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김종철 옮김 / 씨엠북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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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의 영혼은 육체라는 뻘 속에 갇혀 있어 무디고 둔하며 영혼의 지각 능력은 조잡하고 불확실하다. 그래서 영혼은 아무것도 분명하고 확실하게 예견할 수 없는 것이다.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면 우리 이별은 달라질 수 있었을 텐데. - P16

나는 그 원고를 읽으며 망설였다. 2년간 내 존재의 심연에서는 하나의 욕망, 한 알의 씨앗이 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의 내부를 파먹으로 익어 가고 있는 그 씨앗을 내 오장육부로 느낄 수 있었다. 씨앗은 자라면서 움직이기 시작해 밖으로 나오려고 내 몸 속 벽에 발길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내게 그놈을 파괴할 용기는 없었다. 정신적인 낙태는 시기를 놓친 것이었다. - P18

목자: 내겐 황소가 있습니다. 또 암소도 있고 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목초지도 있으며 내 암소를 모두 거느릴 종우 또한 있습니다. 그러니 하늘이시여, 마음대로 비를 내리셔도 좋습니다.
붓다: 내겐 황소도 암소도, 목초지도 없습니다. 내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늘이시여, 마음대로 비를 내리셔도 좋습니다.
목자: 나에겐 말 잘 듣고 부지런한 양치기 여자가 있습니다. 이 여자는 오래 전부터 내 아내였습니다. 그녀를 밤에 희롱하는 나는 행복합니다. 그러니 하늘이시여, 마음대로 비를 내리셔도 좋습니다.
붓다: 내겐 자유롭고 착한 영혼이 있습니다. 나는 오래 전부터 내 영혼을 길들였고 나와 희롱하는 것도 가르쳐 놓았습니다. 그러니 하늘이시여, 마음대로 비를 내리셔도 좋습니다. - P34

육체는 짐을 진 짐승과 같아요. 육체를 먹이지 않으면 언젠가는 길바닥에 영혼을 팽개치고 말 거요. - P57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하나 조르바만 믿지. 조르바가 다른 것보다 나아서 믿는 게 아니오. 눈곱만큼도 없어요. 조르바 역시 다른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하지만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조르바뿐이기 때문이지요. - P89

까마귀에게 일어난 일이 뭐요, 조르바?
원래 까마귀는 점잖고 당당하게 걸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까마귀는 비둘기처럼 거들먹거려 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날로 이 가엾은 까마귀는 자기의 걷는 법을 모두 까먹어 버렸다는군요. 뒤죽작죽이 된 거지요. 기껏해야 어기적거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으니까 말입니다. - P108

땅의 모든 것이 어쩌면 어맇게도 멋지게 조화되는 것일까. 대지는 어쩌면 인간의 가슴을 이렇게 울렁거리게 하는 것일까. 인생을 모두 소모한 채 이 외로운 해안으로 유배된 늙은 카바레 가수는 지금 이 초라한 방을 경건한 욕망과 여자의 따사로운 정감으로 채우고 있는 것이다. 정성을 다하여 푸짐하게 차려놓은 상과 따뜻한 화덕, 곱게 단장한 모습과 오렌지 꽃물 향기...... 이처럼 사소한 육제적 기쁨이 어쩌면 이렇게도 급속하고 간단하게 정신적인 즐거움으로 변하는 것일까? - P186

과오란 고백을 통해서 반쯤은 용서된다고 하더군요. - P238

당신은 젊어요. 늙은이가 하는 소리 따위는 귓전으로 흘려버려요. 노인의 말을 다 믿는다면 무덤으로 직행하기밖에 더하겠소? 과부댁이 만일 당신 앞을 지나가거든 냉큼 붙잡아서 결혼하고 애를 낳아요. 망설일 것 없다니까! 까짓 말썽 따위를 젊은이들이야 겁낼 필요가 있나. - P261

"자기 자신의 내부에 행복의 뿌리를 두지 않은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현생과 내생이 동일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 P288

다음 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시장으로 달려가 버찌를 한 소쿠리나 샀지요. 나는 그것을 도랑에 숨어서 먹기 시작했습니다. 목구멍으로 넘어올 때까지 쑤셔 넣었어요. 배가 아프고 구역질이 났어요. 두목, 결국 나는 몽땅 토하고 말았지요. 그리고 그 후부터 나는 버찌를 먹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보기만 해도 견딜 수 없을 정도였지요. 나는 마침내 구원을 받은 겁니다. 언제 어디서 버찌를 보아도 나는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너랑 별 볼일이 없다.‘라고 말입니다. - P309

