동농이 남편과 함께 상해로 망명을 하자, 정정화도 두 분을 따라 1920년 20세의 나이로 홀로 상해로 망명을 하였다. 양반댁 여성의 몸으로 결심을 내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데, 덜컥 맘먹고 힘든 여정을 견딘것을 보면 상당히 강단이 있는 여성임을 알 수 있다.

 

상해에 도착한 그는 상해 임시 정부의 살림살이를 보고 견딜 수 없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임정은 연통제 등으로 국내와 연락을 하며 군자금을 지원받기는 했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일제의 감시가 심했던 터라, 기본적 의식주도 시원하게 해결되지않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정정화는 이러한 상황을 보아내기가 가슴이 아파, 자진하여 국내로 잠입 군자금을 모아올 것을 결심하여 실행하기에 이른다. 조마조마한 국내 잠입과 군자금 모집을 성공하고 상해로 돌아오니, 그는 건장한 남정네들도 하지 못하는 일을 거뜬히 해낸 여장부가 되어 있었다. 이후로도 5차례나 더 국내로 잠입 혹은 정식 입국을 하여 군자금을 추가 모집하고 연락책을 맡는 등 임정의 아주 중요한 임무를 해내었다.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푹탄 투적 이후, 일제로부터 심한 압박을 받은 임정이 1년여에 걸쳐 피나을 하여 마침내 중경에 도착하기까지 그리고 중경생활을 할 때도 빠른 일처리와 업무 센스, 깔끔한 마루리, 책임성 등으로 인하여 임정의 안살림을 도맡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독당 등에 책임있는 역할도 맡아 대외적 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망명이후 해방하여 한국에 귀국하기까지, 겪고 느낀 모든 점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데도 그의 비상한 머리가 한 몫을 톡톡히 했슴은 물론이다.

 

그러나, 여느 독립운동가와 마찬가지로 해방 후 조선에서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단지 개인적 사유로 한국전쟁당시 피란을 가지않고 서울에 남았다는 이유로 서울 수복 후, 부역죄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기도 하였고, 인민군에 의하여 같이 독립 운동을 하였던 남편 김의한이 납북되자 곤궁한 그의 처지는 더욱 팍팍해젔다. 그리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것도 너무나 힘들었다. 그러나 이보다도, 해방 후 다시 친일파들이 득세를 하고 독립 운동을 하였던 이들은 의도적으로 잡아 가두고 고문을 하고, 이를 지켜보는 것이 그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지경이었다.

실로 영민하고 재치있었던 그가 친일 경찰에 체포되고 고문당하면서 받았던 정신적 충격으로 인하여 동기를 상실하고 삶의 의지를 잃어버려 과거의 그 총민함이 많이 옅어져 그의 아들 김자동은 너무나 안타까워 하였다. 왜냐면, 이 자서전이 더욱 더 많은 시실과 기억으로 충실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고 정정화는 그야말로 범인으로 조용히 살았다. 때로는 거꾸로 가는 듯한 조국의 현실에 가슴아파하고 때로는 살아내기 위하여 무시하면서.

 

그러던 중 아들 김자동의 간곡한 설득으로 88세의 나이에 자서전을 집필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 책은 실로 정정화 개인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구석 구석 우리가 잘 몰랐던 임시정부의 사정, 임정요인들의 개인적 사정/취향/성향, 당시 중국의 상황 등 아주 세밀하고 디테일한 사실들이 조목 조목 잘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장강일기가 출판하지 않았다면 우리 독립운동사에 큰 손실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목숨바쳐 대한민국을 지키려 한 많은 투사들의 목숨값, 핏값으로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 마땅히 부채 의식을 가지고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책을 읽는 내내 같은 여성이기에 특히 그에게 감정 이입이 되어, 내가 탈출하는 것 같았고 내가 독립 운동을 하는 것 같았다.

동시에 그녀가 아파할 때는 나의 마음도 너무나 쓰라렸다.

작금의 대한민국의 역사적 현실이 가슴 답답한 일로 가득차 있지만, 이런 책을 접한 이들부터 이 분들의 노고를 제대로 알고 전파하여 그들의 투쟁이 결코 헛된 일이 되지 않고 결국에는 정의가 승리하는 역사를 만들기 위하여 무엇이라도 행동하는 사람이고자 한다.

 

살아있는 역사, 내가 곧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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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 평전 - 개정판
김삼웅 지음 / 시대의창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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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원봉 이름 석자를 아는 사람은 많이 드문 편이다. 그러나 역사를 좋아하는 나느 김원봉 이름 석자는 들어보았다. 하지만 디테일을 잘 모르기는 마찬가지. 김원봉과 관련되어서는 의열단의 이름 정도만 들어본 정도.

