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멀어져 갔지만, 나는 아직 술을 끊은 것이 아니다. 나는희망의 힘에 의지해서 살지 않고 이런 미완성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_ 늙기의 즐거움 중 - P20
주어와 술어를 논리적으로 말쑥하게 연결해 놓았다고 해서문장이 성립되지는 않는다. 주어와 술어 사이의 거리는 불화로긴장되어 있다. 이 아득한 거리가 보이면, 늙은 것이다. 이 사이를 삶의 전압으로 채워 넣지 않고 말을 징검다리 삼아 다른 말로건너가려다가는 허당에 빠진다. 이 허당은 깊어서 한번 빠지면헤어나지 못한다. 허당에 자주 빠지는 자는 허당의 깊이를 모른다. 말은 고해를 건너가는 징검다리가 아니다. 주어와 술어 사이가 휑하니 비면 문장은 들떠서 촐싹거리다가 징검다리와 함께무너진다. 쭉정이들은 마땅히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므로, 이 무너짐은 애석하지 않다. 말들아 잘 가라._ 말년 중 - P39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별으로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_ 허송세월 중 - P43
시간을 시각과 시각 사이의 흐름이라고 억지로 말하는 말을 들을 때 나는 말로부터 소외되지만, 허송세월하는 저녁에 노을을 들여다보면 나는 시간의 질감을 내 살아 있는 육신의 관능으로 느낄수 있고, 한 개의 미립자처럼 또는 한 줄기 파장처럼 시간의 흐름위에 떠서 흘러가는 내 생명을 느낄 수 있다._ 허송세월 중 - P48
죽으면 말길이 끊어져서 죽은 자는 산 자에게 죽음의 내용을 전할 수 없고, 죽은 자는 죽었기 때문에 죽음을 인지할 수 없다.인간은 그저 죽을 뿐,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다._ 재의 가벼움 중 - P50
가볍게 죽고, 가는 사람을 서늘하게 보내자. 단순한 장례 절차에서도 정중한 애도를 실현할 수 있다. 가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의술도 모두 가벼움으로 돌아가자. 뼛가루를 들여다보면 다알 수 있다. 이 가벼움으로 삶의 무거움을 버티어 낼 수 있다. 결국은 가볍다._ 재의 가벼움 중 - P54
태풍전망대에서 내려올 때 내 마음속에서 자연과 역사는 극심한 불화로 부딪힌다. 이처럼 크고 무서운 적대감의 뿌리가대체 무엇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봉우리들이 신록으로 덮이고또 백설로 덮여도 중무장한 적의의 진지들은 능선을 따라서 대치하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언어로 자신을 설명할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으로 나의 산천예찬은 무색해진다. 이념의 깃발이 무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지층 아래 적개심은 날마다 차곡차곡 쌓여 가는 것인가._ 태풍전망대에서 중 - P103
과일을 먹을 때, 마주 보는 거울의 허상은 깨어지고, 그 자리에 꽃이 피어난다. 꽃을 설명해서는 꽃을 이해할 수 없고, 꽃을받아들이면 논리로는 알 수 없는 것을 몸이 안다._ 꽃과 과일 중 - P88
어린아이들은 길을 걸어갈 때도 몸이 리듬으로 출렁거린다. 몸속에서 기쁨이 솟구쳐서 아이들은 오른쪽으로 뛰고 왼쪽으로뛴다. 아이들의 몸속에서 새롭게 빚어지는 시간이 아이들의 몸에 리듬을 실어 준다. 호랑이나 사자의 어린것들도 스스로 기뻐하는 몸의 율동을 지니고 태어난다. 그것들은 생명을 가진 몸의즐거움으로 발랄하고 그 몸들은 신생하는 시간과 더불어 뒹굴면서 논다. 이 장난치는 어린것들의 몸의 리듬을 들여다보는 일은늙어 가는 나의 내밀한 즐거움이다._ 시간과 강물 중 - P95
이 시대에는 ‘말로 해서는 안 된다‘는 절망감을 떨쳐 내기가어렵다. 말이 소통의 능력을 회복할 수 있을 때 이 시대는 좁은출구를 겨우 찾아갈 수 있을 터인데, 말이 적대하는 전투에 동원된 시대에 나의 말은 무력하게 들리지만, 무의미하지는 않기를나는 바란다._ 적대하는 언어들 중 - P110