우리의 늙은 세이렌은 저 원대한 희망 - 결혼 - 이 마음속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모든 매력을 깡그리 잃어버린 것이다.(중략)그녀는 결혼을 갈망하는 가련한 여자의 모습만을 보여 주려고 한 것이었다. - P333

"못할 것도 없지요. 하지만 내가 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해요. 나는 당신이 말하는 그 신비를 몸으로 느끼느라 쓸 시간이 없었지요. 때로는 전쟁, 때로는 계집, 때로는 술, 때로는 산투리에 빠져 있었어요. 그러니 내게 펜대 따위 굴릴 시간이 어디 있었겠어요? 그래서 이런 일들이 펜대 운전사들에게 맡겨진 거지요. 인생의 신비를 직접 경험하는 사람들에겐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몰라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 P344

"조국 같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인간은 앞뒤 해야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면하기 힘들어요. 하느님이 돌보셔서, 나는 그 모든 걸 졸업했습니다. 내게는 다 끝났어요. 당신은 어떻습니까?"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나는 이 조르바라는 사내가 부러웠다. 그는 싸우고 죽이고 사랑하면서 내가 펜과 잉크 속에서 배우려던 것들을 고스란히 몸으로 살아온 것이었다. 내가 의자에 붙어 앉아 고독과 싸우며 풀려고 하던 문제를 이 사나이는 산속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칼 한 자루로 풀어 버린 것이다. - P360

"일은 어중간하게 해 놓으면 끝장이에요. 말이나 선행도 마찬가지에요.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건 다 그 어중간한 습관 때문입니다. 할 때는 확실하게 하는 겁니다. 우리는 못 하나를 박을 때마다 승리하는 겁니다. 하느님은 악마 두목보다 반거충이 악마를 더 미워하십니다!" - P364

그렇다. 바다, 여자, 술, 그리고 고된 노동! 일과 술과 사랑에 자신을 바치고, 하느님과 악마를 겁내지 말아야 한다...그것이 젊음이라는 것이다! - P373

이제 나는 마음이 이 육체의 환희를 독점하여 그 나름의 형상을 만들며 생각을 키워 가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나는 내 몸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야수처럼 기뻐 날뛰게 내버려두었다. 그러고는 나는 이따금 무아지경에서 내 외부와 내부를 지켜보며 이 생명의 기적에 감탄했다. 나는 자신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 생겼단 말인가? 어떻게 우리의 발, 손, 배가 이처럼 세계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인가? - P377

"인간이란 참 괴상한 물건이지요. 속에다 빵, 포도주, 물고기 당근 같은 걸 집어넣으면 그게 한숨이나 웃음이나 꿈같은 것이 되어 나오잖아요. 무슨 공장 같지 않아요? 우리 머릿속에는 발성 영화기 같은 거라도 들어 있나 봅니다." - P401

"새 길을 만들려면 새 계획이 필요해요. 나는 이미 지난 일은 어제로 끝냅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미리 생각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뿐입니다. 나는 매순간 자문합니다. ‘조르바, 너는 뭘 하고 있느냐?‘ "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 너는 무엇을 하느냐?‘ ‘일하고 있네.‘ ‘열심히 하게.‘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무엇을 하느냐?‘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해 보게. 키스할 동안 다른 것들은 모두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자네와 그 여자 밖에 아무도 없는 거야.실컷 키스하게." - P430

‘알렉시스야, 내 너에게 비밀을 하나 알려 주겠다. 지금은 너무 어려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크면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잘 들어둬라. 애야, 천국의 일곱 품계도 이 땅의 일곱 품계도 하느님을 품기엔 넉넉하지 않다. 그러나 사람의 가슴은 하느님을 품기에 충분하지. 구러니 알렉시스야, 조심해라. 내 너에게 충고하건대, 사람의 가슴에 상처를 내면 안 된다! - P440

마침내 나는 행복이 무언가를 깨달았네. 그 이유는 네게 ‘행복이란 의무를 이행하는 데 있다. 의무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보람은 그만큼 더 큰 법‘이란 옛말이 지금 이 순간 그대로 실감되어 오기 때문이네. - P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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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알드 달 지음, 정영목 옮김 / 강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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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가의 자동차를 소유한 사람들 사이에는 강력한 형제애가 존재한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존중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부는 부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사실 큰 부자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다른 큰 부자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어디를 가나 자연스럽게 서로를 찾는다. 그들 사이에는 서로를 인식하는 많은 종류의 신호가 있다. 여자의 경우에는 육중한 보석을 몸에 걸치는 게 아마 가장 흔한 신호일 것이다. 그러나 비싼 자동차도 매우 선호하는 신호이며, 이것은 남녀 모두가 애용한다. 비싼 자동차는 움직이는 플래카드이며, 부의 공적인 과시다. - P93

