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나는 누군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공부같은 거였다.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보려고 한 거였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년을 매일 술 처먹고 공부 비슷한 걸 하다보니 아버지가 서울에서 공부를 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지 짐작이 갔다. 서울에서는 사는 것 자체가 일이었다. 보통 일이 아니라 큰일이었다. - P165

조건이 환경을, 환경이 인간을 바꾼다. 돈이 세살 때부터 시작돼 이십년을 끌어온 버릇도 고친다. 호칭 역시 조건이다. - P215

형의 손은 늘 세제와 물 때문에 불어 있거나 부르트고 갈라져 있었다. 언젠가 지나가던 중에 형이 세차를 하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었다. 바깥만 깨끗이 하는 게 아니라 엔진 룸이며 트렁크까지 말끔하게 청소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타이어의 바람을 넣고 보이지 않는 바닥의 염분, 녹을 제거하기도 했다. 결국 간단한 정비까지 해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식으로 차를 돌봐주면 내가 차 주인이라도 팁을 주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 같았다. - P217

가장 큰 적은 졸음과 권태였다. 몇가지 동작만 끊임없이 반복한다는 게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또렷또렷하던 눈이 동태 눈깔이 되는데는 몇달이면 충분했다. - P220

인생이라는 긴 마라톤 시합에서 쌀알만 한 모래가 신발에 들어가 있다 치자. 레이스가 진행될수록 쌀알은 자갈로, 자갈에서 바위로 변한다. 남을 이기는 것은 고사하고 계속 뛸 수조차 없게 되는 것이다. 내게 군대 문제가 그랬다. - P226

나는 오로지 내 길을 갈 것이다. 나는 언제나 내편일 것이다. 세상이 모두 망한다 해도 나는 살아남을 것이다. 어둡고 추운 무명의 우주 속에 임재하는 원소처럼 누구보다 길이 존재하리라. 그것이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한 쓰레기들에 대한 복수일 것이다. 맹세한다. 나는 매일 맹세로 하루를 시작하고 맹세한 뒤 잠이 든다. 꿈에서도 나는 쓴다. 나는 너희 중 누구보다 오래, 드러나지 않으면서 힘을 가진 채로 살 것이다. 살아남으로써 이기리라. - P246

-힘 있고 돈 있고 법까지 제 편인 개새끼들한테 계속 갈굼을 당하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뭐예요?
만수 형님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내가 우리 일곱명 책임을 져야 했으니까. 책임을 질 사람이 책임을 지는 게 올바른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내가 무식해서 정치도 모르고 법 같은 건 잘 몰라도 정의가 뭔지는 알아. 아, 이렇게 하는 게 맞다는 게 그냥 느껴지더라고. - P302

동구권이 무너지고 나서 자기 세계관이 무너졌다고 했다. 그게 언제적 일인데! 한없이 게을렀고 줏대가 없었고 스스로 목표를 만들어낼 줄 몰랐다. 자신이 살고자 하는 삶은 이게 아니었다. 기사식당 바깥주인으로 경광봉 들고 형광조끼 입은 채 주차 정리나 하면서 인생을 보내려고 태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럼 누구는? 내 인생의 목표는 어디 가서 찾나? 주방의 가스레인지 불꽃 속에서? 끓고 있는 돼지뼈 국물 속에서? 뭘 하나 희생하지 않고 제멋대로, 편한 대로 살려고 하는 이기주의자였다. - P319

앞으로도 누군가 내 삶 앞에 쳐놓은 거미줄 같은 덫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앞으로도 남편이 가져다주는 알량한 수입을 쪼개 살림을 해야 하고 감당할 수 없는 아이를 감당해야 하고 내 한몸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면서 시누이를 돌봐야 할 것이었다. 내 아이를 가지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앞으로도 삶에 지친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지친 사람이면서 지쳤다 하소연도 못하고 그들이 배설하는 비정상적인 감정을 모두 받아내야 할 것이다. 그게 제일 힘들었다. - P338

만수야, 너는 아직 재주가 다 드러나지 않은 망아지, 덜 벼려진 칼과 같구나.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가지만 돈끼호떼의 로시난테처럼 비루먹고 약한 말도 열흘을 부지런히 가면 천리를 간다고 했다. 또 천리마의 꼬랑지에 붙어 있는 쇄파리 또한 천리를 간단다. 네가 하루 천리를 가는 명마가 아니라고 샐망하지 마라. 뭐든지 잘 보고 기술을 배워 하루하루 열심히 하면 너는 전기기사, 시계수리공, 운전기사 등등의 기술자가 될 수 있다. 구두닦이, 지제꾼도 열심히만 하면 얼마든지 송공할 수 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했으니 너는 귀를 크게 열고 입은 꼭 다물고 네 길을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 P40

지금 이 세상이 이렇게라도 굴러가는 것이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누군가는 노력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 그렇게 하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 P364

뭔가를 바꾸기 위해서는 서로를 알고 다 같이 노력을 해야 한다. 교통사고가 나기 직전에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 것처럼. - P364

나는 한번도 내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내게는 아직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으니까. 그 사람들은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지지하고 지켜줘야 한다. 내가 포기하는 건 가족까지 포기하는 것이다. - P365

단지 가족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훌륭하고 고귀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저절로 좋아하고 존경하게 된 거다.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나기를 그랬던 것 같다. 그들은 나의 뿌리이고 울타리이고 자랑이다. 나는 그들이 정말 좋다. 지금도 그렇다. 눈을 감으면 언제든 복숭아꽃 살구꽃이 환하게 핀 고향의 집에서 어머니가 나 오기를 기다리며 마당에 서 있는 게 보인다. 형님은 하모니카로 ‘클레멘타인‘을 불고 아버지는 가마니를 짜고 새끼를 꼬고 있다. 어서 와, 어서 와. 누나들은 산나물이 담긴 바구니를 옆에 끼고 나를 향해 손짓한다. 할아버지의 글 읽는 소리. 할머니의 다정한 말소리. 동생들이 달려나온다. 석수다. 옥희다. 나는 마주 달려간다.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난다. 햇볕이 따뜻하다. 소가 운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내 아들 태석이가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린다. 앞치마를 한 아내가 손을 닦으며 나를 바라다보고 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거기 다 있다. - P365

지금 같은 순간이 있어서 나는 행복하다. 내가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 기쁨이 내 영혼을 가득 채우며 차오른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느낌, 개인의 벽을 넘어 존재가 뒤섞이고 서로의 가장 깊은 곳까지 다다를 수 있을 것 같다. 이게 진짜 나다. - P366

이렇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식구들 건강하고 하루하루 나 무사히 일 끝나고 하면 그게 고맙고 행복한 거죠.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을 때에도 가만히 참고 좀 기다리다보면 휠씬 나아져요. 세상은 늘 변하거든. 인생의 답은 해피엔딩이 아니지만 말이죠. - P3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