정상적인 사유 능력과 감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이 참을 수 없이 단순한 원시성과 한 세기에 걸친 불변의 무지몽매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데, 죽음이 망각에 묻혀 일상화되면 사람들은 절망을 절망으로 인식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을 상실하게 된다. 이미 그렇게 되어 있다._ ‘세월호’는 지금도 기울어져 있다 중 - P120
공원에서 연꽃과 물고기를 들여다보면서 장자를 생각했다.연꽃이 장자고 물고기가 책이었다. 아름다운 것은 본래 스스로그러하다. 거꾸로 써도 마찬가지다. 내년 여름에는 또 새 매미가울겠지._ 여름 편지 중 - P129
굳이 어려운 말이나 중의적 표현이 없어도 멋진 글이 된다는 걸 보여준 소설이다. 그 시절(일제)와 현대를 사이에 두고 펼쳐지는 쓰는 여자, 작희 이야기는 왜 이렇게 다큐 같은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다. 억압과 폭력, 탄압을 온 몸으로 당한 여성들이 결국 가해자들을 돌보는 현실에서 또다른 모순을 느낀다. 특히 지식인들의 위선과 가식은 시대를 초월한 시대코드인 듯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읽어보라고 선물해주는 책이다
이런 일은 누구나 다 겪는 시간에 대한 경험이다. 물리적 시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경험에 따라 절대적 시간으로 변모한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이 물리적 시간을 자신만의 절대적 시간으로 전환시키면서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비록 물리적 시간 안에 있다 해도 스스로 창조해나갈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자신만의 절대적 시간이다._ 시간도 신의 피조물이다 중 - P344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스펜서 존슨은 그의 책 <선물》에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은 바로 지금 이순간이고,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완전히 몰두할 때 행복해진다"고 말한다. 지금 이 순간 존재하고 있으면서 하고 싶은 일에 완전히 몰두할 수 있는 삶이야말로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선물이라는 것이다._ 가장 소중한 선물 중 - P455
산다는 것은 결국낡은 의자 하나 차지하는 일이었을 뿐작고 낡은 의자에 한번 앉았다가일어나는 일이었을 뿐_ 낡은 의자를 위한 저녁기도 중 - P501
나의 불행이 남을 위로하는 일보다 남의 불행이 나를 위로하는 일이 더 많았다. 불행한 이들에게 많은 빚을지면서 오늘을 살고 있는 셈이다. - P531
향수 원료인 용연향은 원래 고래의 상처에서 발생된 부산물이다. 수컷 향유고래가 대왕오징어 등을 섭취하다가내장에 생긴 상처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토해내면 역한 냄새가 난다. 그렇지만 그 배설물은 10년 이상바다를 떠돌면서 염분에 씻기고 햇볕에 바짝 말라 아주귀한 향수의 원료가 된다. 처음엔 비록 상처의 똥이었지만오랜 세월 인고의 시간을 견딤으로써 고통의 향기를 지니게 된 것이다. 아마 고래의 똥은 자신이 왜 험한 바다를 떠도는지 그 고통의 의미를 알았을 것이다._ 의미 없는 고통은 없다 중 - P553