그녀는 남편과 함께 있을 때면 자신이 영원한 환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대기실에서 살면서 말없이 잡지만 읽는 여자.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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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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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나는 누군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공부같은 거였다.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보려고 한 거였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년을 매일 술 처먹고 공부 비슷한 걸 하다보니 아버지가 서울에서 공부를 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지 짐작이 갔다. 서울에서는 사는 것 자체가 일이었다. 보통 일이 아니라 큰일이었다. - P165

조건이 환경을, 환경이 인간을 바꾼다. 돈이 세살 때부터 시작돼 이십년을 끌어온 버릇도 고친다. 호칭 역시 조건이다. - P215

형의 손은 늘 세제와 물 때문에 불어 있거나 부르트고 갈라져 있었다. 언젠가 지나가던 중에 형이 세차를 하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었다. 바깥만 깨끗이 하는 게 아니라 엔진 룸이며 트렁크까지 말끔하게 청소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타이어의 바람을 넣고 보이지 않는 바닥의 염분, 녹을 제거하기도 했다. 결국 간단한 정비까지 해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식으로 차를 돌봐주면 내가 차 주인이라도 팁을 주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 같았다. - P217

가장 큰 적은 졸음과 권태였다. 몇가지 동작만 끊임없이 반복한다는 게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또렷또렷하던 눈이 동태 눈깔이 되는데는 몇달이면 충분했다. - P220

인생이라는 긴 마라톤 시합에서 쌀알만 한 모래가 신발에 들어가 있다 치자. 레이스가 진행될수록 쌀알은 자갈로, 자갈에서 바위로 변한다. 남을 이기는 것은 고사하고 계속 뛸 수조차 없게 되는 것이다. 내게 군대 문제가 그랬다. - P226

나는 오로지 내 길을 갈 것이다. 나는 언제나 내편일 것이다. 세상이 모두 망한다 해도 나는 살아남을 것이다. 어둡고 추운 무명의 우주 속에 임재하는 원소처럼 누구보다 길이 존재하리라. 그것이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한 쓰레기들에 대한 복수일 것이다. 맹세한다. 나는 매일 맹세로 하루를 시작하고 맹세한 뒤 잠이 든다. 꿈에서도 나는 쓴다. 나는 너희 중 누구보다 오래, 드러나지 않으면서 힘을 가진 채로 살 것이다. 살아남으로써 이기리라. - P246

-힘 있고 돈 있고 법까지 제 편인 개새끼들한테 계속 갈굼을 당하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뭐예요?
만수 형님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내가 우리 일곱명 책임을 져야 했으니까. 책임을 질 사람이 책임을 지는 게 올바른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내가 무식해서 정치도 모르고 법 같은 건 잘 몰라도 정의가 뭔지는 알아. 아, 이렇게 하는 게 맞다는 게 그냥 느껴지더라고. - P302

동구권이 무너지고 나서 자기 세계관이 무너졌다고 했다. 그게 언제적 일인데! 한없이 게을렀고 줏대가 없었고 스스로 목표를 만들어낼 줄 몰랐다. 자신이 살고자 하는 삶은 이게 아니었다. 기사식당 바깥주인으로 경광봉 들고 형광조끼 입은 채 주차 정리나 하면서 인생을 보내려고 태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럼 누구는? 내 인생의 목표는 어디 가서 찾나? 주방의 가스레인지 불꽃 속에서? 끓고 있는 돼지뼈 국물 속에서? 뭘 하나 희생하지 않고 제멋대로, 편한 대로 살려고 하는 이기주의자였다. - P319

앞으로도 누군가 내 삶 앞에 쳐놓은 거미줄 같은 덫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앞으로도 남편이 가져다주는 알량한 수입을 쪼개 살림을 해야 하고 감당할 수 없는 아이를 감당해야 하고 내 한몸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면서 시누이를 돌봐야 할 것이었다. 내 아이를 가지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앞으로도 삶에 지친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지친 사람이면서 지쳤다 하소연도 못하고 그들이 배설하는 비정상적인 감정을 모두 받아내야 할 것이다. 그게 제일 힘들었다. - P338

