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산 김원봉 평전 - 개정판
김삼웅 지음 / 시대의창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김원봉 이름 석자를 아는 사람은 많이 드문 편이다. 그러나 역사를 좋아하는 나느 김원봉 이름 석자는 들어보았다. 하지만 디테일을 잘 모르기는 마찬가지. 김원봉과 관련되어서는 의열단의 이름 정도만 들어본 정도.

 

역사 팟캐스트 이작가와 이박사의 이이제이를 좋아한다. 어느 날 이이제이에서 약산 김원봉을 다루는 편이 방송되었다. 당연히 들어보았겠지. 소감은? 우~~~~~와~~~~~~! 이런 분의 생애와 업적이 왜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 왜 우리 교과서는 김원봉에 대하여서 한 줄도 다루지 않았을까? 내 기억속에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투척 나석주는 국사교과서에서 독립투장부분에서 윤봉길과 같이 이름 정도 언급된 정도였다. 그런데 나석주열사외 활동이 의열단 활동이었고 김원봉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니!

 

언젠가 꼭 김원봉에 대하여 더 많이 알고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김삼웅씨의 약산 김원봉 평전을 접하였다. 느낌은? 또 다른 우~~~~~와~~~~~!

간략하게나마 그의 생애를 풀어보자면,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10대에 벌써 항일 의식을 가지고 19세에 독립을 위해서는 무장투쟁만이 살 길이라는 생각으로 군사학으로 배우기 위해 당시 군사학에서 독보적 존재였던 독일로 가기 위해 중국의 독일 대학 덕화학당에 입학하였다. 비록 곧 독일이 1차 대전에 패전하여 4개월만에 그만두게 되었지만 이 후 김원봉은 상해에 계속 머무르면서 뜻 있는 사람들과 '정의'의 의과 '맹렬'의 열의 더하여 의열단을 조직하고 그야말로 정의가 맹렬히 살아숨쉬는 일제를 향한 폭렬 투쟁을 시작한다. 일제 시대에 이루어진 웬만한 폭탄 투척 사건의 대부분 김원봉의 주도하에 의열단에서 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단지, 해방 후 보수 우익 및 민족주의 진영의 논리에 의하여 이 사실이 후대에 부각되지 않았을 뿐.

 

당시 다른 독립투사들과는 달리, 김원봉은 외교니 교육을 통한 실력 양성이니 이런 것들은 독립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로지 정신 무장되고 실력이 있는 군대를 통한 무장 투쟁만이 독립의 지름길이라 굳게 믿었다. 그리하여 초기 폭렬 투쟁은 종국에는 조선 의용대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조선 의용대는 당시 3천만 동포의 염원에 맞추어 임시정부에 소속되었고 이는 임정의 한국광복군 청설에 밑거름이 되었다.

 

실제로 당시에는 김구보다도 김원봉의 활약 및 존재감이 더 컸다고 할수 있다. 그런데, 왜 지금에는 김구의 존재와 비중에 비하여 김원봉은 철저히 무시당하여왔을까? 바로 그가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한 부분때문이다. 그러나, 이 평전을 보면, 그가 공산주의자들과 교류하고 사회주의사상을 공부한 것은 그야말로 단지 조선의 독립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며, 공산주의자들이 독립보다 사상을 더 우선시 한다고 생각했을때는 가차없이 그들과 결별하였다.

36년 일제 치하에서 독립 투쟁(그렇다. 김원봉의 활약은 독립 운동이 아니라 그야말로 투쟁이다.)중에 오로지 나의 뜻과 꼭 맞는 사람, 조직과만 일을 한다고 하면 과연 독립 투쟁이 제대로 운영되겠는가?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이런 조직 저런 조직 어울려가며, 논쟁도 해가며 양보도 해가며 한 판 흐드러지게 어울려야 결국 합이 될것이 아닌가?

 

그러나 해방 후 우리의 지도층 및 지식인들은 철저하게 민족주의의 논리만을 교육시켰다. 그 외 다른 진영의 활동과 영역은 아예 다루지도 않았다. 여기에서 이런 훌륭한 족적을 남긴 위인이 실로 조국에서 외면당하는 쓰라린 현실이 남은 것이다.

 

해방 후 미군정이 들어온 현실에서, 김원봉은 1947년 친일 경찰에게 체포당하고 만다. 급기야 친일 경찰에게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는데, 김원봉을 고문했는 군정경찰이 바로 최고로 악독한 친일 경찰 노덕술이다! 이 때 체포와 고문을 당하고 풀려나서 3일 동안을 엉엉 울었다고 한다.

독립 투쟁을 할 당시에도 민첩한 행동과 철저한 보안으로 단 한번도 일제에 잡히지 않고 일제를 파멸시키고자 목숨까지 내놓았던 그가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 경찰에게 붙잡혀 고문을 당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나? 그가 진실로 독립시키고자 했던 조국의 모습은 이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그가 느꼈을 분노와 억울함이 그대로 내 속에 전해야 나도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극도의 실망감을 갖고 김구와 함께 남북연석회의 차 북한을 방문하고 나서는 남한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친일을 한 인간들과는 같은 하늘에서 숨을 쉴 수가 없다고 했다. 너무 가슴이 아프다. 잘못된 꿰어진 역사의 첫 단추는 위대한 우리 독립 투사를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 때 잘못 꿰어졌던 단추는 그 후 여러번의 기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잔재들이 남아있으니, 김원봉은 하늘에서 어떤 심정으로 이 땅 남한을 내려다 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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