리사는 우희의 첫 고용인이다. 쉰 중반을 넘어선 나이에 우희는 난생처음 구직활동에 나섰다. 누군가는 팔자 좋은 여자라고 비아냥대지 몰랐다. 그러나 구인구직 사이트를 뒤지고 다니면서 우희는 자신이 세상과 절연된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경단녀 운운 이전에 내세울 경력이란 게 전무했다. 가만히 있으면 벼락거지가 된다더니, 자신이 그 꼴이었다. 그러다가 베이비시터 사이트를 알게 되었을 때는 광맥을 발견한 듯기뻤다. 그것만큼은 자신 있었다. 몇몇 곳과 매칭이 되어 전화면접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차례로 ‘거부하셨습니다‘는 문자가 도착했다. 문자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는 뉴스에 경악했던게 언제였더라. 그런데 막상 그런 문자를 받고 보니, 면전에서 듣는 것보다는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거절당할 거라면._ 베이비시터 중 - P196
안수집사가 된 남편은 말끝마다 용서를 빌라고 했다. 그까짓게 뭐 대수라고, 우희는 용서를 빌었다. 아이들까지 끌어들여몇 시간씩 붙잡혀 있는 걸 보느니 그게 쉬웠다. 우희가 용서를 빌면 집안이 조용해졌다. 베이비시터 중 - P205
선호도 처음부터 폭력적인 사람은 아니었으리라. 삼대독자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차곡차곡 쌓이고 쟁여진 것이 터져 나온 것일 뿐. 자신을 한껏 떠받들던 그것이 자신을 잡아먹는괴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괴물이 물건을 집어 던지고 우희의 팔을 꺾고 목을 조른 것이다. 언젠가는 그런 자신에게 소스라치게 놀란 선호가 우희 앞에 엎어져서 울었다. _ 베이비시터 중 - P214
양해의 말 한마디 없이 가정을 파탄 내는 어른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 그 무력함만큼 절망했을 것이다. 그건 어쩌면 아이에게 각인된 최초의 배신이며 폭력이리라. 하루아침에 달라져버린눈앞의 세상에, 은지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녀는 어쩌다 미국까지 가야 했을까. 전남편의 지속적인 괴롭힘에 대한 이야기를 엄마로부터 들었지만, 듣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그건 마치 세상 사람들의 입방아에 돌고돌아온 나의 추문처럼 쓰라렸다. 그 무렵, 나는 그녀를 나의 분신처럼 느끼고 있었다._ 스와니 강 중 - P75
세상은, 낮과 밤, 빛과 그늘, 그리고 시차로 나뉘어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태양을 공유하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우리는 이어져 있는 거라고, 서로를 끊임없이 의심하라고 아무리 무섭게 닦달해도 신비롭게 이어진 인연마저 끊을 수는 없다고,단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보지 않았다고 모르는 건 아니라고,모른다고 없는 건 아니라고.하여 그녀는, 그녀의 지워지지 않는 숫자 1은, 우리 모두라고._ 스와니 강 중 - P87
그가 목숨을 걸었던건 인간으로서 죽고자 함이었다. _ 천국의 난민 중 - P124
중국에 있을 때의 엄마는 중국말이 서툴렀고 한국에서의 엄마는 한국말이 서투르다. _ 그림자 그리기 중 - P137
평소에는 너에게 관심도 없던 아이들이다. 너는 투명인간이니까. 아니다. 아이들에 대한 관심을 지우기 시작한 건, 네가 먼저다. 너는 아이들을 하나씩 지워나간다. 아이들을 하나씩 지우는데, 이상하게도 정작 지워지는 건 너 자신이다. 네가 국어책을 읽을 때 쿡쿡거리며 웃던 아이, 게임기를 자랑하며 줬다 빼앗던 아이, 쓰레기 냄새가 난다며 코를 막던 아이, 네가 입은 옷을 보고 키득거리던 아이, 네가 뭘 물어봤을 때마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딴청을 부리던 아이, 네 말투를 흉내 내며 네 주위를 빙빙 돌던 아이, 그 아이들을 하나씩 지워나가며 너는 점점 그림자가 되어간다._ 그림자 그리기 중 - P142
너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의심은 너의 유일한 힘이다. 그것만이 지금껏 너를 지켜주었다고, 너는 생각한다._ 그림자 그리기 중 - P155