만수야, 너는 아직 재주가 다 드러나지 않은 망아지, 덜 벼려진 칼과 같구나.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가지만 돈끼호떼의 로시난테처럼 비루먹고 약한 말도 열흘을 부지런히 가면 천리를 간다고 했다. 또 천리마의 꼬랑지에 붙어 있는 쇄파리 또한 천리를 간단다. 네가 하루 천리를 가는 명마가 아니라고 샐망하지 마라. 뭐든지 잘 보고 기술을 배워 하루하루 열심히 하면 너는 전기기사, 시계수리공, 운전기사 등등의 기술자가 될 수 있다. 구두닦이, 지제꾼도 열심히만 하면 얼마든지 송공할 수 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했으니 너는 귀를 크게 열고 입은 꼭 다물고 네 길을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 P40

지금 이 세상이 이렇게라도 굴러가는 것이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누군가는 노력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 그렇게 하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 P364

뭔가를 바꾸기 위해서는 서로를 알고 다 같이 노력을 해야 한다. 교통사고가 나기 직전에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 것처럼. - P364

나는 한번도 내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내게는 아직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으니까. 그 사람들은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지지하고 지켜줘야 한다. 내가 포기하는 건 가족까지 포기하는 것이다. - P365

단지 가족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훌륭하고 고귀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저절로 좋아하고 존경하게 된 거다.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나기를 그랬던 것 같다. 그들은 나의 뿌리이고 울타리이고 자랑이다. 나는 그들이 정말 좋다. 지금도 그렇다. 눈을 감으면 언제든 복숭아꽃 살구꽃이 환하게 핀 고향의 집에서 어머니가 나 오기를 기다리며 마당에 서 있는 게 보인다. 형님은 하모니카로 ‘클레멘타인‘을 불고 아버지는 가마니를 짜고 새끼를 꼬고 있다. 어서 와, 어서 와. 누나들은 산나물이 담긴 바구니를 옆에 끼고 나를 향해 손짓한다. 할아버지의 글 읽는 소리. 할머니의 다정한 말소리. 동생들이 달려나온다. 석수다. 옥희다. 나는 마주 달려간다.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난다. 햇볕이 따뜻하다. 소가 운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내 아들 태석이가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린다. 앞치마를 한 아내가 손을 닦으며 나를 바라다보고 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거기 다 있다. - P365

지금 같은 순간이 있어서 나는 행복하다. 내가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 기쁨이 내 영혼을 가득 채우며 차오른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느낌, 개인의 벽을 넘어 존재가 뒤섞이고 서로의 가장 깊은 곳까지 다다를 수 있을 것 같다. 이게 진짜 나다. - P366

이렇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식구들 건강하고 하루하루 나 무사히 일 끝나고 하면 그게 고맙고 행복한 거죠.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을 때에도 가만히 참고 좀 기다리다보면 휠씬 나아져요. 세상은 늘 변하거든. 인생의 답은 해피엔딩이 아니지만 말이죠. - P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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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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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구이 노인처럼 잊히지 않는 사람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자기가 살아온 날들을 그처럼 또렷하게, 또 그처럼 멋들어지게 묘사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말고는 또 없었던 것이다. 그는 과거의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었고, 자기가 젊었을 때 살았던 방식뿐만 아니라 어떻게 늙어가는지도 정확하게 꿰뚷어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 P63

그런 노인을 시골에서 만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아마도 가간하고 고생스러운 생활이 그들의 기억을 그들의 기억을 흐트러뜨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대개 지난 일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대충 얼버무리기 일쑤였다. 자기가 살아온 날들에 별다른 애정이 없는 듯, 마치 길에서 주워들은 것처럼 몇 가지 사소한 일들만 드문드문 기억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 사소한 기억마저도 자기가 아니라 남에 대한 것이었고, 한두 마디 말로 자기가 생각하는 모든 것을 표현해버렸다. - P63

