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사물들
장석주 지음 / 동녘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병의 주둥이를 꽉 물고 있는 금속 뚜껑을 여는 일은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퍽, 하는 소리와 동시에 병의 뚜껑은 몸통에서 분리되고, 병의 몸통 속에 밀봉되어 있던 액체와 비밀이 거품을 뿜어낸다. 이 분리의 찰나에 무두인이 탄생한다. - P192

에피쿠로스는 "먹거나 마시기 전에, 무엇을 먹고 마실지를 생각하기보다는 누구와 먹고 마실 것인가를 조심스레 고려해보라. 왜냐하면 친구 없이 식사를 하는 것은 사자나 늑대의 삶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자유, 사색과 더불어 우정이 삶의 기초이고, 행복한 삶의 필수적인 요소임을 강조한 것이다. - P194

이 얼음묘지에 모여 있는 것들은
탐욕과 포만에의 욕망에서 잠시 유예된 것들이다.
다음을 기약하고 냉장고 속에 처넣은
어떤 것들은 그대로 잊힌다. - P200

신문은 그 본질에서 세상 모든 것의 그림자와 중력들의 누설이다. 다양한 삶과 사건들의 모자이크. 이 모자이크는 선택적이다.
한 젊은 여배우가 한 영화제 레드카펫 위에서 걷다가 넘어진 것은 신문에 나오지만, 이발사 은퇴자들의 모임 같은 것은 신문에 나오지 않는다. - P209

신문에서 리얼리티는 중요하게 취할만한 요소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간신문을 읽는이 시간에 서리는 유유자적, 햇빛의 기쁨, 멜랑콜리의 안온함이다. 조간신문은 멜랑콜리의 안온함으로 우리의 들끓는 욕망을 다독인다. 조간신문을 읽는 이 시간에 꽃잎 내려앉듯 쌓이는 정밀한 고요와 잔잔한 기쁨을 속속들이 맛보려 한다. - P211

시간이란 반복 가능한 분절들이고, 따라서 몸도 반복 가능한 분절들로 변한다. 세상이 복잡해지고 인간 관계들이 얽힐수록 이 분절은 더욱 촘촘해진다. 해마다 늘어나는 나이는 시간의 분절을 대표하는 셈법의 한가지다. 그 많은 분절들 속으로 사건과 사람들이 부침하며 흘러간다. 누구도 이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 - P221

구두는 그 미지와 폐쇄성으로 향해 나아가는 한 쌍의 배다. 구두는 북극이나 남극의 얼음을 깨고 항해하는 쇄빙선같이 대지라는 장애물들에 꿋꿋하게 맞서며 앞으로 나아가지만 그런 난항에 대해 투덜거리지 않는다. - P226

여행가방이 작을수록 여행은 알차고 실속은 커지지만 그것이 클수록 여행은 그 본질에서 벗어나며 지루하고 고달파진다. 여행의 즐거움은 여행가방의 무게와 반비례하는 법이다. - P234

우산은 가난한 존재들이 숨을 수 있는 무릉도원과 깨지지 않는 우정에 대한 일종의 은유이다. - P240

세계는 점점 ‘지옥‘으로 변하는데, 그 ‘지옥‘을 만든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소설가 이탈로칼비노는 이렇게 적는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 가고있다."고. 지옥은 삶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위험과 공포로 가득한 삶 자체다. - P250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는 죽이거나(사냥꾼), 아니면 죽임을 당하거나(사냥감) 둘 중의 하나다. 용케도 사냥꾼이 되었다고 해도 악몽은 종결되지 않는다. 사냥은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계속되어야 한다. "끊임없이 계속 사냥에 참여하는 삶이 또다른 유토피아라면, 그것은 (과거의 유토피아와는 반대로) 끝이 없는 유토피아다. 사실 정통적인 기준으로 보면 기괴한 유토피아다. 본래 유토피아는 고생이 끝날 것이라는 약속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이에 반해 사냥꾼의 유토피아는 고생이 결코 끝나지 않는 꿈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앞의 책) - P255

공구상자 속에 든 망치, 드라이버, 드릴, 니퍼, 렌치, 톱, 줄자 따위의 도구-사물들은 여전히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망치는 노동을 수행하는 데 많이 쓰이는 도구-사물들 중에서도구석기 시대에서 하이테크 사회에 이르기까지 그 도구적 수명을 이어온 도구-사물이다. 망치의 발명이 인류 역사에서 위대한 업적에 속한는 사실을 증거한다. 망치의 단순한 구조는 인류의기술적 진화의 역사를 압축하고, 아울러 이것의 유용성은 700만년을 간단하게 뛰어넘는다. - P26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철학자의 사물들
장석주 지음 / 동녘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물들은 삶을 공간으로 확장한 것이고, 자아를 시간적으로 연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 P18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한 먼지들의 책방 - 정우영 시집 창비시선 498
정우영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묵은 시간 밀어뜨리고 연두는 피어
기지개 켜는 숨결들 연무처럼 은근히 번져갑니다.
아야, 애기 젖부텀 멕여라이.
고맙게도 또 한 생이 바람의 꼬릴 잡고 사부작거리며
갓난 마음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_ 흐르는 별들이 내리는 곳 중에서 - P8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한 먼지들의 책방 - 정우영 시집 창비시선 498
정우영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망초꽃만환해요


아침에 집 나간 사람이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아요.


대문은 삐걱거리며 고개 내밀어 골목길 더듬고
창문들은 한사코 어긋나게 틈을 벌려놓지요.
불이란 불은 다 꺼져 어둠에 뭉개졌지만
다들 집 앞 가로등 피어날 때를 숨죽여 기다립니다.
밤이 깊어도 귀가하지 않는 사람을
애타게 부르던 이는 또 어디로 갔을까요.


형체도 없는 그림자들 슬금슬금 모여드는지
정신 나간 가로등이 흐릿하게나마 깜박거립니다.
욕실의 눈과 귀는 온통 가로등에게 쏠리고
부엌이 부스럭거리며 깨어나 헛밥을 안치네요.


바람의 기척조차 메말라 기울어지는 빈집.
망초꽃들만 돌아와 눈 시리게 번져갑니다. - P28

쭈글치고 앉아 한분 한분 토닥였다.
사느라 애썼다고, 가서 편안하시라고.
꽃이라고 하여 어찌 고통이 없겠는가.
땅은 썩어가고 햇볕이 불덩어리라면.
나오느니 신음인데 하염없이 목은 탄다면.

_ 동백이 쿵, 중에서 - P32

소름이 온몸을 좌악 훑더니
슴슴함이 홀라당 빠져나간다.
슴슴함도 불온만큼은 감당할 수 없다는 듯이.

_ 천하무적 중에서 - P5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철학자의 사물들
장석주 지음 / 동녘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진은 대상을 전유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망각에 대비한 일종의 보험이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물은 생겨나는 순간부터 소실점을 향해 달려간다. 소실점에 가 닿는 순간사물은 사라진다. 사진은 그 사라짐의 운명에 대한 미약한 저항이다. - P148

자신들의 생각의 얕음, 야비함, 천박함을 폭로하는 그 하찮은 얘기들과 낄낄거림을 하염없이 들여다 볼 때 우리는 왜소해지고 비루해진다. 어쩌자고 이것을 보고 있었단 말인가? - P1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