 

역사 팟캐스트 이작가와 이박사의 이이제이를 좋아한다. 어느 날 이이제이에서 약산 김원봉을 다루는 편이 방송되었다. 당연히 들어보았겠지. 소감은? 우~~~~~와~~~~~~! 이런 분의 생애와 업적이 왜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 왜 우리 교과서는 김원봉에 대하여서 한 줄도 다루지 않았을까? 내 기억속에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투척 나석주는 국사교과서에서 독립투장부분에서 윤봉길과 같이 이름 정도 언급된 정도였다. 그런데 나석주열사외 활동이 의열단 활동이었고 김원봉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니!

 

언젠가 꼭 김원봉에 대하여 더 많이 알고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김삼웅씨의 약산 김원봉 평전을 접하였다. 느낌은? 또 다른 우~~~~~와~~~~~!

간략하게나마 그의 생애를 풀어보자면,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10대에 벌써 항일 의식을 가지고 19세에 독립을 위해서는 무장투쟁만이 살 길이라는 생각으로 군사학으로 배우기 위해 당시 군사학에서 독보적 존재였던 독일로 가기 위해 중국의 독일 대학 덕화학당에 입학하였다. 비록 곧 독일이 1차 대전에 패전하여 4개월만에 그만두게 되었지만 이 후 김원봉은 상해에 계속 머무르면서 뜻 있는 사람들과 '정의'의 의과 '맹렬'의 열의 더하여 의열단을 조직하고 그야말로 정의가 맹렬히 살아숨쉬는 일제를 향한 폭렬 투쟁을 시작한다. 일제 시대에 이루어진 웬만한 폭탄 투척 사건의 대부분 김원봉의 주도하에 의열단에서 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단지, 해방 후 보수 우익 및 민족주의 진영의 논리에 의하여 이 사실이 후대에 부각되지 않았을 뿐.

 

당시 다른 독립투사들과는 달리, 김원봉은 외교니 교육을 통한 실력 양성이니 이런 것들은 독립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로지 정신 무장되고 실력이 있는 군대를 통한 무장 투쟁만이 독립의 지름길이라 굳게 믿었다. 그리하여 초기 폭렬 투쟁은 종국에는 조선 의용대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조선 의용대는 당시 3천만 동포의 염원에 맞추어 임시정부에 소속되었고 이는 임정의 한국광복군 청설에 밑거름이 되었다.

 

실제로 당시에는 김구보다도 김원봉의 활약 및 존재감이 더 컸다고 할수 있다. 그런데, 왜 지금에는 김구의 존재와 비중에 비하여 김원봉은 철저히 무시당하여왔을까? 바로 그가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한 부분때문이다. 그러나, 이 평전을 보면, 그가 공산주의자들과 교류하고 사회주의사상을 공부한 것은 그야말로 단지 조선의 독립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며, 공산주의자들이 독립보다 사상을 더 우선시 한다고 생각했을때는 가차없이 그들과 결별하였다.

36년 일제 치하에서 독립 투쟁(그렇다. 김원봉의 활약은 독립 운동이 아니라 그야말로 투쟁이다.)중에 오로지 나의 뜻과 꼭 맞는 사람, 조직과만 일을 한다고 하면 과연 독립 투쟁이 제대로 운영되겠는가?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이런 조직 저런 조직 어울려가며, 논쟁도 해가며 양보도 해가며 한 판 흐드러지게 어울려야 결국 합이 될것이 아닌가?

 

그러나 해방 후 우리의 지도층 및 지식인들은 철저하게 민족주의의 논리만을 교육시켰다. 그 외 다른 진영의 활동과 영역은 아예 다루지도 않았다. 여기에서 이런 훌륭한 족적을 남긴 위인이 실로 조국에서 외면당하는 쓰라린 현실이 남은 것이다.

 

해방 후 미군정이 들어온 현실에서, 김원봉은 1947년 친일 경찰에게 체포당하고 만다. 급기야 친일 경찰에게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는데, 김원봉을 고문했는 군정경찰이 바로 최고로 악독한 친일 경찰 노덕술이다! 이 때 체포와 고문을 당하고 풀려나서 3일 동안을 엉엉 울었다고 한다.

독립 투쟁을 할 당시에도 민첩한 행동과 철저한 보안으로 단 한번도 일제에 잡히지 않고 일제를 파멸시키고자 목숨까지 내놓았던 그가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 경찰에게 붙잡혀 고문을 당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나? 그가 진실로 독립시키고자 했던 조국의 모습은 이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그가 느꼈을 분노와 억울함이 그대로 내 속에 전해야 나도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극도의 실망감을 갖고 김구와 함께 남북연석회의 차 북한을 방문하고 나서는 남한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친일을 한 인간들과는 같은 하늘에서 숨을 쉴 수가 없다고 했다. 너무 가슴이 아프다. 잘못된 꿰어진 역사의 첫 단추는 위대한 우리 독립 투사를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 때 잘못 꿰어졌던 단추는 그 후 여러번의 기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잔재들이 남아있으니, 김원봉은 하늘에서 어떤 심정으로 이 땅 남한을 내려다 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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