그의 이야기는 새의 발톱이 나뭇가지를 꼭 움켜잡듯 나를 단단히 사로잡았다. - P63

후에 나는 생각을 달리 하게 됐지. 내가 나 자신을 겁줄 필요는 없다고 말일세. 그게 다 운명인 거지. 옛말에 큰 재난을 당하고도 죽지 않으면 훗날 반드시 복이 있을 거라 했네. 그래서 난 내 나머지 반평생은 점점 더 나아잘 거라 믿기로 했지. 자전에게도 그렇게 말했더니 그녀는 이로 실을 끊으며 이렇게 말하더군.
"저는 복 같은 거 바라지 않아요. 해마다 당신한테 새 신발을 지어줄 수만 있다면 그걸로 됐어요." - P111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다 믿을 수는 없게 된 거지. 믿지 않는 것이기도 했고, 감히 믿지 못하는 것이기도 했다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나날들을 어떻게 살아갈지 누구도 자신할 수 없었거든. - P165

그날부터 나는 낮에는 밭에서 일하고, 저녁이 되면 자전에게 성안에 가서 유칭이 좀 나아졌는지 보고 오겠다고 했지. 그러고는 천천히 성 쪽으로 걸어가다가 날이 어둑어둑해지면 발길을 돌려 유칭의 무덤 앞에 가서 우두커니 앉아 있곤 했다네. 밤이 깊어져 바람이 얼굴 위로 불어오면 죽은 아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지. 소리가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떠나니는 탓인지 내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어. 그렇게 한밤중까지 앉아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네. - P196

난 구불구불 성안으로 난 작은 길을 바라보았지. 내 아들이 벗은 발로 뛰어가는 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네. 달빛만 처연하게 길을 비추는데, 마치 그 길 가득 하얀 소금을 훝뿌려놓은 것 같았어. - P199

"사람은 이 네 가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네. 말은 함부로 해서는 안 되고, 잠은 아무데사나 자서는 안 되며, 문간은 잘못 밟으면 안되고, 주머니는 잘못 만지면 안 되는 거야." - P200

나는 그에게 살아온 이야기를 계속 들려달라고 청했다. 그가 하도 고마워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바람에, 꼭 내가 그를 위해 뭐라도 해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느 자기 신세타령을 다른 사람이 관심있게 들어준다는 사실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나타냈던 것이다. - P200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보면, 때로는 마음이 아프지만 때로는 아주 안심이 돼. 우리 식구들 전부 내가 장례를 치러주고, 내 손으로 직접 묻어주지 않았나. 언젠가 내가 다리 뻗고 죽는 날이 와도 누구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말일세. - P278

"푸구이는 괜찮은 녀석이야. 간혹 몰래 게으름을 피우기도 하지만, 뭐 사람도 틈만 나면 게으름을 피우는데 소야 더 말할 게 있나. 나는 놈한테 언제 일을 시켜야 하고, 언제 쉬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네. 내가 피곤하면 그놈도 피곤할 테니 쉬게 하면 되고, 내가 좀 쉬고 나서 정신이 들면 놈도 일할 때가 된 거야."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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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봄 - 김유정 단편선 한국현대문학전집 (현대문학) 8
김유정 지음, 김미현 엮음 / 현대문학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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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산한 검은 구름이 하늘에 뭉게뭉게 모여드는 것이 금시라도 비 한줄기 할 듯하면서도 여전히 짓궃은 햇발은 겹겹 산속에 묻힌 외진 마을을 통째로 자실 듯이 달구고 있었다. 이따금 생각나는 듯 살매 들린 바람은 논밭 간의 나무들을 뒤흔들며 공기는 쓸쓸하였다. 다만 뱃맷한 마루나무 솦에서 거칠어가는 논촌을 을프는 듯 매미의 애끊는 노래.

<소낙비> 중에서 - P31

그 전날 왜 내가 새고개 맞은 봉우리 화전밭을 혼자 갈고 있지 않았느냐. 밭 가생이로 돌 적마다 야릇한 꽃내가 물컥물컥 코를 찌르고 머리 위에서 벌들은 가끔 붕, 붕, 소리를 친다. 바위틈에서 샘물 소리밖에 안 들리는 산골짜기니까 맑은 하늘의 봄볕은 이불 속같이 따스하고 꼭 꿈꾸는 것 같다. 나는 몸이 나른하고 몸살(을 아직 모르지만 병)이 나려고 그러는지 가슴이 울렁울렁하고 이랬다.

<봄.봄> 중에서 - P160

인제는 봄도 늦었나 보다. 저 건너 돌담 안에는 사쿠라 꽃이 벌겋게 벌어졌다. 가지가지 나무에는 싱싱한 싹이 피었고 새침히 옷깃을 핥고 드는 요놈이 꽃샘이겠지. 까치들은 새끼 칠 집을 장만하느라고 가지를 입에 물고 날아들고-.

<따라지> 중에서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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